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적 사회는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기본적인 가치관의 다양성, 정치적-사회적 이데올로기의 다양성, 전통이나 관습이나 신앙 등의 문화적 특성의 다양성, 그리고 성별, 소득, 인종, 지역 등의 인구학적 특징에 의한 이해관계의 다양성을 포함하여 헤아릴 수 없는 다원적 요소와 구조를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움직임에 대하여,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의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다원주의가 사회적 통합성의 기반에 의문을 남긴다는 것이고, 둘째는 개방적 다원주의에 일종의 “논리적 패러독스”가 내재한다는 것이다. 둘째의 문제는 별도의 절 “민주주의와 그 적들”에서 논의하기로 하고 이 절에서는 첫째의 문제만 검토하기로 한다.


왜 완전주의?

첫째 문제와 관련하여, 19세기의 빅토리아 시대에 “완전주의”를 주장하는 대열의 사람들은, 다양성이 좋은 듯이 보이지만,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하나의 사회로서 결속시키는 바탕 혹은 동력으로 작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자칫, 확실한 기준도 없이 무기력한 상대주의로 나아가는 흐름을 우려하는 소리였다. 자유주의적 사회철학에서는, 계속 증가하고 있는 사회적 다양성의 추세 속에서 어떻게 실용성 있는 정치적 통합을 추진해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이 이어져 온 것은 사실이다. 그들에 의하면, 다원주의를 윤리적으로 당연시하는 주장이나 정책은 여러 가지의 정치적 문제를 발생케 할 수도 있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합법적인 정치적 판단의 권위를 부여받을 만큼 민주적 사회의 기초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치적 도덕성은 인간의 복리와 번영을 지향하는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사상체제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그리고 국민이 아무런 정치적 간섭이 없는 상태에서, 한 사회가 지켜 온 관습이나 합법성의 여부를 문제로 삼지 않고, 누구든지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허용해도 좋겠는가? 이러한 물음은, 다원주의에 의한 사고와 행위가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적어도 실질적인 문화적 품위도 있고 윤리적 가치도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손색이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것이다. 사람들 간에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거나 서로 경쟁적으로 겨룰 수도 있는 다양한 신념과 가치관이 허용되어도, 국가는 분명히 옳은 것은 증진시키고 권장하되 옳지 못한 것은 저지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특별히 정치적 도덕성이라고 할 것은 없으되 정치가 바로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완전주의에 의하면, 자유주의의 국가는 그 구성원들에게 자유로움을 소중하게 여기는 덕목들을 심어주고, 가능하면 그러한 목표들을 추구하는 데 전혀 방해를 받지 않도록 보장해 주는 국가라야 한다. 국가는 그러한 탁월성을 지닌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배출하고, 그들이 그 탁월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최선의 기회를 제도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완전주의자들 중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이해방식이 있다. 하나는 복리(福利)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즉, 가장 가치 있는 삶이란 각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주도하되 최대한으로 평안을 누리는 “행복한 삶”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고귀한 삶”이나 성공적의 삶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점에서, 고귀한 삶은 복리 그 자체, 즉 행복한 삶을 가장 잘 누리는 삶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고귀한 삶에서 때로는 타인을 위해서, 혹은 다른 어떤 가치의 실현을 위해서, 자신의 복리 그 자체를 희생할 수도 있는 삶이다. 완전주의자들 사이에서는 “행복함”의 개념보다도 “고귀함”의 개념이 더욱 우선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완전주의자들에게는 어떤 대상이나 행위가 좋다거나 옳다고 말할 때, 그 말은 본질적으로 욕구충족의 대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쾌락주의적 사고를 거부하거나 아니면 근원적으로 초월하고자 한다.


완전주의자들 중에는 인간적 가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인본적” 완전주의자와 자연의 상태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가치를 말하는 “자연적(혹은 객관적)” 완전주의자로 구별되기도 한다. 특히 인본적 완전주의자들은 인간적 가치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인간 본성이 지닌 가장 중요한 능력으로 이해되어 온 “합리성”을 중심으로 논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자연적 완전주의자로 분류되는 이론가들 중에는 완전주의를 인간 본성과는 무관한 것으로 서술하기도 한다. 자연적 완전주의는 대개 예술과 과학과 문화에서 인간이 자신의 수월성을 최대한으로 성취하는 것을 포함한다. 즉, 인본적 완전주의자들이 인간적 본성이라고 규정하는 이지적 능력만이 아니라, 이와 무관하게 인간이 자연적 속성으로 지닌 여러 가지의 취향이나 능력 중에도 객관적인 가치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그 최선의 것을 성취하거나 실현하는 것으로 특징짓고 있다. (D. Parfit, “Overpopulation and the Quality of Life,”Applied Ethics, 1986)

양립의 논리


완전주의자들이 인간 본성으로 규정하는 이성적 능력과 합리성의 계발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최선의 삶이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할 때, 듣기에 따라서는 일원론인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좋은 삶”은 온갖 허다한 삶의 형태 모두에게 적용하는 개방된 의미로 두지 않고, 적어도 특정한 가치의 삶을 지향하고 추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본성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가장 잘 계발할 수 있는 측면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술적인 것을 잘 할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학술적인 것에 더욱 집중을 잘 할 수 있다.
나의 완성과 다른 사람의 완성을 다 같이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면, 완전주의가 추구하는 바와 모순 없이 다원주의를 허용하는 셈이 된다. 만약 그렇다면, 특히 자연적(객관적) 완전주의와 다원적 가치체제가 양립할 수 있다고 하거나, 아니면 그래도 궁극적으로는 완전주의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다른 여러 가치체제를 주장하고 추구해도 그 자체를 여전히 완전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약간 생각을 달리하여 완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완전한”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하나의 완벽한 삶의 형식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최대한으로 좋은 혹은 훌륭한 것을 지향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그 좋은 것이라고 주장(혹은 평가)되는 것들이 서로 상충하기도 한다면 엄격히 말해서 완벽한 하나의 삶의 형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므로 결국에는 다원적 가치체제는 허용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가치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완전주의가 훼손되지는 않는다는 생각도 있다. 완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의 요지는 어떤 가치체제도 “개방적으로” 수용하는 다원주의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주의는 인간이 보존하고 증진시키고 보증해야 하는 가치와 활동은 어떤 것인가를 끝없이 탐색하고 확인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완전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인간이 고귀한 삶을 살고자 추구하는 가치들은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똑 같은 것을 똑 같은 수준으로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가치실현의 완벽성에 있어서 사람들에 따른 질적-양적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같은 가치를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능력이나 의지나 경험이나 환경에 따라서 그 양상이 다를 수가 있다. 가장 잘 실현하고 가장 잘 성취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히 탁월해서 모든 사람들의 관심, 존경,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성취하는 바의 특징에 따라서 우리는 “천재”라고도 하고, “대가”라고도 하며, “영웅”이라고도 하고, “성인”이라고 칭하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완전주의가 불평등의 원인이 되지는 않는가? 예컨대, 흔히 엘리트주의를 정당화할 때, 엘리트에 해당하는 유능한 사람들이 성취하고 실현한 가치가 만인에게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라면 허용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 우리가 흔히 문명의이기(利器)로 여기는 여러 가지의 발명품들은 그 좋은 예이다. 우리는 엘리트들의 천재적 업적의 도움으로 높은 삶의 질을 향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더욱 강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의 기회를 결과적으로 박탈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예컨대, 흔히 속칭 “레전드”라고 하면서 칭송하는 축구, 야구, 골프 등과 같은 스포츠의 영웅들은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어떤 의미에서 그들을 희생시키고 성공한 사람들이다. 승리자의 불평등한 성공의 사례이다.


물론, 완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객관적 가치들은 대체적으로 보아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합리적으로 검토된 것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때때로 고귀한 생애를 보낸 도덕적 위인들을 공경하고, 탁월한 학문적 성취를 한 학자들을 숭상하며,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예술가, 정치가, 사업가, 모험가 등을 예찬한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주변에는 좋은 삶으로 모범을 보여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그들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남기고 존경과 정감을 느끼게 하는 착한 이웃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분명히 우리의 삶에서 추구해야 하거나 추구할 만한 가치는 여러 가지로 존재한다. 이런 사례들도 대중의 무지나, 정치적 편견이나, 때로는 다수의 취향이나, 특정한 집단의 이기주의로 인하여 배척되거나 무시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만약에 국가가 결과적으로 국민 일반에게 돌아 갈 가치의 질과 양을 고려하여 완전주의가 지향하는 가치를 위하여 통치권력을 강제로 발동한다면, 이러한 정책을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또한 반면에, 국가가 다원주의를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평등주의 이념 하에서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면, 예컨대 엘리트주의에 의해서 발휘되는 특수한 능력이나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가치의 많은 부분을 잃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필요에 따라 차등주의를 허용하고 국가의 강제성이나 특혜가 작용하는 것을 평등주의에 위배되는 정책의 사례라고 하여 정치적으로 거부되면, 그 강제성이 없이는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 가치를 완성하지 못하는 손실을 입게 될 수도 있다. 여전히 자유주의 국가에서 요구되는 평등과 자유의 가치에 대한 절대성과 상대성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여지는 남겨 두고 있는 셈이다.


완전주의가 본질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자유주의의 정당화와 그 핵심을 인간의 가치에 대한 독특한 통찰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예컨대, 개인적 자유를 좋은 삶의 모습으로 보고, 개인의 자율성이 지닌 가치에서 자유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자기통제, 자기표현, 지식의 적극적 추구, 도덕적 책임의 당연한 수용 등을 포함하여 그야말로 품격을 지닌 삶의 가치를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의미론적으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고전적 자유교육의 정신과 일관성을 지닌다. 자유교육은 다소 편협하게 규정되기도 하였지만, 인간 각자가 잠재적 수월성을 자율적으로 실현하면서 성장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에 붙여


간단히 말하면, 다원주의와 완전주의의 중요한 차이는 여기에 있다. 교육 혹은 정치의 경우를 두고 볼 때, 일관성 있게 유지해야 하는 방향감과 추구하는 가치체제를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판단의 기준이 완전주의에는 “있다”는 것이고 다원주의에는 “없다”는 것이다. “극단적 완전주의”는 합리적 가치와 인문학적 고전의 가치를 절대시하는 전통적 자유교육관이 그 전형적인 것이며, 거기에는 오직 제한적인 사회적 계층이나 세력만의 관여를 허용하는 “폐쇄적 중립성”이 적용된다. 반대로, “극단적 다원주의”는 그 전형적인 것으로서 정치적-사회적 가치와 신념의 다양성을 전제로 하는 개방적 대중교육의 체제가 있고, 모든 통속적인 가치관까지도 수용하고 정치적 보호를 받는 “개방적 중립성”이 적용된다.


좀 더 엄격히 생각해 보면, 자유주의적 전통 속에 있는 것이면, 다원주의라고 해서 국가의 교육은 국민들로 하여금 어떤 가치체제를 수용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며, 완전주의라고 해서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오직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제한된 몇 가지의 삶을 살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강제하거나 회유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다원주의와 완전주의는 그 차이가 표방된 포괄적 가치체제가 지닌 “개방성의 정도”에 있다. 쉽게 말하면, 국민교육이 지향할 가치체제를 다원주의에서는 다소 “느슨한” 상태에 두자는 것이고, 완전주의에서는 그것을 다소 “단단한” 상태에 두자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느슨한 기능은 그 체제가 다양한 가치 혹은 가치체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중립성에 대한 요구의 외연이 넓고. 단단한 기능은 그 외연이 좁을 수밖에 없다.


예컨대, 어느 완전주의자가 합리적 가치를 절대시한다고 하더라도 합리적 삶의 방식은 상당한 정도로 다양하다는 것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어느 다원주의자가 다양한 가치관을 제한 없이 수용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다원적 가치관의 각각은 마치 절대적인 것인 양 추구한다. 이를테면, 신앙의 자유 속에서 다양한 종파들이 존재하지만, 각 종파의 신도들은 자신의 신앙이 절대적인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완전주의와 다원주의, 그 어느 경우에나,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관이나 지니고 있는 신념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질성 혹은 차별성이 있음을 수용하는 “관용과 배려”는 자유주의의 기본적인 덕목에 속한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문제와 논의는 그러한 관용과 배려가 전제된 다원적 가치관 혹은 신념체제에 대한 고찰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