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만 충남대 교육학과 교수

“고대에는 가(家)마다 숙(塾)을 두고, 당(黨)마다 상(庠)을 두고, 주(州)마다 서(序)를 두고, 국(國)에 학(學)을 두어 교육을 시행했다.”

『예기』의 학기(學記) 편에 나오는 말이다. 요점은 행정단위마다 교육기관을 두어 순차적으로 교육하고 선발하는 체제를 갖추었다는 것인데, 다른 면에서 본다면 이상적인 국가는 이와 같은 체계적인 학교제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때 각 지방(鄕)의 교육기관을 통칭해서 교(校)라 하고, 중앙(國)의 최고교육기관을 학(學)이라고 했다. 오늘날 학교라는 용어의 기원이 이것이다. 이후 유교문화권에서는 여러 왕조가 바뀌었지만, 어느 왕조나 이러한 학교제도의 설치를 천명해왔고, 이점은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행정단위마다 학교를 세워서 일련의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이러한 발상은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학교제도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예기』에는 인용문 바로 앞에 이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군자가 백성을 순화시키고 풍속을 완성시키려면 반드시 학교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백성을 순화시키고 풍속을 완성시키는 것(化民成俗)이 학교의 존재 이유인 셈이다. 이 화민성속이라는 말은 서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군자로 지칭되는 통치자가 백성을 길들이는 정치적인 행위로 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행위를 넘어 인간다운 공동체를 실현하려는 문명적 지향으로 볼 수도 있다. 현대인들은 주로 전자의 관점에서 전통적인 학교를 이해하여, 후자와 같은 해석은 그저 치장에 불과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즉 전통적인 학교는 어떠한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정치 이데올로기를 전수하는 장이며, 특정 권력자를 보좌할 엘리트를 선발하는 장치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이면, 전통적인 학교는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장소로 비쳐지게 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사례들은 이러한 예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전한다. 한 가지 예로 유생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는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을 보자.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성균관 유생들이 거재(居齋)하지 않고 출입이 무상한 세태에 대해서 논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현대인들이라면 학생이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경우, 강제로라도 등교하게 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학칙을 적용해서 퇴학시키면 된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대책은 훌륭한 분을 학교에 모시고 유생들이 이러한 분에게 감화를 받아 자발적으로 학교에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었고, 강제로 학교에 밀어 넣어야 한다는 주장은 거론되지도 않았다.

또한 유생들이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에도 이들의 의견을 강제로 진압 하지 않았다. 유생들의 상소는 반드시 승정원에서 수납하고, 왕은 그에 대해 적절한 답변을 해야 했다. 심지어 유생들이 계속 문제를 삼는다 해도 이들을 처벌하지 않고, 성균관장, 예조판서, 정승이 순차적으로 설득하는 단계를 거쳤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유생과 조정의 의견이 절충되면서 논란이 일단락되는 방식으로 마무리되었다.

전통적인 학교가 권위적인 권력 장치일 뿐이라면, 조선시대의 이러한 조치들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조치들은 당시 조정에서 학교를 특정 권력자의 부속기관으로 보지 않고, 문명수호의 중심기관이라고 인정했다고 보았을 때에야 이해되는 모습이다. 강제로 학교에 밀어 넣는다고 해서 학교에 들어가는 유생이나 힘으로 누른다고 해서 자신의 의견을 꺾는 유생은 이미 학교에서 양성하려는 인재상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 되는 셈이다.

이점에서 『예기』에 제시된 이상적인 학교관은 그저 명목에 그치지 않고, 현실적인 교육정책에 스며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교육정책이 그러한 방향으로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교육정책가들이 이러한 학교의 이념을 존중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근대적인 학교제도를 구축하는 데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훔볼트의 진술은 새삼스러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는 독일이 프랑스군의 침략으로 위기에 봉착하자 학교제도를 재구조화하여 국력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또 그러한 방향으로 교육개혁을 주도한 인물이지만, 그러한 그도 학교, 특히 대학과 국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국가 자체의 이익에 직접 관계되는 어떤 것도 대학에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국가는, 대학이 그 고유의 기능을 수행할 때 국가의 목적에 이바지할 뿐만 아니라 … 국가가 가동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동력과 자원을 가동할 여유를 가지고 국가의 목적을 무한히 높은 차원에서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윌리암 보이드, 서양교육사, p.410.)

훔볼트가 말하는 대학의 고유한 기능이란 진리탐구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말은 국가가 대학의 고유한 기능, 즉 진리탐구의 기능을 최대한 존중하도록 촉구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이점에서 훔볼트의 진술은, 비록 표현은 다르지만, 조선시대에 교육정책가들이 성균관의 문명수호의 기능을 존중하면서 교육정책을 시행하려 했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진리탐구나 문명수호라는 말을 그저 지나 버린 시대의 낡은 이념으로 간주하기 쉽다. 근대교육이 도입된 이후 미래 사회의 필요에 맞추어 학교교육을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실지로 이른바 근대교육 정책은 취학인구·산업별동향·취업수요의 변화 등을 예측하고, 이에 따라 학제를 개편하거나 교육과정을 바꾸면서 학교교육의 사회적 적합성을 높여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학교의 존재 이유를 이처럼 일방적으로 미래 사회를 기준으로 설정할 필요는 없다. 아니 미래 사회의 필요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학교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미래 사회는 불확정성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그만큼 현 세대의 창조적인 대처능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적인 능력은 이른바 맞춤형 교육, 그것도 잘못 예측될 수밖에 없는 맞춤형 교육에 의해서는 형성되지 않는다. 맞춤형 교육이라는 것은 주어진 틀 내에서의 숙련도를 향상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는 반면에, 창조적 능력이라는 것은 틀 자체를 바꾸고 새로운 룰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능력을 어느 다른 사람이나 기관이 미리 확정해서 세부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 직접적으로 함양시킬 수 없다는 데에 난점이 있다. 그러한 능력이 미리 확인되고 전수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창조적인 능력이 아니다. 따라서 창조성을 함양하기 위해서라도 현재와 같은 맞춤형 교육관은 지양될 필요가 생긴다.

이때 학교의 본래적 기능이라는 문제가 다시 화두로 떠오르게 된다. ‘미래 사회의 필요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있으면서도 결과적으로 미래사회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능력, 창조성과 같은 능력은 어떻게 함양될 수 있는가? 학교가 아닌 외부 기관에서 그러한 능력을 규정하거나 요구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이 연이어 제기되는데, 이 질문들은 현대 사회에서의 학교의 존재 방식이나 존재 이유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낡은 것으로 간주했던 예전의 학교의 이념들은 어느덧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