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대한민국의 속도는 빠르기로 정평이 나 있다. ‘빨리빨리’로 형용되는 대한민국은 그만큼 빠른 성장을 기록하면서 국민의 살림살이도 나아졌지만, 반대로 피로감을 호소하는 이 또한 점차 늘어나면서 외국에서의 삶을 동경하기도 한다. 그러나 막연한 기대감에 떠나는 외국에서의 향수병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자신을 괴롭히기도 한다. <에듀인뉴스>는 성공적인 외국에서의 삶을 위해 최근 멕시코에서 귀국한 선우림 배우 가족으로부터 이민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한다.

라오스와 국경을 맞댄 우돈타니 지역의 동물원 앞.(사진=선우림)
라오스와 국경을 맞댄 우돈타니 지역의 동물원 앞.(사진=선우림)

 


로망으로 시작된 첫 번째 이민, 하필이면 아무 정보가 없는 곳이네?


Thanks~, Khob chai~, Xiexie, Gracias~, Arigato~,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세상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 마음을 열게 하는 말, 현지 적응에도 꼭 필요한 말. 방긋 미소에, 이 한마디면 충분해!!

“여보 여기 어때?”

결혼 후 우리의 이민 도전은 남편에 의해 시작되었다. 낭만을 꿈꾸는 나의 막연한 후보지의 예상을 깨고 두 번 모두 뜻밖의 해외 근무지를 선택한 것이다.

첫 번째 장소는 신혼여행의 여운으로 동남아에서 살고 싶다는 로망에서 시작되었는데, 나름 세계미인대회 홍보대사를 하면서 많은 나라를 알았다고 생각한 내게도 퍽 생소한 곳이었다.

그곳에 한국인이 세운 글로벌 기업에 근무함으로써 가족들과 수월하게 적응하고, 덜 알려진 만큼 알아가는 묘미와 발전 가능성이 있기에 일과 낭만 두 마리 토끼를 잡아보자는 취지였다. 일리 있고 현실적인 남편의 제안에 그제야 지도에서 찾아보고 알게 된 낯선 곳이다.

지금은 방송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누구나 다 아는 여행지이자, 은퇴 후 이민 후보지로 거론될 만큼 사업, 은퇴이민, 여행 등 다양한 방법으로 가게 되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은둔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미지의 땅이라 선교나 봉사로 가는 것 외엔 정보가 없었다.

저렴한 골프 연습장과 각종 운동, 특색 있는 음식들, 삶과 더위에 지칠 때 부담 없이 하기 좋은 힐링 마사지와 한국에 비해 저렴한 쇼핑까지 장점은 많았다. 하지만 예쁜 하늘과 풀과 집이 있어도 조금은 무료한 일상에 종종 고향생각이 나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좋았던 기억과 힘든 기억 모두 생생히 나지만, 당시 인터넷과 서점을 뒤져도 피부에 와 닿는 정보가 없어 떠나기 전 걱정이 많았다.

멕시코 거주 한국인 자녀들이 선우림 배우의 집으로 찾아와 아들과 놀고 있다.(사진=선우림)
멕시코 거주 한국인 자녀들이 선우림 배우의 집으로 찾아와 아들과 놀고 있다.(사진=선우림)

두 번째 이민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듣고 읽어도 한번 보고 경험하느니 못하다’라는 속담처럼 위성사진도 찾아보고 대사관도 가봤으나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것’과 비슷해 직접 가서 보는 것과 차이가 컸다.

첫 번째의 고생과 경험 덕분인지, 이유야 어떻든 한층 뭐든지 나아졌다.

두 번째 장소도 로망은 첫 번째와 같았으나, 조금 더 포부가 커지면서 일과 교육 그리고 문화와 역사의 여행이라는 슬로건을 마음에 품고 떠나게 되었다.

두 곳 모두 남편의 직장이 있는 대도시였고, 항상 하는 도시 생활에 익숙하다고 자신했지만, 동양과 서양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인사할 때조차 완전히 다른 건 물론이고(조용히 두 손을 합장하는 차분한 인사 vs 서로의 볼을 맞대며 인사), 음식, 예술문화와 삶이 완전히 다른 반전의 묘미도 있어 신기했지만, 배우느라 늘 긴장하다 보니 때론 편안한 한국 생활이 그리웠다.

용감하게 남편이 먼저 출발하여 현지 적응을 위한 시도를 했다. 해외 근무지의 적응은 물론 집과 차를 구하면, 나는 한국에서 언어를 미리 배우면서 은행, 세금, 유치원 등을 정리하였고, 집이 결정되면 국제화물로 이삿짐을 보내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준비해도 현지에 가면 익숙해진 나의 사고로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고, 다 정리하고 왔다고 생각한 한국 생활인데 미처 생각 못 한 것도 부지기수였다.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하며 당황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도 중요했다.

현지에 도착해 쉬고 나면 동네 한 바퀴를 차로 돌며 마트에서 장을 볼 때 꼭 화분과 씨앗을 사서 심었다. 그리고 집 앞 가까운 곳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은 적응을 위한 나의 루트였다.

아이 학교를 알아보고 집 앞 갈만한 공원이나 카페가 있는지 눈여겨보기도 하면서 무엇보다 한국인 온라인 카페와 한국마트와 음식점이나 가게가 있는 곳을 미리 알아두는 것도 아직 외국어가 익숙지 않은 내겐 중요한 절차였다.

멕시코에 도착한 국제 이삿짐이 선우림 배우의 거주지에 배달된 모습.(사진=선우림)
멕시코에 도착한 국제 이삿짐이 선우림 배우의 거주지에 배달된 모습.(사진=선우림)

이제는 실전! 국제 이사 어떻게 준비하지?


외국어라곤 영어가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다양한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한 계기가 첫 번째 이민이었다. 당시 아직 알려진 곳이 아닌 만큼 해외 이사업체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필요한 것은 가서 산다는 마음으로 꼭 필요한 것만 박스 포장하여, 20피트 컨테이너 삼분의 일가량만 채웠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과 함께 보내서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의 컨테이너를 여러 명이 사용하면 통관에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준비성이 철저한 남편은 회사로부터 신원보증을 신청해놓았고 비자발급도 서둘러 끝내서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은 비자와 신원확인에 문제가 생겨 해결될 때까지 우리의 짐도 항구에서 대기하게 되어 예정일보다 한 달이나 늦게 도착하였다.

짐이 오던 날 낯선 이국땅에서 얼마나 반갑던지, 한국에서 왔다는 것과 나의 삶이 묻어난 편안한 물건이라는 생각에 마음도 삶도 안정이 되었다.

멕시코 거주지에 도착한 선우림 배우의 짐을 풀고 셋팅하는 모습.(사진=선우림)
멕시코 거주지에 도착한 선우림 배우의 짐을 풀고 셋팅하는 모습.(사진=선우림)

두 번째 이민은 비용이 더 들었는데, 아이가 태어나고 더 멀리 가는 만큼 꼭 필요해진 물품도 많아져 20피트 컨테이너를 모두 사용했다.

그 새 해상운송 비용도 많이 올라서 배나 뛰었고 다양하고 전문적인 업체의 견적도 받아볼 수 있었다.

견적의 세부적인 것은 조금씩 달라도 거의 비슷했는데, 그중에서도 가격과 서비스와 보험을 중점으로 안전하고 좋은 곳을 선택하였다. 두 세군데 견적을 넣었고, 방문견적 상담과 남편이 근무하는 회사와 잘 맞는 곳을 최종 선택했다.

국내에서 출발해 해상운송을 통해 해외의 집과 가장 가까운 항구에 도착한 짐은, 그때부터 통관이라는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 통과하면 육로운송을 거쳐 집까지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다.

두 번의 국제 이사를 하면서 돌이켜보면 현지에서 구하거나 새로 구입해도 될 것들이 많았다. 굳이 이사 비용 대신 새로 사는 것이 비용을 절감할 수 있지만, 향수병에 빠져들지 않고 한국인의 정서를 지키는 것에는 한국에서 사용하던 우리의 물품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다음 편에는 국제이사 할 시 주의사항과 여정을 담아본다~ 긴 여정의 비행 어떻게 가지?

# 이 글은 선우림 배우의 남편, 한준희 씨와 함께 합니다.

선우림 배우 가족, 선우림은 배우이자 MC로 한국구세군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한국국기원 홍보대사 미스아시아퍼시픽 수상 & 홍보대사였으며 중국드라마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영화, 광고 등 다수 출연했다. (전)멕시코 누에보리온주립대 한글학당 교사이며 라오스 한류페스티벌 심사위원이다. 그의 남편 한준희는 MEXICO, LAOS, JAPAN 현지 기업에 근무하면서 많은 외국 생활 노하우를 갖고 있다.
선우림 배우 가족, 선우림은 배우이자 MC로 한국구세군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한국국기원 홍보대사 미스아시아퍼시픽 수상 & 홍보대사였으며 중국드라마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영화, 광고 등 다수 출연했다. (전)멕시코 누에보리온주립대 한글학당 교사이며 라오스 한류페스티벌 심사위원이다. 그의 남편 한준희는 MEXICO, LAOS, JAPAN 현지 기업에 근무하면서 많은 외국 생활 노하우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