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세영 충남대 교육학과 교수

2016년 봄 대한민국 서울, 인류는 알파고에 완패했다. 아마도 훗날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하나의 더 큰 알파고 쇼크로 기억될 것이 틀림없다. 정말 그럴 것인가? 그냥 재미난 구경거리 사건이 아닌 인간의 달 착륙을 가능케 했던 제2의 스푸트니크 쇼크일 것인가? 또 다른 사람들은 2016년에 제4차 산업혁명을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분명치는 않지만, 틀림없이 무언가 큰놈이 다가오고 있으며 어쩌면 지금 내 옆에 와있는데 내가 눈치를 못 채고 있는지 모른다. 도대체 지금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사실은 우리가, 아니 이 글을 쓰는 필자인 나는, 그것을 알 턱이 없으며 안다고 말을 해도 그것은 적어도 거짓말은 아닐지 모르나 틀린 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더욱 우리와 나를 짓누르는 고통은 모르면서도 현재 가진 앎에 기반을 두어 오늘을 살아내야 한다는 시지프스적 부조리이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 나는 그 변화의 총체이며 대표인 ‘그놈’을 하나 생각해 내야 한다. 아마도 그놈은 ‘인공지능’임에 틀림없다.

혹시 이놈이 그 빅뱅 혹은 대폭발이라고 불리는 우주탄생의 그 시점인 특이점 (Singularity)을 만들어내는 방아쇠는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사실 이러한 특이점들은 우주의 역사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거치면서 크고 작은 규모로 있었을 것이며 그때 마다의 방아쇠 또한 크고 작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미증유의 불안함이 바로 그러한 특이점과 방아쇠의 이야기임도 분명하다. 머리를 줴뜯어 생각을 하고 촉각을 곤두세워 얻어낼 수 있는 느낌의 끝에는 결국 컴퓨터라는 놈이 자리 잡고 있음 또한 분명하다.

컴퓨터의 기원이 반세기 전에 앨런 튜링이 만든 암호해독기라고 하든, 그 앨런 튜링이 먹었다던 독 사과를 닮은 스티브 잡스의 애플컴퓨터라고 하든 여하튼 인류는 분명 컴퓨터와의 한판 승부를 하고 있는 중이며 알파고 쇼크 전투에서는 분명 패전하였다.

그런데 전투에서의 일 패가 전쟁에서의 항복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패배감에 빠져들고 있다. 마치 그것은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과정에서 있었던 러다이트 기계파괴운동과 매우 닮아있다.

컴퓨터가 인공지능을 만들고 인공지능이 알파고와 로봇을 만들어서 급기야는 내 일을 모두 빼앗아갈지도 모르는 공포감이 몰려오고 있다. 일만 뺏어 가는 것이 아니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I>에서는 로봇인 데이빗이 마틴에게서 엄마의 사랑까지 빼앗아가는 듯하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은 <AI>의 데이빗이나 <스타워즈>의 귀요미 R2가 아니라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는 터미네이터일 것이라고 모두가 생각한다.

4차 산업혁명의 화두는 분명 이와 같은 공포이다. 그래서 그것에 대비하여 기계와 싸워 이기자는 생각보다는 설마 그럴 리는 없으므로 더욱더 현재적 질서를 고집하려는 방어 기제가 작동한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그렇지 않음을 증언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이와 같은 혁명과 함께 인류의 위대한 역사를 써왔는지 되새겨보아야 한다. 틀림없이 그 안에 돌파구를 만드는 지혜가 담겨있다. 그것이 ‘온고지신’이다.

인류의 커다란 도전이 될 4차 산업혁명

필자가 생각하기로 4차 산업혁명보다 훨씬 폭발력이 컸던 혁명이 적어도 세 차례는 있었다고 본다. 그 첫째는 글자의 발명이었다. 호모사피엔스는 구강과 비강을 구분하여 단순한 짐승의 소리가 아닌 인간의 음성(voice)을 만들어냄으로써 침팬지와 영원한 결별을 했다.

그러나 진정한 인류의 역사가 만들어진 것은 그 음성을 석판과 점토판 그리고 죽편과 패엽에 글자라는 상징미디어로 바꾸어 자식들에게 그리고 이웃들에게 삶의 지혜를 전하기 시작한 이후이다. 알타미라 동굴에 그린 벽화보다는 수메르 점토판에 써 놓은 길가메시 설화가 선조들의 삶을 기억하고 후손들에게 새로운 삶을 만들어 전하는 혁명적 기술이었다.

우리는 이를 1차 산업혁명이라고 명명해야 한다. 그것은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구분점이었으며 가히 인류사의 첫 번째 특이점이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피라미드를 만들었고 수메르의 쐐기문자는 함무라비 법전을 만들었고 인더스 강의 산스크릿은 철학을 만들고 황허 지역의 갑골문자는 춘추백가를 낳았다.

그리고 마침내 위대한 호머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이라는 대서사시를 기록함으로써 휴머니즘이라는 위대한 정신사가 탄생하였다. 사피엔스로 진화한 지 오만 년이 지나서야 가능한 일이었으며 그 비밀은 순전히 글자였다. 글자를 아는가 모르는가가 문명과 미개를 갈랐다.

두 번째 특이점이자 2차 산업혁명은 이슬람으로 건너온 중국의 종이가 만들어냈다. 종이는 이미 중국과 한국에서 쓰여진지 오래이고 그것이 중국과 한국의 문치 문명을 열었다.

당나라의 정관정요와 조선의 선비문화는 인류의 역사가 칼과 폭력의 전쟁이 아닌 글과 정치의 평화에 기반해야 함을 증명하였다. 마침내 종이는 실크로드를 거쳐 아라비아 상인들에게 전해졌고 마호멧은 하나님의 말씀을 종이 위에 써서 민중들에게 전파하였고 100년도 안 된 짧은 시기에 금은보화로 치장한 서구기독교문명권을 강타했다.

세 번째 특이점 그리고 3차 산업혁명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시작되었다. 십자군 전쟁과 신대륙 발견을 통해 더욱 기고만장해진 로만가톨릭은 여전히 금은보화로 신을 치장했으며 민중들은 소외되었고 종교개혁의 씨앗은 곳곳에서 싹을 틔웠다.

마침내 마르틴루터의 95개 조 반박문과 독일어 성경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날개 삼아 전 유럽을 강타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책의 시대를 열었고, 책은 신학을 넘어 베토벤의 악보를 보급시켰고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유포시켰고 급기야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시대를 열었다.

그 책은 아직도 가장 강력한 인류의 기술이며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간의 차이는 천국과 지옥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우리는 이를 문해자와 문맹자로 구분하여 국제사회는 매일매일 글을 못 읽는 어린이들을 위해 학교를 열고 선생님을 보내고 책을 나누어주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렇지만 과연 언제 세계 70억 인구가 책을 읽고 그 책 안에 담긴 내용을 같은 뜻으로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을까? 모두가 꿈은 꾸고 있지만 그럴 날이 쉬이 오지는 않을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당장 아프리카의 시골 초등학교 교실을 찾아가 본다고 상상을 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업인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으며, 더 솔직하게는 지금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교실에서 선생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 자는 학생들만 생각해보아도 책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과연 우리는 그 아프리카의 어린이들과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선생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고 꾸지람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우리는 그 학생들이 집이 가난해서, 혹은 학교가 멀어서 공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핑계를 댈 수 있을 것인가?

무언가 새로운 혁명적인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 말로만 하던 사람들이 글을 사용했던 것처럼, 돌에 글을 새기던 사람들이 종이 위에 쓰기 시작했고, 돈 있는 부자들만 가졌던 필사본 책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펭귄북의 시대가 오듯이 무언가 혁명적 변화가 필요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리고 사실은 우리가 기다리는 사이에 슬그머니 그러나 갑작스럽게 제4의 혁명이 찾아왔다. 그것은 글과 종이와 인쇄술의 합작품인 책을 뛰어넘는 컴퓨터 기술이다. 디지털, ICT, 소프트웨어, 스마트 등등 온갖 이름들이 우리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들은 컴퓨터라는 기계이다.

그런데 그 기계의 심연에 인공지능이라는 사람의 뇌와 너무나도 비슷한 뇌가 자리 잡고 우리를 갑작스러운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겪는 수모와 위험을 감수했듯이 지금 인류는 커다란 도전에 직면해있다.

바둑의 고수 이세돌 기사는 알파고와 어떻게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그동안 셀 수도 없는 바둑의 고수들은 더욱더 열심히 공부하여 세계 최고수가 되어보려고 했으나 이제 그 희망이 사라져버린 느낌이다.

인간으로서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알파고를 이겨낼 수 없는 것 같다. 정말 그렇게 될지는 알파고를 만든 딥 마인드와 구글에서도 답을 내놓지 않고 있으며 한중일 바둑기사단체들에서도 말 을 꺼내지 않고 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둑은 이제 어찌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앞에서 선 인류의 실존적 질문은 바로 이와 같은 종류일 것이다.

4차 산업혁명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스마트교육

그래도 답을 한번 찾아보아야 한다. 2011년 대한민국이 스마트교육이라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명명했던 것도 그러한 답을 찾는 행위의 하나였다고 생각해 본다. 2009년 아이폰 쇼크가 한국 사회를 강타했고 2010년 삼성전자는 스마트폰으로 대응했다.

애플과 삼성전자 간의 특허소송이 세계의 화제가 되었지만 이제 각 각 2016년 각사의 버전 넘버는 세븐(7)으로 수렴했다. OECD의 PISA 테스트 결과가 해마다 발표되고 노키아의 핀란드와 애니콜의 대한민국이 수위를 다투었으며 세계인들은 두 나라를 모두 부러워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속내는 꼭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았으며 남모를 속 사정은 여전했다. 노키아는 스마트폰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고 꼭 노키아 때문은 아니겠지만 이후로 조금씩 PISA 성적도 떨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며 오히려 공부를 비관하여 자살하는 학생들의 숫자가 늘고 학교폭력은 극에 달했다. 어른들은 자녀들의 스마트폰과 게임 중독을 걱정하기 시작했으나 아이들의 손에 쥐어지는 스마트폰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물론 이는 어린 청소년들만이 아닌 어른들과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마찬가지였다. 온 사회가 스마트폰에 사로잡혀가기 시작한 것은 분명 2010년 이후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알파고에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다.

스마트교육은 어쩌면 이런 충격을 미연에 방지해보고자 했던 시도였을 것이다. 이제는 지나버린 해이지만 2015년까지는 모든 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 스마트패드와 디지털 교과서를 사용할 수 있기를 기대했고 학교를 꼭 시간 맞춰 다니는 것이 아닌 온오프라인의 유연한 시간표를 기대했으며 모든 학생들이 획일적인 교육과정을 따르지 않고 각자의 흥미와 적성에 맞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다.

이를 위해 모든 학교와 사회에 스마트교육 환경과 인프라가 갖추어지기를 기대했다. 2015년 5월 송도에 모이기로 예정되었던 유네스코 세계교육포럼에서는 그렇게 변모한 대한민국의 교육이 멋진 쇼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헛꿈이었다. 언젠가는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꿈일지는 모르지만 그건 그냥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꾼 꿈일 뿐이었다. 어른들은 러다이트가 되어 아이들에게서 스마트폰을 수거했다.

페이지 수와 단어 수까지 꼭꼭 동여매진 교과서를 있는 그대로 사진 찍어서 옮겨 놓은듯한 디지털 교과서는 차라리 잘 인쇄된 그림책만도 못했다. 학교 인터넷망은 이런저런 보안상의 이유를 들어 막혀있기 일쑤여서 클라우드환경 구축이라는 정책 문서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송도에 모였던 세계교육지도자들은 대한민국이 왜 스마트교육을 중지해버렸는가 물었고 우리는 그게 아니고 징검돌 다리를 두드리는 마음으로 준비 중이라고 얼버무렸다.

우리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알파고는 열심히 바둑공부를 했고 일본과 중국 등 이웃 나라들은 우리의 스마트교육 정책을 배워갔다. 몇몇 국제보고서들은 이제 대한민국의 교육정보화 수준이 더 이상 세계 최고가 아니며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스마트 기술을 활용하는 수준도 결코 예전처럼 최고가 아니라고 전해오고 있다.

2016년 초 열린 다보스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고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고 나자 대한민국 사회가 다시 냄비끓듯 끓기 시작했다. 여름에는 느닷없이 포켓몬고까지 문을 열고 AR, VR이라는 희한한 놈들도 나타났다.

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이번에도 어김없이 국가와 정부가 나섰다. 인공지능산업을 키우고 스마트 농장과 스마트 도시를 만들겠다고 했다. 2015 개정 교육과정을 만들며 온갖 입씨름을 벌이던 소프트웨어 교육과 코딩 교육 이슈도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이제 학부모들은 코딩학원들에 아이들을 보낼까 말까 고민에 빠져들었다. 전문가들의 공론탁설이나 정부관료들의 복지부동은 이제 그만두어야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학부모들의 이 고민을 들어주어야 하고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스마트폰을 쥐여주어야 한다.

수학 시간에는 코딩도 해보고 국어 시간에는 VR 안경을 쓰고 성춘향과 이도령이 노닐던 광한루에도 나가 보아야 한다. 음악 시간에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과 함께 화상연결교실에서 춤추고 노래해야 하며 기술 시간에는 드론도 날리고 3D 프린터로 멋진 작품을 만들게 해야 한다.

사회 시간에는 포켓몬을 따라 중세도시의 고성을 찾아보고 과학 시간에는 NASA센터 과학자들과 함께 우주여행을 떠나야 한다. 아이들은 컴퓨터가 어떻게 말을 하는지 알게 될 것이고 컴퓨터에게 말을 걸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컴퓨터와 대화를 위해 코딩을 배우고 로봇을 만들고 드론을 날릴 것이다. SNS를 통해 아프리카의 어린이들 과 대한민국의 어린이들이 오늘 학교서 배운 재미난 이야기들을 비디오클립에 태 워 신나게 주고받을 것이다.

노래를 작곡하고 춤을 디자인하여 유튜브에 올리고 강남스타일러가 되기를 꿈꿀 것이다. 4차 산업혁명시대를 살아가야 할 사람들은 우리의 자녀와 청소년과 학생들이다. 학교에서 할 일, 교육이 할 일은 이 주인공들이 미리 그 세상을 살아보게 하는 일이다.

어른들과 선생님들이 가진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음악, 미술, 체육 교과서를 다시 살펴보고 그안에 쓰여진 깨알 같은 글씨들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의 미래 세대들이 그것들로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그들이 매일매일 스마트폰에서 인터넷에서 친구들과 주고받는 이야기들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과감하게 그 차이를 메꿔줘야 한다. 그것이 스마트교육이며, 그것이 4차 산업혁명시대를 살아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