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성의 계발과 지도력의 도야
영재교육은 원목(原木)을 찾아서 키우는 것
영재의 궁극적인 능력은 창의력이다
영재교육을 가로막는 두개의 장벽 : 입시 교육과 고정 학제

◆이돈희 전 민사고 교장의 현장생활 보고서

제도적 구조 속에서 보면 영재교육은 비록 초등교육이나 중등교육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일차적으로 그 특징은 복지적 목적이라기보다는 투자적 목적의 제도에 가깝다. 영재(英才)는 사회적 영재이다. 개인의 자격으로 영재가 아니라 사회적 요구에 의해서 영재로 분류된 능력, 적어도 잠재적 능력의 소유자이며, 그들이 받아야 할 교육은 일종의 복지적 제도의 대상이 되는 일반의 보통교육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잠재성을 계발하기 위하여 사회적 투자의 일환으로서 전문적으로 개발된 프로그램에 의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민족사관고등학교는 영재교육기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알려져 있다고 하기보다는 설립 당시에 그렇게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학교에 부임하였을 때의 프로그램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영재교육의 특징보다는 지도자 교육의 특징을 실제로 더욱 강조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영재교육이면서 지도자 교육이고 지도자 교육이면서 영재교육인 것을 동시에 실현하고자 한 것이 본래 설립의 의지인 것 같았다.

그러면 영재성 계발과 지도력 도야는 서로 다른 것인가? 둘은 동시에 겨냥할 수는 없는가? 물론 “영재”라는 말과 “지도자”라는 말이 어떻게 이해되느냐에 따라서 서로 의미가 교차할 수도 있고,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두 개념이 서로 모순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동시에 겨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사고는 영재이면서 동시에 지도자로 키우는 교육을 하고자 한 학교라고 보아야 한다. 영재적 잠재력을 계발하면서 동시에 지도자적 자질을 함께 도야하는 교육을 하고자 한 것이다.

옛날 <맹자(孟子)>에서 나오는 말, 즉 “천하의 영재를 찾아서 교육하는 것은 (군자의) 세 번째 낙(樂)이다”라고 한 말에서의 “영재”는 그야말로 “지도자”라는 말과 일치한다. 당시의 영재란 문사(文士)로서의 잠재적 자질을 소유한 젊은이들을 지칭한 것으로서 훗날 나라에 봉사할 인재를 말한 것이다. 오늘처럼 과학영재, 기술영재, 예술영재, 스포츠영재 등은 그런 고전적 영재의 개념에서는 제외되는 부분이다.

오늘날 영재의 개념은 맹자 때와는 많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영재란 (1) 평균이상의 기본적인 이지적(理知的) 능력을 소유하고, (2) 창의적인 문제해결의 능력을 발휘하며, (3) 수행해야 할 과제에 대한 집착력이 보통보다 강한 사람을 일컫는다. 문학, 예술, 과학, 기술, 스포츠 등 적어도 고도의 기술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이면 그 어느 분야에도 영재가 있을 수 있다.

영재는 단지 문사적 영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민사고가 영재교육을 지향한다고 해서 모든 분야의 영재를 기를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예술영재, 기술영재, 스포츠영재 등은 아예 이 학교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묵시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다. 전통문화의 학습과 심신의 단련을 위하여 예술과 체육의 교육을 일반 고등학교와 같이 정규의 교육과정에 편성하고 있으나, 그것은 지도자적 자질로서 요청된 것이지 그 분야의 영재교육을 위한 것은 아니다.

민사고의 영재교육은 학문적 기초 위에서 발휘되는 이지적 영재성을 계발하는 교육이다. 이러한 영재들이 한국의 정신적-문화적 전통을 마음으로 새기고 몸으로 익혀서 각자가 계발한 영재성을 장차 세계무대에서 발휘하면서 민족과 국가, 뿐만 아니라 인류의 복리를 위해 봉사하는 지도자가 되게 한다는 것, 이것이 민족사관고등학교의 “건학의 이념”이다.

영재교육은 원목(原木)을 찾아서 키우는 것

민족사관고등학교는 이런 기준, 즉 영재성과 지도력이라는 이중적 기준에 의해서 학생선발을 해야 한다. 즉, 영재적 자질과 지도자적 자질을 동시에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성격상 다소 다르기 때문에 학생의 잠재력 중에서 어느 쪽을 더욱 체계적으로 관찰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지도자적 자질은 그 특징이 일차적으로 “길러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잠재적 지도자, 즉 지도력(leadership)을 행사할 수 있는 잠재적 자질을 가진 사람이 있고, 아무리 좋은 환경과 체계적인 훈련을 하더라도 도저히 지도자적 능력을 기를 수 없다고 말할 정도의 사람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말해서 지도자적 자질은 후천적 경험 요인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즉 지도력은 그 특징상 학습되고 길러지는 것이므로, 효율성이 탁월한 체계적 프로그램을 통하여 어떤 목적의 지도자는 상당한 정도로 길러진다는 기대를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교육의 대상을 선발하는 데 있어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나 지도자적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하는 결정적 장애요인을 체계적으로 확인하면 된다.

그러나 영재교육의 대상은 그렇지가 않다. 영재도 후천적으로 계발되는 부분이 적지 않게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으로 인하여 “영재”라고 불린다. 엄격히 말하면 “영재”라는 말은 그 잠재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비록 우수한 능력을 현재 발휘하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잠재된 능력이 보이면 그는 잠재적 영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비록 우수한 능력을 현재 발휘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더욱더 계발할 수 있는 잠재력이 소진된 상태에 있다면 그런 학생은 영재교육의 대상으로는 별로 의미가 없다.

나는 어떤 학부모들의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영재들 중에는 세 부류의 영재, 즉 “잠재적인 영재”, “잘 계발된 영재”, “만들어진 영재”가 있다고 하였다. 물론 만들어진 영재는 엄격한 의미의 영재가 아니다.

첫째, 높은 잠재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나 잘 계발되지 않은 영재가 있다. 가정, 학교, 지역 등의 환경이나 교육의 프로그램이 적절히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재성이 잘 계발되지는 않았으나, 계발의 여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그런 영재가 있다. 학교가 이런 학생을 뽑으면 초기에는 기초능력, 혹은 성취동기의 혼란으로 인하여 교육하기에 힘들 수는 있으나, 궤도에 오르면 교육의 성과를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보여주게 된다.

둘째, 본래 잠재되어 있었던 능력이 적절한 환경과 좋은 프로그램을 통하여 잘 계발된 영재가 있다. 이런 학생들은 학교가 별다른 노력 없이도 가시적인 성과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그 성과는 이 학교의 교육적 노력에 의한 성과는 아니다. 그러므로 학교가 거둔 성과는 그야말로 불로소득(不勞所得)과 같은 성과이다. 대개 경쟁을 통하여 우수한 집단을 선발한 이른바 “명문학교”는 이러한 성과를 특별한 노력 없이 얻고서도 마치 자기네의 교육적 성과인 것처럼 선전하는 것이 보통이다.

셋째, 본래 지닌 잠재성은 탁월한 편에 속하지 않았지만 본인이나 부모나 학교 등의 노력으로 인하여 능력 평가에서 좋은 결과를 보이도록 만들어진 영재가 있다. 이는 엄격한 의미에서 영재는 아니다. 그러나 현재 보여주는 능력 자체는 마치 잘 계발된 영재와 비슷한 수준에 있을 수 있다. 흔히 교사들은 이런 학생도 우수한 학생이라고 말하게 된다. 실제로 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영재는 성장력이 부족하여 시간이 지나면 다른 학생들에 의해서 쉽게 추월당하기도 한다.

잠재적 영재성을 충분히 지닌 원목(原木)의 학생들을 체계적으로 선발하여 잘 자라도록 교육하는 영재학교, 이런 학교는 “명문학교”라는 이름을 듣기가 어려울지 모르나 교육적으로 보면 가장 “좋은 학교”, 즉 교육의 성과를 가장 확실하게 거두고 있는 학교이다. 즉 “순수한” 영재학교이다. 그러나 경쟁적 분위기 속에서 명문학교의 평가를 받고자 하는 대부분의 학교들은 잘 계발된 영재들을 선발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다. 이런 학교도 영재학교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순수성보다는 오히려 화려한 명문지향적 학교로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잘 계발된 영재”와 “만들어진 영재”의 구별이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구별을 어렵게 하는 데는 두 가지의 혼란이 있다. 하나는 영재적 잠재력이 별로 높지 않으나 잘 계발된 영재처럼 길러진 학생들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래 높은 잠재력을 지닌 영재, 실제로 잠재적 영재인데도 불구하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없도록 만들어져버린 학생들이 있다는 것이다. 양쪽은 모두 예컨대 점수따기식의 기계적 학습을 받게 함으로써 그 잠재성의 발견과 계발을 어렵게 만들어 놓은 경우이다. 특히 판별도구에 대비한 선행학습을 심도 있게 해 버린 경우이다. 영재성이 낮은 학생이 높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영재성이 높은 학생이 만들어진 것 같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낼 수 있을 뿐이다. 영재학교라면 충분한 잠재성이 있고 그것이 잘 계발된 영재 혹은 잘 계발되지는 않았으나 잠재적 영재성을 충분히 지닌 원목을 발굴하여 잠재력이 최대한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만들어진 영재를 선발한 학교는 적어도 영재교육에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영재의 궁극적인 능력은 창의력이다

영재교육의 대상을 특징짓는 그 잠재력이란 어떤 잠재력을 의미하는가? 앞서 살펴 보았듯이 “영재”라고 일컬어질 수 있게 하는 기본적 자질로서 평균 이상의 기초능력, 과제에 대한 집착력 등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영재가 영재로서 발휘해야 할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능력은 창의력이다. 영재적 잠재력은 기본적으로 창의성의 잠재력을 말한다.

우리는 흔히 창의력을 말할 때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능력, 당면한 문제상황을 잘 극복하고 해결하는 능력, 기발한 착상의 능력 등을 언급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창의력은 어떤 유형의 것이든지 간에 주어진 문제에 대한 관심과 집착을 통하여 그 문제를 새롭게 해결하는 능력을 뜻한다고 하면 비교적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잠재적 능력을 발견함으로써 영재를 발굴한다는 것은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학생들을 찾아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교육적으로 유의미한 창의력은 잡다한 온갖 종류의 창의력이 아니라, 적어도 (1) 기본적인 이지적 능력에 기초하여 발휘하는 창의력을 뜻하고, (2) 우연적으로 발휘하는 기지나 착상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관심과 집착을 통하여 발휘하는 문제해결력을 뜻하며, (3) 어떤 특정한 행동으로 나타난 우연적 결과라기보다는 하나의 성향으로 지닌 특성을 의미한다.

나는 민사고의 영재교육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의 “쟁점성 문제”를 두고 씨름을 해야 했다. 하나는 창의력이란 사고의 소재 혹은 내용을 초월하여 그 자체로서 계발되는 것인가의 문제이다. 즉 창의력이란 “일반지능”처럼 그것이 발휘되는 내용과 무관하게 소유하는 어떤 성향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의 창의력이 의미하는 바는 그 자체로서 소유하는 특성이기 때문에 과학적 창의력, 예술적 창의력, 기술적 창의력, 전술적 창의력 등 그 어떤 이름의 것이라도 질적으로 같은 종류의 능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만약에 그렇다면, 교육과정은 내용, 즉 정보, 지식, 이론 등을 학습하는 것보다는 창의적 사고의 연습에 집중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과연 그런가? 이것이 우리가 여기서 검토해 봐야 할 질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창의력을 계발하기 위하여, 즉 영재로서 제대로 교육시켜 위대한 과학자, 사상가, 사업가 등으로 길러 나라와 인류에 공헌할 수 있는 인재를 교육하고자 할 때, 어느 정도의 전문적 집중성을 지녀야 하는가이다. 아마도 20세가 넘은 학생들에게 야구를 가르쳐 훌륭한 야구선수로 만든다거나, 성인의 나이에 피아노를 배워 세상을 놀라게 할 피아니스트가 되게 한다는 것은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듯이 영재가 영재로서 그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느 분야의 전문성이 요청될 것이고, 그 전문성은 어느 시기부터 집중적으로 계발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계발의 시기와 범위이다. 말하자면 언제부터 얼마나 넓게, 혹은 얼마나 집중적이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첫 번째의 문제는 일상적 경험의 분석과 반성적 사고를 통해서도 답할 수 있다고 여겨지지만, 두 번째의 문제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영재가 그 잠재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넓게 공부하도록 해야 하느냐, 아니면 좁게 집중적으로 공부하게 해야 하느냐의 문제는 쉽게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집중하는 분야에 따라 차이가 있기도 하고 장기적으로 체계적 관찰과 연구를 요하는 문제이다.

내가 여기서 밝히고자 하는 것은 내용에 관계 없이 창의력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또한 작용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과학적 창의력을 잘 발휘하는 사람이 사회적 문제의 해결에도 그 능력을 반드시 잘 발휘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내용이 다르면 창의력은 발휘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며, 창의력은 내용과 더불어 작용한다는 말이다. 바둑이라는 게임, 적어도 유단자들이 즐기는 바둑이라는 것은 고도의 기본기를 소유하고 있어야 하고 대단한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게임이다. 그러나 바둑의 고단자는 예컨대 수학적 혹은 예술적 창의력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흔히 창의력을 집중적으로 계발하기 위하여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람들 중에는 내용을 지나치게 경시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지적(理知的) 창의력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론, 지식, 정보, 규칙 등의 소재가 주어져야 하고, 그것을 조작할 수 있는 방법, 요령, 기술 등의 도구가 있어야 한다. 창의력을 발휘하자면 그것이 작용하기 위한 도구와 소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텅빈 방안에서는 아무것도 만들어질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조잡한 소재를 기발한 방법으로 다룰 때 발휘되는 창의성이란 창의적일지는 모르나 하찮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고도의 이지적 소재를 탁월한 도구로써 다룰 때 비로소 우리는 유의미한 창의성이 발휘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적, 예술적, 문학적 창의력이 바로 그런 것이다.

창의성을 위한 교육에서 내용 혹은 지식(이론)은 무용하거나 경시해야 할 대상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내용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창의성을 지녔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창의성에 있어서 내용은 필요조건일 뿐이며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런 사람은 박식할 수는 있으나 창의적이지 못한 사람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창의성이 발휘되는 마음의 작용이 없이 단순히 소재로서의 지식, 이론, 정보들로써 마음속을 채우기만 한다는 데 있다. 암기에 의한 지식, 점수따기식 교육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잡다한 지식과 정보들이 차곡히 마음을 채우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방법적 원리에 의해서 활발하게 조작되고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제대로 교육을 받은 상태라고 할 수 있고 창의력 또한 이 과정에서 작용하는 법이다.

그러면 영재적 창의성을 계발하기 위한 교육의 내용, 정보, 지식, 이론 등은 어느 정도의 집중성을 지녀야 하는가? 야구선수로 키우기 위해서 야구만 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야구는 공을 던지고 받고 치고 달리고 하는 동작 이외에 게임의 규칙과 전략과 안목을 필요로 한다. 이에 맞는 체력을 소유해야 하고 야구 장비의 성질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며 경기에 나설 때에는 담력과 용기와 재치 등의 자기 통제력을 소유해야 한다. 야구만이 아니라 경기를 특징으로 하는 스포츠는 대개 이러하다. 적어도 이런 정도의 자질을 구비하는 데도 야구선수로서의 학습의 과제는 적지 않게 많은 셈이다.

혹시 야구를 잘하기 위해서 탁구연습을 많이 하여 순발력을 키우고, 검도나 궁도를 해서 집중력을 높이고, 태권도나 유도를 해서 순간적 대응력을 높인다면 의미가 있는 것인가? 연구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야구선수에게 수학이니 과학이니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교과는 단순히 학생이 야구선수로서가 아니라, 이지적으로 도덕적으로 건강한 시민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교양적 목적으로밖에는 그 의미가 없는 것인가? 아마도 그럴지도 모른다.

야구선수가 그러듯이 수학자가 되고자 하는 학생은 수학만 잘하게 하면 되는 것인가? 야구에서 하는 달리기, 던지기, 치기 등은 다른 스포츠에서도 하듯이, 스포츠는 종목마다에 한정된 기술과 능력이 제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수학도 자연과학, 사회과학, 철학, 기술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문학이나 예술과도 무관하다고 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수학을 잘한다는 것은 수학이라는 독특한 영역에서만 아니라, 관련분야와 공유하는 영역에서도 창의성을 발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약에 수학자로서 통달해야 하는 전문적 영역의 범위가 있다면 교육과정에서 어느 정도로 넓혀져야 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좁은 구역을 정해 놓고 깊게만 파고자 하면 그 깊이는 사실상 한계가 있다. 더욱 깊게 파기 위해서는 구역을 더욱 넓게 해서 파야 한다. 어떻게 넓혀야 하는가? 인접학문으로 그 영계를 넓히는 방법도 있다. 예컨대, 수학 혹은 물리학의 인접학문이라는 것의 전통적 관념이 상당히는 흐려지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 예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말하자면 자연과학의 한 분야는 자연과학이라는 영역에서만 아니라, 사회과학, 인문과학, 예술, 스포츠 등을 인접으로 수용하려는 예상치 못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자연과학에서의 분야별 전문화와 분화현상은 한 분야 내의 전문적 분업의 형태만이 아니고, 인접과학과의 교차와 접변(接變)을 통하여 다시 통합되기도 하고 세분화되기도 하는 모양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과학에서만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다. 여러 분야의 전통적인 학문의 영역들 사이에서 그 벽들이 무너져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학문영역들 간의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통적 영역들 간의 접변으로 인한 재분화를 발생케 하기도 한다. 예컨대, 심리학은 과거에는 인접학문이라고 하면 기초부문에 철학을 들 수 있고, 응용부문에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교육학 등을 들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심리학의 어떤 분야, 예컨대 뇌과학과 관련된 분야는 그것이 자연과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의 구별은 단지 관심의 집중 정도에 따른 구분이지 대상과 방법의 엄격한 경계를 둔 구분은 아니다. 그리고 많은 사회과학적 논의는 철학, 역사학, 문학 등의 인문과학과의 접변에 의한 연구과제들이 증가하고 있다.

영재교육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다소 전문화된 분야를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전문화의 분야가 어느 것이든지 간에 그 범위를 지나치도록 협소하게 규정하면 오히려 영재의 성장을 제한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물론 전문적 집중이 없이 방만하게 이것저것을 섭렵하여 초점을 잃으면 영재적 능력이 충분히 계발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학습범위의 집중과 확대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는 영재의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그러나 어떤 일정한 규칙이 있다기보다는 전문적 분야의 성격에 따라서 그 넓이와 깊이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로는 직관적 판단이나 엄밀한 계산이나 이론적 유추를 통하여 검토할 수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실천적 경험, 특히 장기적 경험을 요하는 성찰의 문제로 여겨진다.

수업의 한 장면

영재교육을 가로막는 두 개의 장벽 : 입시 교육과 고정 학제

민족사관고등학교는 강원도 교육청에 병설 중학교의 설립 인가를 신청한 바 있으나, 시설과 재정에 관련된 몇 가지 이유로 유보된 바가 있다. 왜 병설 중학교를 구상하였는가? 두 가지의 주된 이유가 있다. 하나는 대학입시라는 절박한 상황을 앞에 두고 있는 고등학교에서 영재교육의 프로그램을 제대로 운영하는 데는 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의 학생들도 중학교에서부터 민사고가 맡아서 교육해 왔다면 훨씬 더 영재성이 잘 계발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민사고가 영재교육과 지도자 교육이라는 이중적 특성을 동시에 실현코자 하지만, 두 가지 모두, 특히 영재교육은 심각한 제도적 장벽을 경험하고 있다. 그것은 영재교육을 하는 학교라고는 하지만 민사고도 우리나라의 학제상 3년의 고등학교이고 도리 없이 대학의 진학을 위한 준비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학교가 실질적으로 영재교육을 하고 있고 그러한 성과를 거둔 학교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대학선발정책에서는 어떤 특전이나 고려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소규모의 영재학교는 내신등급 등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국이나 미국의 전통적 사립학교와 문법학교(Grammar School)는 영재교육이니 지도자교육이니 하는 건학이념의 천명 없이 본래가 대학의 준비학교(Preparatory School)로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민사고도 그러한 서양의 사립학교와 유사하게 대학의 준비학교로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지금까지 교육의 성과도 진학의 실적으로 말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나라의 경우에, 어쩌면 외국의 경우에도, 대학의 진학을 준비하는 교육은 영재의 계발을 위한 교육과 상당한 정도로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

내가 민사고에 부임했을 초기에 교사들은 영재교육과 입시교육을 동시에 한다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해결하기 힘든 일로 여겨 갈등을 겪고 있었다. 당장의 입시교육을 위한 효율성은 좋은 점수따기에 있다. 그러나 점수따기식 교육으로는 영재적 잠재력을 계발하는 교육을 효율적으로 하기가 어렵다.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고민도 있었던 셈이다.

학교장인 나는 이렇게 말해 왔다. 우리가 영재교육만 충실하면 진학교육이 부실할 수밖에 없고, 진학교육에만 충실하면 영재교육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지금의 학생들, 영재학생들을 평생토록 데리고 있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 학생들의 영재성을 계발하되 적어도 그 영재성을 계속해서 잘 계발해 줄 수 있는 “특별한” 대학에 보내주는 것 역시 적지 않게 중요하고, 대개는 소위 “명문”이라고 평가 받는 대학들에 속한다. 그러므로 진학교육 역시 영재교육과 무관한 것이 아니며 또한 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매우 어려운 과제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영재교육의 방법과 일관된 진학교육을 함께 감당하는 것이 좋은 방안일 수는 있다.

충실한 영재교육이면서 효율적인 진학교육인 것, 이 말은 사실상 듣기에는 쉬우나 실천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말이다. 대학의 선발제도는 여기서 말하는 영재교육, 거기에다 지도성 교육까지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프로그램을 친절히 고려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영재교육도 일반학제의 전체적 틀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그 체제 속에서 전략을 구상할 수밖에 없다. 일종의 타협이기는 하지만, 철저한 영재교육의 원리를 다소 유보하면서 진학교육의 요구에 적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영재성을 계발하는 교육의 전략으로 반드시 불필요한 일은 아니기도 하다. 왜냐하면, 문제는 학생들을 데리고 가르칠 수 있는 기간이 길어야 3년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최소한 마지막 1년은 학생이나 학교가 입시준비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국내대학의 진학을 계획하는 학생들의 경우는 전쟁에 임하는 자세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초기의 2년을 완전히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그 기간만으로는 영재교육의 원리에 맞는 교육 프로그램을 사실상 제대로 운영하기가 어렵고, 여기에 학부모 측의 압력까지 가해지면 학교의 교육과정은 대학입시의 준비를 위한 모양새를 갖출 수밖에 없다.

중학교는 비교적 대학입시와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영재교육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적어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통하여 6년의 교육과정을 운영하면 영재교육과 대입준비를 더욱 균형 있게 소화해 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웃 일본에서 영재교육을 위한 학교들 중에 초기중등인 중학교와 후기중등인 고등학교를 한 체제로 연계한 “일관중등학교(一貫中等學校)”로 개편한 사례가 있다. 적어도 영재교육을 위해서는 하나의 대안으로 고려해 볼 만도 하다.

만약에 일본의 일관중등학교와 같은 제도가 허용되려면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우리의 학제(學制)가 바뀌어야 한다. 기왕 학제의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교육부와 연구기관의 주변에서 학제의 개편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초등학교를 5년으로 한다든가 고등학교를 4년으로 한다든가 등의 아이디어들이 검토되고 있는 것 같이 들린다. 내가 보기로는 학제에 관한 한, 적어도 두 가지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구태여 현행과 같이 6-3-3-4 제도니, 5-3-4-4 제도니 하는 식으로 학교제도를 규격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미래의 사회, 특히 지식기반사회로 전망되는 미래의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교육연한이 과거처럼 몇 년 몇 년으로 규격화해서 정해져 있으면, 사회적-국가적 차원에서의 인력의 개발에서나, 개인적 차원에서의 자기실현을 위해서 매우 불편하거나 비효율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래의 학교는 산업, 지식, 생활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인하여 획일화된 학교제도는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기가 어려우므로 능률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교육의 제도적 기회도 경직되게 운영될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중앙의 정부가 교육과정의 개발이나 교원공급의 편의 등을 위해서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 등의 수준은 제도적으로 구분해 두되, 구체적인 개별학교는 그 학교의 성격에 따라서, 혹은 설립이념에 따라서, 예컨대 5학년에서 7학년까지, 8학년에서 12학년까지, 혹은 9학년에서 12학년까지의 학교들을 자유롭게 설립할 수 있도록 개방해 둘 필요가 있다. 학교 간의 이동은 이수한 학년을 기준으로 그 가능성을 판정하면 된다. 어떤 초등학교 중에는 4년제도 있고 5년제나 6년제도 있으며, 어떤 중학교 중에는 4년제도 있고 5년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제도는 그 효율성을 점검하기 위하여 경쟁상태에 두면 언젠가는 자연히 가장 효율적인 것으로 혹은 다양한 모양으로 안착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각급학교의 수업연한이 몇 년이어야 하느냐 하는 것보다는 지금의 한 학년도 2학기 제도와 3월 학기제도 등도 개방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의 학기제는 재조정되어야 한다. 해당 학년도의 2학기는 대개 12월말까지 교육과정의 운영이 거의 끝남에도 불구하고 겨울방학 후인 2월의 한 달 동안 학생들을 학교에 허술하게 묶어둔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차라리 2월부터 신학기를 시작하게 하고 여름방학을 연장하든가, 아니면 개별학교로 하여금 방학으로 정한 기간에 여름학기도 운영할 수 있는 여유를 줄 필요도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아마도 미래에도, 학생들의 국가 간 이동이 매우 빈번할 것이고, 국제적 취업구조에도 적응해야 할 것이므로, 매 학년도의 신학기를 3월에 시작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학기제를 국제적 동향에 맞추어 전년의 9월로 앞당기는 방식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외국, 특히 서양의 경우보다 6개월 정도 늦게 취학하고 있다.

요컨대, 미래의 교육은 고정된 제도적 틀로써는 변화에 대응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투자적 목적에 의한 교육계획이거나 복지적 동기에 의한 교육정책이거나 간에, 대학은 말할 것도 없고 고등학교나 중학교에서까지도 학생선발의 규칙, 교육운영의 체제, 교육내용의 조직, 학습활동의 범위를 기계적으로 고정시켜 놓고서 국제적 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경직된 제도가 교육받는 모두에게 충분히 봉사하는 제도가 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태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꺼번에 온갖 것을 고쳐 버릴 수는 없으므로, 국가는 교육의 여러 부문에서 크고 작은 교육적 실험이 가능하도록 국가적 통제의 경직성을 풀고 오히려 이를 지원하는 적극성을 보일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의 교육정책은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사고와 실천의 여지를 허용하기보다는 규격성과 획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통제와 규제가 너무 많은 편이다. 이러한 경직성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자립형 사립학교나 자율형 공립학교를 활용하여 실험적으로 운영하는 대안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