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중 중앙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현대사회에서 개인, 조직, 심지어 국가도 평가를 받는다. 교육분야에서 '교육평가'는 학생들의 교육 성취를 재는 활동이기도 하고 교육 기회를 학생들에게 적절히 배분하기 위한 절차나 수단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사실상 세계적으로도) 교육은 경쟁의 장이고 경쟁은 평가를 통해 판가름나야 한다. 이때 평가는 물론 공정하고 투명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교육에서 평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에듀인뉴스가 '교육평가를 평가한다'를 주제로 기획시리즈를 마련했다. 전문가들의 교육평가에 대한 진단과 대안 제시부터 좌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준비한 기획에 독자들의 관심을 기대한다.<편집자 주>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수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누구보다도 학생들이 교육 때문에 힘들어한다. 2013년 12월 8일 알자지라(Al Jazeera)는 ‘한국 학생들이 스트레스로 망가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 교육은 정글과 같아요. 경쟁이 엄청나죠. 먹고 먹히는 경쟁” 서울의 한 고등학생의 말도 인용했다. 조사마다 다르긴 하지만, 한 해에 한국 청소년의 15~46%가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자살을 생각하게 하는 요인이 교육만은 물론 아니겠지만, 청소년의 문제인 한, 교육의 영향을 작게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학부모도 교육 문제 때문에 힘들어하기는 학생(자녀) 못지않은 걸 우리는 잘 안다.

자녀가 태어나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어디로 이사해서 어떤 기관에 아이 교육을 맡겨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하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 어떤 시간표와 프로그램으로 방과 후 생활을 관리해야 할지 궁리하고 결정해야 한다.

필요한 정보를 찾아 늘 귀를 쫑긋거려야 하고,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부업까지 해야 하는 지경이라 한다. 교육이 힘들어 아예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한다는 말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 저출산의 원인이 교육에 있다는 진단은 이제 상식이 됐다.

교육의 관건이라 할 교원들도 힘들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교육보다 ‘잡무’에 주력해야 하는 일상이 힘들다고 하고, 진도를 맞추고 수능에 맞추어야 하는 상황에서 수업다운 수업을 꿈꾸는 일은 잊은 지 오래라고 한다.

학생이나 학부모들로부터 존경받을 엄두를 못 내는 건 두말할 나위 없고, 폭력이나 고발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인 상황에 있다고 한다. 전문가나 정책 결정자들은 이런 한국 교육을 비관해온 지 오래다.

학교 교육의 발전을 모색하고 미래 계획(개혁)을 제안했던 보고서들은, 적어도 필자가 찾아 확인할 수 있었던 한에서는, 광복 이후 한 번도 빠짐 없이 ‘한국 교육 이대로는 안 된다’고 진단해왔다.

주입식이며 암기 위주 교육이고 입시 위주 교육이어서 미래가 없고, 사고력과 창의성을 키우지 못하는 교육이어서 국가 경쟁력을 위태롭게 한다고 진단해왔다.

전인교육이나 인성교육에 실패하고 있다고도 지적해왔다. 사람다운 사람, 생각이 깊고 창의적이며 진취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을 배출할 수 있도록, 교육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역설해왔다.

교육평가에 대한 우리의 굳어진 통념

한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달려들어 교육(학교 교육)을 그렇게 힘들게 꾸려가건만, 한국 교육이 개인의 행복을 키워주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국가 미래마저 어둡게 만든다는 건 어찌 된 영문일까?

지난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교육에 관심을 둔 수많은 ‘지성인’들이(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위원회들이) 그 까닭을 논급했고 그 문제 해법을 제안해왔다. 오늘도 여전히 그 문제를 다루게 되는 걸 보면, 그동안의 논의나 제안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묵혀진 난제를 오늘 다시 새삼스럽게 거론하는 게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가 되고 얼마나 더 일리 있는 이야기가 될지, 자신이 서지는 않는다. 이미 됐던 이야기를 조금 돌려 얘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듯도 하고, 많이들 알고 있는 이야기에 불과할 듯도 하다.

이렇게 주뼛거리게 되는데도 굳이 이 글을 쓰는 것은, ‘교육’ 에 대한 우리 사회의(어쩌면 세계적인) 통념에 심각한 흠이 있다고 지적할 이유가 있어 보여서이다. 사회 통념은 일상적인 삶을 위한 ‘지혜’이다. 통념은 일상의 바탕이고 가이드라인이다.

통념은 상식이고 상식대로 살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통념으로 미리 알며, 웬만하면 상식 밖의 짓을 하지 않는다. 통념은 우리에게 안정된 삶의 양식을 준다. 그러나 안정된 삶이 정체된 삶이어선 안 되듯이, 통념도 개정되지 못하고 굳어져서는 안 된다. 통념은 깨져야 하고, 통념이 깨질 때 삶은 미래로 진보하게 된다.

거듭되는 비판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육이 여전한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질곡은 필경 굳어진 통념으로 빚어진 것일 것이다. 여기서 문제 삼으려는 한국 사회의 통념은 ‘교육평가’에 관한 것이다.

교육평가는 학생들의 교육 성취를 재는 활동이기도 하고 교육 기회를 학생들에게 적절히 배분하기 위한 절차나 수단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사실상 세계적으로도) 교육은 경쟁의 장이고 경쟁은 평가를 통해 판가름나야 한다.

이때 평가는 물론 공정하고 투명해야 하는 것이 된다. 평가는 ‘객관적으로’ 누구나 확인할 수 있게 학생들의 우열을 판가름하는 행위이어야 한다. 이런 교육평가의 원칙은 한국 학교 교육에서 철칙이 돼 있는데, 이 철칙을 견고하게 지지하고 있는 게 바로 교육평가에 대한 우리의 통념이다. 이것이 우리 교육을 뒤틀고 있다.

학교 교육은 경쟁 관리 기관

우리나라에서 학교 교육은 경쟁을 관리하는 데 온 노력과 자원을 쏟고 있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어떤 상황을 살아가고 있는지 상상해보자. 매우 이른 시기부터, 그들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리라는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당초 그런 꿈이 없었다면, 주위 어른들이나 친구 또는 사회가 그런 꿈을 갖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사실상 모든 가정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형편이 닿는 대로 대입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을 강구한다.

‘사교육’ 시장은 이런 수요에 부응하여 날로 발달하며, 학교마저도 가정의 원망(願望)에 적극 조응한다. 결국 그 많은 꿈들은 서로 부딪치고 경쟁은 첨예해진다. 과열 경쟁은 자칫 국가적 소동으로 번지기 마련으로, 교육정책은 무엇보다도 소동 없도록 경쟁을 무난히 관리하는 데 역점을 두게 된다.

우리나라 모든 학교가(적어도 같은 급 같은 범주에 속하는 학교라면) 동일한 평가 방식을 적용해야 하고 또 그 평가 결과를 동일한 ‘학교생활기록부’ 양식에 기입해야하기에 이른 것은, 바로 그런 정책 관성이 낳은 결과이다.

전국 모든 학생, 모든 학교에 대해 획일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육 평가와 그 결과 기록은 궁극적으로 교육 경쟁의 정점에서 승패를 판가름하는 대입전형 자료가 된다. 요컨대 한국 학교 교육은 국가 표준의 학교생활기록부 기록들(그리고 그 기록을 위한 표준적인 평가들)로 수렴되는 국가사업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도 학교생활기록과는 또 다른 경로에서 여전히 경쟁을 관리하기 위한 수단에 다름 아니다. 이 시험 역시 고3까지의 교육 성취를 결산하기 위한 것이며, 매우 철저한 보안 속에서 엄정하고 표준적인 절차를 통해, 모든 수험생에게 객관적인 상대 비교가 가능한 점수를 부여하기 위해 시행된다.

대학수학능력시험 관리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는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수능시험 날 ‘비행기를 띄우지 않고 열차를 세운다’고 신기해하는 보도를, 적지 않은 외국 언론 기사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육의 본연에서 벗어난 학교 교육의 평가 학교 교육이 경쟁을 관리하는 데 몰두함에 따라, 한국에서 교육평가는 ① 획일적이고 ② 객관적이며 ③ 상대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① 경쟁은 ‘공평한 기회’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여겨지므로, 모든 학생에게 동일한 평가 방식을 적용하게 되고, ② 경쟁은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여겨지므로, 평가 결과는 누구나 객관적으로 판독하고 수긍할 수 있게 ‘점수’로 나타내져야 하며, ③ 경쟁은 결국 이기고 지는 사람들의 서열로 매듭지어야 하므로, 평가를 통해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성취 수준이 아니라 ‘석차’가 된다.

한국 교육에서 평가가 지니게 된 위 세 가지 속성은 교육의 본연을 원천적으로 망가뜨린다. 그것은 학교 교육을 교육일 수 없게 만들고 있다. ① 획일적일 수밖에 없는 평가 양식은 학생 개개인을 독특하게 배려할 수 없게 만든다.

이 점은 그동안 다양한 우화로 지적돼 왔다. 이를테면 새와 들짐승과 물고기를 달리기 하나만으로 평가해 그들의 가치(성취)를 결정하는 것이 무리한 것처럼, 학생들의 다양한 잠재력(또는 학습 준비도)을 무시하는 평가는 ‘교육’ 평가일 수 없다.

획일적인 평가를 위해 진도를 맞추고 변별력을 구비하려는 관행의 와중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교육적으로 버려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②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이루어지는 평가는 교육의 총체성(integrity)을 해치고 교육(학습)의 과정을 왜곡시킨다. 교육의 결과를 숫자로 드러내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은 천하가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숫자로 드러난 것으로만 교육의 성과를 운위하려는 것이 한국 교육의 현실이다. 객관적으로 잡히지는 않았지만 주관적(질적)으로 포착된 수많은 징후들은, 그 교육적 효용성에도 불구하고 의미 없는 것으로 폐기된다.

결국 점수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게 됨에 따라, 교육의 과정에는 부패와 왜곡이 난무하게 된다. ‘캠벨의 법칙’(Campbell’s Law)이라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듯이, 사회적인 결정을 객관적인(양적인) 지표에만 의존할수록 그 결정(평가)에 관련된 편법과 술수는 늘어만 가게 된다.

교육(학습) 목표가 오직 점수를 높이는 것으로 와전되는 상황에서, 그 득점(교육적) 노력은 진정한 학습의 방향으로 모아지기보다 정답 찾는 요령을 터득하는 데로 모아진다. 이런 현실을 우리는 입시 위주니 주입식이니 하며 비판해온 지 오래다.

③ ‘상대평가’가 교육의 과정을 장악하게 되면 많은 부작용이 일어나지만, 무엇보다도 근본적으로, 교육의 장에서 교육적 관계가 구축될 수 없다. 급우는 물리쳐야 할 경쟁자가 되고 선생님은 심판이 된다. 교육이 상보적이고 호혜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은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선생님의 지도와 안내를 신뢰할 수 있고 급우들과도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때, 교육은 비로소 제 본질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평가의 상황에서 급우는 경쟁 상대여서 견제해야 하고, 선생님은 나를 사정(査定)하는 심판이기에 눈속임도 불사해야 한다. 이런 관계 속에서 참된 교육이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비유컨대, 같은 팀 동료 선수(급우)들은 견제해야 하고 심판(선생님)에게는 당연히 지도나 응원을 요청할 수 없는(코치는 없는) 상황에서, 어떤 선수가 게임을 훌륭하게 치를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맥락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상대평가의 상황이 학교(교사)와 가정의 관계를 상보적이 아닌 적대적인 것이 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학교는 가정과 더불어 학생의 학습을 도와주는 기관이기보다는 학생의 성취 서열을 결정(판정)하는 기관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를테면, 학교가 학생들의 개인차를 감안하여 각각에게 고유한 교육 조치를 취하게 된다면(이것은 교육적으로 매우 바람직한 조치이지만), 상대평가 상황에서 이런 조치는 감사(感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의혹의 대상이 된다.

상대평가를 전제한다면, 개인차를 고려하는 교육적인 조치는 어느 누군가를 더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만드는 편파적인 조치가 되기 때문이다. 가정이(결국 사회가) 학교(교사)에 대해 지니게 되는 불신은 상대평가 상황에서 구조적으로 커지고 견고해질 수밖에 없다.

교육평가는 교육을 위한 것

교육평가는 교육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교육평가는 교육을 근본적으로 훼손하고 있다. 교육과 교육평가의 관계는 본말전도(本末顚倒)의 사태에 있다. 이런 사태는 물론 우리 역사와 전통 그리고 관성이 고착시키고 있다. 우리의 통념이 굳건하게 지지하고 있다.

생존경쟁을 사실상 교육 경쟁으로 대체해 온 전통, 결국 학교가 생존경쟁의 압축장이 되고 학교 교육이 경쟁 관리 기관이 돼버린 역사, 달궈질 대로 달궈지는 교육열의 문화, 점수로 판정하는 배타적인 실력주의(meritocracy)의 신화, 정치적이고 천박한 정책 관성 등이 본말전도의 사태를 정상적인 사태로 받아들이게 만들고 있다.

여기에서는 개인 수준에서의 평가에 대해서만 얘기했지만, 기관이나 지역 그리고 국가(국제) 수준에서의 평가에 대해서도 사실 크게 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평가를 교육보다 앞세우고, 특히 평가를 통해 교육(인간)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고 믿고, 평가로 교육 행위를 향도해야 한다고 여기는 버릇은 걷잡을 수 없이 널리 퍼져 있다. 이런 버릇은 한국에서 특히 완고하여 오랫동안 교육을 망쳐 왔다. 이 고질적인 버릇을 바로잡아야 교육에 제 모습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