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만 충남대 교육학과 교수

영조: 백리 정도의 고을을 다스리는 임무도 가볍지 않다. 하물며 경주는 경상도의 큰 고을이라 다른 고을에 비길 바가 아니다. 그대는 승지를 거친 터라 내 고민을 잘 알 것이니, 농사(勸農)·교육(興學)·군사(詰戎) 등 제반 일에 각별히 신경을 쓰기 바란다.

조명봉: 경주는 고도(古都)라서 그 책임이 작지 않습니다.  내려간 다음에 폐단이 있으면 감사와 상의한 후에 보고하겠습니다.

승지가 별도 지시를 읽고, 조명봉은 칠사(七事)를 외웠다.
(<승정원일기> 영조 1년 5월 2일)

조선 시대의 지방관은 임지로 파견되기 전에 왕을 알현하고 해당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수령으로 지켜야 할 주요 사항을 왕 앞에서 외워야 했다. 

인용문에서 경주부윤으로 파견되는 조명봉이 외웠다는 칠사가 그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수령칠사인데, 태종대에 마련한 수령포폄(守令褒貶), 즉 수령의 고과평정기준을 요약한 것이기도 하다. 

그 7가지 주요 사항 가운데 하나가 수명학교(修明學校)라는 조항인데, 이것은 수령에게 해당 지역의 교육에 관한 책임을 지우는 것이면서 동시에 권한도 부여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 수명학교 조항은 이후 조선판 교육자 치제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조선 초기까지는 아직 교육자치라 할 만한 특징이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조선 초기의 수령들은 주로 학교를 건설하고 교육을 지원하는 데에 주력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 수명학교의 세부 내용이 전체 교실 중 수리한 것은 몇 칸인가, 전체 생도 가운데 실제로 공부하는 자는 몇 명인가, 그리고 각 경서마다 몇 사람이나 통(通)했는가 하는 정도만 수록되어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다. 

태종대까지는 아직 향교가 설립되지 않은 지역이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정도의 임무만 부여한 것이다. 더욱이 실질적인 교육은 고을의 규모에 따라 파견된 교수나 훈도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서 지방관의 교육에 관한 권한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6세기부터 지방 교관을 파견하는 정책이 중지되면서부터 수령은 실질적인 교육 업무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보통 이 시기에 교관 파견을 중지한 조치를 지방 교육이 황폐화된 주요 요인으로 해석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이 조치는 중앙에서 현직 관료를 교관으로 파견하는 정책을 중단한다는 것이지 지방의 교육을 내팽개친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지로 이전의 교관 자리를 대신하여 지역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자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학식과 인망을 갖춘 자로서, 훈장 또는 학장이라는 직함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제 수령은 학교를 건립하거나 수리하는 일, 교육의 성과를 보고하는 일 이외에 이들 지방 교사를 임명하는 권한을 함께 가지게 된 것이다. 17세기 중반의 다음과 같은 기록은 이러한 변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여주(驪州) 소속 9개 면의 학장(學長) 가운데… 여주학장 진사 이상신, 죽산학장 생원 허신 두 사람은 진심으로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여 태만함이 없으니 가장 우수합니다.

가르치는 동몽들이 각각 십 수 명이었는데 이들을 평가하니 모두 고강에 능통하였고 그중 5~6명은 제술에서도 연달아 우등을 차지하였습니다.

이 보고는 경기감사가 여주 소속 학장 가운데 우수한 자를 보고하고 그들에 대한 포상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들 학장은 주로 생원이나 진사의 자격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이것은 조선 중기부터 각 지역마다 생원·진사로서 학식과 인망을 갖춘 인사들이 증가하였고 이들을 해당 지역의 교사로 임명하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영조 대에는 경상감사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이 「권학절목」을 제정하여 리(숙사)→면(서원·서당)→군·현(향교)→도(낙육재)로 이어지는 학교체제를 갖추고, 면의 서원․서당에는 면훈장, 군·현의 향교에는 도훈장이 교육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다른 도에서도 발견되는데, 경상도의 낙육재(樂育齋)에 해당되는 기관으로 전라도의 희현당(希顯堂), 평안도의 장도회(長都會), 함경도의 양현당(養賢堂), 황해도의 사황재(思皇齋) 등이 확인되고 아직 자료가 확인되지 않은 지역에서도 비슷한 기관이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이 시기의 지방교육은 각 도 단위로 관찰사의 주관 하에 운영되었음을 보여준다. 일련의 학교체제를 갖추어 각 지역의 교사를 임명하고 매년 춘추에 교생·원생을 평가하였으며, 또한 공도회와 같은 지방 과시(課試)를 직접 주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각 지역의 교육재정은 해당 지역 수령의 책임 하에서 운영되었다. 이처럼 관찰사와 수령의 지역교육에 관한 권한이 확대되면서 수명학교의 조항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영조 대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거관대요(居官大要)》는 일종의 지방관 업무지침서라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교육과 관련된 사항은 학교 11개 조항, 소학강독절목 8개 조항, 거재절목 11개 조항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보면 조선 시대의 지방교육은 초기의 중앙집권적 운영방식에서 점차로 각 도를 단위로하는 교육자치의 운영방식으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방자치의 경향은 개화기에 새로운 학교제도를 모색하는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경상도의 낙육재는 20세시 초까지 운영되다가 경술국치 직전인 1909년 협성학교로 전환되었고 1896년 경상도가 남도와 북도로 분리되면서 경상남도 진주에 새로 설립된 낙육재는 다음 해에 관립학교인 진주낙육고등학교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개화기에 근대교육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각 도 단위로 위기에 대처하는 노력이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강화도 지역에서는 1908년 강화진위대장 이동휘가 주민들과 강화학무회(江華學務會)를 구성하고 지역을 56개 학구로 구분하여 의무교육을 추진하였고 최초의 민간근대학교로 알려진 원산학사 또한 이러한 지방 교육 자치의 전통 속에서 설립될 수 있었다. 

보통 원산학사는 민간인이 세운 학교로 알려졌고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기본적으로 이 학교는 당시 덕원부사 겸 원산감리였던 정현석(鄭顯奭 1817-1800)의 설립 계획과 서북경략사 어윤중(魚允中, 1848-1896), 원산항 통상담당 통리기무아문 주사 승지 정헌시(鄭憲時, 1847- ?)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이러한 사례들은 근대교육을 수용하는 격변기에 조선의 각 지역마다 주체적인 대응노력이 있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국권을 상실한 일제 강점기에도 이어져서 총독부가 ‘실용’과 ‘민도’를 앞세워 조선민의 우민화 정책을 추진하였을 때 각지에서 일어난 학교설립운동의 형태로 계승되었다. 

비록 국권을 상실하여 각 지역의 수령들은 사라졌지만 교육자치의 전통은 강하게 남아 총독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지역민들이 기금을 모금하고 학교설립 청원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조선인 학교를 확대하고자 한 것이다. 

흔히는 현대의 한국 교육자치제도를 외국에서 이식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 기본 모형은 미군정기에 마련된 것으로 파악한다. 

실지로 현대 교육자치법의 모태라 할 수 있는 법령이 군정 말기에 통과되었고 미군정청은 이것을 ‘조선인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유구한 전통을 가진 한국의 교육자치제도가 과연 이런 식으로 규정되어도 충분한지는 의문이다. 

그것은 마치 몸의 치수를 재지 않고 최신 유행복을 입으려는 난센스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혹시 교육자치제와 관련된 여러 논란은 오랫동안 각 지역에서 기울여 온 교육자치의 노력을 간과한 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