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과 사회, 어느 쪽이 가치론적으로 우선하는가?

영국의 청교도 이민단을 실은 한 선단(船團)이 1630년에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에 위치한 마사츄세츠(Massachusetts)를 향하여 항해하고 있었다. 그 선단에 속한 아벨라호(the Arbella)에는 후일에 마사추세츠의 초대 총독이 된 윈스롭(John Winthrop)이 함께 승선해 있었다. 당시의 이민단은 신대륙에서 시작할 새로운 공화국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고, 그 분위기에 부응하여 윈스롭은 앞으로 일구어 갈 새로운 청교도 공화국의 생활에 기조가 될 연설(설교)을 하였다. 그는 그 연설에서 세 가지의 중요한 개념을 언급하였다. 첫째, 한 공화국의 구성원들은 각자 서로 다르게 태어났다는 것, 즉 구성원 간에는 “차이”(difference)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들은 모두의 생존을 위하여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 즉 “협동”(cooperation)의 삶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셋째, 공화국은 “정의”(justice)를 실현하는 국가라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민주주의를 말할 때 강조하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그의 연설에서 특별하게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윈스롭이 먼저 개체들은 각기 다른 개체와 구별되는 독특성을 지닌다고 한 것은 바로 사회의 구성원은 다양성을 지닌다는 것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다양성과 차별성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불행의 원인이 된다고 볼 이유는 없다고 하였다. 오히려 그것은 신(神)이 준 무한한 섭리에 속한다.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개체의 독특성과 다양성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각 개체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자신과는 다른 개체, 즉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개체들은 형제적 정의(情意)로써 함께 얽혀 살도록 묶어주는 결속의 힘을 필요로 하고, 그러한 힘은 모든 개체의 각자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하였다.(John Winthrop, “A Model of Christian Charity,” In individualism and Commitment in American Life, ed. Robert Bellah et al. New York: Harper & Row, 1630; 1987. p. 23)

윈스롭이 강조한 바에 의하면, 서로 얽힌 삶의 공동체가 지닌 결속력은, 형식적 제도로서 정해진 사회적 규칙 혹은 법적 질서에서 요구되는 서로의 관계와는 성격상 근본적으로 다르다. 함께 삶을 같이하는 개체적 이웃들은 서로 공동체적 복리를 나누어 가지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이웃의 도움으로 충족시키고, 남은 것은 이웃의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 가진다. 모두는 공동체의 번영이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자신의 크고 작은 희생을 감수하기도 한다. 이러한 공동체의 삶은 단순히 법으로 묶어 놓은 조직체의 삶과는 특징상 다른 것이다.

우리가 흔히 민주주의를 말할 때, 가장 기본적인 가치로 언급하는 자유와 평등의 개념은 윈스롭의 공동체를 특징짓는 이념적 가치의 명시적 언급에서 제외되어 있다. 평등의 개념은 동일성(homogeneity)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누구나를 위하여 신이 모두 동일하도록 창조하였다고 보장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는 의미상 구속이나 통제로부터 벗어나려는 개념이며 공화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60년 이후의 로크(John Locke)는 윈스롭과는 달리 오히려 개인의 재산과 그 보존에 대한 관심을 둔 사상가였다. 윈스롭의 공동체에서는 전향적으로 사회적 복리를 일차적 관심으로 두었으나, 로크는 오히려 자연상태의 인간과 그들의 조직체를 정치적 관심사로 삼았다. 자연상태의 개체들은 자연적인 요소들을 대상으로 하여 자신의 노력을 가함으로써 가치를 생산하고, 생산된 가치를 소유하여 재산을 형성한다. 로크는, 개체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배하려는 절대권력은 타도되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사회적 다수를 위한 통치구조인 정부는 구성원의 생명과 재산과 자유를 보호하는 만큼의 최소 규모만 요구된다고 하였다. 로크의 경우에 국가는 자연상태에 존재하는 독립적 개체들이 구축한 계약적 조직체로 보는 철저한 근대적 정치사상의 특징을 보였다. 그러므로 원천적으로 자연상태에서 연유된 개체들의 인격적 존엄은 자유의 가치를 요구하고, 국가의 형성을 비롯한 사회적 관계의 계약적 상황에서는 평등의 가치가 보장되어야 한다.

윈스롭의 경우에 국가는 형제적 관계로 결속된 공동체인 데 비하여, 로크의 경우는 자유로운 개체들의 계약적 사회를 의미한다. 우선 두 사상가는 모두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지만, 각기 어떤 국가(혹은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에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윈스롭에게는 청교도로 구성된 신세계의 이민자들과 함께 어떤 특징의 공동체를 건설해야 하는가를 구상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고, 그의 사상적 근원은 주로 근대 이전에 이해되었던 기독교적 공동체였다. 반면에 로크는 당시에 자리 잡고 있던 절대권력을 타개하고, 다수의 민중을 위하여 제한된 통치력을 행사하는 최소정부를 구상하였다. 윈스롭은 공동체적 사회를, 그리고 로크는 독립된 개체들로 구성되는 민중의 계약적 사회를 생각하였다.

위의 차이는 사회 혹은 국가가 구성될 때, 그 국가의 구성원들이 국가 속에서 서로 어떤 성격의 관계를 유지하는가를 설명하는 관점에 있어서 극명한 차이를 나타내기도 한다. 대표적인 학설을 들면, 사회적 관계를 설명하는 “유기적 관계”(organic relation)의 이론과 “기계적 관계”(mechanic relation)의 이론이 있다.

유기적 관계설에 의하면, 한 사회 속에 있는 x는 본질적으로 자체의 속성 속에 y와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이해한다면,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에서, 아버지 x는 자식 y가 있기 때문에, 즉 자식과의 관계로 인하여 아버지인 것이다. 자식인 y의 경우도 아버지 x로 인하여 자식이 된다. 이러한 유기적 관계를 “내적 관계”(internal relation)라고도 한다. 즉 x의 속성 속에 y와의 필연적 관계를, 그리고 y의 속성 속에 x와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한 사회의 구성원이 서로 유기적 관계에 있다는 것은 그가 존재하는 목적이나 생존하는 가치나 대인적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서로 속성을 공유하는 특징을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개인적 존재도 독자적 존재가 아니라, 전체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주어진 자유는 전체적 가치의 맥락 속에서 주어진 것이며 개별적으로 주장되는 것이 아니다. 평등의 개념은 전체적 가치에서 부여된 것이며 부여된 만큼의 실현이 가능한 것이다. 내적 관계의 개념이 적용되는 경우는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에서 여러 수준의 사회적 형태로 있을 수 있다. 사회주의적 성격을 띤 국가에서 다소 상대적 차이는 있지만 내적 관계의 사례를 볼 수 있고, 극단적인 경우는 전체주의 국가의 형태가 있다.

기계적 관계설에 의하면, 한 사회 속에 있는 x와 y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로서, 논리적으로나 사실적으로 본래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별개의 존재였다. 그러나 우연적 요인이나 어떤 힘의 작용으로 인하여 서로의 사이에 일종의 관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한 구직자가 광고를 보고 찾아간 업체에 사원이 되는 경우와 같이, 그 관계는 x와 y의 어느 한쪽에서도 자체의 속성 속에 다른 쪽과의 본질적 관계가 주어져 있지 않은 경우이다. 이러한 관계를 달리 “외적 관계”(external relation)라고도 한다. 한 사회의 구성원이 서로 기계적 관계에 있다는 것은 각 개체가 하나의 독립적 존재로서 존엄성과 가치를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사회적 조직(혹은 국가) 속에 구성원이 되는 것은 원리상 사회적 계약에 의해서 성립된 존재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자유주의의 국가들이 이 범주에 속하지만, 역시 국가에 따라서 상대적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자유방임형 국가가 극단적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하나의 단위국가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대체로 유기적 관계의 특징이 강한 순으로 볼 때 전체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의 순으로 볼 수 있고, 기계적 관계의 특징이 강한 순으로 볼 때 그 역순인 자유주의, 사회주의, 전체주의로 그 순서를 둘 수 있다. 그러나 유기적 관계의 경우이든지 기계적 관계의 경우이든지 간에, 하나의 단위국가 속에는 많은 작은 조직들이 존재하고, 여러 조직들은 자체의 생성과 성장의 배경, 조직의 목적과 전통, 구성원의 정체성과 자의식 등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로 상대적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사원이나 교회, 학교나 동호회, 기업체나 군대는 각기 전체를 구성하는 특징에 있어서 다르다. 그리고 한 국가의 내부에 존재하는 여러 구성조직들의 전체적 양상, 예컨대 유기적-기계적 특성의 경향성과 비중은 단위국가 자체의 이념적-전통적 특성에 따라서 하부구조에 상대적인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전형적인 기계적 관계를 특징으로 하는 작은 조직들이 발달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반대로 자유주의 국가에서 강도 높은 유기적 관계의 조직들이 일반화되기는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윈스롭의 경우를 보면, 국가의 구성원은, 로크와 유사하게, 각기 독특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존재라고 하면서 개체적 특성과 정체(正體)를 전제로 함에도 불구하고 전체는 하나의 공동체에서 결속된 관계로 주장하고 있다. 말하자면 개인주의적 특징의 요소들과 집단주의적 성격의 종합적 목표를 두고 있는 셈이다. 이에 비하여 로크는 철저하게 개인주의적 특징의 요소들과 개인주의적 경향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물론 로크의 경우에, 사회적 구성원인 개인들이 지닌 공통된 특징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는 인간 개체들은 모두가 자신의 경험을 합리적으로 조직하고 처리하는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구성원은 그 속성에 있어서 동일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이 공유하는 합리성의 개념이 개체들 간의 관계와 전체의 구성적(관계적) 특징을 결정하는 동인(능력)이기는 하지만, 공동체 혹은 국가를 성립시키는 본질적 동인(목표)이거나 궁극적 가치는 아니다. 단지 모든 구성은 각기 합리적 능력(이성)을 소유한 존재라는 공통성이 있을 뿐이다.

듀이와 민주적 “삶의 양식”

우리는 여기서 유기적 관계와 기계적 관계의 개념적 차별성과 관련성을 논의한 듀이(John Dewey)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듀이를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그는 이미 세계가 급격한 변화를 시작한 19세기의 후반에서 20세기까지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미국의 남북전쟁 시기에 태어나서, 신대륙에 대대적인 이민이 몰려들고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성장하였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진행되었던 시대를 살았으며 핵개발이 시작한 초기에 사망하였다. 지나간 시대에 비교하면, 그야말로 그는 급격한 변화의 시기를 살았던 셈이다.

듀이는 윈스롭과 로크의 차이를 심각한 차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듀이의 경험주의적 자연주의는, 로크의 민주적 사고와 윈스롭의 공동체적 이념이 서로 대립되는 관계에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둘은 함께 설명되는 다른 측면이라고 생각하였다. 듀이는 윈스롭의 근대 이전의 정치이론과 로크의 근대적 이론을 초월하여 그 차이와 관계를 다시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민주주의,” “개인,” “자유,” “평등” 등의 정치철학적 용어들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재규명하고자 하였다.

듀이는, 윈스롭이 타인과 더불어 함께 영위하는 삶을 언급하였듯이, 민주주의란 공동체의 삶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에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는, 민주주의란 단순히 정치제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의 경험을 공유하는 “조직을 이루는 삶의 양식”(mode of associated living)이라고 하였다. “민주주의”는 특별한 헌법이나 법적 체제를 갖춘 정부의 형태에 한정되는 개념이 아니라, 규범적 언어로 말해서,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의 형식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의 민주주의는 실제로 여러 형태로 존재하며, 일정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더욱 발전된 형태로 계속적인 진화를 하는 체제이다.

민주적 공동체는 타인과 더불어 함께하는 생활의 장이므로 자연히 어떤 형태로나 나의 생활과 행동을 부자유스럽게도 한다. 그러나 타인과 더불어 삶을 영위하는 민주적 사회는 성격상 나를 제약하기도 하지만 나를 북돋아 주기도 한다. 즉, 그러한 제약은 나를 위축시키기도 하지만, 오히려 제약 그 자체를 통하여 나를 성장케 하는 경험의 장을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가장 좋은 사회적 조직(혹은 공동체)은 민주적 조직이고, 가장 민주적 조직은 가장 교육적인 조직, 즉 구성원의 모두가 가장 좋은 성장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조직을 의미한다.(Reconstruction in Philosophy, MW 12: pp.185-186)

내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하여 경험하고 참여하는 공동체는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가족이 있고, 이웃이 있고, 친구가 있고, 사업상의 동료가 있고, 취미를 같이하는 모임이 있고, 어떤 이익을 거래하는 상대가 있고, 신앙을 같이하는 신도가 있다. 각각의 조직 혹은 공동체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특정한 차원의 능력이나 취향을 공유하기도 한다. 인간사회의 공동체의 수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종류만큼 존재한다. 내가 관계하는 공동체가 각기 추구하는 가치와 특성과 활동은 바로 나의 인성과 습관과 능력에 영향을 주고, 어떤 의미에서 나의 개성과 인격은 적어도 상당한 부분에 걸쳐 내가 관계하는 모든 조직(공동체)이 추구하는 가치들이 삶의 환경으로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도 또한 그 관계에서 다른 구성인들에게 일종의 환경으로서 영향을 주기도 하는, 이른바 서로 상호작용(interaction)과 “교변작용”(transaction)을 한다.

그러면 개인과 사회의 어느 쪽이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가치론적으로 우선하는가? 아마도 듀이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개인은 공동체적 개인이며, 사회는 개인들의 연합체이다.” 구성원은 각기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적인 물리적(기계적) 요소가 아니며, 연합체(공동체)는 개인들을 하나의 원리로 지배하는 통일된(유기적) 실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공동체를 하나의 원리로 지배하는 실체라고 한다면, 공동체의 부분들 간에 수없이 발생하는 갈등이나 대립의 근원 혹은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다. 하나로서의 통일된 전체 속에 부분들 간의 갈등과 대립은 있을 수 없다. 달리 구성원은 궁극적으로 각기 별개로 존재하는 실체일 뿐이라면, 공동체의 개념 그 자체가 성립할 수 없고, 구성원을 구성원으로 되게 하는 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은 자체로서는 물리적으로 설명되는 독립된 개체이지만, 그 개체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 함께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 속의 실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구성원은 자체의 가치와 존엄을 지닌 존재이지만, 단순한 “원자적 개체”가 아니라,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다른 구성원과의 관계 속에 있는 “사회적 개체”로 이해된다.

듀이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개체와 사회라는 이원론적 개념보다는 개체적 특징과 사회적 관계를 동시에 지니는 공동체적 개념이 함의하는 바의 맥락, 즉 개체와 개체들이 상호작용(혹은 교변작용)하는 상황에서, 개체적-사회적 지력을 다함으로써 구성원과 공동체의 계속적인 성장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양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