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만의 역사 속 교육] 교육불평등(敎育不平等)
[최광만의 역사 속 교육] 교육불평등(敎育不平等)
  • 한치원 기자
  • 승인 2017.02.01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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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만 충남대 교육학과 교수

사람마다 각자 잘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변려문(騈儷文)에 능한 자는 부(賦)․ 책(策)에 능하지 못하고, 부․책을 잘하는 자는 변려문을 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 정시․알성시․절제 등에서 오로지 표(表)로 선비를 시험해 왔기 때문에, 경유(京儒)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먼저 사륙문(四六文)을 공부합니다. 이에 비하여, 향유(鄕儒)들은 다만 부․책만 익히고 천 리 길을 걸어와 응시합니다.

그러다가 표 문제를 보게 되면 붓은 버려둔 채 백지만 끌어안고 눈물을 머금으며 절망하게 됩니다.

무릇 사정이 이와 같으니 합격한 자들은 모두 경유들이고 향유는 한 사람도 들지 못합니다.(《영조실록》즉위년 11월 24일) 영조 즉위년(1724)에 진천 유학 변우익(邊遇翼)이 올린 상소 가운데 일부분이다.

그에 따르면 당시 지방 유생들은 과거에서 연이어 실패하고 있다고 한다. 실지로 영조 대에는 경유(京儒)니 향유(鄕儒)니 하는 용어가 빈번히 나타나고, 경유가 급제자 가운데 다수를 차지한 데 대한 비판이 제기되곤 하였다. 이른바 한성(漢城)과 지방의 격차 문제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 간 격차 문제는, 겉보기와는 달리 지역 간 학력차와 곧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소과 급제자의 지역별 분포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다음의 <표>에 나타난 세기별 소과 급제자의 분포를 보자.

<표>에 의하면, 한성은 15세기 44.00%에서 점차 증가하여 16세기 후반에는 50%를 상회하다가, 그 이후로는 감소하여 19세기 후반에는 16.04%로 급감하였다.

한성과 경기도, 즉 수도권 전체로 보아도 15세기 52.86%에서 19세기 후반 29.63%로 거의 반으로 줄었다. 이에 비하여 지방 유생의 급제비중은 점차로 증가하였다.

또한 지방 내에서도 지역 간 격차는 점차로 줄어들었다. 예를 들어, 가장 급제 비중이 높았던 경상도는 17.91%에서 15.23%로 감소한 반면, 충청도는 6.95%에서 16.95%로 증가하였고, 심지어 15세기에 한 명도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한 함경도는 점차 급제자가 증가하여 19세기 후반에 4.82%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수치를 소과 초시의 각 지역별 배분 비율과 비교하면, 대체적으로 그와 일치하는 방향으로 변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소과 초시의 선발인원이 지역별 인구와 학력을 바탕으로 균등하게 정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국 이러한 경향은 지역별 학력차가 줄어드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변우익의 상소에 보이는 지역 간 격차 문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결론적으로 이 문제는 지역 간 학력차가 줄어든 상황에서, 특정 유형의 문제가 특정 지역 유생에게 유리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비슷한 실력의 유생이 증가한 상황에서 과거의 경쟁률이 이전보다 심화되었던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 때문에 과거가 시행될 때마다 각종 뒷말이 무성하였는데, 이것은 오늘날 각종 시험을 치른 후 출제가 잘못되었다거나 부정이 있었다거나 하는 항의가 빗발치는 것과 유사하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과거로 인한 소란이 그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과거를 공정하게 시행하기 위한 각종 대책을 끊임없이 내놓았지만, 개중에는 대대적인 부정행위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실지로 과거에 대한 과도한 경쟁은 당시인들에게 부정의 유혹을 뿌리치지 어렵게 하였고, 이른바 양반 계층의 경우에는 더욱 심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양반은 기본적으로는 획득적 개념이다.

부모의 지위는 자식에게 그대로 부여되지 않는다. 한동안은 그 집안을 양반으로 인정해주지만 3~4대에 걸쳐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지 않으면 그러한 암묵적인 인정도 사라진다.

따라서 그 가문의 자손으로서는 자기 대에서 선조의 영광을 사라지게 하는 것만큼 큰 불효가 없고, 그만큼 과거에서의 성공이 절실한 과제가 되는 것이다.

숙종 25년(1699)에 치러진 증광시는 4년여의 수사 끝에 50여 명의 부정행위 관련자를 색출했던 사건으로 이른바 기묘과옥(己卯科獄)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부정에 연루된 인물 가운데에는 당시 재상 최석정의 사위, 소론의 영수이던 박세채의 아들과 손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숙종 28년(1702)에 시행된 알성시에서는 9명의 급제자 가운데 8명이 시험관과 4촌 이내의 인척 관계에 있었던 인물들이어서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었던 경우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조선 후기의 교육 불평등 문제가 지역 간 차이보다는 계층 간 차별에 보다 강하게 연결되었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의 교육개혁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였던 문제가 바로 이 계층 간의 차별이었다. 이른바 반상(班常)의 구별이 그것이다.

반상은 양반과 상인을 의미하고, 법적으로는 그 지위가 구분되지 않는 하나의 계층일 뿐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양반과 상인의 구분이 강화되고, 서로 섞일 수 없는 두 계층으로 구분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일반인이라는 의미의 상인은 점차 천한 상놈으로 의미가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영조 대의 유수원은 이 반상의 차별을 모든 문제의 근본 요인으로 보았고, 그의 저서 《우서》에서 그 심각성을 다음과 같이 고발하였다.

이 밖에도 허다한 고질적인 폐단이 모두 양반을 우대한다는 헛된 명분(名分)에서 나온다. 그 근본을 따져 보면 국초(國初)에 법제를 마련할 때 사민(四民)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 만약 이를 구제할 길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이 백성은 모두 녹아 소멸되고야 말 것이다. (《迂書》 권1, 叢論四民)

이렇듯 유수원에게 문벌의 폐단은 모든 백성의 살길을 막아버리는 근본적인 사안이었다. 그리고 그 귀결점은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의 소멸이었다. 교육불평등과 관련된 이러한 조선의 사례가 현대인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문제는 지난 일이고, 지금과는 상관이 없을까? 조선에서 교육 불평등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것은 건국한 지 30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더욱이 그사이에 온갖 내우외환도 겪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건국한 지 70년도 채 안 된다. 조선으로 치면 이제 막 세조 대쯤 온 셈이다.

이 점에서 보면, 조선 후기에 왜 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는가를 비판하기 이전에,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이 문제를 잘 다루어왔는지가 더 궁금해진다. 지금 우리는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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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원 기자  eduin@edu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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