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만 충남대 교육학과 교수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않은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

[논어]학이편 제1장의 첫 구절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되 뇌일 수 있지만, 그 반면에, 또는 그렇기 때문에, 그 의미를 느끼기 어려운 문구이기도 하다. 자신이 공부할 때 느끼는 경험과 이 말 사이에 거리가 있는 탓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괴리감이 현대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보다 [논어]라는 책에 익숙했던 조선의 선비들도 공부하는 과정은 힘들었고, 그만큼 이 구절의 의미를 직접 경험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배우고 때로 익히는 즐거움, 즉 학습의 즐거움은 어느 시대에나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수천년 동안 알고 있었던 이 구절은 그저 책에 쓰여 있는 바람에 불과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준비에 힘들었던 조선의 선비나 입시와 취직공부에 찌들은 현대인들이지만, 그 중에는 학습의 즐거움을 느낀 사람도 있고, 최소한 제대로 된 공부라면 즐거워야 한다는 점은 인정해왔다. 다만 현대인들이 조선의 선비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학습이라는 말을 때로는 중성적으로, 때로는 제한된 의미로 이해함으로써, 학습의 즐거움을 느낄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데에 있다.

근래에 사용되는 자기주도적 학습이나 평생 학습이라는 용어는 대표적인 징표이다. 자기주도적 학습이라는 용어는 중성적, 또는 과학적으로 탐구되는 대상으로서의 학습이라는 말에 자기주도적이라는 관형사를 덧붙인 합성어이다. 또한 평생 학습이라는 용어는 특정 기간에 수행되는 활동으로서의 학습이라는 말에 평생이라는 부가어를 덧붙인 복합어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현대에 사용되는 학습이라는 말의 의미가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서, 부득이하게 만들어 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식어들을 덧붙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이러한 시도는 결국 학습이라는 용어를 보완하는 정도 밖에는 되지 못한다. 어쨌든 중점은 이러한 관형사들이 없는 상태의 학습이라는 것에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조선의 선비들이 생각한 학습이라는 용어는 그 속에 자기주도적이라거나 평생수행해야 할 활동이라거나 하는 의미가 이미 붙박혀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비록 일련의 교육과정이 있기는 했어도, 특정 연령이면 누구나 동일한 방식으로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교육과정은 학습자가 스스로 학습을 진행할 때에 고려할 이정표 같은 것이지, 무차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만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학습에 입문하는 시기, 특정 교과를 이수하는 기간이나 정도가 서로 달랐다. 전통적인 교육기관에서 학습자가 저마다 다른 일정으로 공부를 수행했던 것은 이러한 인식 때문이다. 그런 만큼 학습은 개별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고, 또한 학습의 주도성은 어디까지나 학습자 자신에게 있게 된다.

또한 조선시대에 학습이라는 말 속에는 그것이 평생 동안 진행되는 것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 학습은 이미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간주되고, 죽은 다음에야 끝난다. 심지어 죽은 다음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여전히 ‘학생(學生)’으로 지칭이 된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학습자가 특정 학교에 입학하거나 졸업하는 것이 현대인만큼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실지로 조선시대에는 졸업장 같은 것은 없었다. 특정 시점에 학업을 마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논어]에서 말하는 학습의 즐거움은 학습자가 평생에 걸쳐 자기주도적으로 공부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결과인 셈이다. 이점을 감안하면, 현대인이 조선시대의 선비에 비하여 학습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상대적으로 적어진 셈이다. 자기주도적 학습과 평생 학습이라는 의미를 기본적으로 공유했던 시대에도 학습의 즐거움을 얻기 어려웠는데, 하물며 이러한 인식 자체가 분명하지 않는 현대인들은 말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무엇 때문에 발생했을까? 아마도 여기에는 근대교육 형성과정에서 나타난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근대교육의 패러다임이란 교육을 인간의 권리로 보아 모든 이들에게 교육기회를 개방한다는 데에 중점이 있다. 이러한 관점은 교육사에서 획기적인 변화이지만,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대량교육과 표준화된 교육과정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제한된 조건 하에서 모든 이들에게 교육을 개방하기 위해서는 학교의 대형화와 학급의 과밀화가 나타나고, 그러한 상황에서 학습은 표준화된 방식으로 시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근대교육은 학습의 즐거움을 희생시키면서 ‘모든 이의 교육을’ 성취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매천야록]에 보면, 20세기 초 조선의 학습자층, 즉 유생층 인구가 110만명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추정인구 1,500만 명을 기준으로 한다면 7.3%, 남자만 기준으로 한다면 15%정도이다. 조선시대의 생산력 수준에서 개별화 교육을 유지할 수 있었던 역량이 이 만큼인 셈이다. 그러나 근대교육이 도입된 이후 사태는 급변하여 교육정책의 제1순위가 모든 학령인구에게 학교교육을 제공하는 데로 모아졌다. 그 결과 해방당시의 취학률, 즉 초등교육 43%, 중등교육 2%, 고등교육 0.1% 수준에서 40여년이 지난 시점에는 초중등교육이 공히 100%, 고등교육 80%로 팽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야기되는 복잡한 제반 문제들은 이른바 선진국들의 사례에서 답안을 찾아 해결해 왔다. 이점에서 한국의 근현대는 뒤늦게 근대교육 패러다임을 수용하면서, 숨가쁘게 무언가를 해온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금의 한국교육상황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차원에 이르렀다고 여겨진다. 모든 이에게 학교교육의 기회는 제공되고 있다. 아니 오히려 과도하게 제공되고 있다. 또한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지나치게 공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현대의 한국교육은 문제가 많다고 인식된다. 예전 같으면 선진국에서 모범답안을 찾아 해결했겠지만, 더 이상 다른 나라에서 답안을 찾기도 어렵다. 이점에서 한국의 교육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교육개혁은 이러한 변화에 대처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수많은 정책들이 나타나고 사라져 왔다. 그 하나하나의 성과나 의미는 나름대로 천착[穿鑿]되어야 하겠지만, 현대 한국교육에 무언가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인식은 확산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변화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상황이라면, 이때 한 가지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으로서 학습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근대교육 형성과정에서 부차적인 위치로 전락한 학습의 즐거움을 어떻게 하면 제1 순위로 설정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학습의 즐거움을 살리는 방향에서 교육제도를 재구조화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는 말이다.

이 질문은 교육개혁의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여러 정책적 변수를 파생시키는 핵심적인 질문이다. 조금 과장한다면, 현대 한국교육의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구안하는 데에 화두가 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앞으로 한국 교육이 학습의 즐거움을 되살리면서, 모든 이에게 교육을 제공할 수 있을까? 현대인들의 창의성이 요청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