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만 충남대 교육학과 교수

지팡이를 휘두르면 개화장(開化杖)이오 안경을 걸치면 개화꾼이었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돌아오자 저쪽 시민의 자격으로 엊그제 상감이던 고종 앞에 나아갈 때 뒷짐을 지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참으로 개화라는 것의 본령이었을까. 아니, 자기상실인 것이다. 자기가 상실된 곳에 번영이 있다면 그것은 과시(果是)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개화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영재(寧齋)는 개화 세력 보기를, 김옥균이나 서광범의 무리를 보기를 한낱 판돈을 크게 벌이려는 도박꾼으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한국이란 나라를 그들의 도박에 필요한 판돈으로 말이다.(민영규, 《강화학 최후의 광경》, 91쪽.)

영재(寧齋)는 강화 양명학 계통의 학자로서 15세에 과거에 급제했던 조선의 2대 천재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을 말한다.

그는 현대사의 시각에서 보면, 전형적인 보수주의자였다. 갑신정변과 갑오경장 때 개화파의 협력 요구를 거절하였고, 동학교도가 난을 일으켰을 때는 강경 진압을 주장하여 어윤중(魚允中)과 대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권신들을 탄핵하고, 개화파 강위(姜瑋, 1820~1884)의 제자로서 개화당의 인물들과도 깊이 교류하고 있었다.

그의 아우 이건승(李建昇, 1858~1924) 또한 황현(黃玹)의 친구이자 정인보(鄭寅普)의 스승으로서, 근대사의 한복판에 있었던 인물이었고, 1906년 강화도에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설립하여 근대민족교육을 시행하였다.

그런데 이 계명의숙은 조금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이 학교는 강화 지역의 학문풍 토와 지역 인사들의 참여 그리고 주민들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황은 1905년 이동휘(李東輝, 1873~1935)가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한 후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1908년에는 강화학무회(江華學務會)발기대회를 개최하여 근대적인 교육제도를 구축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그 계획은 강화지역을 56개 학구로 나누어 학구마다 사립초등학교를 설립하고 학령아동을 의무적으로 취학시킨다는 내용과, 이들 초등학교에서 학업을 이수한 학생들을 보창학교 중학과와 중성학교(中成學校) 사범속성과에 입학시키는 학제를 마련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발기대회는 면 장·이장을 비롯한 지역 유지 그리고 주민들 수백 명이 참가하여 성황리에 진행되었는데, 당시 신문에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황성신문》 1908년 3월 8일 잡보, 「江華義務敎育」)
 
당시 강화 지역에 설립된 학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확인되지만, 실지로는 이보다 많았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근대교육사는 단절론의 시각으로 재단되어 있다. 근대 이후의 교육을 고찰할 때에, 지난 500여 년간 지속되었던 조선의 교육 전통은 사라지고, 마치 백지 위에 이른바 근대교육이라는 것이 새롭게 그려진 것처럼 묘사한다.

이것은 이제까지 한 편의 시각, 즉 서재필의 시각으로만 근대 시기의 교육사를 바라보았다는 것과, 그 과정에서 이건창이나 이건승의 시각은 배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의 교육은 일방적으로 찬양만 해야 할 대상도 아니고, 또 일방적으로 비판만 해야 할 대상도 아니다. 어느 시대의 교육이나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교육이 현대인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단편적인 결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이다. 조선 시대는 양인 이상이면, 법적으로, 교육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데에 제한이 없던 사회였다.

그런 만큼 조선은 동시대 어떤 나라보다도 교육에 관한 관심이 높았고, 그에 따른 문제와 대응이 점철된 사회이기도 하였다.

위기지학이라는 이상과 시험 위주의 공부가 팽배한 현실, 국가가 학교를 지원해야 한다는 이상과 수많은 사학의 설립을 허용해야 하는 현실, 문명국가를 실현해야 한다는 이상과 제국 주의 침략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현실이 지속적으로 또 광범위하게 나타난 사회가 조선이다.

이러한 이상과 현실의 갈등은 비록 세부적인 면에서 현대와 다를지 몰라도, 그 기본 성격에서는 모종의 연계성을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조선의 교육은 현대 교육과 관련된 수많은 데이터가 쌓여있는 보고이기도 한 셈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역사 속 교육’은 그러한 수많은 데이터 가운데 몇 개의 파일만 뒤적인 내용이다.

현대인들, 특히 현대의 교육 관계자들이 그러한 데이터의 존재를 인지하면서 현재의 교육을 바라볼 수 있다면, 문제 자체를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무엇이 왜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의 창의성은 그때야 비로소 발휘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