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축복인가 재앙인가] (06) 아리스토텔레스, 입헌정체와 중산층 예찬
[민주주의, 축복인가 재앙인가] (06) 아리스토텔레스, 입헌정체와 중산층 예찬
  •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1.18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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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인뉴스]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가장 보편적인 가치와 시스템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한 마디로 설명하고자 하면 선뜻 입이 트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라는 가치와 체계는 인간의 삶과 사회적 관계에서 완벽한 시스템이라 할 수 있을까. 또 민주주의가 교육 현장에는 어떻게 스며들고 있으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에듀인뉴스> 이돈희 발행인은 민주주의의 개념적 내포와 외연의 진화적 과정, 그리고 이에 따른 민주주의의 의미론적 검토, 주요쟁점의 확인, 실천적 문제의 분석 등을 이야기하는 연재를 통해 교육현장적 여건과 문제를 규명하고 실천적 가능성과 한계성을 논의하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흉상. 대리석, 기원전 330년 리시포스(Lysippos)가 만든 동상의 모사품. 표면에 덮힌 설화석고는 현대에 덧붙여졌다.(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흉상. 대리석, 기원전 330년 리시포스(Lysippos)가 만든 동상의 모사품. 표면에 덮힌 설화석고는 현대에 덧붙여졌다.(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느 특정한 통치체제가 절대적으로 좋은 국가를 만든다고 규정하지도 않았고, 이상적 국가의 절대적 그림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오히려 그는 이상적 국가는 특정한 형태의 국가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구성원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정치학」에서 일인의 통치나 다수의 통치나 간에 여러 체제의 각각이 성공적인 국가가 되기 위한 도덕적, 구조적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주로 다수, 특히 빈민들이 통치하는 민주정체를 기반으로 한 혼합적인 형태까지도 검토하였고, 그것이 바로 앞선 글의 표에서 명시된 “입헌체제”(politeia, polity)이다.(“입헌정체”라는 번역은 꼭 적절하지는 않으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상대적으로 가장 좋은 정체를 모색하면서 칭한 국가를 “Politeia”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는 그냥 “입헌정체”라고 번역하면 큰 무리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입헌체제는 그가 일종의 혼합체제라고 설명하기도 하였듯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민주체제와 동일시하거나 그 체제의 한 유형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단순히 민주정체를 공적 이익을 추구하도록 변형시켜 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실상 입헌정체를 당시의 민주정체와 동의어로 사용하지도 않았고, 그 외연에 속한다고 명백하게 언급하지도 않은, 다소 애매한 상태에 둔 개방적 의미를 지닌 말이다.

빈민층과 부유층을 포함한 만인이 참여하는 정체라는 점에서 민주정체와 과두정체를 혼합한 정체라고 읽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입헌정체에 접근하는 정치적 지향성은 적어도 오늘의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주적 가치관과 일관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고 그렇게 의도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입헌정체”는 하나의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표현하는 이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오늘의 민주주의의 개념이 지향하는 바와 같이, 즉 적어도 원리상, “만인의 이익을 위한” 정체이고, 그러므로 공통선(공동이익)을 실현하는 데 통치력이 발휘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정체이다.

그러나 공통선의 개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정치적 환경에 따라서 바뀌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고대 그리스 시대의 공통선의 개념이 함의하는 것보다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반적 원리들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면, 시민(국민)을 위한 좋은 정치체제에는 두 가지 부분이 있다.

하나는 그들이 복종하는 법률 자체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느냐이고, (ii) 다른 하나는 시민이 법률에 실질적으로 복종하느냐이다.

(1)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주 정치가를 공예가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비유가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엄격한 입법이론에서 보면 정치학은 일종의 실천적 지식이지만 공예나 의술은 생산적인 지식이다.

그러나 그 비유가 여전히 타당성을 지니는 것은 정치가는 지식을 보편적인 원리에 따라서 법률적 체제를 구축하고 조정하고 유지하는 일종의 생산적인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보면 그러하다.(EN VI.8 and X.9)

이러한 비유를 좀더 검토해 보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나의 공예품을 생산하는 과정을 그의 “네가지의 동인”(four causes), 즉 질료적, 형상적, 효율적, 그리고 종국적 동인의 원리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 것을 보면 그 타당성을 이해할 만도 하다. (물리학, 2권 3장과 형이상학 A.2)

예컨대, 공예가가 진흙으로써 항아리를 만들고자 할 때, 진흙은 질료로서 하나의 동인(material cause)이 되고, 공예가가 최종적으로 완성하고자 하는 하나의 항아리는 그 일을 하게 하는 종국적 동인(final cause)이며, 그가 의중에 어떤 형상의 항아리를 만들 것인가의 구상이 있으면 그것은 형상적 동인(formal cause)이고, 그것을 만들기 위한 그의 작업은 효율적 동인(efficient cause)이다.

그렇듯이, 국가(도시)도 그러한 네 가지의 동인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일종의 공동체(koinônia, community)이고, 각기 독특한 기능을 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부분들의 집성체이다.(정치학, 2권 1장, 3권 1장).

이러한 집성체는 여러 가정구조, 경제적 계급, 자치적 조직들이 있고, 종국적 동인에 해당하는 국가는 기본적으로 개체적 시민들로써 구성된다.

그 개인들이 질료적 동인이라면, 도시국가의 시민들이 어떤 질서를 이루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케 하는 입헌적 원리(politeia)가 바로 형상적 동인에 해당하고, 정치가는 그러한 국가를 만들어 가는 효율적 동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정치가는 아테네의 솔론(Solon)이나 스파르타의 리쿠르구스(Lycurgus) 등과 같은 입법자는 바로 기본법을 제정하여 국가를 만드는 공예가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헌국가는 상당한 정도의 질서와 규칙을 제도화한 법치국가의 체제를 의미한다.

국민이 준수하는 법률의 내용은 구성원의 모두가 추구하는 바의 공통선에 일관성을 유지하여야 한다.

위대한 정치체제는 공동이익의 가치를 개발하되 그것은 모두의 행복을 구현하는 방안으로 개발하여야 한다.

이것이 입헌정체의 핵심적 특징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는 특정한 가치요소를 실질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말하는 실천적 이성의 기본적인 원리인 “중용”(mesotēs, mean)의 개념을 개체적 덕성을 설명하는 데서 뿐만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중간층”(hoi mesoi)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데서도 일관되게 언급하였다.

덕성은 바로 중용을 의미하며, 중용의 가치와 삶은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가치이고 삶의 의미를 가져다주는 최선의 도덕적 원리이다.

개체적 덕성의 경우에, 참다운 용기는 만용과 비겁의, 절제는 사치와 인색의 중도를 의미하듯이, 욕구 충족의 과도함과 부족함의 양극적 경향에서 도덕적 중도와 균형을 취하려는 “중용”(中庸)의 원리가 있다.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행복한 삶이란 이러한 중용의 덕성을 실현하는 데 방해받지 않은 삶을 의미한다. 그렇듯이 가장 훌륭한 정치공동체도 중산계층의 시민들에 의해서 구축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산층이 충분히 크고, 가능하면 부유층과 빈민층을 모두 능가할 정도로 더 큰 경우에, 그 국가는 잘 다스려지고 있는 국가라고 하였다.

국민들이 적절하고 충분할 만큼 소유하고 있는 국가는 위대한 국가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너무 많이 소유하는 데 비하여 어떤 사람들은 너무 적게 소유하는 경우에 극단적 민주주의에 이르게 되고, 결국 순전한 과두정체, 때로는 잠주정체까지 등장할 수가 있다.

중산층이 중심이 된 국가에서는 극단적 민주정체가 발생하지 않고, 더욱 안정된 국가를 만들 수 있으며, 입헌정체의 수립과 운영의 열쇠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산층이 빈부의 극단으로 흐르지 않고,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을 취함으로써 모든 구성원들에 최대한의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하였다.

중산층이 빈약할 경우에 발생하는 사회적 풍토를 「정치학」에서 기술한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국가에는 세 부분이 있고, 매우 부유한 층, 매우 가난한 층, 그리고 세 번째로 그 중간층이 있다.

중도와 중용이 가장 좋듯이, 세 계층 중에서도 중간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이성(logos)에 가장 잘 복종할 것이다.

한편으로 지나치게 아름답거나 지나치게 힘이 세거나 지나치게 집안이 좋거나 지나치게 부유한 자라든가, 다른 한편으로 지나치게 가난하거나 지나치게 약하거나 지나치게 볼품이 없는 자는 이성에 복종하기가 어렵다.

이 가운데 전자에 속하는 자들은 무뢰한이나 대형 범죄자가 되고, 후자에 속하는 자들은 불량배나 좀도둑 같은 범죄꾼이 되는 경향이 있다.

한쪽은 교만한 마음에서, 다른 쪽은 악의에서 불의한 짓을 저지른다. 그밖에도 체력, 재산, 연줄 등 과도하게 좋은 환경에 타고난 자들은 복종하려고도 않고 복종할 줄도 모른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너무 사치스럽게 자란 탓에 학교에서도 복종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불우한 환경에 태어난 자들은 너무 비굴하다. 그리하여 한쪽은 지배할 줄 모르고 노예처럼 지배받을 줄만 알며, 다른 한쪽은 복종할 줄 모르고 폭군처럼 지배할 줄만 안다.

그리하여 자유민의 도시(국가)가 아니라 주인들과 노예들의 도시(국가)가 생겨나, 한쪽은 시기하고 한쪽은 경멸한다.

한 국가에서 가장 안전한 것이 중산계급이다. 그들은 빈민들처럼 남의 재물을 탐하지 않거니와, 빈민들이 부자의 재물을 탐하듯, 아무도 그들의 재물을 탐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남들도 그들에게 음모를 꾸미지 않고, 그들도 남들에게 음모를 꾸미지 않으므로 그들은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에는 중산계급의 수가 적다. 그러므로 부유층이든 빈곤층이든 어느 한쪽이 우세해지면 정체를 자기들 의도에 따라 개편하게 되면 과두정체나 민주정체가 생겨난다.

이때 중간계급이 어느 한쪽에 가담하면 그쪽의 비중이 더 높아져 양극단 가운데 어느 한쪽이 우세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극단적인 민주정체나 독선적인 과두정체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고, 둘 중의 어느 한쪽이 극단으로 흐르지 못하므로 최악의 상태인 참주정체를 미리 방지할 수 있다. (정치학, 4권 11장)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헌정체는 오늘의 민주정체와는 개념상 매우 유사한 것 같지만,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결정적 차이가 있다.

첫째는 노예제도를 당연시하였고, 둘째는 여성을 차별하는 제도를 정당화하였으며, 셋째는 계층의 구분에 절대적 기준을 상정하였다.

(1) 아리스토텔레스 당시로 보면 완전한 가정은 노예와 자유민으로 구성되며, 최소한 구성요소로 보면 주인과 노예,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자식이다.

이 중에 노예는 생명이 있는 재산에 속하며 재산은 그 소유자의 부분에 속한다. 그러므로 주인은 노예의 주인일 뿐이고 노예에 속하지 않으나, 노예는 주인의 노예일 뿐이고 전적으로 주인에 속한다.

그러면 노예는 본성에 있어서 노예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이 있는 존재는 지배와 피지배의 이원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그 구별은 혼(psychē)과 몸(soma)으로 구성된다고 하였다.

지배의 형태에 있어서 몸에 대한 혼의 지배는 주인의 지배와 같고, 욕망에 대한 이성의 지배는 정치가나 왕의 지배와 같다.

그러면 몸과 혼이 다르고, 들짐승이 인간과 다른 만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몸을 사용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면 최상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인간들은 모두 본성적으로 노예이며, 이들은 주인의 지배를 받는 편이 낫다.

남에게 속할 수 있고 그래서 실제로 남에게 속하는 자는, 이성이 있는 것은 알지만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본성적으로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은 자유민의 몸과 노예의 몸을 구별하고자 노예에게는 천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강한 몸을 주고 자유민에게는 그런 일에는 쓸모가 없지만 시민 생활에 적합한 꼿꼿한 몸매를 준다.

(2)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도 지배와 피지배의 방식이 있다.

우선 아내와 자식에 대한 가장의 지배는 자유민을 지배한다는 점에서 같으나, 지배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자식들의 경우에 아버지의 지배는 피치자들에 대한 왕의 지배와 같고, 아버지는 더 사랑하고 더 연장자이기에 지배자인 것인데, 이것은 왕의 지배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내에 대한 그의 지배는 동료 시민들에 대한 정치가의 지배와 같다. 자연에 배치되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성이 여성보다 본성적으로 지배하는 데서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가가 지배하는 경우 대개 치자와 피치자는 교대를 하며 국가는 차별 없는 평등을 지향한다.

한 사람이 지배하고 다른 사람이 지배를 받을 경우에 지배자는 외형과 말투와 예절에서 구별을 두려고 하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관계도 언제나 이와 같다. 모든 가정은 국가의 일부이고 부부관계, 부자관계들은 가정의 일부이며, 부분의 덕성은 전체의 덕성과 관련하여 고찰해야 한다.

따라서 아이들도 여자들도 국가의 정체에 맞추어 교육을 받아야 한다. 특히 여자들은 한 국가의 자유민의 절반이고, 아이들은 자라서 국정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여성을 비하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인 것은 인간관계를 공동체 속의 관계, 가족 공동체를 확대한 국가 공동체를 상정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가족 밖의 여성이 아니라 가족 안의 여성인 아내의 위치를 두고 논의했기 때문이다.

(3)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 당시 그리스 사회는 중산계층의 개념이 거의 없는 시기였다. 그의 현실주의적 안목에 따라서 구상된 정치적 체제에 관해서 적어도 두 가지의 질문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중산계층은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는가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계층내의 상대성, 즉 상대적 빈곤의식과 상대적 부유의식은 어떤 형태로든지 형성되기도 한다. 특히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활발한 계층이동이 진행되면, 중산계층이라는 정체의식은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적 개방사회는 소득수준 정도의 경제적 계층구분은 다소 무리하게나마 계량적으로 결정할 수 있지만, 각기 향유하고 있는 이지적, 윤리적, 심미적 문화의 특징은 경제적 계층이동에 자연스럽게 동반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는 상류에 속하지만 문화적으로는 하류에 남아 있을 수가 있고, 그 역으로도 사실이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민주정체, 그리고 이와 유사하게 상대적 빈곤의식을 소유한 계층이 주도하는 민주정체 혹은 입헌정체에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려한 군중적 선동정치의 발생을 방지할 제도적 장치가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이러한 문제는 바로 민주주의를 단순히 통치체제, 즉 민주정체만으로 접근하고 설명하는 안목에 한계가 있음을 나타내어 준다.

민주주의는 단순한 정치체제만으로 그 의미를 다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와 민주주의를 논의한 끝에 약식으로 다시 정리한다면, 그는 인간의 공동체에 지배와 피지배라는 힘의 관계의 원리를 전제로 한다.

이때 지배의 힘은 명시적인 권력의 행사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인간적 관계에서 의사와 행동과 생활에서 앞서고 뒤서는 관계를 지키는 지혜와 관습과 생활에서 우선권을 인정하는 관계까지르 포함한 넓은 의미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성립되는 관계의 특성를 의미하고, 그런 맥락에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입헌정체를 논하는 내용에서 보면, 과두정체의 부유층과 민주정체의 빈민층을 혼합하면서 중산계급을 확충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헌정체는 오늘날 민주정체의 기본적 요건처럼 되어 있다.

그는 인간은 모두가 이성적 존재라고 보고, 다소 제한적인 측면은 있지만, 만민이 각자의 행복한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국가와 정치의 체제를 구상하였다.

그것은 오늘의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기본적인 조건과 방향의 정립에 있어서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고, 그만큼 우리 모두에게 매우 고마운 사상가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이것이다.

즉 그 체제 속에서 생활하면서 함께 추구하는 가치를 공유할 때의 정조(情操)와 책무와 규칙, 그리고 동료 인간과의 관계 속에 있는 자아의식과 공동체적 문화에 대한 공유의식을 소화하는 능력과 실적 만큼, 구성원들이 민주주의가 약속하는 삶의 질을 유지하고 또한 향유할 수가 있다.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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