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석  이종태 한울고 교장 / 이혜영 한국교육개발원 선임연구위원 /
        정제영 이화여대 교육학과 교수 
진행  조난심 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부원장 
정리  지성배 기자

사회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6-3-3-4의 학기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열린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선 학기 및 학제를 유연하게 변경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습니다. 우선 초등학교 이전 단계부터 개선의 여지가 없을까요?
 
  0∼5세의 유아 교육기에 인성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90% 이상이 발달한다는 뇌 인지 과학 관련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1950년대에 이미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입학 전 적응교육 프로그램(Head-start)’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학교 교육으로는 유아기에서의 교육 차이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합니다. 이러한 현상들만 봐도 유아기의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사회적 양극화가 점차 심화되고 있는 우리나라는 유아기의 평등한 교육적 경험을 위해 국가가 큰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봅니다.

이제는 유 아·초등 교육 쪽으로도 의무교육 제도를 확대해야 할 시기가 된 것 같습니다. 개인들이 운영하는 유아교육기관의 교육을 막지는 않겠지만, 국가가 최저 수준의 유아 교육을 모든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초·중등교육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입니다.

진행과정에 있어서 유아 학교를 할 것인지, 보육을 유치원으로 통합할 것인지,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등의 실질적인 문제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론적으로는 사회적 합의가 도출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혜  유아까지 의무 교육화를 하는 것은 위험성이 있다고 봅니다. 무상 교육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의무 교육으로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의무 교육을 한다는 것은 보통 강한 통제를 수반하기 때문에 무상 교육과 의무 교육은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보육과 교육은 무상으로 해야 하겠지만, 완전히 학교 의무 교육 제도 속에 포함하는 것은 깊이 고민해볼 문제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의무 교육은 3∼5세를 대상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3∼5세 의무 교육이라는 것은 교육 소비자인 학생·학부모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헌법상의 권리를 국민에게 창출해주는 것은 국가에게 책무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국가가 지원해줘야 할 책임을 의무 교육이라고 규정하고 싶습니다. 현재 저소득층에 대한 무상 교육은 전 세계에 걸쳐서 유아뿐만 아니라 초·중·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의도는 좋지만, 의무 교육화하지 않으면 선별적으로 지원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이 박사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획일화와 경직성을 경계하는 차원에서는 저도 공감합니다만, 국가가 의무 교육을 받아야 할 유아에게 교육을 제공할 수 있도록 책무를 강하게 부과한다는 측면에서 의무 교육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종  정 교수님이 의무 교육의 개념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셨는데, 우리나라의 많은 교육관료들은 의무라는 뜻을 국가 강제라는 말과 동일시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 관료들이 유아 교육까지 의무 교육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봅니다. 다만 모든 유아들에게 교육 기회가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는 측면에서 국가가 재정을 전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유아 교육의 확대가 학교 교육과 연계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3∼5세 누리과정의 교육 프로그램을 단순히 읽고 쓰고 셈하는 쪽으로만 구상하다 보니 유아단계에서부터 문자 교육이나 지식 교육을 해야 하는 것처럼 인식할 우려가 있습니다.

유아 시절의 교육은 돌봄이라고 하는 것이 더 큰 목표인데, 초·중등교육과 같은 맥락에서 교육이라는 단어를 연계해 사용하다 보면 아이들을 규율에 맞춰 훈련시키고, 머릿속에 지식을 집어넣는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부분들이 충분히 인식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아 학교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0~2세의 경우에는 엄마가 키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는 여성 노동력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아이들을 공적인 영역으로 데려오려고 하지만 엄마보다 더 따뜻한 가슴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회  유아 교육 분야는 국가의 지원이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데서 오는 학습 결손과 교육적인 격차가 적지 않습니다.

교육계에서는 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생기는 교육적·환경적 격차를 해소하는 데 좀 더 관심을 갖고 지혜를 모아서 유아교육과 보육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보육 문제는 점차 심화되고 있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일본에서 의무출산휴가제를 비정규직까지 확대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봤습니다. 우리나라도 출산휴가·육아휴직 제도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대기업과 공공기관에서만 가능하고, 소기업 이하에서는 활용하기 어렵습니다.

현재는 이러한 제도를 신청하면 무조건 받아주도록 되어 있긴 하지만, 신청 자체를 못하게 만드는 문화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문화는 결국 출산율을 떨어뜨리는 큰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출산을 하면 부모 중에 한 명은 반드시 아이를 기르도록 강제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사유를 제출해서 면하게 하는 방식으로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렇게라도 방법을 찾지 않으면 저출산 문제는 해소하기 어렵습니다.

이종  공감합니다. 한 예로 제 딸이 자기는 모 분유 회사의 제품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분유를 만드는 회사임에도 여직원이 임신을 하면 회사를 못 다니게 한다는 겁니다.

이런 기업가의 인식도 저출산 문제를 개선하는 데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유아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유아를 교육이라고 하는 단어로 접근하기보다는 돌봄 또는 보육, 양육과 같은 개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더구나 요즘은 가정 해체 현상이 점점 심각해져서 유아기에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감안하여, 좀 더 종합적인 복지 차원에서 출산과 양육, 육아 부분의 투자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유아학교와 같은 교육 문제는 그 다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조난심 박사

이혜  우리나라는 유보통합에 대한 갈등이 굉장히 심합니다. 단편적으로 보육 기능을 강화하려고 하면 보육을 담당하는 보건복지부가 나서서 담당해야 하는데 보육 기능 속에 교육 기능도 함께 있고 재정의 문제가 겹치다 보니 교육부와 잘 타협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유보갈등을 해결하고 제도를 정착해 나가는 조치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회  몇 해 전부터 유치원과 보육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나, 갈등이 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보통합의 문제를 어떻게 보시나요? 

  유보통합의 핵심 갈등은 시설, 교사의 자격 등에 대한 규정의 차이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유치원에 비해 보육원(어린이집)의 규정이 느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육으로의 통합을 유치원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육의 자격을 높여서 유치원으로 통합한다고 하면 개인이 경영하는 어린이집이 대부분인 보육계는 엄청난 자금 투자가 필요하기에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어찌 됐든 지금 상황대로 흘러간다면 결국은 어느 쪽으로든 통합이 될 것으로 생각되는데 제도적으로 각종 자격을 낮출 것인가, 아니면 보육원의 자격을 유치원만큼 높일 것인가 하는 것부터 정리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혜  유아 단계에서는 문자로 교육하는 것보다 돌보고 마음껏 뛰어놀게 하는 것이 더욱 좋다고 봅니다. 그런데 교육부는 굳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유치원을 학교로 규정해 관리하고 있고 어린이집을 보육인 것처럼 구분하는데, 사실 현장에서는 누리과정이라는 정책으로 똑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혼 여성이 취업을 많이 하는 현 상황을 반영해 보육지원 기능으로 재조정하고, 그 기능에 맞는 법과 제도, 관할부서를 만들어 내면 되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부처에 맡겨 놓기만 하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식으로 하니까 밑에 있는 담당자들만 싸우는 격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사회  유아 교육 문제를 교육 당사자인 어린이집 단체와 유치원 단체에 너무 일임해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익 단체끼리 붙여 놓으니까 해결방안이 나오질 않 습니다.

‘태어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한 교육을 어떻게 지원해서 제대로 성장하게 만들 것인가’와 같은 제3의 큰 그림을 갖고 목표를 설정해서 접근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리스쿨(pre-school) 단계에 있는 교육 제도를 우리가 근본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에게 이론적으로 보육과 유아 교육의 구조를 그려보라고 한다면, 0∼2세는 부모가 키우되 도저히 돌볼 수 있는 형편이 안 되는 경우에 한해 어린이집이 보육기능을 맡도록 하고, 3∼5세는 돌봄 중심의 유아 교육을 하도록 설계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구조는 기본적으로 정부가 국·공립 유치원을 운영할 수 있는 비용이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사립에서 제공하는 수준의 유아 교육 서비스를 국가에서 제공하려면 많은 재정이 투입되어야 합니다.

제가 의무교육을 주장하면서도, 제도적으로 정착하기에는 어려움이 도처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래서 의무교육을 지향점으로 설정하자는 것입니다. 지향점이 있어야 산적한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회  초·중등 단계에서 교과 교육을 중심으로 한 지식 교육의 틀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할까요? 아니면 인성교육이나 돌봄기능과 같은 것들의 비중이 늘어나야 할까요? 

이종  저는 지식 교육, 교과 교육에 유감이 많습니다. 교과 지식이 교육의 근본이라는 것에 대한 합리적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근대교육사상가로 추앙받는 루소, 페스탈로치의 교육론을 살펴봐도 교과 지식은 나오지 않습니다.

학교 교육의 교과 지식은 근대의 학문들이 대학의 교과와 학과로 자리 잡은 이후에 그대로 베껴온 것입니다. 아이들이 교과 지식을 습득해야 사물을 인식하고 세계를 인식하나요? 그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종합적인 것을 경험 속에서 터득하고, 그 이후에 원리를 깨달아 갑니다. 그런 점에서 교과 지식위주로 되어 있는 현재 교육과정은 전면적으로 폐지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의 아이들은 교과 지식에 관한 한 거의 문맹수준에 가깝습니다. 그렇지만 이 아이들이 평소에 논리를 펼치고 판단을 하는 데 있어서는 일반 학교 아이들에 비해 뒤지지 않습니다.

교과서로 교육하는 것은 수능 점수를 따기 위한 교육에 불과한 것이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본질적으로 필요한 교육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나라는 교과 지식을 근간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교실에서 수업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들도 별로 없지만, 수업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들조차도 교과 지식을 통해서 스스로 흡수하는 지적인자양분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보면 굉장히 회의적입니다.

따라서 국가교육과정에서 교과 체제로 되어 있는 부분을 과감하게 축소 시키고, 아이들의 종합적인 사고 능력을 어떻게 길러 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2+2의 정답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구의 퓨즈를 갈아 끼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이들이 삶 속에서 종합적으로 깨달아 가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과정을 통해 인성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국·영·수를 배운다고 인성교육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침 이러한 교육 변화를 적용하기 위해 성취기준이라는 것이 도입되면서 ‘2015 교육과정’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2015 교육과정도 성취기준을 영국처럼 교사 스스로 조정할 수 있도록 변경하였는지 궁금합니다.

이종태 한울고 교장

  제3자적 관점에서 보면 전혀 바뀌지 않았다고 봅니다. 요즘 영국이나 미국의 각 주는 성취기준을 러닝맵 형식으로 최소화해 한 과목이 단 한 장으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교사에게 교육과정 재구성 권한이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다루어야 할 항목을 다른 것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꽉 채 워놨기 때문에 순서를 바꾸거나 붙여서 하는 정도의 수업 재구성 권한만 주어져 있지, 내용을 스스로 변경해 성취 기준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영국과 같은 수준의 성취기준은 아니라는 겁니다.

사회  예를 들면 이전에 사회과목에서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성취기준이 있었다면 교육과정을 구성한 문서 자체에 ‘지리 상의 발견’이라는 문구만 있습니다. 이것을 브루너는 ‘중간 언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2015 교육과정을 구성한 문서에서는 ‘지리상의 발견’을 ‘어떤 데이터를 활용하고 어떤 협동학습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이해하고, 이것을 토대로 무슨 활동을 할 수 있는가’로 규정합니다. 즉, 내용영역과 학습 경험, 성취 목표가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다양한 요소가 어우러진 기준에 굉장히 많은 항목을 넣었기 때문에 학습 분량이 줄지 않았다는 문제와 교사의 재구성 권한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갈등이 있습니다.

일부 교사 집단에서는 문서에 표기되지 않은 새로운 성취기준을 만들 수 있는 것 까지가 권한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지금 법상으로는 문서에 기입 되어 있는 내용 안에서 새롭게 버무리는 것이 재구성 권한이라고 하여 논쟁이 있긴 합니다.

이종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교과를 계획하고 전문가들이 구상할 때는 많은 고민을 통해 지식 교육의 수준을 높이려 했겠지만, 현장에는 ‘그러한 변화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라는 회의적 시각이 존재합니다.

우선 교사들이 변경된 교육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과서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은 이전과 똑같고, 아이들의 이해 수준이 천차 만별임에도 불구하고 교사 역시 이전과 똑같이 모니터를 통해서 주입하는 교육방식을 고수합니다.

개정 교육과정에 새로운 성취기준이 도입되어 이제는 교사가 이 새로운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다양한 경로를 이용할 수 있는지 저는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교사의 재구성 권한의 범위가 변하지 않았다면 현실적으로 개정된 교육과정은 이전의 교육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2015 교육과정이 잘 운영되기 위해서 교사의 노력도 필요하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교사가 수업 방식을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며, 이때 학교는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근대 학교제도라는 것이 자리 잡은 지 150년 정도 되었습니다. 기존의 일부 소수 계층, 특권 계층이 갖고 있던 교과 교육, 지식 교육을 전 국민이 공유하게 됐다는 측면에서 굉장히 민주주의적인 제도처럼 보이지만, 계층 간의 차이를 극복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화시키는 문제가 있습니다.

재생산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지만, 교육 외적인 부분의 격차로 인해 교육의 본질적인 격차가 심해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또한 학교 구조의 문제점 중 하나는 교사 한 명이 여러 명의 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학생 개인에 대한 보살핌이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보살핌도 없는 가운데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고, 그 내용을 잘 습득하면 좋고 습득하지 못하면 낙오되는 구조도 문제입니다.

특히 학교급이 올라가면 상대평가가 심화되면서 한 번 뒤처지면 도저히 역전 불가능한,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는 상황은 더욱 문제입니다.

한 명의 교사가 여러 명의 학생을 가르치는 구조를 깨야만 개별적인 보살핌이 가능하며,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제대로 학습했는지를 점검하며 보살 펴줄 수 있는 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비인간적이긴 하지만 ‘인공 지능이나 첨단 기술을 이용해서 개별적인 학습 보살핌이 가능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변화가 없으면 지식이든, 인성이든 학생을 제대로 돌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학급당 학생 수를 줄이면 해결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이전에 80명 ∼100명이 함께 수업을 듣던 초등학교 수준에서 현재 25명 이내로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 한 명 개별학생에 대한 배려나 학습지원이 안 되고 있는 현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종  제가 교장연수차 덴마크에 갔을 때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수학시간이었는데 어떤 아이는 단순한 곱셈, 나눗셈을 하고 있고, 또 어떤 아이는 고차원적인 수식을 갖고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돌아온 저는 교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학교는 한 교실에 20명이 정원인데도 왜 항상 같은 모니터를 보며 동일한 수업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학교에는 1차 방정식을 모르는 아이도 있고 분수를 모르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똑같은 수업을 하냐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이 몇 명 안 되니까 개별적인 수준을 다 알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개인 수준에 맞는 진도를 정해서 과제를 내주고 점검해주는 식으로 수준을 맞춰서 수업을 해야 하는 데, 교사들이 그렇게 못하는 것을 보고 답답했습니다.

물론 A, B, C, D 반을 나눠 수준별 학습을 한다고는 하지만, 형식적인 구분일 뿐 그 역시 개별적인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고 봅니다.

저는 지금도 지식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학교에서 해야 할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지식 교육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개별화 수업을 그렇게 말하고 다녀도 우리나라 교사들은 일제식 수업 밖에 모릅니다. 자기가 아는 것을 쏟아 붓는 것이 수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방식으로 열심히 수업을 했다고 해도 실제로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수업 내용을 얼마나 받아들였나 하는 것입니다.

아이 중심의 수업이 안 이뤄지고 있는 것이 교사의 책임인지 시스템의 문제인지 잘 모르겠지만 학 교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수업은 성과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이혜  현재 학교 체제를 완전히 없애고 새로운 학교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학교라는 구조를 제로베이스에서 새로 설계해야 한다는 거죠. 지금과 같은 학교가 아니고 언제 어디서나 배울 수 있는 학교 시스템으로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요즘 세대에 훌륭하다고 하는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나 테슬라 창업자 엘론 머스크와 같은 사람들 은 학교 교육과정을 제대로 마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창의성 하나로 세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오늘날의 학교 제도에서는 창의성이 길러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의성 있는 사람들은 학교의 경직화된 구조를 참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혜영 한국교육개발원 선임연구위원

 

 정  학교에서는 공급자 위주로 수업을 진행하고 학생들의 평균적인 수준으로 진도를 나가다 보니, 이해가 빠른 학생은 수업을 재미 없어하고, 이해가 느린 학생은 포기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교육과정이 학년과 매칭 되어 있어서 나타나는 획일화와 경직화를 극복할 수 있는 게 무학년제라고 생각합니다.

무학년제는 현재 타이트하게 결합되어 있는 교육과정과 학년, 시간과 내용의 체제를 느슨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성취의 맥시멈을 정해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학생들의 학업 성취가 “70%다, 80%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맥시멈을 뛰어넘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지는 기현상이 발생합니다.

습득력이 빠른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울 것이 없다 보니 초등학교 5∼6학년 때부터 수학 정석을 풀기 시작해서 고3때까지 무한 반복합니다.

맥시멈으로 정해진 우리 교육과정이 학생들의 창의력 성장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학생 개개인을 위한 맞춤 지도를 하고자 하면 교육과정상의 경직적인 구조와 타이트한 연계를 깨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회  요즘은 가정에 아이들이 하나, 둘 밖에 없습니다. 핵가족화로 인해 아이들은 사회적 접촉을 통한 협동이라고 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어쩌면 학교밖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반영하듯 아이들에게 “학교는 왜 가니?”라고 물어보면 “친구 만나러 가요”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웃었는데 생각해보니 정답인 것 같습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학교의 기능도 바뀌어야 하겠습니다.

 이종  이 시점에서 “학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해봅니다. 저는 근대 학교가 평균적인 인재를 기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근대 학교는 결코 개인의 행복과 성장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많은 학자들도 근대 학교를 일컬어 국가가 국민을 육성하고 통치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고도의 통제 체제라고 비판을 합니다. 우리는 학교에 돌봄과 배려 기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지금의 학교 체제는 설계 당시부터 그러한 기능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학교 자체가 새로 개편되어야 한다는 이혜영 박사님의 의견은 현대 사회에 필요한 기능을 학교에 부여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학교의 또 다른 주요 기능은 사회자의 말씀대로 아이들이 ‘친구 만나러 학교 간다’는데 있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를 만나고 그들만의 놀이를 통해서 수많은 학습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래의 학교가 친구를 만나서 마음껏 놀고, 배울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그렇기에 교과지식 중심, 교사 중심 교육을 해왔던 근대 학교 모델에서 벗어나 탈 근대적 학교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 출발은 아이들의 다양한 관심과 학습 욕구를 채워주는 데에서 부터 시작하며, 교사는 학생들을 쫓아다니면서 학생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서비스맨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학교와 교사의 개념이 달라지면 국가교육과정이라고 하는 것도 필요가 없게 됩니다.

물론 지식정보사회에서도 최소한의 교육은 필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규정한 교육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교육과정의 대강(大綱)화 아닙니까?

교육과정을 대강(大綱)화 하고, 구체적인 것은 학생이 선택하도록 해서, 교사와 학교는 학생이 선택한 것을 만족시키는 서비스를 해줘야 합니다.

  요즘은 창의성과 인성이 가장 핵심적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창의성 역량을 기르기 위한 별도의 콘텐츠와 방법이 있습니까? 없는 것 같습니다.

정범모 교육학 박사는 “새롭게 문제를 인식하고, 문제 해결 방식을 자기가 이해하여 성과를 만들어내는 데, 그 성과가 자기 수준에서 의미 있고 보람이 있으면 개인 수준의 창의성이 올라가는 것이고, 사회 수준에서 보람을 만들어 내면 사회 수준에서의 창의성이 올라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저는 “창의성이란 학습의 과정과 다름 아니다”라고 이해합니다. 내가 새로운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문제 해결 과정을 알아내고, 나에게 보람 있는 것을 하면 개인 수준의 학습이 되는 것이고, 이것을 창의성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회 수준에서 보람 있는 문제 해결 방식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내면, 사회 수준의 창의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결국 창의성을 기른다는 것은 별도의 학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개인별 수준에 맞는 학습을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창의성을 길러준다는 명분으로 영재들을 모아 창의성 코스와 같은 과정을 통해 가르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의성을 길러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일 뿐입니다. 또한 인성이나 사회성은 놀이 중심이나 공동 학습과 같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기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저는 인성을 습관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이들이 좋은 습관을 가질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려면 경험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내면화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글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활동과 경험을 통해 터득하게 하는 것이 인성 교육과 사회성 교육입니다. 인성 강좌를 열고 특강을 한다고 인성이 길러지는 것은 아닙니다.

학교에서의 많은 경험이 삶에 녹아들도록 하고 상대 평가를 없애야 인성이 생깁니다. 시험봐 서 등수 매긴다고 인성이 좋아지겠습니까. 학교를 재설계해야 합니다.

이종  저는 인성교육이란 말을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특성을 정형화된 것으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 됨됨이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학교나 가정이 민주적이면 아이도 그렇게 되는 것이고, 부모가 정직하면 아이도 정직하게 자랍니다. 이렇듯 인성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인성교육은 가르친다고 해서 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와 사회, 그리고 어른들의 삶이 아이들의 인성을 형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회  저는 인성교육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인성교육은 기존의 자유교양 교육관을 확장하는 면이 있습니다. 기존의 지식 위주 교육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해 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인성교육이라는 큰 개념을 만들어서 시도하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인성교육을 부정적으로만 보기보다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요구에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인성교육진흥법이 통과된 이유도 중요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유일하게 모든 국회의원이 동의한 것이 인성교육법이라고 합니다. 학부모들에 게 “학교에서 뭘 해줬으면 좋겠냐?”라고 물으면 인성교육을 요구하는 답변이 많다고 합니다.

이혜  그러나 정작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경쟁 현장에 내몰고 있습니다.

사회  뭔가 취약하기 때문에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보완합니다. 실질적으로 잘 안 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정책이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 학교의 틀 자체가 인성교육을 잘하기 힘들게 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학교 출석 일수만 채우면 되기 때문에 고등학교는 수시(대학입시)가 끝나면 교실이 어수선해지고, 1~2학년 때는 교실에서 자고 있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느냐는 중요치 않고, 학교 출결을 기준으로 졸업장을 줍니다. 이걸 달리 조정하거나 합리적으로 운영할 수는 없을까요?

저는 필수이수 과정을 고2 정도까지 하고 끝냈으면 합니다. 나머지 과정은 학생들의 진로에 따라 대학 준비 심화학습을 하거나 진로 체험 활동을 하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혜  학교를 경쟁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모든 지식은 학교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학교 밖에서 충분히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제도상으로는 학교 졸업장이 없으면 정규 교육을 안 받은 것으로 인정되어버립니다.

학교뿐 아니라 ‘어디에서 배워도 좋다’라고 해야 합니다. 평생학습시대에는 어디에서든 사회를 살아갈 지식을 배우면 이를 인정해 주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유연한 학교 교육체제를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  학교에서 소외받고 있는 많은 학생들에게 학교란 졸업장을 따기 위한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선생님을 잘 따라오는 아이는 몇 안 되고, 수업을 이해 못 하는 아이가 대부분입니다. 이해도 못 하고 학교에 앉아 있는 것은 인내심을 키우는 것이긴 합니다만, 교육 목표는 인내심만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최근 참고 견뎌내는 것을 핵심 역량으로 꼽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이것을 굉장히 잘 키워준 꼴이죠.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저 1, 2등급 아이들을 위해 밑에서 받쳐주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아이에게는 학교에 앉아있는 것이 삶에서 의미 없는 시간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 체제를 바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최소한 고등학교부터는 유연한 학점제를 만들어주고, 그중에서 핵심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자유로울 필요가 있습니다.

학교가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는 학교만능주의나 독점체제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최근 초·중학교뿐만 아니라 고등학교까지 소프트웨어 교육을 의무화하겠다고 합니다.

소프트웨어는 계속 바뀌는 것인데, 교사를 양성해서 가르친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안 됩니다. 외부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데 “너는 밖에 나가지 말고 선생님이 배워서 가르쳐줄게, 참고 기다려”라는 것입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저커버그나 스티브잡스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다 평가를 위해 시험까지 본다면 코딩을 통째로 외우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것입니다. 이것은 슬픈 일입니다. 이런 교육과정을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소프트웨어를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막고, 비전문적 교육 과정을 하는 것은 지양해야 합니다. 아웃소싱을 해야 할 것은 과감히 해야 합니다. 가르쳐야 할 새로운 내용은 학교가 과감히 외부의 학습 경험을 인정해주는 형태가 되어야 합니다.

정제영 이화여대 교육학과 교수

 이종  교육에 관한 모든 권한을 국가가 가지고 있습니다. 학력인정 자체를 국가가 하는 것이죠. 결국 배운 것 없어도 출석 일수만 채우면 학력이 인정되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교육에 대한 국가의 독점과 국가의 권한을 대폭 낮추거나 없애야 제대로 된 교육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홈스쿨링을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논의도 의미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배우고 싶은 사람은 배우고, 가르치고 싶은 사람은 가르치는 ‘평생학습시대’로 가기 위해 지금의 학교 체제는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나라도 서양 대부분의 나라처럼 고교 졸업 자격증 정도만 유지하고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학력인정 제도는 없앴으면 합니다. 왜 학력 인정을 받아야 합니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의무 교육인 초·중학교를 통합하고, 고등학교는 졸업 자격 고사 방식으로 변경해 중간 과정의 평가를 대폭 완화했으면 합니다.

학교 또는 교사가 학기 중에 다양한 과정을 시도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변경해야 합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학교라는 틀 자체를 없애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학교 밖과 안이,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학습 기회를 갖기 위해 서로 경쟁해야 할 것입니다.

이혜  학교도 교육할 수 있는 여러 기관 중에 하나여야 합니다. 우리는 대학을 진학하려면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합니다.

국가의 인증을 받은 학교만이 졸업장을 발급할 수 있기 때문에 대학을 가려면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합니다. 지금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고등학교 졸업 인증이 취소되어 중졸이 되어버린 것이 큰 뉴스가 되고 있듯이, 우리나라는 학교의 학력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했다는 자격보다는 어떤 실력을 갖췄느냐 가 중요합니다. 학생이 갖춘 실력을 학교뿐만 아니라 학원에서도 인정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출석일수가 졸업에 있어 중요한 요소이 기 때문에 생기는 국가적인 코미디입니다. 졸업 자격에 출석 일수를 폐지해야 이러한 상황이 해결될 것 같습니다.

사회  제가 핀란드의 한 지자체에서 학교를 담당하는 사람을 인터뷰하면서 들었던 말은 “정부는 학교에 많은 지원을 하지만 간섭은 안 하는 게 원칙”이라고 합니다.

지원은 하지만 프로그램을 짜고 돈을 어떻게 쓰는 것은 학교가 알아서 하게 둡니다.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핀란드 정부의 역할은 돈을 지원하는 것이고 그 나머지의 선택은 학교와 학생의 자유입니다.

학생들이 직업세계에 나왔다가 다시 학교를 선택해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학생들이 고등학교 다니는 동안은 무료입니다.

우리나라도 의무교육은 무료지만 다른 점은 강제적이라는 것입니다. 기간도 강제적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무상의 개념은 의무를 수반하지만 핀란드는 발상이 달랐습니다. 

이종  학력인정 자체가 모순입니다. 통용되는 능력은 그것을 쓰는 사람이 결정하면 되는 데 국가가 왜 꼭 졸업장으로 인정해줘야 합니까.

과거 산업화 시대에 사람들이 무리로 취급받을 때나 필요한 것이죠. 국가가 학력인정을 하는 것은 구시대적인 제도입니다.

  거기에 등수까지 매깁니다.

이혜  인내력에 대한 것도 이제는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은 인내력만 가지고 일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사회  저희 기관에서 행정직을 뽑았는데 경쟁률이 100:1이 넘었습니다. 제출 서류 중에 텝스가 있어서 “행정직이 영어를 쓸 것도 아닌데 이런 걸 왜 요구하나”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텝스를 뺐더니 서류전형 심사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텝스와 같은 구분 기준이 있으면, 기준을 충족하는 서류만 고르면 되는 쉬운 일이긴 합니다. 학교의 학생 선별 기능은 어떻게 작동하고 있습니까?

정  지금 말씀하신 선별 기능이 학교 교육을 망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예전에 국제중학교에서 입학생을 선발하는 기준 중 하나가 텝스 성적이었습니다. 텝스는 초등학생용이 아 니라 성인용 영어시험인데 초등학생이 본 것입니다.

심사하는 선생님들은 “텝스 성적 하나로 집안이 좋은지, 외국 경험이 있는지 등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국제중학교를 다닐 만한 능력이 있는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텝스 성적이 국제중학교 입학부터 명문대 진학에 이어 취업까지 쭉 연결되는 고속도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당시 초등학생이 텝스를 푸는 것을 보고 신기해서 학생들을 상대로 면담을 해봤습니다.

텝스 지문에 초등학생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모기지론, 피그말리온 같은 내용이 있어서 이러한 내용을 다 아냐고 물었더니 “학원에서 문제를 푸는 요령을 가르쳐주기 때문에 내용은 몰라도 다 맞출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편리함’입니다. 이러한 선택의 편리함이 교육을 완전히 황폐화시켰습니다. 학교는 학생을 선발할 때 선발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운영해서 우수한 아이들을 뽑았습니다. 학력고사가 얼마나 편리합니까.

시험을 통해 1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우고 정원에 맞게 뽑는 것이 쉬울 수는 있지만 그것이 교육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상급학교의 선발 제도가 하급 학교에 주는 영향력은 상당히 큽니다. 선발의 편리함보다는 “그 평가가 과연 타당한 것이냐”를 생각하는 것이 사회적 책무입니다.  

사회  대량 교육에 의한 대량 선발 시험 체제가 깊이 뿌리박혀 있는데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선발제도를 다양화하기 위해서는 예산이 정말 많이 들 어갑니다.

수행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기획안을 짜서 평가하고, 집체 면담을 도입했습니다. 이것이 합리적이긴 한데 전형 기간이 늘어나서 예산이 많이 든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혜  수능 시험 제도도 대량 선발 시험 체제죠. 대학이 선발 기준으로 가장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수능 시험이나 학교 졸업장입니다.

기업과 대학은 원하는 직무능력과 수학능력을 검증하기 위한 선발 기준을 스스로 개발해서 사용하는 게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국가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인정하는 학교 졸 업장이 그 역할을 한 것이죠. 편리하니까. 대학이 돈 들여 개발해서 뽑아야 하는데 선발 비용을 국가가 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안 됩니다.

  수능이 점수화돼서 줄 세우는 방식이 대학 입장에서는 편하기도 하지만, 뽑을 때는 의미가 없습니다. 뭘 잘하고 뭘 못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습니다

학생부종합전형도 학교 밖의 경험까지 연계해 기록할 수 있다면 학교가 충분히 중심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봅니다.

이혜  지금은 학교의 주 기능이 ‘선발’입니다. 이 선발 조건에 맞추어 경쟁을 하는 것이죠.

사회  현재 운영되고 있는 3월 학기제에 대한 의견이 궁금합니다.

  교육과정과 수업의 연계만 조금 느슨하게 해주면, 3월에 시작하든 9월에 시작하든 이는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혜  외국의 주요 국가에서 9월 학기제를 시행하고 있으니까 이를 따라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학기제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의 종합체입니다.

수십 년, 수백 년간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태국과 필리핀이 9월 학기제로 바꾼 적이 있는데, 태풍 등의 날씨 문제와 학교 냉방비가 많이 드는 등 폐단이 생겨서 다시 원래의 학기제로 돌아갔습니다.

학기제는 국가의 계절이나 배경, 역사 등과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의 3월 학기제도 그러한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가 하니까, 또 유학생들의 한국 학교 교육과정 연계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학기제를 바꾸자는 의견이 나옵니다. 

  교사 역할도 중요합니다. 그동안 교사들 이 지식을 전달해주던 역할만 해왔다면, 이제는 학생들이 학습하는 데 어려움이나 문제가 생기면 이를 해결해주고, 잘하는 아이들은 또 어떻게 가이드해 줄지 고민하는 이런 역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평가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학교도 바뀌어야 합니다. 수업이 변하려면, 상대평가체제가 절대평가체제로 바뀌어야 합니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A에서 B로 변화를 꾀할 때 또 다른 획일화를 만드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방향을 잘 설계해서 다양한 형태의 미래교육을 만들어 실험을 해야 합니다. 시스템을 바꾸되 차근차근 진행해서 성공사례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종  교육부에서 학교에 많은 권한을 줬다고 하는데 실제 학교 운영 형태는 옛날과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학교는 교육부에서 하라는 대로 하고, 자율적으로 해보고자 하다가도 지레 겁을 먹습니다. 물론 법과 제도가 현실적으로 이러한 자율성을 막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학교장 책임경영 제도와 학교 자율성 얘기가 무수히 나왔지만 제대로 된 것은 없습니다. 학교에서 다양한 교육적 실험을 해볼 수 있도록 학교의 관리 행정 구조를 전면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 가장 장벽이 되는 것은 교사들입니다.

교사들은 귀찮은 것은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특히, 공립학교의 순환정보시스템은 당장 없어져야 할 구악 중의 구악입니다.

교사들이 학교에 대한 소속감도 없고 책임감도 없어 조금 불편하면 빨리 다른 곳에 갈 궁리만 합니다. 책임 교육 구조가 전혀 안 되고 있는 거죠.

교사의 임용, 승진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고 학교에 무한대의 자율성을 보장해 줘야 우리나라의 학교 교육이 바뀔 수 있습니다.

 사회  급변하는 사회에서 적응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미래 세대를 위해 우리 학교 교육 체제도 이제 유연하게 운영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자리였습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우리나라의 교육을 위해 소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