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사업에 실패하고 큰 빚을 진 부부가 어느 도시에서 10명의 자녀를 데리고 숨어 살다가 이 중 7명의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방치하던 사실이 관계 기관에 의해 뒤늦게 드러난 사건이 있었다.

발견 당시에 아이 중 4명은 11~17세가 되기까지 출생신고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중학교를 도중에 그만두고 검정고시에 합격한 첫째가 동생들에게 한글과 셈하기를 가르쳤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막내 2명을 제외한 12~22살의 7남매는 그렇게 서로서로 언니, 오빠를 통해서 배웠다고 한다.

병든 남편을 대신해 아내가 벌어오는 하루 8만 원의 일당이 수입 전부였다. 하지만 직장을 얻어 다른 도시로 옮겨 간 3남매를 제외한 나머지 7명의 아이와 부부는 5평 미만의 비좁은 방에서도 비교적 옷도 깨끗하고 청결한 환경을 유지하며 살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아이들도 대체로 밝고 건강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나는 이 기사를 접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곱 명의 아이들이 학교도 다니지 않고 더군다나 이 중에 출생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는데 이러한 열악한 형편에서 어떻게생존할 수 있었을까? 아니 생존뿐만 아니라 어떻게 나름대로 가정의 형태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요즘 심심치 않게 드러나는 아동학대 사건을 보면 가정경제의 파탄으로 인한 가정파괴가 그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정은 최악의 결과로 끝맺음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내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던 중 문득 나는 교육복지사업에 몸담았던 때의 경험이 떠올랐다. 당시에 교육부에서는 ‘교육복지투자우선지역 지원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저소득층 자녀들을 비롯해서 교육적으로 취약한 학생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펼쳤었다.

학교를 중심으로 추진된 이 사업에서 교사와 담당자들이 가장 어려워했던 것 중의 하나는 지원을 받는 학생들에게 나타나는 낙인효과였다. 교사들은 낙인효과를 방지하기 위해 취약집단 학생들을 선발할 때도 되도록이면 다른 학생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방법을 동원하였다.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도 취약집단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학생들도 참가시켜서 겉에서 보았을 때 취약집단 학생이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인효과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사업 컨설팅을 위해서 어느 학교를 방문했을 때 나는 한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낙인효과를 상쇄시킬 수 있는방법에 대한 힌트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사와 학생이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 선생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보통 교육복지 프로그램에는 취약집단 학생들만 참여하게 되는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다시 학교와 세상으로부터 배제를 경험하게 되며 따라서 낙인효과가 고착화된다. 그러나 학교에서 학생들의 삶을 지도하고 책임지는 공적 존재인 교사가 그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하게 되면, 학생들은 교사와의 소통과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를 학교 안에서 의미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고 낙인감 대신 자존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나는 교육복지사업의 해묵은 문제를 해결할 한 줄기 빛을 발견할 수 있었고, 나아가 교육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성찰해 볼 수 있었다.

부모와 교사의 사랑과 책임

학생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을 다른 말로 ‘사랑과 책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부모에게는 본능적으로 자식을 아끼고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고자 하는 사랑과 책임의 천부적인 DNA가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교사에게도 학생에 대한 사랑과 책임의 천부적인 DNA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 학생들에 대해 자기도 모르게 사랑과 애정이 생기고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싶고 그들과 이야기하고 싶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아마도 그들을 교사가 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이러한 교사로서의 DNA가 온전히 발현되지 못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자신의 평생의 업으로 삼기 원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 DNA는 살아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믿지 않고서는 학교에서 사람을 길러내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교사는 자기에게 맡겨진 학생에게 사랑과 책임을 주는 사람이다.

앞의 가정의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부부와 10남매는 어떻게 살아올 수 있었을까? 기사를 다시 읽으니 당시 구청관계자는 그 부부가 “어떻게든 아이들을 키워보려 발버둥을 쳤다”라고 말하고 있다. 순간 발버둥이라는 말에 마음이 꽂힌다. 부부의 이 발버둥이야말로 아이들을 향한 사랑과 책임의 원초적 표현이었음이 분명하다.

잠시 상상해보았다. 아마 이 부부는 서로를 사랑하는 부부였고 서로를 책임지려고 하는 부부였을 것이다. 이 사랑과 책임이 자녀들에게로 흘러가고 언니, 오빠들은 다시 동생들에게 사랑과 책임을 흘려보내면서 그렇게 견디며 살아왔을 것이다.

사랑과 책임에는 한계가 없다. 대상을 가리지 않으며 거기에는 어떠한 불순물도 끼어들지 못한다. 그것은 개념상 순수하고 무한하다. 무한 사랑, 무한 책임이다.

과연 나는, 부모와 교사는 이런 의미의 사랑과 책임을 실천할 수 있을까? 이는 무겁고 엄중한 질문이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교사를 성직자로 바라보는 세계에서나 통할 법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용기를 내야 한다는 마음속 작은 외침이 들려온다.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사랑을 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부유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분명히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고 누군가의 책임 안에서 누려왔다.

그 기억들을 떠올리자. 비록 희미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의지하여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고 책임져야 한다. 힘든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이 일은 더더욱 힘들다. 힘들지만 좀 더 힘을 내자. 발버둥을 치자. 요즘 세상에 부모와 교사가 아니고는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고 책임질 사람들이 없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