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여행·사진 작가

살다 보면 누군가에게 적개심의 대상이 될 때가 있다. 그 적개심을 무시하지 못한다면 누군가는 있지도 않은 잘못을 자기 안에서 찾고 누군가는 그걸 남의 탓으로 돌려 버린다. 문제는 그 적개심의 이유가 개인적 잘못에서 비롯되지 않았을 때다. 이런 경우 내 상황을 탓하기보단 측은한 마음이 먼저 가슴을 꽉 채울지 모른다.

철렁하고 괜히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당혹감, 그래서 더 미안해지는, 그렇다고 가까이 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은, 툭 하고 꺾이는 무릎을 힘겹게 지탱해야 했던 순간.

괜히 미안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사람이 있었다. 그와의 인사는 경쾌하게 시작됐다. 선한 미소로 이름을 나누고 손을 맞잡았다. 그러다 서로의 국적을 묻는 말에 부드럽게 휘어져 있던 그의 눈가가 미묘하게 굳어졌다.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흔들리는 눈빛을 숨기려는 듯 재빠르게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국적은 미국이었고, 생김새는 나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의례 하던 인사처럼 별 특별함 없이 보였을 우리의 인사는 미묘하게 흔들리며 끝을 냈다.

1박 2일간의 미얀마 시뽀 트레킹(미얀마 북서쪽에 위치한 시뽀에서 출발하는 이 트레킹은 미얀마 여행의 백미라할 만큼 아름다운 풍경뿐만 아니라 현지문화를 체험할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은 그렇게 시작됐다.

트레킹의 시작은 가이드를 따라 우리네 그것과 다른 바 없는 푸른 논 사이를 가로지르며 시작됐다. 넓게 펼쳐진 논 뒤로는 아스라이 길게 뻗은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이리저리 꼬인 길을 하나씩 풀어 가며 우리 팀은 산 속으로 스며들었다.

가늘게 나 있는 길 위에 바나나가 주렁주렁 달린 나뭇가지가 부러져 있었다. 가이드는 바나나 껍질을 벗겨 내게 내밀었다. 달콤한 바나나 맛을 상상하며 겁 없이 한입 크게 베어 문 내 혀는 한동안 떫은 맛을 지워내야 했다.

함께 트레킹을 나선 우리 팀 모두는 이 모습에 크게 웃을 수 있었다. 길은 내 키를 훌쩍 넘긴 옥수수밭 중간을 가로질러 가파른 언덕으로 이어졌다.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나선 작은 마을을 지났고 여기서 차를 마시며 쉴 수 있었다.

차를 마시고 다시 시작된 트레킹에서 난 어색한 인사의 상대였던 카인과 단둘이 걸음을 옮겼다. 일행은 멀찌감치 떨어져 앞서 나갔고, 난 카인의 속도를 맞추며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이런저런 궁리를 했다. 마치 첫 데이트에서 상대의 취향을 파악하기라도 하듯 안절부절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카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질문이 무엇인지 생각지도 않고 난 그가 말을 먼저 붙여준게 무척 고마웠다. 그런데 그의 입에선 “Korea Army Soup”이란 표현이 나왔고 난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 단박에 깨닫지 못해 적잖게 당황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부대찌개를 말하는 거였다. 처음 만나 서로에게 하는 첫 질문이 부대찌개에 대한 것이라니. 첫 질문부터 이야기가 삐걱대지 않을까 해 군 부대 등에서 나온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음식의 역사를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소상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난 조금은 슬픈 이야기라고 했다.

카인은 한국의 개고기 문화에 대해서도 질문했다. 왠지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질문을 계속 받는 것 같았지만 카인은 자신을 미국에서 태국 음식 등을 만드는 셰프라고 소개하며 음식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직업적 호기심에 따른 질문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는 내 답변에 반문하거나 추가 질문을 하진 않았다. 단지 셰프의 삶이 고달프다고 했고, 여행이 휴식과 음식에 대한 영감을 준다고 말했다.

난 그의 말 사이 이에 한국을 좋아하지 않냐고 여러 번 묻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질문을 삼키고 삼켰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곳을 만났다. 카인은 여기서 자기 돈으로 파인애플을 사서 모두의 갈증을 해갈해 주었다. 미국인 답지 않은 행동이었고 그에 대한 궁금증이 조금 더 증폭됐다.

우리는 여기서 2시간 정도를 더 걸어 시뽀를 출발한 지 6시간 만에 산속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샨족 마을에 여장을 풀었다. 거실 한가운데 화덕이 있는 샨족 전통가옥은 이들의 삶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창살 없는 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마을 풍경만큼이나 정겹고 따스했다.

집의 가장 어른은 화덕 위에 주전자를 올리고 차를 만들어 내왔다. 해가 뉘엿뉘엿할 때쯤 동네를 한 바퀴 돌자며 가이드가 모두를 불러 모았다. 카인은 동네를 돌기 전에 가게에 들를 수 있냐고 물었다. 그는 사탕과 공책 몇 권을 사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만나는 아이마다 그것들을 나눠줬다.

마을을 돌고 나선 화덕 앞에 빙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기다렸다. 메뉴는 샨족들이 매일 먹는 가정식이었는데 우리네 나물 반찬과 비슷한 게 많아 입맛에 잘 맞았다. 저녁을 먹고는 마당에서 가볍게 맥주를 한잔하기로 했다.

온기로 가득했던 하늘은 어느새 초롱거리는 별빛 아래서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트레킹으로 열이 오른 몸이 맥주 한 잔과 더불어 서서히 식는 느낌이었다. 긴장이 풀리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난 카인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쫑긋했다.

그는 완벽한 미국 영어를 구사했고, 사고방식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피부색은 일본이나 한국, 중국 사람이라고 해야 맞았다. 카인은 유대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두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일본 음식 등 아시아 음식이 친숙하다고 했다. 매운 음식을 좋아해 한국의 고추장 또한 좋아한다고 했다.

“그럼, 카인! 태어난 곳도 미국이야?”

난 그와 만나 하루를 보내며 목 언저리쯤에 계속 걸려있던 가시 같은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순간 카인은 나와 인사를 나누던 그때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 같은.

사람의 관계에서 육체적 거리가 심리적 거리와 항상 비례하진 않는다. 사실 이 거리가 비례하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게 바로 인간관계다. 두 가지 거리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던가. 난 내게 표정을 구기고 말았다.

“그게, 사실 난 한국에서 태어났어. 그리고 아주 어렸을 때 미국에 입양된 거지.”

카인의 대답은 짧고 분명했다. 그리고 미묘하게 흔들리던 눈빛을 더는 내비치지 않았다.

다음날 오후 트레킹 마지막 지점에서 삼각대를 세우고 카메라를 올렸다. 단체 사진 한 장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난 각자의 SNS 계정으로 사진을 보내주기로 했다. 며칠 후 사진을 전송했다.

카인은 내 사진 전송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질문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의 만남은 내가 한국인임을 밝힌 그 순간부터 결론이 나 있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카인이 한국을 떠날 때부터 우리의 관계는 이미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