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스승의 윤리적 존엄”을 지키는 책무성과 전문성
[사설] “스승의 윤리적 존엄”을 지키는 책무성과 전문성
  • 인터넷뉴스팀
  • 승인 2021.05.15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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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적 환경의 중심에 선 교사
'교수학습 성공'의 일차적인 책무…"교사에 있어"
“한 학생의 생애를 파멸시키는 데는 오직 한 사람의 교사이면 족하다”
"아동중심교육의 오해와 이해"
'교사의 전문성 'vs '의사의 전문성'
'국가'와 '교직단체'의 공동과제
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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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인뉴스= 인터넷뉴스팀]

한 학생의 생애를 파멸시키는 데는 오직 한 사람의 교사이면 족하다”

                                  _시드니 후크

     

 "교육적 환경의 중심에 선 교사"

학습자의 교육적 경험을 위해 가장 전형적인 것은 교실의 상황(혹은 수업의 상황)이다. 교실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교사가 지식을 전달한다든가, 학습자들 사이에 관찰이나 토론을 시도해 보게 한다든가, 어떤 주제로 개인별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하는 등의 활동이 가능한 상황을 만들고 그것을 운영한다. 그 상황에는 교사도 있고 또래들이 함께 하고 학습을 위한 시설이 주어진다. 그뿐만 아니라, 교사가 인간관계를 맺는 특징적 스타일도 있고, 독특하게 발휘하는 지도력도 있으며, 학생들이 함께 형성하는 분위기도 있다. 그리고 제도적 조건이 함께 한다. 즉 신입반이거나 졸업반이거나 남녀 공학이거나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의 자녀이거나 도시의 학교이거나 공립학교이거나 전통이 오랜 학교이거나 특정한 시기에 반영되어야 하는 교육정책이 영향을 주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교실의 상황에는 교육과 학습의 문화가 있다. 그 문화는 학습자가 직접 경험하는 독특한 풍토를 의미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교사가 어떤 주제나 소재를 중심으로 하여 수업을 진행하면 학습을 위한 기본적인 상황이 조성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상황적 조건에서도 집단적으로나 개별적으로 학습자가 실질적으로 주어진 상황과 상호작용하는 경험적 양상은 수없이 다양하게 발생한다. 교실의 학습활동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학습자의 동기나 관심의 여하에 따라서 학급의 구성원들은 어느 수준까지 거의 비슷한 공통적 내용을 담은 학습경험을 할 수 있다. 학습자들은 일단 주어진 상황으로부터 공통된 영향(자극)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습자 개개인의 구체적 경험은 환경(상황)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형성되고 발전하고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개별적으로는 천차만별의 다양한 신체적-심리적-사회적 특징을 별도로 경험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학습자에 따라서 각기 주어지는 실질적인 상황의 특징이 다르다는 의미이다.

'교수학습 성공'의  일차적인 책무…"교사에 있어"

그러면 이러한 교실상황이 학습자의 교육적 경험의 장으로서 어떤 것을 제공할 수 있는가? 우선, 교실은 학습자의 물리적 공간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문화적 공간이다. 학습의 분위기를 포함한 물리적-문화적 공간의 특성과 의미는 학습자의 각각에게 교실이라는 환경의 독특한 의미를 제공한다. 교실에는 반드시 교사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사가 있는 교실과 없는 교실은 그 상황의 의미에 있어서 다를 수 있다. 단순한 물리적 차이만은 아니다. 교사는 적어도 학습자와 인격적 가치로서 상호작용하는 관계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서, 컴퓨터, 시청각 기기, 시뮬레이션 장치 등의 물리적 장비와 프로그램이 있고 없고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교사와 더불어 학생들이 만든 상황 혹은 분위기는 그 교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하고 유일한 학습의 장을 만들고, 또한 거기서 학습자는 어떤 지식이나 정보의 도움이 있기 전에 이미 그 교실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교사의 역할과 학습자의 동기 여하에 따라서 크고 작은 경험들이 형성되고, 성공적인 학습이 되자면 교사와 함께 하는 시간마다 적어도 어느 수준의 학습이 완성되어야 한다. 어지럽고 흐트러진 경험이 아니라 통일되고 응집된 경험이 만들어진다. 모든 학습자가 동시에 학습하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각자는 동일한 학습의 경험을 완성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는 자신의 성장에 도움되는 어떤 경험을 이루었을 때에야 비로소 교육적인 학습이 성공한 것이다. 성공적인 학습은 학습자의 동기와 교사의 지도력에 달려 있지만, 아마도 일차적인 책무는 교사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실이라는 학습경험의 상황을 조성하고 운영하는 책무에는 학습자에게서 동기를 유발하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교사의 책무는 도덕적으로 매우 준엄한 것이다. 미국의 교육철학자인 시드니 후크(Sidney Hook, Education for Modern Man, p. 229)가 “한 학생의 생애를 파멸시키는 데는 오직 한 사람의 교사이면 족하다”고 한 말이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반드시 교육자답지 않게 사악한 인성을 가진 교사도 있다는 말이 아니다. 흔히 말하듯 실력 있고 말로써나 행동으로써 뛰어나서 설득력이 매우 대단한 교사도 가끔 이 범주에 속할 수가 있다. 실력이나 인기로써 뛰어난 교사는 자신의 특유한 스타일로써 학습의 상황을 주도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질 수가 있다. 뛰어난 언어적 구사력을 지닌 교사는 학생이 경험할 학습의 상황을 매우 단조롭게 만들고, 지식이나 정보를 주입하는 것으로써 학습의 상황을 끝내버릴 수가 있다. 또한 어떤 교사는 학습자들이 지닌 잠재력과 경험구조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흥미위주의 혹은 교사위주의 일방적 학습장을 구축하고 그것으로써 학습의 성공을 장담하고자 한다.

그런가 하면 학습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데 뛰어난 경영적 자질을 가진 교사도 유사한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다. 학습자가 잘 짜인 수업계획과 흥미 있는 운영에 일시적으로 매몰되면, 당시로는 한편의 재미있는 영화를 관람하거나 게임을 즐기는 것처럼, 학습자 개개인의 성장에 별로 기여하지 못하는 흥미위주의 경험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러한 흥미위주의 학습활동은 불온한 사상이나 허위의 선전을 하는데 있어서 직설적으로 시도하는 주입식의 경우보다 훨씬 더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한다.

흔히 교실 수업의 방법으로 권장하는 토론중심의 수업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한 주입식 수업은 잘 조직된 지식을 전달할 수는 있지만 토론의 경우만큼 강력한 자발적 관심을 유도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옛 소련의 청년공산당(Comsomol)의 구성원들은 토론과 반성과 선서 등의 집단적 과정을 통하여 매우 경직된 사상으로 무장케 하였듯이, 강력한 동지적 결속의 의지는 토론의 과정을 통하여 내면화된 신념과 사상으로 더욱 철저하게 학습자의 인격 속에 침투할 수 있다.

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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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중심교육의 오해와 이해"

_'어려움이 없는 상태'… 어떤 관심도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성공적인 민주주의 교육은 교사의 기술적 효율성보다 학습자의 성장에 얼마나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 오느냐에 달려 있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루소(Jean J. Rousseau) 이후의 낭만적 자연주의의 교육론에서 아동중심교육을 주장해 왔고, 그것이 민주적 교육의 전형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교사중심에서 아동중심으로 전환한다면 당시로서는 흔히 그렇게 했듯이 교육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동중심교육은 19세기 유럽의 낭만적 자연주의자들과 20세기 초기의 미국 진보주의자들이 새로운 개념으로 중요하게 사용하던 개념이다. 해방 후에 미국 교육사절단의 활동으로 우리나라에 “새교육” 운동이 전개될 당시에 가장 중요한 개념은 “아동의 흥미”를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그리고 지금도 “흥미”라는 말이 영어의 “interest”의 번역어로 사용된 것이라면, 아동중심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혼란을 야기한 것이 사실이다. 새교육의 주요개념은 학습의 장에 아이들이 흥미 있게 참여하도록 만들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 말은 오히려 “관심”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듀이(John Dewey)와 혹킹(William E. Hocking) 등은 “어려움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떤 관심도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역경이 있고 좌절이 있으며 난관이 닥친 상태에 임하는 경험을 하지 않고는 주어진 과업을 감당하고 목적하는 바를 실현하고자 하는 지속가능한 의지력을 활성화하는 데 결정적 계기를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듀이와 혹킹은 모두 학습자의 흥미진진한 상태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과제를 수행하고 목적을 실현하는 일에 대한 진지한 집념과 집중력을 언급하고 있다. 교사가 학습을 위한 상황을 마련하는 일에서 덧없이 흘러가는 “흥미로움”과 “즐거움”을 충족시키기만 하는 것은 학습자의 계속적 성장을 위한 정책으로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학습의 장이 설명식, 토론식, 탐구식, 자습식 등의 어느 것으로 선택되고 각각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는 거의 전적으로 교실경영에 대한 교사의 방침에 속한 사항이다. 학습의 상황적 특징을 구상하고 거기서 학습자가 경험의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고 예상되는 최선의 것을 교사는 창의적으로 계획한다. 흔히 학습자의 활동이 활발하면 교사는 성공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교사는 현재 거느리고 있는 학습집단의 성장에 요구되는 경험의 성격이 어떠해야 하느냐에 따라서 교실의 생산적인 학습상황을 구상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교사의 일방적 설명이 중요할 수도 있고, 집단적 토론이나 탐구의 활동이 가장 효율적인 것일 수도 있으며, 학습자가 일시적이나마 혼자서 생각하고 반추하고 확신하고 구상하는 시간을 필요로 할 때도 있다.

요컨대 학습자의 성장의 과제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학습의 상황이 계획되고 운영된다. 교사가 아무리 강의식 설명에서 인기를 얻고, 학습자의 집단적 토론이나 탐구가 성취감을 만족시키고, 학습자 혼자서 보낸 시간이 일시적으로 유익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교육적 성장은 각자 경험의 계속성을 충족시킬 때 그 의미를 제대로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일회적이고 단편적인 것들도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전형적인 교실 수업의 상황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학습의 상황이 요청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달리 예컨대 강연회나, 놀이의 장에서나, 독서실에서 경험할 수도 있다. 학교와 같은 제도적 교육의 장은 체계적인 인간성장이라는 기준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타당한 학습의 상황을 전문적으로 제공한다. 교사의 전문성을 거기에서 발휘되는 것이다.

경험의 계속적인 성장이란 경험의 구조적 재구성을 의미한다. 방만하고 잡다하게 가지고 있는 다양한 경험들이 한꺼번에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학교라는 교육의 장에서 제공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동반하지 않고는 학습자의 성장동기를 유발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교사의 역할이 일차적으로 작용해야 하는 곳은, 바로 학습자가 이미 지니고 있는 경험과 더불어 새로운 목적(가치)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물론 새로운 가치의 설정은 교사 자신의 가치관에 의한 회유나 설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학습자 수준의 경험의 연속성에 기초한 것이다.

1990년대의 후반에 “수요자중심교육”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 적이 있다. 당시의 대통령 자문 교육개혁위원회가 개혁방안을 보고한 시기(1995년)에 즈음하여 교육기회의 수요자인 학습자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교육을 말한 것이다. 이때의 필요를 반드시 학습자의 “주관적” 필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여러 가지의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학습자 혹은 그 보호자로서의 수요자 측의 주관적 필요로만 이해하면, 교사의 전문성은 고객의 주문에 응하는 서비스의 수준에 머물고 만다. 그러면, 이때 학습자의 필요란 “주관적 필요”가 아니라 “객관적 필요”라고 생각하면 옳은 것인가? 필요의 객관성은 학습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떤 권위주의적 힘을 요청하는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그러면 교사는 그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전문성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필요의 객관성은 학습자에게 요구되는 교육적 필요라는 것이 어떤 성격의, 어떤 내용의, 어떤 수준의 것인가를 전문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의사가 환자의 건강을 관리하는 상황에 있다면, 환자에게 객관적으로 필요로 하는 건강관리의 기준과 진료의 선택에 전문성을 발휘하는 것이나 같은 이치이다.

사진 연합뉴스 _copyright 에듀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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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전문성 'vs '의사의 전문성'

그러면 환자에 대한 의사의 전문성과 학습자에 대한 교사의 전문성은 유사한 것인가? 신체적-정신적 건강의 유지에 봉사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비중으로 보면 의사는 신체적 건강과 생명의 보호에, 교사는 정신적 성숙과 발달 쪽에 상대적으로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셈이다. 의사는 신체적 생명력을 관리하는 일을 한다면, 교사는 정신적 성장력을 관리하는 것이다. 의사가 관리하는 환자가 신체적 생명체로서 지닌 객관적 조건은 교사가 관리하는 학습자가 정신적 성장체로서 지닌 객관적 조건보다 덜 복잡하다. 의사는 자연과학적 법칙성에 더 많이 의존한다. 의학적 판단의 기준은 교육학적 판단의 기준보다 훨씬 과학적 법칙성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의사는 수요자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교사의 경우보다 도덕적 부담을 덜 느끼게 한다. 그것은 교육서비스가 의료서비스보다 도덕적 책임에 관하여 상대적으로 더 복잡하고, 전문적 판단의 기준과 활동의 지침이 불확실하고 모호하기조차 하기 때문이다. 의사의 판단과 처방에 대하여 고객의 동의를 얻기는 비교적 용이하지만, 교사의 교육적 판단과 문제의 처리에 있어서 반론이나 거부적 반응을 받기는 매우 쉽다. 교육적 가치판단의 기준 자체가 모호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교사는, 의사가 참고하는 각종 검사결과의 지표처럼, 학습자가 결과적으로 보여줄 목표인 “성장된 실체”를 어떤 공식적 형태로 구체화할 수도 없고, 측정가능한 요소들 이외에 수없이 많은 것들을 고려하여 반영하기도 어렵다. 더욱이 교사에게는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실천의 과정에서 범하지 말아야 할 도덕적 규칙이 매우 엄격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육은 일종의 “도덕적 과업”이라고도 한다. 모든 교육행위에서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판단은 도덕적 판단의 부담을 지니게 된다. 일찍, 듀이는 교육에서의 목표는 교육 그 자체에서 결정할 사항이지 외부에서 주어지거나 결정될 것은 아니라고 하였듯이, 교육은 마땅히 그 판단에 있어서 자율적이어야 하며 그 자체의 목표를 결정하는 데 자유로워야 한다. 교육의 기능 바깥에 나가서 외부로부터 목표를 빌려오는 것은 교육의 대의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 개체가 지닌 경험의 요소들 중에는 통일성의 중심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부에도 제대로 기식하지 못하는 것들이 수없이 있다. 인간은 언제나 만족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로 우리는 일상적으로 자신의 습관과 감정과 행동에서 부족함을 말하고 뉘우치고 후회하는 존재로 살고 있다.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개체들은 도덕적으로, 이지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완전한 인격체로 존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적어도 제도적 교육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학습자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구조를 계속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성장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우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의미의 성장은 경험적 요소들이 서로 어울려 통일성을 지니되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면서 더욱 풍요롭고 균형 잡힌 역동성을 유지해 가는 삶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경험구조의 통일성은 적어도 한 인격체를 특징짓는 일관된 특징을 의미하고, 역동성은 환경적 요소들의 변화에 일관되게 주도적으로 적응하는 능력을 뜻한다. 물론 이러한 인격체로서 성장하도록 도우는 전문적 관리자가 교사이다. 교사의 전문성은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학습의 환경, 더욱 직접적으로는 경험의 재구성을 위한 학습의 상황을 관리하는 데 전문적 능력과 도덕성을 발휘하는 데 있다. 그만큼 교사가 하는 일은 사실상 예술가가 작품을 생산하는 활동과 유사한 과업을 수행하는 셈이다.

'국가'와 '교직단체'의 공동과제

교사, 특히 집단적 구성원인 교사가 전문성을 지닌다고 해서, 그들의 교육적 가치관이 통일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보듯이 그들은 특정 정치적 노선에 속하기도 하고, 그들 자신의 권익을 위하여 투쟁의 대열을 형성하기도 한다. 교사 집단 내부에도 교육관의 차이로 인하여 갈등구조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교사들의 전문적 교육관과 학부모의 통속적 교육관의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으며,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세력 등의 교육외적 요소가 작용하여 교육의 장이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러한 혼란은 어느 세력이 교육관의 공식성을 독점하고자 할 때 거기에 저항하는 세력의 반작용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국가적 차원의 공식적 교육관을 이해하는 사고의 폭을 넓혀야 한다. 특히, 독선적 편협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식적 교육관은 교육의 전문가들 사이에는 말할 것도 없고, 수요자층을 포함한 사회 일반의 이해기준이 일반화된 수준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공교육의 일관성이 유지된다. 교육을 통하여 지향하는 가치는 충분한 포괄성을 지녀야 하되, 그 진술은 명백하거나 유권적 해석이 가능할 정도의 진술과 이해의 기반을 제공하여야 한다.

둘째, 발생하는 갈등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민주주의의 원리를 철저하게 공유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조정적 결과에 도달할 수 있도록 사회적-정치적 성숙성을 형성해야 한다. 학교교육은 성장하는 세대에게 민주주의의 이념과 규범과 습관을 충분히 학습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범교과적으로 편성하여야 한다. 민주주의의 이상과 규칙은 특정한 교과, 단지 정치제도에 한정된 내용으로 구성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생활양식으로 이해되는 원리가 모든 교과의 공통된 요건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셋째, 교육의 제도적 프로그램을 다원화하여 다양한 교육관에 따른 선택의 여유를 고려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교육 프로그램의 선택을 위한 폭이 좁으면 특정한 부분에서 교육기회의 상대적 희소성이 발생한다. 그로 인하여 갈등적 상황을 유발하는 분배정의적 문제가 발생하면 고질적인 정치적 쟁점이 생산되고 교육은 정치적 미궁 속에 함몰되어 버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위한 기본적인 가치인 평등의 개념도 획일성의 유지를 의미하기보다는, 국가적, 사회적, 개인적 측면에서 수요의 다양성을 전제로 한 공정한 선택의 원리를 충족시키는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진 연합뉴스  copyright 에듀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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