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여행·사진 작가

칠레 비야리카 화산

칠레는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로 유명하다. 동시에 화산의 나라이기도 하다. 칠레에는 3,000여 개의 화산이 있고, 비야리카를 포함해 이 중 500개가 분출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여러 곳에서 화산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이 중에서 비야리카 화산(Villarrica, 2,847m)은 여행자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장소다. 칠레 푸콘에 온 지 나흘째 아침. 비야리카 화산 트레킹을 위해 오전 5시 40분쯤 일어나 목욕재계로 난생처음 활화산을 대하는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다.

<푸콘은 동화마을 같은 분위기로 여행자를 반겨준다.>
<푸콘에 있는 호숫가는 화산마을답게 현무암 자갈이 깔려 있다.>

화산 트레킹은 으레 능선이 적고 오르막이 대부분이다. 비야리카도 마찬가지였다. 꽤 열량이 필요한 하루였다.

새벽 댓바람부터 들어가지 않는 음식을 차곡차곡 위장 안에 챙겨 넣은 뒤 날씨를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하늘은 꼭 만성변비 환자처럼 잔뜩 찌푸려 있었다. 사실 전날 트레킹을 하려고 했지만, 비가 내리는 바람에 하루를 공쳤다.

어쨌든 오늘은 트레킹이 가능하다고 했다. 숙소 앞에 버스가 도착했다. 다른 숙소에서 픽업을 먼저 했는지 버스에는 콜롬비아 커플, 스페인 아주머니 2명 그리고 국적을 알 수 없는 동양인 한 명 (중국인으로 추측)이 앉아 있었다.

차에 앉아 있자 지각의 미안함은 아침 수프와 함께 말아 드신 이스라엘 커플이 차에 올랐다. 어느 여행기에선 이스라엘 여행자와 잘도 다니던데 난 가는 곳마다 이스라엘 여행자와는 뭔가 잘 맞지 않았다.

비야리카 입구에 도착했다. 가이드는 돌연 낯빛을 바꾸더니 리프트를 이용하려면 7,000페소를 더 내야 한다고 말했다.

타기 싫은 사람은 2시간 정도 더 걸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거의 반강제나 다름없는 요구였다. 리프트를 타지 않으면 정상까지 7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였다. 모두 리프트를 타겠다고 했다. 사전 조사로 알고 있던 내용이었지만, 트레킹 전에 이런 설명은 없었다.

<화산을 무념무상으로 걷다 보니 어느새 구름 위에 올라섰다.>

트레킹 투어비용 3만 5,000페소 + 리프트 7,000페소면 100달러짜리 투어였다. 리프트에 오르자 발아래로 듬성듬성 녹다만 눈이 느릿하게 뒷걸음질 쳤다. 스키장을 거슬러 올라가는 리프트는 구름 속에 앉아 있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지루함 그 자체였다.

리프트에서 내리자 먼저 출발한 다른 팀이 먼발치서 열을 지어 구름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본전 생각이 났다.

구름 보자고 100달러나 주고 비야리카를 찾은 건 아닌데, 내 운도 다한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선 투어 비용을 돌려달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바모스!(Vamos, 갑시다)” 가이드는 이런 내 기분을 전혀 개의치 않고 힘차게 출발을 알렸다. 우리 일행도 열을 지어 걷기 시작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이스라엘 커플이 뒤처지기 시작했다. 조용히 뒤따라오면 될 것을 그들은 자꾸만 가이드를 불러 팀 전체를 멈춰 세웠다.

그 덕에 짧은 주기로 불필요한 휴식이 주어졌다. 국적을 알 수 없는 거구의 동양인도 이스라엘 커플과 자연스레 그룹을 형성했다.

우리는 시작부터 다국적 팀의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해 내고 있었다. 가이드를 온전히 따라가고 있는 건, 콜롬비아 커플과 스페인 아줌마 2명 그리고 나뿐이었다.

“헉~ 헉~” 한 시간 정도 산을 오르자 암흑 같은 세상이 차츰 밝아졌다. 언뜻언뜻 구름이 바람에 날리며 하늘을 보여줄 듯 말 듯 애간장을 태웠다.

그러다 희미한 구름 조각이 일순간 바람에 흩어지며 한 방에 시야가 트였다. “와~아~앗!” 순식간에 열린 하늘은 실비단 같았다.

<아스라이 보이는 구름이 마치 푹신한 솜털 같다.>

발아래로 우리 팀이 뚫고 올라온 구름이 잔바람에 넘실대며 장관을 연출했다. 운해와 파란 하늘의 경계에서 휴식이 주어졌다. 그리고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 결정도 이때 내려졌다.

정체불명의 동양인은 뒤도 안 돌아보고 하산을 결정했고, 이스라엘 커플은 자기들끼리 트레킹을 하겠다며 일방 통보를 했다.

“바모스!” 가이드는 인원 정리가 되자 다시 출발을 독려하며 머리 위에 보이는 까마득한 봉우리를 넘어야 진짜 정상이 보인다고 했다. 오르막이 이어지는 단조로운 길이 계속됐다. 눈길은 미끄러웠다. 오랜만에 허벅지에 알알한 통증이 느껴졌다.

체력 소모가 컸다.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며 3시간을 걷곤 후다닥 점심을 먹었다. 그나마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며 먹는 점심은 본전 생각을 싹 지울 만큼 훌륭했다.

비야리카 화산 썰매

다시 눈길을 걷는 고된 트레킹이 시작됐다. 풍경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채, 무념무상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먼저 출발한 팀이 까마득한 거리에서 꼼지락대는 미니어처처럼 보였다. 그렇게 2시간 더 끝날 것 같지 않은 경사를 오르자 갑자기 산이 거친 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정상 직전에는 가파른 언덕이 나오는데 바람도 거칠고 쉬지 않은 걸음이 이어진다.>

무엇 때문인지 기분이 상한 바람은 사정없이 허공을 할퀴고 있었고, 태양은 자외선 강도를 높이며 피부를 태웠다.

거칠게 몸을 밀치는 바람을 뚫고 막바지 비지땀을 흘리자 거짓말처럼 정상이 코앞에 다가왔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마른 숨을 내뱉으며 마지막 고개를 넘었다.

이제 열 걸음이면 정상에… 그 순간, “흐흑! 웩! 뭐야 이게!” 등정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매캐한 가스가 콧속 점막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비야리카 화산은 활화산으로 정상에 올라서면 유독가스가 날리고, 괴기스러운 분화구를 볼 수 있다.>

연탄이 한 100개쯤 타고 있는 곳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고, 화산 가스를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뜨아~악’ 방독면을 착용한 트레커가 눈에 띄었다.

그 사이 팀원들이 하나둘 정상에 도착했다. 그들도 독가스를 들이켰는지 내가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화산은 폭죽 대신 모락모락 유독가스를 내뿜으며 우리의 정상 등극을 축하했다. 분화구 안은 엄청난 연기와 열기로 괴기스럽게 물들어 있었다.

그 속에 정확히 무엇이 있는지 보이진 않았지만, 겉으로 보기엔 꼭 지옥으로 통하는 문같이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멀리 운해 위로 화산 특유의 봉긋 솟은 봉우리가 도열한 모습은 생경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했던가.

곧이어, 등정에 성공한 트레커만이 누릴 수 있는 진짜 놀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올라올 때 가져온 플라스틱 썰매를 엉덩이에 대고 직각에 가까운 비탈진 경사 앞에 섰다.

“바모스!” 가이드가 신호를 내렸다. 눈썰매를 타고 구름 속으로 활강을 시작했다. …바모스, 가이드는 이 한마디로 모든 감정을 표현해 내는 놀라운 재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