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해연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부교수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삶인지, 행복하게 살기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우리는 가끔 던진다. 옛 현인들은 소소하건 화려하건 쾌락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도 하고, 그보다는 절제를 통해 두려움과 고통에서 자유로운 것이 행복이라 논하기도 하였다.

쾌를 추구하는 것이든 평온함을 누리는 것이든, 모두 여전히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이다. 사랑받고 인정받는 기쁨을 위해 일생을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는 좌절과 고통, 불안과 우울감, 때로는 권태나 회의가 밀려오기도 한다. 그래서 욕망을 절제하고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평온한 마음을 가지는 건 또 다른 행복의 조건이다.

그런데 그것이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건 괴로움을 벗어나는 것이건, 원하고 피하는 궁극적인 상태는 모두 감정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부를 잘하고 돈을 많이 벌고 또 예뻐지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떻게 보면, 사랑을 주고받으며, 즐거움과 만족을 유지하고, 두려움이나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조건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공부를 하고 돈을 벌고 외모를 관리하는 데에 비해, 감정 그 자체에 대해서는 막상 아는 것이 많지 않다. 상대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니까 눈물은 불편하다. 사랑과 우애를 유지하는 법, 고통스러운 감정에서 회복되는 법을 어디서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사회 곳곳에서 조절되지 못한 감정문제가 요즘처럼 사회문제로 드러나는 때, 매일매일 경험하고 다루어나가는 감정에 대해 깊은 주의를 기울여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최해연 한국상담대학원대학 부교수

감정 표현의 기술이 부족한 아이들과 어른들

뉴스에는 유난히 불편한 소식들이 많다. 분노를 불특정 대상에 쏟아내는 ‘묻지 마 범죄’는 도를 지나치고, 도로위에서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들 때문에 법이 만들어질 지경이다. 아동-청소년의 행동 및 정서장애 유병률이 심각하게 늘고 있고, 전체 청소년의 1/3이 우울증을 경험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OECD 국가 중 우리나라 청소년에게서만 유독 자살률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냥 걱정거리로 지나칠 일도, 누가 해결해주기를 기다릴 일도 아니다. 생명력 넘칠 시기의 아이들이 불안과 우울로 시달리고 있다. 이는 너무나 경쟁적인 대한민국의 삶과 교육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단상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고속성장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몇 가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개인의 감정적 욕구이다. 예부터 관계성을 중시하는 한국 문화에서는 타인을 배려하고 체면과 공손함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고 억제하는 특성이 있었다.

그러나 공동체가 무너져가고 성과주의가 팽배한 지난 몇십 년 동안 이러한 특성은 건강하지 못한 방향으로 변화한 듯하다. 일이 우선이기 때문에, 일 때문에 바빠서, 일 때문에 지쳐서 한 개인의 감정은 뒷전이 되었다.

공동체의 기능이 와해되면서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살피고, 때로는 훈육하는 기능도 약해졌다. 가족의 응집력도 약해졌고 또래나 학교, 그리고 지역공동체가 공유하는 부분은 점점 줄어들었다. 놀 시간이 없는 아이들은 같이 재미있게 뛰어놀면서 유대감을 쌓고 또 다투기도 하면서 갈등을 해결해가는 법을 배울 기회들을 좀처럼 얻지 못한다. 가족규모가 작아지고 부모가 맞벌이하거나 이혼을 하는 경우, 아이들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조절하는 방법을 더욱 배우지 못한다.

같이 놀면서 욕구나 감정을 조절하는 법이나 타협하고 주장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참지를 못한다. 친구 관계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고 관계가 없으니 이해하려 하기보다 피하고 따돌린다. 친구 관계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고 대인관계에 대한 불안이 많아지고 있지만 어떻게 조절하고 해결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들은 혼자만의 생각 속으로, 게임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교육환경에서 아이들은 꿈꾸기 전에 걱정을 시작하게 한다. 학업에 대한 불안과 좌절감, 남들처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아이들은 공부한다. 과도한 선행학습과 치열한 경쟁속에서 극심한 불안을 공부의 동력으로 사용한다.

잘하다가도 미끄러지면 회복이 어렵다. 불안감을 조절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배움과 성장이 경쟁과 입시로 대체된 곳에서 밀려오는 불안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학업과 진학이 우선되고 중요한 사항들을 부모들이 결정하는 상황에서는 아이들은 스스로의 마음을 살펴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분해내는 경험을 하기가 어렵다.

좋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뛰며 정말 하고싶은 느낌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어느 정도가 싫어도 참고할 수 있는 것인지, 진심으로 거부해야 하는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주장한들 먹히지 않는다는 경험이 몇 번 반복되면,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살피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되고 아이들은 감정과 욕구를 인식하는데 무능해진다.

주위에 마음이 쓰일 때도 무시하는 버릇하면 마음이 보내는 신호에 무감하게 되어 간다. 과잉의 스트레스는 반항과 폭력으로 해소되기도 하며 신체적 폭력은 막아도 언어폭력과 따돌림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런데 어른들도 지쳐있다. 어른들도 좌절된 감정들을 어떻게 조절하고 나누는지 잘 모른다. 2013년 여성가족부 청소년 가정폭력 현황 보고에 따르면 54% 청소년이 정서적, 신체적 가정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 어른이나 아이나 과도한 스트레스를, 극심한 감정적 고통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은 감정을 어떻게 조절하는지를 배우지 못한다.

소통되지 못한 억눌린 감정을 아버지는 술잔 속에서, 아들은 게임 안에서, 쇼핑과 TV 시청 속에서 외로이 삭여져 왔다. 우리나라 모든 아동과 청소년이 감정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 유연하고 건강한 감정적 능력을 지닌 세대 역시 등장한다. 그럼에도 가정환경이 좋건 나쁘건, 감정적 기술이 부족한 아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은 인생을 살아가는 밑거름

감정의 기술 중에서도 감정을 느끼고 이를 조절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하게 매일매일 접하는 감정을 잘 느끼라는 것이 새삼스러울 수 있다. 감정이 올라올 때 잘참아왔는데, 또 조절이라니?

그러나 우리가 감정과 관련하여 나도 모르게 사용하고 있는 방법들을 잘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감정적으로 조금 더 유능해질 수 있다. 감정은 더욱 미묘한 방식으로도 영향을 미친다. 화가 났을 때 잘못한 것만 보이는 것처럼, 부정적인 감정은 우리의 주의력과 사고의 범위를 좁힌다. 문제 상황에서 문제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진화된 결과이다.

그러나 이 진화의 산물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종종 오작동을 한다. 누구나 한순간 욱하는 마음 때문에 손해를 보기도, 사람을 잃기도 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감정을 못 이겨 힘들었던 경험이나 때로는 다른 사람의 지나친 감정적 행동 때문에 불편하고 곤란했던 적도 있을 것이다. 감정 조절이 잘 안되는 것은 생각보다 광범위한 행동들과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감정조절을 잘해야 공부를 잘한다면? 참을성이 있으면 공부를 잘할 것 같지만 학습이나 성취에서는 잘 참는 것 말고도 다양한 조절 과정이 관련된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도 공부를 잘하고 싶을 것이다. 시험이 다가오면 불안해지는데 문제는 불안과 압박감 같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조절하는가이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도 시험을 앞두고 딴짓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딴짓을 하면서 내적 신호, 즉 불안을 느낀다. 그래서 이런 불안을 근본적으로 다룰 방법으로 시험공부를 시작한다. 여기서 차이가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도 시험이 다가오면 해도 안 될 것 같은 막막함이나 또 실망할 부모를 생각하면 미리 불안하다. 그 수준은 공부를 잘하는 아이 이상일 것이다.

그런데 너무 불안하니까 산만해지고 마음을 진정하고 싶으니 우선 게임을 한판 한다. 냉장고를 뒤적이며 먹기도 하고, 다른 친구는 어떤 상태인가 확인을 하기도 한다. 책을 붙들어도 집중이 안 되니 딴생각에 잠시 빠진다. 이 모습을 보는 부모는 속이 탄다. 부모에게 한마디 듣고 나면 자신의 속도 모르고 야단만 치니 억울한 마음이 들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보니 피곤하고 잠이 온다. 결국 잠을 이기지 못하고 준비가 안 된 채로 시험을 본다.

당연히 모르는 문제를 푸는 막막함과 낮은 성적, 이는 또다시 스트레스의 원천이 된다. 이런 식으로 불안이 커지다 보면 좀 더 원시적인 방법인 회피, 합리화, 정당화로 불안을 다룬다. 포기하기도 하고 다른 길을 찾기도 하는데 문제는 다른 길에서도 불안이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기에는 공포, 분노와 같은 일차 정서를 담당하는 편도가 성호르몬의 영향을 받아 강하게 활성화되는 반면 이를 조절할 전두엽은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상태이다 보니 아동기보다 정서조절이 어렵고 충동적인 경향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소년기에 내재화와 외현화를 아우르는 다양한 형태의 심리 행동적 문제가 극적으로 증가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정서조절의 어려움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밑거름이다. 그리고 건강한 발달을 위해서는 대개 다른 사람과 소통이 필요하다.

사람과 사람이 조율하고 소통하여 감정 문제 해결하기

우선 정서조절 능력이 어떻게 발달하는지 살펴보면, 정서조절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수 있다. 갓 태어난 아기는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부모가아기의 감정을 대신 조절해주게 된다.

어머니가 사라지거나 배가 고파서 두렵고 화가 난 아이는 우는 것으로 자신의 상태를 알린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는 어머니는 배고픈 울음소리에는 젖을 먹이고, 놀란 아이는 안아주고 쓰다듬어 진정시킨다. 부모가 아이의 상태에 조율하여 공감하고 필요한 조치를 해주는 것이다. 이를 외부 조절자로서 기능한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이의 상태에 ‘조율’하는 것이다. 아이가 배가 고픈것인지 놀란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도록 아이의 상태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인지적으로 성장하면서 외부에 의지하던 감정 조절은 점차 내면화된다.

넘어져 아프고 화가 난 아이에게 “아무개가 넘어져서 아프구나, 화가났구나” 하며 어루만져 주는 부모의 반응을 통해 아이는 지금의 자기의 상태가 화가 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부모가 “괜찮다” 하며 어루만져주던 누적된 경험으로 자기 혼자서도 괜찮다고 되뇌거나 긴장을 푸는 행동을 하여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적절히 조절할 줄 아는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위로할 줄 알게 된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위로를 주거나, 진정을 시키거나 격려를 하는 등 상황에따라 적절한 반응을 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감정 상태를 잘 알지 못하거나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적응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자신이 화가 난지 모르는 아이는 엉뚱하게 친구에게 싸움을 걸기도 한다. 친구에게 말을 걸기 두렵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는 일단 숨어버린다. 상대의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를 몰라 멋대로 해석해버린다. 그래서 소통이 어려워진다. 감정을 알고 다룰 줄 모르면, 감정은 골칫거리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감정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는 데는 자신의 감정이 누군가에 의해 ‘조율’되고 ‘소통’되기보다는 문제로 인식된 영향이 크다. 누군가 이들의 감정을 조절해주고 조절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어른들도 잘 몰라서이다. 어른들 역시 감정이 누군가에게 이해되기보다 피하거나 참아야 하는 것으로 배워왔기 때문이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상대를 포용할만한 여력이 없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상대의 감정 표현에 두 가지의 특징적인 반응을 하게 된다. 그 하나는 처벌적 반응이다. 예를 들어 시댁에 다녀와서 아내가 남편에게 힘들다고 하면 “뭐가 힘들어?”, “그게 힘들 일이니?” 또는 “너만 힘드니, 다들 그러고 살아”와 같은 반응들이 사실은 힘들다는 감정 표현에 처벌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내가 힘들다는데 그렇게 말한 것이 잘못한 것처럼 상대가 반응하면 우리는 화가 난다.

내가 분명 힘든데, 상대가 아니라고 한다고 감정이 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를 이해시키려고 감정을 더 세게 표현하게 된다. 반항이나 단절도 같은 맥락이다. 알아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반응은 많은 경우 더 갈등을 심화시킨다. 또 다른 반응은 전환반응이다. 나쁜 기분을 빠르게 바꾸기를 요구하는 반응이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부당한 일에 화가 나거나 상심했을 때 “괜찮아, 별것 아니야”, “생각해서 뭐해? 빨리 잊어”라는 반응들이다. 이런 반응은 때로는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상대가 감정을 무마하기 위해 농담을 하며 장난을 치거나, 강아지가 죽어 슬퍼하면 다음 날 다른 강아지를 사주어 기분을 풀어주려 하는 것이다.

좋은 의도에서 나오는 행동이지만 사실 이런 행동들은 ‘네가 지금 그렇게 느끼는 것은 나빠. 그러니까 더 이상 느끼지 마’라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다고 말했지만 뭐가 힘드냐고 말하거나 무조건 괜찮을 것이라 하면, 좀 외로운 마음이 든다.

감정은 표현해도 상대가 받아주지 않으면 상처가 되기도 한다. 점차 표현하기 조심스럽고 혼자 감정을 억누른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감정에도 상대의 감정에도 무감해지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감정을 표현하면 불편해진다. 상대의 감정을 모른척하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로 잘 보이지 않는다.

감정의 문제는 감정을 다루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감정을 이야기하는데 이성적인 접근으로 그럴만한지 아닌지를 판단해주는 것을 상대는 원하지 않는다. 이럴 때는 그냥 ‘그럴만한 일이 있나 보다’, ‘그럴만하다’, ‘그래?’ 하고 가만히 두기만 해도 괜찮다. 여력이 있으면 그럴만한 일이 무엇인지 들어보면서 그럴만한 부분을 느껴보는 것이다.

내 입장을 잠시 내려두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 그 마음을 헤아려보는 것이다. ‘나라면 안 그럴 텐데, 너만 힘든 것이 아니라 나도...’라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의 마음 상태를 궁금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두 대의 악기가 음을 맞추듯 두 사람이 조율되는 것이다.

각자 자신의 이야기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연주를 들으며 서로의 상태를 맞추는 것이다. 충고하지 않아도, 대신 해결해 주지 않아도 된다. 조율,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감정이 소통될 때는 감정의 문제는 신비할 만큼 빠른 회복력을 보이기도 한다.

감정을 느끼는 것은 중요하다. 좋은지 싫은지 느껴야 무엇을 해야 할지도결정할 수 있고, 느껴야 조절할 수 있고, 느껴야 표현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매사에 감정에만 예민하게 집중하거나 일일이 다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미열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열이 난다는 것은 면역기능이 떨어졌고 몸이 피로해져 있다는 이상 신호이다. 열이 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주의를 기술여야 몸의 신호에 따라 비타민도 먹고 잠도 많이 자고 적절한 대처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몸의 신호를 하찮게 여기며 무시해버린다면, 우리는 적절한 대처의 기회를 놓치고 큰 병을 치를 수도 있다.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감정을 제대로 느껴야 적절히 조절도 할 수있다.

있는 것은 없다고 하지 않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 있는 그대로 괜찮은 상태가 건강한 것이다. 매운맛, 신맛, 단맛, 쓴맛, 짠맛 등 다양한 맛들이 삶을 풍요롭게 하듯, 기쁨, 분노, 슬픔, 사랑, 두려움은 우리 삶을 다채롭게 한다.

각각의 감정은 다 제 역할이 있고 나름의 맛이 있다. 다양한 감정을 누릴 수 있고 또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는 삶, 그것이 웰빙이다.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이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 조절하고 또 어떻게 표현할지를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