[에듀인뉴스] 그림책에 녹아 든 인간의 삶을 어떤 모습일까. 교사 등 교육자의 교육활동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 그림책은 어떤 통찰을 전해줄까. <에듀인뉴스>는 그림책으로 삶을 탐구하는 교사들의 모임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와 함께 그림책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우서희 서울 자운초 교사/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 운영진
우서희 서울 자운초 교사/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 운영진

몽골에서 망아지를 길들이는 2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말을 말뚝에 단단한 끈으로 묶어두고 멀리 못 가게 하는 것이다. 말뚝에 묶인 망아지는 몸부림치다가 어느새 묶여있는 상태에 적응한다.

다른 방법은 망아지를 풀어놓고, 망아지가 가는 방향을 따라 다른 말을 타고 따라가는 것이다. 망아지는 가고 싶은 대로 이리저리 날뛰어도, 망아지 주인은 그저 곁에서 따라가기만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 망아지가 주인을 쫓아온다고 한다.

우리에게 수시로 찾아오는 다양한 감정 중에서 ‘화’는 망아지와 가장 닮았다.

화는 제멋대로 날뛰며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변화시키고, 온 몸의 근육을 긴장시킨다. 이런 화를 길들이기는 어려운 일이다.

말뚝에 묶어놓은 망아지처럼 내 화를 마음속에 꽁꽁 묶어놓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림책 '천천히 걷다보면' 표지.(게일 실버 글, 크리스틴 크뢰머 그림, 불광출판사, 2011)
그림책 '천천히 걷다보면' 표지.(게일 실버 글, 크리스틴 크뢰머 그림, 불광출판사, 2011)

『천천히 걷다보면』(게일 실버, 크리스틴 크뢰머)의 주인공 얀은 삽으로 땅 파기 놀이를 제일 좋아한다. 샘과 찰리와 함께 놀려고 삽도 가져왔다. 그런데 그날따라 샘과 찰리는 얀과 놀지 않고, 공놀이를 하러 간다.

눈물이 얀의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얀은 땅바닥이 떨어진 자신의 눈물 자국을 보고 있을 때, 화가 나타난다. 검은 모자와 검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렸지만, 새빨간 몸과 뾰족뾰족한 이빨은 감출 수 없다.

화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나는 일이 네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항상 나타난단다.’

화는 샘과 찰리에게 공을 힘껏 던져 맞혀버리자고 흥분해서 말한다. 제멋대로 벌떡 일어나서 가버리는 화를 얀이 겨우 붙잡는다. 그리고 둘이 함께 걷기 시작한다.

숨을 들이쉬며 한걸음, 숨을 내쉬며 한걸음 걷자 얀과 화가 밟고 있는 땅속의 모습이 나타난다.

나무의 깊은 뿌리, 서로 맞잡고 있는 민들레의 뿌리, 개미의 집, 웃고 있는 돌. 평소에 잊고 지냈지만, 항상 그 자리에서 나를 지탱해주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열셋, 열넷, 열다섯 걸음을 걷자 화는 점점 피곤해진다. 어느새 화는 포근한 노란색 옷으로 갈아입었다.

얀에게 풀밭에 누워 쉬자고 한다. 화가 건넨 민들레 홀씨를 후 불자, 화가 사라졌다. 그리고 친구 사라가 나타났다.

얀은 사라가 땅을 파며 발견한 멋진 돌멩이를 궁금해 한다. 사라는 얀이 왜 천천히 걷고 있었는지 궁금해 한다.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얀이 화가 났을 때 친구를 향해 공을 던지지 않고, 숨을 마시고 내쉬면서 천천히 걷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에게 찾아온 화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얀이 친구를 향해 공을 던지고 싶은 게 아니라, 화라는 녀석이 공을 던지고 싶어 하는 거다.

화의 이름을 불러주고, 화의 손을 잡아준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새로운 선택지가 눈에 보인다.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유난히 화를 잘 내던 지후..."하나, 둘, 셋 같이 숨을 쉬어 볼까"


올해 유난히 화를 잘 내는 지후를 만났다. 급식을 먹으려고 줄을 서 있다가, 얼굴이 벌게진 채 소리 지르고 있다.

“억울해, 억울하다고! 성진이가 새치기했다고!!”

지후와 그 옆에서 지후를 노려보고 있는 성진을 가만히 부른다. 나는 지후의 눈을 원망하는 기색 없이 찬찬히 바라본다.

“지후야, 하나, 둘, 셋 같이 숨을 쉬어보자.”

우리는 함께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지후와 내가 함께 숨을 쉬면서 지후가 소리치고 화를 냈던 장면에서 조금 멀리 떨어질 수 있다. 얀과 화가 숨을 쉬며 걸을 때 땅속 풍경이 보였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얼른 밥 먹어야 하는데 왜 또 싸울까?” 하는 생각에서 멀어진다. 지후는 자기에게 ‘시비를 걸었던’ 친구에게서 멀어진다.

화가 나서 날뛰는 지후를 다그치며, 지후의 감정을 말뚝에 꽁꽁 묶어두려 했다면 지후는 말뚝을 뽑으려 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지후의 벌개졌던 얼굴이 제 혈색을 찾았다.

지금이다. 지후와 성진이 진짜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

“지후야, 성진아. 무슨 일이 있었어? 친구가 한 잘못 말고, 스스로 했던 행동부터 이야기해보자. 누가 먼저 이야기해볼까?”

“제가 성진이를 밀치고, 소리 질렀어요.”

조금 전까지 지후의 눈동자 속에서 날뛰던 불꽃이 사그라들고, 갓 태어난 송아지의 까만 눈이 끔뻑인다.

성진이는 새치기하려던 건 아니었다고,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지후가 줄에 서 있지 않고, 잠깐 어디 가있어서 성진이 차례였는지 몰랐다고 상황을 설명한다.

“그럼 누가 먼저 사과해볼까?”

“성진아. 내가 밀치고, 소리 질러서 미안해.”

지후가 이렇게 말하니 성진이도 마음이 누그러든다. 성진이는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줄을 설 때는 자리를 지켜달라고 부탁한다.

이제 서로 안아주라고 하고 돌려보낸다. 자리로 들어가며 지후는 성진이 어깨에 손을 쓱 얹는다.

화를 알아볼 수 있으면, 친구를 지킬 수 있다.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 운영진.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는 그림책으로 삶을 탐구하는 교사 모임이다. '아이들 곁에서 교사도 창작하는 삶을 살자'는 철학을 가지고 9명의 교사 운영진이 매주 모여서 그림책을 연구한다. 한 달에 한 번 오픈 강연을 통해 새로운 삶의 화두를 던지고, 학교 안팎의 다양한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교류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 운영진.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는 그림책으로 삶을 탐구하는 교사 모임이다. '아이들 곁에서 교사도 창작하는 삶을 살자'는 철학을 가지고 9명의 교사 운영진이 매주 모여서 그림책을 연구한다. 한 달에 한 번 오픈 강연을 통해 새로운 삶의 화두를 던지고, 학교 안팎의 다양한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교류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