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면서 부모 스스로가 경계해야 할 것 중의 하나는 부모의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어렸을 때 나는 이랬었는데, 내가 다닌 학교는 이랬었는데․․․’ 하면서 나의 경험으로 아이의 현재의 삶을 견주어 보는 것이다.

스스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부모건 그렇지 않은 부모건 아이를 기를 때 일차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경향일 것이다. 전자의 부모라면 자녀에게 부모의 경험에서부터 나오는 지침을 강조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반면에 후자의 부모라면 자녀들이 부모가 살아온 삶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클 것이다. 어찌 됐든 두 경우 모두 부모의 경험이라는 눈으로 자녀를 바라보고 해석하고 그에 따른 처방전을 내놓고 싶어 한다.

부모의 경험은 나름대로 소중하고 의미 있다. 거기에는 환희와 만족감, 소망과 도전이 들어있으며, 실패와 좌절, 고통의 눈물이 들어있다.

한 사람에게 영향을 준 사건들과 그 한 사람이 이루어 낸 모든 환경, 지식, 생각들, 생산물들, 가치관과 습관들은 그 자체로 역사적 사건이며 인생의 가치이다.

천하보다 귀한 한사람만큼의 가치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모의 경험이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해도 자녀에게도 동일하게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 들에게 부모의 경험은 일방적인 것, 과거에 이미 끝난 것, 정지되어 있는 것, 박제되고 화석처럼 굳어진 것, 아이들의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심지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인생의 금과옥조조차 예외가 아닐 수 있다.

그것은 부모의 경험이 소중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의 경험을 자녀가 소중하고 가치 있게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보여주고 전달했는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어른 말씀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

대체로 이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가 어른 말씀을 듣지 않아서 꾸지람을 듣고 있는 유쾌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말을 듣는다면, 아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이나 착한 행동을 하기로 다짐을 하는 것 대신 어른에 대한 반항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다.

부모의 귀중한 경험은 종종 잔소리의 형태로 포장되어 아이들 귀에 들어간다. 그러나 잔소리를 듣고 변화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했다.

아이가 들을 준비도 안되어 있는데 단지 ‘어른 말씀’이라는 이유로 퍼부어서는 안 된다. 아이가 들을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말을 하지 않거나, 아이가 들을 수 있는 만큼의 이야기를 하거나, 둘중 의 하나를 해야 한다. 아이가 대학에 떨어졌다.

짧게는 중 고등학교 6년, 길게는 아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자녀양육’이라는 과목의 중간고사를 치르는 느낌이다.

시험 시작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다들 책 집어넣고 머리 위에 손 올려. 지금 보는 거 하나도 안나와”라고 낭랑하게 말씀하시는 것만 같다.

아이의 아픔을 공감해 주지 못했고 마음을 읽어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장 후회가 되고 가슴 아팠다. 내가 말하면 말하는 대로 되는 줄 알고 부질없는 말들을 잘도 쏟아 냈었다. 내 말이 최고 인 줄 알았다. 가장 후회되는 말은 “공부해라”였다.

정말이지 천하에 하등 쓸모없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아이가 수능을 치르고 나오면서 가장 먼저 한 말은 “왜 사람들이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 말 하는지 알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 얼마 나 절묘하게 엇갈리는 타이밍인지! 긴 호흡을 가져야겠다.

꾸미지도 말고, 어떤 의도도 품지 말고, 그냥 소박하고 수수하게 이야기를 들려주자. 보고 들은 것을 보고하는 증인처럼 말이다.

“얘들아, 이런 삶도 있단다. 그러니 너희들도 용기를 가져” 이렇게만 말이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다만 그 사랑이 미숙할 뿐이다. 부모도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매일 한 뼘씩 자라다 보면 언젠가 샘곁의 가지가 담장을 넘을 날이 오겠지. 그때까지 하이파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