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축복인가 재앙인가] (07) 민주주의와 다원주의적 기반
[민주주의, 축복인가 재앙인가] (07) 민주주의와 다원주의적 기반
  •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3.23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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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는 민주주의의 “수레”

다원주의”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세계관, 인간관, 사회관, 종교관 등과 같은 가치관에 대한 이론적 혹은 이념적 지향성이 서로 구별되거나 대립되는 복수(다원적 형태)의 신념체제를 언급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관심의 맥락에 따라서 수없이 많은 종류의 다원주의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주로 “정치적 다원주의”이다. 정치적 가치와 원리는 다원주의적 문제와 쟁점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분리시켜 논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관심을 집중시킬 만한 논의의 대상, 즉 구체적인 정치적 문제 혹은 쟁점이 대체적으로 특별히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민주주의는 그 근원에서부터 다원주의를 함의하고 있다. 우선 그 정체(政體)로 본다면, 군주정체나 잠주정체와는 달리 일인이 통치하는 정체는 아니며, 귀족정체나 과두정체와도 달리 소수가 통치하는 정체도 아니다. 오늘날 여러 형태의 독제체제를 구축한 국가들도 명목상으로는 다수의 정체를 내세워 “민주주의”라고 표방하는 경우가 있지만,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는 “민주주의” 혹은 “민주정체”는 실질적으로 다수(민중)의 자유롭고 평등한 참여와 의사의 반영으로 제도의 운영과 정책의 결정을 일상화하는 정체이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통치에 참여하는 다수는 개별적으로 의견의 다양성을 보일 수도 있고, 특정한 부류의 집단적 의사의 다양성도 있을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민주적 다원주의


 플라톤은 원래부터 민주정체를 일종의 타락한 국가로 보았지만, 그가 서술하기로, 민주주의는 구성원의 모두가 자유를 향유하는 체제이며, 이와 같이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는 어떤 형태로든지 각자의 마음에 드는 삶의 방식을 찾고, 거기에 따르는 개인적인 적응을 하면서 살아가는 국가라고 하였다. 플라톤은 이런 국가라면 보기에 참으로 놀랍고 신나는 삶을 누리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라고도 하였다. 민주정체에서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하므로 마치 온갖 꽃으로 수놓은 다채로운 외투처럼,” 어느 정체의 경우보다도 더욱 화려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런 국가를 누가 성공적으로 통치할 수 있을 것인가에는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말하자면, 플라톤은 실재(實在, 이데아)의 세계에 접근하는 이성적 능력과 지혜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통치하는 민주정체는 이상적 국가로 운영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민주정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플라톤만큼 강하게 비판하지도 않았고, 민주정체에 다소 긍정적 측면도 있음을 언급하였다. 그는, 플라톤이 국가 구성원의 소수만이 이성과 지혜를 소유한다고 한정한 것과는 달리, 인간은 능력에 있어서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본질적으로 이성적 존재이고 국가는 만인(萬人)을 위한 공동체라고 하였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국가 공동체의 중요한 필요조건을 충족시키는 셈이고, 또한 다수의 지혜가 참여하는 효율성을 기대할 수도 있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민주정체 그 자체로는 이성적 수월성을 지닌 계층의 통치를 기대하기가 어렵고, 빈민층을 회유하는 선동정치가 편승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플라톤의 경우에 민주정체를 유지한 이상국가는 원천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여겼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체 그 자체의 틀에 귀족(혹은 과두)정체를 혼합하여 오늘의 입헌정체와 유사한 법치주의를 구축하면 실질적으로 인간 영혼의 우수한 부분이 다스리는 국가로 운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편이었다. 그의 정치학에서 이러한 국가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특별히 지칭하지는 않고 일종의 가상적 체제의 국가(politeia)로 서술하였다.

 민주주의의 개념과 원리는, 크레인 브린톤(Crane Brinton)이 언급하였듯이, 이미 25세기 전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당시의 그리스 철학자들(즉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생각하고 논의하고 검토해 본 서양의 중요한 정신사적 주제들 중의 하나였다.(C. Brinton, Ideas and Men, 1950, pp. 23-24) 그들이 검토한 바 중에서 언급한 부정적 측면보다는 적극적 가치의 측면에서 보면, 민주주의는 플라톤의 화려한 다원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만인 공동체의 특징을 충족시키는 정치체제로 떠올려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어떻게 인간의 우수한 부분이 주도하여 통치할 수 있는 제도적 조건을 구비하느냐이다. 이 질문은 민주정체가 국가 공동체의 맥락에서 다원주의를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이론적, 실질적 가능성의 확신을 요구한다. 나는, 이 글에서, 민주주의적 가치의 실현을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실질적인 과제는 다원주의의 성격과 실천적(제도적-정책적) 규칙에 관한 것임을 논의하고자 한다. 여기서 기본적이라고 함은 다원주의를 궁극적 가치로서 상정하기보다는, 자유와 평등을 포함한 민주주의적 가치들을 싣는 수레와 같은 일종의 도구적 조건임을 전제로 한 것이다.

 


다원주의 : 민주주의의 “수레”


 어느 수준의 것이든지 간에, 민주적 조직은 그 구성원의 모두에게 평등한 자유를 부여하면, 그들의 각각이 지닌 개성과 신념과 가치는 상당한 정도로 서로 다른 삶의 형태를 표출하게 된다. 이러한 조직에서는 다원주의적 질서를 허용하고, 이에 따라 형성된 공동체는 암묵적 혹은 명시적 규칙의 체제에 대한 합의가 전제되어 있다. 우선 자유와 평등의 개념에도 어떤 획일적 혹은 폐쇄적 한계를 설정하기보다는, 가능하면 그 개방성을 최대한으로 유지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이념적 방향과 일관성을 지니는 길이다. 그러므로 자유와 평등은 거의 무한한 다양성의 실천적 원리를 포괄하는 일종의 메타언어이다. 실제로 구성원들 간에 우리의자유는 이런 것이며, “저들의자유는 저런 것임을 허용한 다원주의적 원리에 따라서 실천의 규칙이 요구된다. 구체적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사회적, 정치적, 도덕적 체제는 다원주의를 기본적으로 상정하고 있다. (물론, 절대적 다원주의를 수용하지 않는 주장, 특히 완전주의로 일컬어지는 노선의 이론적 고찰이 있으나, 차후에 논의하기로 한다.)

 자유와 평등은 그 자체로서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는 개념이다. 하지만, 실제로 다원주의의 맥락과 무관하게 언급되는 경우라면,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적어도 민주주의를 논의하는 사고의 영역에서 본질적 가치의 중심적 위치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다원주의가 없으면 자유와 평등도 결국 외곬으로 강제되는 것이다. 다원주의가 거부된 사회에서 탁월한 민주주의가 구축될 수 없고, 다원주의가 허용되는 실천적 폭 만큼 조직의 구성원들은 세련된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가치의 다원성을 수용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지는 민주주의가 잘 운행되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오히려 혼란이나 좌절을 경험하는 상태에 있을 때, 혁명의 회오리가 지나간 흔적이 남은 상태에서 보듯이, 민주주의는 다른 어느 체제보다도 더욱 불안정한 생활의 장을 만들고 만다. 조직의 구성원들은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삶의 역량을 실현하는 수준만큼의 삶의 질을 향유할 수가 있다. 민주사회에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평등하며, 구성원의 각각이 성장의 삶을 가장 충실히 누리는 상태에 있고, 모두가 가장 안전한 삶을 영위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은 바로 다원주의가 건강하게 안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주의를 특별히 선호하지 않았던 것은 이상적 국가, 즉 인간과 인간사회의 우수한 부분이 통치하는 국가를 기대하지 못한다는 데도 있지만, 실제로 열등한 부분에 속한 세력과 함께 정의롭고 정연한 조화를 이룬 삶의 장을 구축하고 또한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탓이기도 하다. 그것은 민주정체가 온갖 잡다한 취향과 천차만별의 능력을 포괄하는 다원주의를 수용하고 다스려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상정한 우수한 부분이라는 것은 이성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므로, 오늘의 상황에서 모든 인간의 각자가 지닌 자아실현의 과제가 되는 각자의 잠재성과 우수성의 실현은 이성적 능력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회적 조직의 구성원들이 지닌 개성적 다양성과 추구하는 가치관의 다양성은 훨씬 더 광범하고 복잡하다. 그만큼 민주주의적 삶의 양상도 훨씬 복잡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를 사회적 조직과 운영의 기조로 삼고 이에 따른 삶을 영위하고자 할 때, 수없이 많은 위기와 파산의 경지에 직면한다. 때로는 조직의 전면적 붕괴까지도 우려해야 하는 문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도 바로 다원주의에의 집착 때문이다. 말하자면, 민주주의에 있어서 다원주의는 실현하고 성취해야 할 과제이면서 동시에 피할 수 없는 부담이고 멍에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정치적 갈등과 대립과 투쟁은,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근원적으로는 사실상 민주주의가 허용하고 귀하게 여기며 집착하는 다원주의에 연유한 것임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으로 보면,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적 대립, 지역 간 이해관계의 충돌, (다행히 우리 사회에서는 없는 문제이지만) 종교 간의 갈등, 사회계층 간의 견제 의식 등 수없이 많은 요인들이 다원화된 신념구조를 반영한다. 어떤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사회 구성원들 간의 대립 혹은 갈등을 전제로 한다. 이에 비하여 독재체제는 사회적 갈등을 권위나 강압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그것은 다원주의를 제한하거나 금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체제는 사회 구성원들 간의 갈등과 대립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사회가 아니라, 그것을 해결하는 원리와 규칙을 공유하면서 다원주의를 유지하는 사회이다.

 


다원주의의 개념적 외연


 다원주의적 구조와 풍토, 혹은 전통과 이념을 견지하고 추구하는 국가는, 소극적으로 표현해서, 어떤 특정한 삶의 양식이나 가치체제들에 대하여 “중립성”을 지키고자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적극적으로 다원적 노선이나 가치관 등의 요소들을 보호해야 할 책무를 지니기도 한다. 물론 다원성은 가치추구의 자유로움이 허용된 만큼 기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점에서 보면 역사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가장 개방적 의미의 전형은 “자유주의적” 사고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국가마다 다원화의 틀이 일정할 수는 없다. 개별 국가들은 자체의 역사적 전통과 사회적 여건의 맥락에서 특성화된 이념적 향방과 과업을 설정하고 이에 따른 다원성의 구조가 제도화되기도 한다. 제도화된 다원적 구조에 대하여 국가는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는 책무와 압력을 소화해야 한다.

 자유주의의 전통에서 볼 때, 초기의 사회계약론자들은 정치적 결정의 정당성은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사회적 합의에 근거를 둔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이념의 정당성은 종교적 자유에 대한 의견의 대립이 심각했던 당시에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려는 정치적 고려가 작용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당시에 종교적-윤리적 쟁점들을 해결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관용”(tolerance)이라는 덕목이 실제적으로 요청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계약론자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정치적 결정의 정당성에 관한 자유주의적 이론은 국가가 당당하게 추구할 수 있는 가치체제를 폭넓게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여러 유형의 신념체제를 포용하는 “다원주의”가 자리 잡게 된다.

 정치적 다원주의에 관한 논의는 주로 국민이 각기의 가치관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얼마나 보장받을 수 있으며, 또한 국가 혹은 정부가 어느 정도까지 이에 재제를 가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수없이 많은 가치체제가 존재한다는 점을 중시하고 있다. 정치적 다원주의 중에서 가장 강력한 주장은 단정적으로 모든 가치체제는 그 격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보다는 다소 약한 수준의 것은 모든 가치체제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다소 미온적인 주장은 가치체제들 중에서 적어도 어떤 것들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원주의의 가장 고전적 형태는 정치행위와 의사결정은 주로 “정부”의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며, 비정부집단은 거기에 영향을 주는 일종의 압력집단이라고 전제한다. 그리하여 고전적 다원주의는 정치적 과정에서 권력과 압력이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가에 일차적 관심을 두고 있었다. 갈등관계에 있는 노선들은 복수로 존재하며 계속적인 타협의 과정을 통하여 권력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실제로 일시적인 불평등적 요소들이 존재하지만 여러 가지의 제도가 점차적으로 보완되고 균형을 유지해 간다. 여러 구성 집단 간에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므로 서로 합의할 수 없는 경우에 입법을 저지하는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상정하는 변화는 매우 느리고 점진적일 수밖에 없다.

 국가와 정책결정을 설명하는 다원주의의 이론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르러 특히 미국에서 대단한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하였지만, 종래의 다원주의 이론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비판이 있다. “신다원주의”(neo-pluralism)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새로운 목소리는 권력분배에 관련하여 종전과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는 많은 압력집단이 존재하지만, 종래와 같이 주로 법정기구의 권력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라고 평가하였다. 말하자면 고전적 다원주의는 국가의 정치문화적 다원성에 한정된 것이지만, 신다원주의는 사회문화적 다원주의의 개념으로 확산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다원주의자들은, 국가란 이제 더 이상 여러 이해집단의 요구들을 중재하고 판결하는 심판자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며, 단지 여러 하부조직의 활동을 통하여 부분적인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기구로서 일종의 상대적 자율권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여긴다. 다원주의 안에서 정치문화의 중추적 위치에 있다고 인식되었던 헌법적 규칙들도 이제는 다양성의 맥락에서 보게 되고, 경제적 자원의 명백한 불균등도 그대로 유지시키는 제도적 장치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사회-경제적 힘의 불균등한 분배로 인하여 나타난 현상이며, 정치적 선택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어떤 집단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하지만, 어떤 집단에게는 제약조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코놀리(William E. Connolly)는 신앙과 민족의 다양성을 비롯하여 성별 활동, 혼인 관계, 언어 사용, 친교 관계, 친족 모임 등에까지 다양성의 개념을 확대하여 “복합적 다원화”를 기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Pluralism.Durham : Duke University Press, 2005)

 롤즈의 「정의론」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지게 된 것도 1960년대에 고조된 사회적 불평등 현상, 특히 인종과 계급에 대한 문제의식이 이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침 현대적 자유주의의 핵심적 문제를 분배의 문제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었기 때문에 함께 주의를 끌게 되었다. 그 시대의 광범한 추세에 따르면, 소득의 양극화를 줄이기 위한 대중적 활동도 자유주의적 전통에서 중시해 온 자유의 핵심적 요구에 어긋나지 않으며, 오히려 평등에 대한 우리의 공통된 관심을 가장 적절히 표현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강조점이 바뀌게 된다. 시민권에 관련된 운동들은 이전까지만 해도 변방에 머물고 있었지만, 이제 여러 집단에서 새로운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성별적 역할과 차이에 관하여, 인종적 특성의 차이와 관련하여, 민족적 기원을 중심으로, 사회적 계급에 관련하여, 세대 차이와 연령층의 문제로, 신체적 조건에 관련하여, 양심과 도덕의 문제로 인하여, 종교적 갈등과 차등의 문제로 인하여 등등, 수없이 많은 집단들의 목소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사회 정책의 중심적 과제는 이제 차별성의 정당성에 관한 것이었다.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 장관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 장관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dhle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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