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만 충남대 교수

하늘의 명으로 부여받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그 본성에 따르는 것이 올바른 길이고, 그 길을 닦아 놓은 것이 교육이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중용》)

최광만 충남대 교육학과 교수

《중용》 첫머리 구절이다. 위로부터 읽으면 하늘, 본성, 길, 교육이 직선으로 이어지면서 교육의 발생 내력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마지막 구절에 대한 주석에 보면, 그 길을 닦아놓은 사람은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실현한 성인(聖人)이고, 그가 닦아 놓은 길로서의 교육이란 예법, 음악, 형벌, 정치(禮樂刑政) 등 모든 문명제도를 포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테제는 그 속에 복잡한 형이상학, 인성론, 제도론 등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이 글처럼 제한된 지면에서 다루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이 테제에서 언급하는 교육이 현대인이 보통 생각하는 교육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고는 할 수 있다.

그런데 교육의 발생 내력을 읽는 방식과는 반대 방향으로, 즉 아래부터 이 구절을 읽으면 그 속에는 교육목적이라 할 만한 주장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교육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여 하늘과 합치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너무 거창해서 아마도 현대인들은 수긍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은 현대인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에도 이러한 설명방식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다른 그리고 보다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 함께 제시되었다. 아마도 백성을 순화하고 풍속을 완성한다(化民成俗)거나 몸을 세워 이름을 날린다(立身揚名)거나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중용》에 제시된 것과 같은 우주적 차원의 교육목적은 이해하지 못해도, 이러한 국가적 차원의 목적이나 개인적 차원의 목적을 통해 교육의 지향점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고 여긴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교육목적을 쉽게 풀이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오해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오해는 화민성속과 같은 설명에서는 비교적 덜 하지만, 입신양명과 같은 표현에서는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오해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입신양명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 원래의 맥락을 되짚을 필요가 있다.

무릇 효(孝)는 덕의 근본이고 교육의 바탕이다. 삼(參)아 다시 앉아 보아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마. 몸과 피부와 터럭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몸을 세워 도를 행하고 이름을 후세에 날림으로써 부모를 빛나게 하는 것(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이 효의 마지막이다. 무릇 효는 부모님 섬기는 데에서 시작하여 임금을 섬기는 데에로 옮아가고 최종적으로는 몸을 세우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다.(《孝經》)   

입신양명이 개인적 차원에서의 교육목적으로 이해된 데에는 이 말이 당시에 가장 강조되었던 ‘효’라는 덕목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는 데에 있다. 효가 덕의 근본이고, 교육의 바탕이라면, 그런데 입신양명이 효의 종착이라면, 몸을 세워 이름을 날리는 일은 내가 공부하는 목적으로서 가장 그럴듯한 말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부여 과정에서 완전한 도착이 일어난다.

우선 본문을 축약하는 과정에서 도착이 나타나고, 다음으로는 공부하는 이유를 숙고하지 않는 데에서 도착이 나타난다.

입신양명의 원래 의미는 인용문처럼 몸을 세워 도를 행하고 이름을 후세에 날림으로써 부모를 영원토록 빛나게 한다는 뜻이다. 즉 몸을 세우는 데에는 도를 행한다는 조건이 들어있고, 이름을 날리는 시점은 살아있을 당시가 아니라 먼 훗날까지 무궁토록이라는 조건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 구절을 입신양명으로 줄이는 과정에서 이러한 조건들은 생략된 채, 무엇을 하든 몸을 세우고 지금 당장에 이름을 날린다는 식으로 이해되었고, 결과적으로 원래의 의미와는 다른, 아니 정반대의 뜻으로 전환되고 말았다.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공부하는 이유를 충분히 숙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이유를 숙고한다는 것은 이 말을 《중용》과 같은 우주적 차원의 목적과 연결지어 해석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몸을 세워 도를 행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름을 현세가 아니라 후대에 떨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만큼 표현은 다르지만, 입신양명은 《중용》에서 제시한 교육목적과 다르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숙고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도의 실천이나 후세의 평가와 같은 전망은 사라지고, 어떻게든 이름을 날리는 입신양명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처럼 교육목적이라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그것도 즉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만 해석할 때 의미의 도착이 일어나기 쉽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조선 시대의 학자들은 교육에 관해 논의할 때, 개인적 수준의 심리적 용어는 가능한 한 언급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오늘날의 학습동기와 같은 개념은 당시의 논의에서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조선 시대의 교육이론에서 학습동기처럼 중요한 요인이 무시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순전한 심리적 움직임으로서가 아니라, 교육목적과 연관된 마음의 움직임으로서 주목했다는 말이다.

이점을 고려할 때, 굳이 오늘날의 학습 동기와 같은 수준의 용어를 찾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입지(立志)일 것이다. 공자가 15세에 뜻을 세워 본격적으로 학습했다는 말이나, 율곡이 뜻을 세 우는 것을 학습의 첫 번째 단계로 설정한 것 등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다음은 입지의 이러한 중층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제 나이 10세에 부형을 모실 때(從父兄) 책상에서 《대학혹문》을 발견하고 격치설(格致說)을 읽었습니다. 비록 자세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마음만은 기뻤습니다. 소주(小註) 가운데 ‘한 톨의 먼지가 일어나거나 가라앉는 데에도, 한 숨결이 나오거나 들어오는 데에도 모두 이 리(理)가 있으니 탐구할 수 있다’(一塵之或起或 伏 一息之或呼或吸 皆有理可究)는 말에 이르러서는 그 기쁨은 더욱 커졌습니다. 비록 당시에는 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 톨의 먼지에도 리가 있다면 리가 없는 물건은 없고, 한숨에도리가 있다면 리가 없는 순간은 없다는 점을 시사 받고 끝까지 탐구하리라 깊이 마음먹었습니다.(《滄溪集》)

인용문은 17세기 후반의 학자 임영(林泳, 1649~1696)이 스승 박세채(朴世 采, 1631~1695)에게 보낸 서신에 실린 한 부분이다. 여기에는 그가 언제 어떠한 계기로, 무슨 감정을 느끼고 무슨 생각을 하면서 공부에 뜻을 세웠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즉 어린 임영은 《대학혹문》의 한 구절을 접하면서, 강렬한 희열을 느낌과 동시에 공부에 관한 지향점을 확실히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입지이다. 이러한 입지는 학습의 어느 한 단계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진행되는 전체 학습 과정에서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임영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이때의 경험은 그의 평생학습사 전체에 걸쳐 있었다.  조선 시대에 사용되던 입지라는 개념이 현대에 동기라는 개념으로 대치된 것이 발전인지 아닌지 필자는 모른다.

다만 조선 시대의 경우를 통해 본다면, 학습에서 동기와 같은 심리적인 측면만 부각시키게 되면, 학습자가 가지게 되는 개인적 수준에서의 교육목적은 그 시대에 비하여 훨씬 도착되기 쉽다는 우려는 가지고 있다.

학습 과정에서 교육목적에 관한 사고가 그만큼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는 쓸데없는 시대착오적인 기우일까? 오늘날의 학습자에게 어린 임영처럼 뜻을 세우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