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혁규 청주교육대학교 교수

교육자들은 우리의 일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대중문화에 대해 매우 낮은 이해 수준에 머물고 있다. 교육자들이 대중문화에 관심이 없고 무지하다 보니 대중문화가 학교교육의 소재로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청소년들은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교육적 경험을 제도교육으로부터 너무 적게 제공받고 있다. 학교 문화를 혁신하고 대중문화에 대한 올바른 학습의 경험을 학습자에게 제공하여 학습자들이 능동적 문화인이 되도록 조력해야 한다.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은 교육자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

“사회학자도 텔레비전을 봐야 할까요? 사적인 개인으로서 뿐 아니라 사회학자로서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사회학자는 텔레비전에서 무엇을, 그리고 왜 봐야 할까요? 텔레비전 시청은 사회학자가 해야 할 중요한 임무 중에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 삶의 상당한 시간을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세계 속에서 보냅니다. 그들은 또한 대부분의 지식을 텔레비전에서 얻지요. 오늘날 사회학의 중요한 연구 대상인 생활세계와 사회학적 메시지의 중요한 타깃은 온라인 텔레비전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없애버린다면 사실상 충분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 시청을 거부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인간 경험 중 증가하고 있고 주목할 가치가 있는 부분들에 등을 진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회학자는 자신의 미학적 선호나 오락 취향이 아니라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어떤 것을 텔레비전에서 볼지 선택하여서 합니다.”

지금 인용한 내용은 세계적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화를 기록한 《사회학의 쓸모》라는 책에 적혀 있는 하나의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다(지그문트 바우만, 2015, 236쪽). 「대중문화와 학교교육의 과제」라는 글을 쓰면서 이 글을 인용하는 이유는 교육 실천가나 교육학자에게도 유사한 질문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이다.

예컨대, 이렇게 물어보자.

“교육(학)자도 대중문화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사적인 개인으로서 뿐 만 아니라 교육(학)자로서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교육(학)자는 대중문화에서 무엇을, 그리고 왜 봐야 할까요?”

그리고 아마 바우만의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이에 대해 답한다면 다음과 같이 답해야 하지 않을까?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교육(학)자가 해야 할 중요한 임무 중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의 상당한 부분을 대중문화가 보여주는 세계 속에서 보냅니다. 그들은 또한 대부분의 지식을 대중문화 속에서 얻지요.

특히, 오늘날 교육의 대상인 청소년의 일상이 대중문화의 엄청난 영향력 하에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대중문화에 대한 진지한 고려와 관심이 없이는 교육의 방향을 올바로 설정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 점에서 교육(학)자는 자신의 미학적 선호나 오락 취향과 관계없이 대중문화 현상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대중문화와 대중문화를 보는 관점

위에서 바우만의 글을 인용하여 문답을 해 본 이유는 교육(학)자들이 대중문화에 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성을 환기하기 위함이다. 교육학은 오랫동안 인류의 지적 정수를 엄선하여 다음 세대에 전수해야 한다는 거룩한 소명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 전통적 혹은 정통적 생각은 클래식으로 간주하는 고급문화에 대한 편향적인 애정으로 나타났다.

그로 인해서 교육계는 청소년을 포함하여 현대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대중문화에 대해 긴요한 관심을 기울이는 데 실패하고 있다. 교육(학)자들은 우리의 일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대중문화에 대해 매우 낮은 이해 수준에 머물고 있다.

교육(학)자들이 대중문화에 관심이 없고 무지하다 보니 대중문화가 학교교육의 소재로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청소년들은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교육적 경험을 제도교육으로부터 너무 적게 제공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교육계의 대중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무관심은 어디에서 기원할까?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양분하여 후자를 전자에 비해서 열등하게 보는 엘리트주의적 관점에서 유래한다.

사실 대중문화라는 말 자체에 그런 뉘앙스가 내재되어 있었다. 대중문화라는 말은 유럽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중문화 즉, ‘매스 컬처(Mass Culture)’라는 용어는 독일어 ‘마스(Mass)’와 문화를 의미하는 ‘쿨투르(Kulture)’라는 말의 복합어이다. 이때 마스(Mass)는 일반적으로 유럽사회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계층을 지칭하는 의미였다. 여기서 대중이라는 말에는 주체성을 지니지 못하고 비합리적이며 열등한 집단이라는 경멸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서구 학계에서는 매스 컬처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경멸적인 대중의 개념 대신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함의를 지닌 대중성(The Popular)의 개념을 써서 ‘파퓰러 컬처(Popular Culture)’라는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한다. ‘파퓰러 컬처’라고 할 때 대중문화는 ‘다수의 사람들이 향유하는 문화’라는 의미에 가깝다(김창남, 2010, 34쪽).

그렇다면 우리의 교육적 실천과 관련하여 대중문화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옳을까? 해당 분야의 연구자들이 대중문화를 보는 다양한 관점들을 개발해 왔는데 여기서는 세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이도흠 외, 2003/ 김창남, 2010/ 강명구, 1993).

첫째는 대중문화에 대한 엘리트주의적 비판론이다. 이 관점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구분하며 대중문화의 통속성을 비판한다. 고급문화는 인간 사고와 표현의 정수이며 많은 예술가들의 혼신의 노력의 결과물인데 비하여 대중문화는 말초 신경적이고 저속하며 야만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전음악은 인간의 정서를 고양하고 인격을 도야하며 사회를 순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지만 대중음악은 섹스, 욕망, 사랑 등 감각적 만족감만을 제공하고 사람들을 타락의 길로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 대중문화가 대중의 교양을 고양시키고 문화의 민주화에 기여한다는 대중문화 옹호론자들의 입장이다. 현대 사회는 여러 취향 문화로 형성되어 있으며 각 취향 문화는 고유의 예술 형태와 심미적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급한 것이든 저급한 것이든 모두 동등한 존재가치가 있고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클래식이냐 대중음악이냐 하는 문제는 호프집에서 생맥주를 선택하거나 병맥주를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자의 취향의 차이일 뿐 어느 쪽이 더 수준이 높거나 더 미학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이 두 가지 입장은 대중문화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과 긍정적인 입장으로 대립되지만 대중문화를 대중예술로 좁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이 있다. 즉, 대중문화를 문학, 음악, 미술 등 주로 예술적 차원으로 좁게 정의하여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고급 예술과 그 미적 가치의 차이를 따지는 차원에 머물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입장은 오늘날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광범위한 삶의 양식으로서 대중문화를 다루는 시각으로는 불충분해 보인다. 오늘날 대중문화는 예술이라는 좁은 장르에 갇혀 있지 않다.

대중문화는 우리가 아침에 깨어나서 저녁에 잠들기까지 의식적으로 혹은 무심코 접하는 신문, 방송, 출판, 광고, 영화, 인터넷 등 모든 매체에 편만해 있다. 그것은 마치 공기처럼 우리 삶을 감싸고 있다. 대중문화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와 관계없이 현대인들은 대중문화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대중문화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문화 환경이다. 그리고 이런 대중문화는 하나가 아니라 사실은 복수의 문화들이다. 오늘날 대중문화의 생산, 유통, 소비의 과정에는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행위자들이 관여한다. 이것은 대중문화의 생산 과정과 소비 과정 모두에 적용된다.

대중문화의 생산 과정에도 계급, 세대, 성, 인종, 문화적 배경이 다른 생산자들이 서로 상충하고 갈등하는 수많은 문화 텍스트를 생성하며, 대중문화의 소비 과정에 참여하는 행위자들도 각기 다른 욕망과 필요와 취향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문화적 텍스트를 수용하고 해독한다.

이런 현실의 대중문화 현상을 잘 포착해 내고 그 의미를 교육적으로 해독하는 데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응용한 문화 이론이 꽤 유용한 해석 틀이 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이론은 대중문화 영역을 대중을 지배하려는 지배계급과 이에 저항하는 대중이 서로 충돌하는 장으로 이해한다.

그람시는 한 사회 내의 특정 집단이 다른 집단에 대해서 사회적 권위를 행사할 때 물리적 강제력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하였다. 현대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물리적 강제력 외에 피지배계급의 자발적 동의, 즉, 헤게모니를 통해서 지배력을 유지하고 공고히 한다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형성·유지·변화는 이 헤게모니의 확립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대중문화 영역은 지배자의 의도가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영역도 피지배자의 저항이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영역도 아니다. 사회의 서로 상충하는 다양한 이해가 헤게모니를 획득하기 위해서 갈등하고 충돌하는 장이다.

이러한 헤게모니론에 기반을 둔 대중문화 이론은 대중문화를 의미 해석과 정체성 형성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문화적 실천의 장으로 파악하고 이를 역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이것이 대중문화에 대한 세 번째 관점이다.

대중문화와 학교문화의 갈등

앞에서 대중문화가 학교교육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학습자들은 영화, 대중가요, TV 드라마, 웹툰 등에 일상적으로 노출되면서도 그런 문화 텍스트를 생산하는 주체와 생산 과정, 생산된 문화 텍스트 자체의 의미, 그것이 일상생활에서 경험되고 수용되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대중문화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자신들의 일상과 정체성이 형성되고 있으면서도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문해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대중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교육의 부족은 학생들이 대중문화의 객체와 대상이자 수동적인 소비자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할 가능성을 높여준다. 이는 심각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대중문화에 대한 문해력의 결여를 넘어서는 좀 더 큰 문제가 대중문화와 학교교육 사이에 존재한다. 학교교육도 일종의 생활양식으로서 문화라고 볼 때 현재의 학생들은 대중문화와 학교문화라는 이질적인 두 문화 사이에서 살아간다. 문제는 학생들에게 대중문화는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데 반해 학교문화는 진부하고 낡은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두 문화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다. 학교는 권위주의적이고 획일적이며 여전히 입시문화가 지배하고 있다. 학교는 진학을 위해서 현재적 욕구가 유보되어야 하는 공간이다. 학교는 청소년들에게 금지와 억압의 공간이다. 이에 비해 대중문화는 감성적이고 자극적인 문화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대중매체는 주된 문화적 소비자인 청소년의 현재적인 욕망을 자극하며 다양한 이미지와 콘텐츠로 학교에서 소외된 다수의 학생들을 불러들인다. 대중문화는 학교 문화의 규율에 지친 학생들에게 해방의 출구를 제공하는 변화의 공간이다.

학생들은 학교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에 끼어서 다양한 갈등을 경험하면서 나름의 반응을 보인다. 이들의 대중문화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세 가지 유형으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두 문화 중에서 대중문화의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을 배타적으로 선택함으로써 학생이라는 공식적인 정체성을 사실상 포기해 버리는 경우이다. 이들에게 학교문화는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다. 이 부류의 학생들은 오직 대중문화를 탐닉하고 이에 대한 지식으로 무장함으로서 자신의 능력과 규범에 대한 새로운 위상을 모색한다.

둘째, 반대로 학교라는 제도 혹은 조직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만을 내면화하는 학생들이 있다. 이들은 학교에서 요구하고 부여하는 의미체계만을 받아들이는 일명 모범생이다. 이들은 대학입시를 위해서 청소년기를 유예기로 규정하고 하루하루를 참고 견딘다.

셋째, 그 중간에서 이도 저도 아닌 채 양자 사이에 끼어서 때로 대중문화에 집착했다가 때로 학교 문화의 가치 규범을 따르기도 하는 다수의 학생들이 있다.

그런데 대중문화의 위세가 강해지면서 첫 번째 유형의 학생들이 많아질뿐 아니라 이들이 학교에서 훨씬 더 매력적인 학생으로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적 매력도의 관점에서 볼 때 학교가 제공하는 지식, 선생님의 권위, 모범생의 아우라는 대중문화의 공세 속에서 점점 위력을 잃어가고 있다.

학교교육은 대중문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학생들을 대중문화 속에 무방비 상태로 표류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대중문화에 교육적․ 문화적 헤게모니도 점점 빼앗기고 있다. 결론적으로 학교교육의 교육적 기반도 상당한 정도로 잠식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중문화와 학교교육의 과제

대중문화가 학교교육에 던져주는 도전과 관련하여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첫째, 학교교육의 교육력마저 대중문화로 인해 잠식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학교 문화를 혁신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중문화에 의해 그려지는 학교의 이미지는 대부분 부정적인 것 일색이다. 학교가 대중문화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경직되고 패쇄적인 학교 문화를 경험한 많은 대중문화 생산자가 학교를 부정적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그 경험에 공감하는 많은 대중문화 소비자들이 이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부정적 학교 이미지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대중문화가 학교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면 할수록 학교의 교육적 역량은 잠식될 수밖에 없다.

학교문화의 폐쇄성과 경직성이 학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증폭시키고 학생들이 대중문화에 더 탐닉하는 한 원인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볼 때 학교교육의 문화적 매력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학교의 문화적 매력도를 높이자는 것이 대중의 욕망에 부응하자는 의미로 해석되지 않기를 바란다.

학교가 교육 본연의 가치에 기반하여 모든 학생들이 좋은 교육적 성장을 체험할 수 있는 장이 될 때 학교는 대중문화에 대한 수세적 입장에서 벗어나서 좋은 문화를 선도하고 창출할 수 있는 문화 창조의 진지로서 그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학교가 문화적 실천의 거점으로 그 매력을 회복하는 것과 함께 학교 교육이 담당해야 할 또 다른 임무는 대중문화에 대한 올바른 학습의 경험을 학습자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중문화 전체를 전적으로 고급스럽다거나 저질스럽다고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대중문화가 복수의 문화가 경합하는 장이라는 점을 받아들일 때 여전히 좋은 문화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규범적으로 따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점에서 문화의 선택과 소비를 그냥 개인의 취향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태도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대중문화의 대부분이 대규모 자본에 의해서 상업적인 목적으로 대량 생산되고 복제되는 시스템 속에서 대중문화 텍스트가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며 어떤 가치를 생산하는가를 판단하는 성찰적 능력과 태도는 너무도 중요하다.

학교교육은 학습자들에게 대중문화의 생산, 유통, 소비의 전 과정에 대해서 이해하고 성찰할 기회를 풍부하게 제공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학습자들이 능동적인 문화 주체로서 자신의 취향과 선택을 객관적으로 해석하고 더 나은 문화를 생산하는 데 참여하는 능동적 문화인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조력해야 한다.

학교는 좋은 교육을 통해 성숙한 문화 주체를 형성해 낼 수 있는 문화적 헤게모니를 회복해야 할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