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학교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은 꽤 오랫동안 강조됐다. 학교교육과정이 자율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을 어떻게 실현할지 진지한 논의나 근본적인 고민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학교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에 대한 논의는 ‘학교 단위 교육과정 개발(School–Based Curriculum Development: SBCD)’ 운동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SBCD는 교육과정 운영과 관련하여 최소한 두 가지를 전제한다.

첫째, 톱다운(Top-Down) 또는 중앙집중적인 교육과정 의사결정 방식은 문제가 있기에 이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

둘째, 교사 등 학교 관계자들이 협력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울 교육 프로그램을 결정해야 한다. SBCD는 교육과정에 대한 의사결정은 학생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 관계자가 아니라 학생들과 가까이에 있는 학교 관계자들이 수행해야 함을 전제한다.

학교교육의 최대치와 최소치

그렇다면 국가교육과정의 오랜 전통을 지닌 우리나라에서 학교는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을 얼마나 누릴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국가교육과정이 학교교육을 어느 정도나 규제하려고 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국가교육과정이 학교교육의 최대치(Maxima)를 제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최소치(Minima)를 제시하고 있는가? 학교교육의 최대치를 제시하는 국가교육과정 체제에서는 학교가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

반면에 학교교육의 최소치를 제시하는 국가교육과정 체제에서는 학교가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상당히 많아 보인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나라 국가교육과정은 학교교육의 최대치를 처방하고 있다.

국가교육과정에는 초·중등학교 교육 목표, 내용과 방법뿐만 아니라 성취기준까지 세밀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런 국가교육과정 지침에 따라 학생을 교육해야 하기에 학교가 교육과정에 자율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다.

물론 우리나라 국가교육과정에서도 학생 선택 과목이 일부 제공되며, 단위학교가 교과 수업 시수의 증감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는 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선택지로는 학교교육과정 운영의 실질적인 자율성을 보장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현 국가교육과정 체제에서 학교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은 필수품이라기보다는 장식품의 성격을 지닌다. 현 국가교육과정은 여전히 대부분 학생이 대부분 내용을 같은 방법과 속도로 학습하고 평가받도록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학교교육의 최대치를 처방하는 국가교육과정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모든 학생이 공통기준에 따라 교육받는 것이 이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공통의 지식 또는 감각 즉 상식(Common Sense)을 가진 평균인을 길러내기 위해서 학교는 모든 학생에게 같은 내용을 같은 방법으로 가르치고 평가했다.

왜냐하면 평균인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학교 간의 차이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 국가교육과정은 학교교육의 최대치를 처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평균인을 길러내는 교육에서는 학교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보다는 공통성이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창의인을 기르기 위한 개인 맞춤형 학습

우리는 요즘 디지털화, 빅 데이터, 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다양한 담론을 대면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미래 사회에서는 공통의 지식 또는 감각을 지닌 평균인보다는 자신의 꿈과 끼를 지닌 개성인 또는 창의인을 더 필요로 한다.

이런 연유로 세계의 많은 혁신적인 학교들은 학생 개개인의 관심이나 재능, 진로계획 등에 맞게 교육하는 개인 맞춤형 교육을 하고 있다. 아마도 미래의 학교에서는 교사의 적극적인 교수 활동보다는 학생의 주도적인 학습 활동, 즉 ‘개인 맞춤형 학습’이 교육의 큰 흐름을 형성할 것으로 예상한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히게 된다. 개인 맞춤형 학습이 국가교육과정 체제를 필요로 하는가? 혹은 국가교육과정 체제에서개인 맞춤형 학습이 가능한가?

수많은 학생의 관심과 필요, 진로계획 등에 맞게 교육하기 위해서는 SBCD에서처럼 교육과정 의사결정 권한을 국가로부터 학생들을 매일 대면하면서 교육하는 단위학교로 이양해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단일한 국가교육과정 체제에서는 수많은 학생의 개인차를 고려한 교육 처방 즉 개인 맞춤형 학습을 위한 교육 처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 맞춤형 학습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교육과정 운영에 대한 권한을 국가에서 단위학교로 이양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국가는 교육과정 결정 권한을 학교로 어느 정도 이양해야 하는가? 필자는 국가교육과정이 학교교육의 최소치만을 처방하도록 국가교육과정 권한의 상당량을 학교로 이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학생들이 필수로 배워야 하는 교과목 수를 대폭 줄이고, 둘째, 필수 과목도 9년 또는 12년 동안 계속 반복하여 공부하도록 하기보다는 2년, 3년, 4년, 6년 등 최소한으로만 지정하며, 셋째, 가르쳐야 할 내용 항목이나 성취수준 수도 대폭 줄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단위학교가 교육과정 운영에 자율성을 가지고 국가교육과정의 토대 위에서 학교현장과 학생들에게 적합한 교육과정을 추가로 운영하는 자율성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김재춘 영남대 교수는 대통령비서실 교육비서관과 교육부 차관, 한국교육개발원 원장 등을 거쳤다.>

학교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

우리나라에서 학교 단위 교육과정 편성을 법제화한 지 25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지난 20여 년 동안 학교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을 특히 강조했다.

그러나 대부분 학교가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을 발휘할 여지를 가지지 못했다. 개정을 거듭할수록 국가교육과정 문서 분량은 더욱 늘어났기 때문이다.

교육 내용과 방법의 구체화, 더 나아가 성취기준의 구체화라는 명분으로 국가의 학교교육에 대한 통제와 관리 지침이 지속해서 늘어났다. 그러면서도 이율배반적으로 학교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 또한 꾸준히 강조해 왔다.

학교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을 진정으로 존중하려면 SBCD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주자. SBCD의 필요조건은 학교교육의 최소치만 처방하는 국가교육과정 체제를 도입하는 것이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합한 개인 맞춤형 학습 지원이 가능하도록 교육과정 의사결정에 대한 국가의 권한을 과감하게 단위학교로 이양하자. 그래야만 학교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이라는 말이 미사여구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로 하는 개인 맞춤형 학습도 시도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