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미 교육학박사, 중학생과 고등학생 자녀를 키우고 있다.

 

새 정부의 고위공직자 임명을 앞두고 청문회가 한창이다. 새 정부가 제시한 ‘논문 표절,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병역 면탈, 세금 탈루’라는 5대 인사원칙을 모두 만족하는 인사는 거의 없을 것 같다는 의구심이 현실이 되고 있다.

야심 차게 제시한 인사원칙은 우리 사회 도덕성의 수준을 우리 스스로 드러내며 자괴감에 빠지도록 하는 얄궂은 잣대가 되어버렸다. 공격하는 자나 방어하는 자 누구도 이 기준에 절대적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없는 채, 면피 혹은 정치적 이익만을 꾀하는, 우스꽝스럽고도 안타까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고위공직자 임명 과정을 지켜보면서 도덕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어떤 사람이 도덕적인 사람일까? 5대 인사원칙을 만족하는 사람이 도덕적인 사람인가? 다섯 가지 기준을 다 만족하는 사람은 없는가? 물론 이 다섯 가지 기준을 만족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 중의 태반은 고위공직자의 자리에 오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역량을 가진 사람일 것 같다. 이렇게 추측을 하는 것을 보니 나도 어느새 현실에 대하여 냉소적인 인식을 하게 되었나 보다.

사람들은 힘을 갈망한다. 대체로 사람들이 갈망하고 원하는 힘은 소유에서 생긴다. 많이 가질수록, 많이 소유할수록 더 큰 힘이 생긴다. 힘이 있는 자는 특권을 누리며 이익을 취한다. 소유를 늘려가며 힘을 더욱 과시한다. 일부 특권층의 불법이 폭로될 때면 사람들은 분노를 터뜨린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동전의 양면이다. 자신들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과 비교의식을 공분(公憤)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가진 자는 더 가지려고 하고 갖지 못한 자는 갖기 위해 애쓴다. 조금이라도 더 가진 자는 덜 가진 자보다 우위를 선점한다. 어떤 사람은 우월해지고 어떤 사람은 비굴해진다. 모든 인간관계는 갑과 을의 관계로 환원된다.

소크라테스 앞에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당돌하게 말했던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의 모습과 흡사하다. 트라시마코스를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대답하긴 어려울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다섯 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하게 한 상태 그 자체를 도덕적으로 훌륭한 상태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위장 전입을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았고, 부동산 투기를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았으며, 세금을 탈루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도덕적인 행위를 한 것이다.

그 행위의 뿌리는 마음이다. 자신의 힘을 남용하지 않으려는 마음, 또한 자신이 가진 힘 이상을 갈망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도덕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도덕성은 내면의 힘의 문제다. 반면 트라시마코스는 외부로부터 가져온 것에서 자신의 힘의 근거를 찾는다.

소유에서 생기는 힘은 화려하게 스러져 가는 불꽃놀이와 같다. 가지면 가질수록 현재 가진 것의 값어치가 작게 느껴지기 때문에 더 큰 것, 더 많은 것을 갖고자 하지만, 그럴수록 만족감은 떨어지고 피로감만 쌓이게 된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두려움과 경계심 때문에 주위에 대하여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언젠가 가진 것이 다 닳아 해어진 옷과 같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불꽃놀이가 끝났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내면으로부터 오는 힘은 화르르 타올랐다가 순식간에 스러지는 불꽃놀이가 아니라 그 수명을 다하도록 같은 밝기를 지속하는 촛불과 같다. 내면의 힘은 그가 어떤 것을 소유했는지와 상관없이 그를 자유롭게 해 주고 충족적인 존재가 되게 해 준다.

비교의식에서 해방될 때 내면의 힘이 생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 자유와 기쁨을 얻을 수 있다. 상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

절대적인 기준은 절대적인 존재에게서 오는데, 아이에게 절대적인 존재는 부모와 교사이다. 부모와 교사는 이 땅에서 창조주의 대리자로 위임받은 자들이다. 자라나는 아이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줄 수 있는 존재는 부모와 교사밖에 없다.

부모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으며 자신의 존재가 수용되는 것을 경험할 때, 아이들은 자기 자신을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고유한 목적의 존재로서, 기쁨의 존재로서 여기게 된다. 또한 교사를 통하여 자신의 성장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받으며 자랄때 아이는 실제적인 성장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반성해 본다.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먹고살 것은 있어야지···.”

너무 천박했다. 우리는 이 정도 존재들이 아니다. 우리는 더 고귀하고 더 아름답고 더 유능한 존재다. 겨우 밥 벌어 먹고살 만큼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십수 년 전에 방영했던 TV 프로그램에서 말리 홀트(Molly Holt) 여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녀는 한국전쟁으로 고아가 된 8명의 한국 아동을 입양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 ‘홀트아동복지회’라는 기관을 만들어 복지사업을 펼치고 있는 미국인이다.

다큐멘터리속에서 카메라 앵글에 잡힌 그녀의 작은 방의 풍경이 참 인상적이었다. 최소한의 옷가지와 가재도구, 그리고 낡은 재봉틀이 그녀의 전 재산이었다. 그녀는 미소를 띠며 그것으로 충분하다며 만족해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훌륭한 일로 평생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조금 웃음이 납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그냥 즐겁게 한 것뿐이에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해 준 그들에게 오히려 감사하지요.”

홀트 여사의 내면의 힘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 땅에 보내졌다고 믿는 그 자리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고 즐거움을 누리는 삶을 살았다. 자신의 힘을 남용하지 않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더 큰 힘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진정 자유인이었다.

홀트 여사가 그녀의 부모님으로부터 자유롭고 즐거운 삶의 비법을 전수받아 평생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듯이, 우리도 우리 자녀들이 내면의 힘을 통해 진정으로 도덕적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부모 된 우리가 먼저 마음의 자유를 누리며 살자.

이렇게만 산다면 먼 훗날 우리 아이들이 고위공직자가 되기 위한 청문회장에 서게 되었을 때, 다섯 가지 기준만이 아니라 그 어떤 기준이라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으로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