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세영 충남대학교 교수

#코드 1

말의 발명! 인류는 말을 발명하고 쓰기 시작하면서 짐승은 물론 사촌 침팬지와 영원히 다른 진화사를 걸어왔고 만물의 영장으로 우뚝 섰다.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떠할까? 외국인과의 소통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류가 말을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약 5만 년 전쯤이라 한다. 네안데르탈에서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하는 시기를 말한다. ‘호모사피엔스’란 생각하는 인간이란 뜻인데 생각은 곧 말을 쓰기 시작하면서 탄생했다. 아직까지 인간이 어떻게 동물과는 다른 말을 발명하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인간은 호흡기관인 폐강과 소화기관인 비강이 구분 진화되었고 목구멍과 입술, 코와 혀, 그리고 안면근육을 신비스럽게 조합하여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여 동물의 소리(Sound)와는 다른 사람의 말(Voice)를 만들어냈다.

새가 노래하고 호랑이가 포효하지만 그것들은 사람의 노래와 웅변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갓 태어난 아이가 옹알이를 하고 점차 엄마의 입술과 얼굴과 소리를 흉내 내가면서 말을 배워가는 과정은 신비스러움 그 자체이다.

처음에는 냄새와 모습으로 엄마를 알아보는 아이가 이내 말소리로 알아보는 단계로 진화할 때 아이는 진정한 인간으로 탄생한다.

이처럼 엄마와 아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주는 첫 번째 코드가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일임을 평생토록 깨달아가면서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고 말 한마디에 목숨을 잃기도 한다. 내 집, 내 동네에서는 아무 불편 없이 쓰던 말이 산 넘어 물 건너 딴 집, 딴 동네 사람들이 쓰는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면 말은 서로를 죽이고 살리는 무서운 도구가 된다.

짧은 대한민국의 근대사에서 ‘영어’라는 들어보지 못한 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해 왔는지를 생각하면 말이란 결코 간단치가 않은 비밀이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인류는 오만 년을 넘어 말을 만들고 사용함으로써 적어도 지구 상에서는 만물의 영장이 되었고 아무리 영어가 어렵다 해도 공부를 통해 배우며 극복하여 왔다.

올해 개봉한 미국 영화 <Arrival>은 우주에서 온 외계인의 말을 알아듣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말은 이처럼 호모사피엔스의 첫 번째 코드였던 것이며 수만 년 동안 코딩해왔던 것이다.

#코드 2

글의 발명! 오만 년 전 말의 발명에 이어 오천 년 전 글의 발명으로 인류는 역사 시대로 옮겨 4대 고대 문명의 주인이 되었다. 공룡이 살던 태고의 땅 한반도에서 오백 년 전 훈민정음이 발명되었고 삼일독립선언문을 쓰고 20세기 대한민국 기적이 탄생했다.

초등학교 역사 시간에 4대 문명을 배운다. 황하, 인더스,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나일강가에서 사람들은 처음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갑골, 산스크릿, 쐐기, 상형 문자를 만들어 수확한 곡물의 양과 각자에게 돌아갈 몫을 기록했다.

이것을 우리는 ‘글자(Letter)’라고 부르며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아이가 말을 떼자마자 가르치기 시작하고 아이들은 머리를 쥐어짜 가며 배우느라고 고생고생을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노벨문학상의 수상자가 되지 못하고 대부분의 사람이 노벨문학수상 작품을 읽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문맹자라 하며 아는 사람들을 문해자라 한다.

문맹자와 문해자는 마치 동물과 인간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듯 소통하지 못하며 문맹자들은 문해자들이 오늘 무슨 이야기를 서로 편지로, 책으로 주고받는지 알 길이 없다. 이른바 식자와 무식자의 차이며, 문명인과 미개인의 차이이다.

결국 글을 배우는 것은 문맹, 무식, 미개의 암흑지대를 벗어나 문해, 유식, 문명의 광명지대로 나가는, 현관문을 여는 열쇠를 얻는 일이다.

일제의 압제를 벗어난 1945년 한반도 이천만 민중들은 대부분 글을 읽지 못했다. 한글학회의 노력과 기독교 교회의 성경&찬송가, 상록수 채영신 선생님들 모두 이 열쇠를 가져다준 선지자들이었다.

#코드 3

수의 발명! 피타고라스는 수비주의자로 몰려 아테네를 떠났다. 대장간의 망치 소리에서 그는 수를 발견하였다. 피타고라스정리는 이후 황금비율, 피보나치, 원주율을 지나 E=mc2로 이어져 왔으며 조금씩 조금씩 신의 창조 비밀에 접근해갔다.

수는 앞서 발견하고 발명한 글에 비해 훨씬 어려웠다. 수는 자연수에서 시작하여 0은 물론 음수와 양수, 분수, 무리수와 허수를 넘어 소수, 복소수, 벡터, 무한급수 등등 도무지 알 수 없는 기호로 발전해왔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수학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하는 복병으로 등장하여 한바탕 씨름을 해야 하나 대부분은 싸움에서 지고 다른 길을 찾아 멀리 돌아가야만한다. 달래서 ‘수포자’라는 말까지 나올까.

도대체 수와 수학은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정말 파르테논 신전을 지을 당시 그 사람들이 황금비율대로 측량하고 그 무거운 돌들을 깎고 옮겼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딱딱 들어맞는 것을 보며 아무래도 우주인의 작품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석굴암도 그렇고 스톤헨지도 그렇고 기자의 피라미드와 타지마할과 앙코르와트가 그렇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 이후로 수는 수학으로 발전하고 요즘에는 수열과 함수 그리고 미분과 적분 확률과 통계를 넘어 위상수학 등등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코드들로 학생들을 겁에 질리게 한다.

어찌 되었든 갈릴레오를 지나 뉴턴 그리고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근대과학문명을 만들어냈고 그 모든 비밀은 수학이 갖고 있으며 학교 교육 그리고 대학은 실상 수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으니, 수학을 못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학교와 대학으로부터 낙오자가 되어 왔다.

최근 대한민국에서는 스토리텔링 수학이라 하여 초등학생들에게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수학을 가르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그 결과는 전혀 반대로 더욱 어려운 수학이 되고 말았다.

수와 수학은 정말 모두가 배워야 하는 것일까? 수와 수학은 정말 어렵기만 한 것일까?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코드 4

책의 발명! 한자어 책(冊)은 죽편 묶음이며 라틴어 codex와 영어 book은 모두 종이의 원재료인 나무를 어원으로 한다. 책은 종전의 두루마리를 오늘날의 쪽, 곧 페이지로 분화시킨 형태이며 x를 빼고 코드(code)라는 지식과 비밀의 열쇠가 되었다.

책이 내 것이 된 것은 구텐베르크 이후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마호메트가 천 년 전 중국에서 들여온 종이를 만났으며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개신교 기독교인들은 손바닥만 한 기도책을 갖게 되었다.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고 의문투성이였던 라틴어 성경 구절을 신부님이 들려준 대로 암송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물론 책이 먼저 발달한 곳은 중국과 한국이었으며 오늘날같은 공부를 하고 그 결과를 평가하는 교재와 교과서의 형태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의 책들은 모두 한자로 쓰였기 때문에 직지를 100여 년이나 먼저 발명했음에도 금속활자기반 구텐베르크 인쇄술 같은 기술은 별 소용이 안 되었다. 책은 여전히 비쌌고 부자들이나 가질 수 있었으며 결국 지식독점의 기반이 되었다.

책이 개인 소유물이 된 이후 지식과 코드의 성격은 훨씬 사적 영역으로 진화하였다. 책이 여러 사람의 것이었을 때는 같이 소리 내어 읽고 그 뜻을 공유했다. 그러나 내 것이 된 이후엔 혼자 읽고 혼자만의 방식으로 이해했다.

말하자면 개인별로 디코드된 코드는 인코드 전 코드와는 다를 수도 있게 되었다. 이는 진위의 혼란 우려도 있었으나 새로운 진위의 기준 탄생 가능성도 의미했다. 이는 지식의 사유화와 대중화가 동전의 양면임을 말하며 근대과학의 빅뱅 과정이기도 하다.

원저자의 인코드를 텍스트라 한다면 독자의 디코드는 콘텍스트가 되는 것이며 독자의수와 조합에 따라 무한급수적 코드 폭발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를 미디어학의 대가인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르크 은하계라 이름 붙였다.

이제 우리는 책을 읽고 이해한 후 나만의 책을 쓸 줄 알게 되는 것을 공부와 교육의 종착점으로 알고 있다. 책에는 글과 수가 담겨있으며 금속활자인쇄술이 종이 위에 그것들을 순서에 따라 질서있게 배열한다. 이 순서를 일러 문법이요, 공식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공부와 교육은 책의 문법을 배우고 나만의 비밀 코드를 인코드하고 다른 사람의 코드를 디코드하는 일이다.

#코드 5

비트(bit)의 발명! 제2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일어났다. 코드 1이 글과 수를 종이 위에 인쇄한 책이라면 코드 2는 비트로 모든 코드를 융합한 컴퓨터이다. 2진수 곧 binary digit의 축약어 bit(비트)가 탄생했다. 그것은 1/0 전원 on/off의 단순성이다.

첫 번째 코드는 책으로 완성되었다. 이제 인류는 두 번째 코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두 번째 코드가 완성되면 인류는 기계는 물론 우주의 만물과 소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컴퓨터라고 불러왔으며 2016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이세돌과 알파고가 바둑을 두고 난 이후 인공지능이라 부르기도 한다.

컴퓨터는 글과 수를 사용하지 않고 비트로 코드를 만들어 사용한다. 이를 코딩이라 부른다. 코드가 입혀진 기계는 드론이 되어 하늘을 날고 3D 프린터가 되어 인공장기까지 찍어내고 자동차가 자율 운전하고 로봇이 되어 외로운 인간의 친구가 된다.

비트는 정말 단순하고 배우기 쉽다. 반도체 칩에 불이 켜지면 1이고 꺼지면 0이다. 비트가 8짝이 모여 1바이트가 되고 1바이트가 한 개씩의 알파벳 문자 또는 아라비아 숫자와 기타 몇 가지 특수문자 총 128개를 할당한 것이 아스키코드 곧 미국 정보교환 표준 기호체계이다.

애플의 첫 번째 8비트 컴퓨터가 첫 번째 코드였던 글과 수를 종이가 아닌 전자 스크린에 인쇄하였다. 이후 8비트 컴퓨터는 16, 32, 64비트 시대까지 발전하였고 곧 인간 지능을 넘어서는 128비트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이 비트 단위는 매우 정확하게도 인간 IQ 점수를 나타낸다. 알파고는 아이큐 64비트 컴퓨터 수천수만 대가 클라우드로 묶여서 세계 최고수 바둑 기사를 이겼던 것이다.

컴퓨터를 배운다는 것은 결국 컴퓨터의 언어인 코드를 배우는 일이다. 물론 원시 컴퓨터였던 애니악에서 현재의 64bit 개인 컴퓨터까지 진화하여올 때까지 컴퓨터 언어는 베이식같지 않은 베이식부터 씨뿔뿔(C++)처럼 난해함 그 자체였으며 나름 쉽다는 알(R) 또한 일반인에겐 난공불락이었고 스티브 잡스와 같은 천재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번갯불이 프로메테우스의 불로 바뀌는 혁명이 일기 시작했다. 코딩이 쉬워진 것이다. 레고 블록을 맞추듯 유치원 아이들도 손쉽게 하는 코딩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코딩이 글을 읽고 쓰는 일보다 수를 세고 푸는 일보다 쉬어진 것이다. 코딩 몇 줄로 게임을 만들고 로봇을 제어할 수 있는 신기한 세계에 아이들은 열광하고 있다.

#코드 6

코딩 교육으로의 진화! 첫 번째 교과는 수메르의 필경이었으며 두 번째는 스파르타의 전사 훈련이었다. 중국의 과거는 4서3경이었고 중세 대학은 7자유 교과를 가르쳤다. 대한민국의 국민공통교과 10개 과목은 언수사과음미체+영실도이다. 코딩 교과는 추가되어야 할까?

코딩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까 말까? 가르쳐야 한다면 초등학교에서부터? 중학교에서부터? 또 필수교과일까 선택교과일까? 영국은 어떻고 핀란드는 어떻고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정보과학, 컴퓨팅, 사고력 등등 교과명은 무엇으로 정할까? 가르쳐야 한다면 주당 1시간 아니면 2시간?

수도 없는 질문과 논쟁들이 꼬리를 물었고 정부는 미래부와 교육부가 서로 책임 공방을 하는 사이에 역시나 또 가공의 코딩 학원들이 갈피를 못 잡고 불안해하는 학부모들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코딩은 가르쳐야 한다. 적어도 초등학교 4학년부터는 가르쳐야 한다. 말과 글과 수를 배우고 나면 배울 수 있다. 필수교과로 가르쳐야 한다. 수업시수는 학교가 알아서 학생의 학습 속도에 맞추어서 학생별 맞춤형으로 하면 된다.

언수사과음미체영실도 중 아무래도 실과와 도덕 시간을 조금 빼면 되고 다른 과목에서도 한두 단원쯤 학기 중에 다루어주어도 될 것이다. 언수사과음미체영 한두 단원은 코딩과 융합한 프로젝트 학습으로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이후는 코딩뿐만 아니라 나머지 10개 과목도 모두 선택과목으로 해서 배울 수 있게 하면 된다. 어떤 학생은 하루 종일 코딩만 할 수도 있고 어떤 학생은 국어만 어떤 학생은 수학만, 어떤 학생은 피아노만 쳐도 될 것이다. 적어도 고등학교 이후로는 말이다.

언어를 배운다고 모두가 시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4칙연산을 배운다고 모두가 수학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동요를 배운다고 해서 모두가 성악가가 되는 것도 아니며 수채화를 배운다고 해서 모두가 유명 화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어른들의 의무는 아이들이 가진 씨앗들을 밟아버리지 않기 위해 그 모든 경험들을 학습력이 무한대인 어린 시절에 가능한 하나라도 더 알려주는 것이다. 학교는 그러라고 있는 것이다. 학교는 시인을, 화가를, 성악가를, 물리학자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그런 씨앗을 틔우는 곳이다.

코딩이라는 새로운 씨앗이 움트고 있고, 교육은 오천 년 만에 완전히 바뀌고 있다. 사람 사이의 소통 도구를 배우던 교육이 기계, 동물, 식물을 넘어 하늘의 별과 또 그 별에 살지도 모르는 외계 생물과도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

컴퓨터의 지능이 128비트를 넘는 특이점이 멀지 않았다. 2045년이라고 못 박아 예측하는 미래학자들도 있다.

올해 초등학교 입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하는 시점에는 사람 친구와 지내는 시간보다는 로봇 친구와 지내는 시간이 많아질 수도 있는데 로봇 친구와 소통하지 못할 아이들은 왕따와 외로움에 괴로워해야 할 것이다.

코딩 교육은 스크래치나 엔트리 등과 같은 특정 소프트웨어 사용법을 배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치 그것은 언어가 영어와 한글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님과 같다. 스마트폰 앱과 모바일 게임, 사진 포토샵과 동영상 클리핑도 모두 코딩으로 상징되는 스마트 사회의 언어들이다.

어른들, 부모들, 학교들, 정치가들, 특히나 교육학자들에게 소름 끼치는 위기가 닥쳐왔다. 피할수 없는 위기이다. 정면 대응하고 아이들과 함께 배우지 않으면 지구의 어느 한구석 혹은 우주의 어느 한 별이 빅뱅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곳이 우리가 있는 이곳이 아닐지는 아무도 장담을 못한다. 코딩 교육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훈련시키는 일이 아니라 미래의 언어를 배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