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지준호 기자] 서울호서전문학교(이사장 이운희) 주1일 관광경영학 전공에서는 학생들이 관광경영학 학사학위와 더불어 컨벤션기획사 2급 자격증을 병행해 취득할 수 있다. 또 과정평가형 컨벤션기획사 2급 취득을 통해 조기 학사학위 취득도 가능하다. 일주일 1일 수업으로 직장인, 관광종사원들의 관광경영학 학사학위 취득 및 대학원진학이 가능한 서울호서전문학교 주1일 관광경영학 전공은 1월 28일 고용노동부에서 공고한 2020년도 과정평가형 컨벤션기획사 2급 자격 교육 · 훈련과정에 최종 승인을 받았다.과정평가형 자격제도는 직무능력
정밀 진단은 완치의 근간이자 치료 효율성을 높이는 열쇠라 할 수 있다. 특히 비뇨기 질환인 전립선비대증의 경우 비가역적인 변화가 특징이기 때문에 세밀한 진단 절차가 필수다.전립선비대증은 30대 중반에 조직학적인 전립선 변화로 병증이 시작된다고 알려져 있다. 통계에 따르면 60세 남성 10명 중 6명이 전립선비대증을 앓고 있을 만큼 고령층에게 흔히 발병하는 비뇨기 질환이다. 문제는 이러한 특성 때문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연스레 생기는 과정의 하나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이다.전립선비대증을 방치하면 배뇨 장애가 심각해져 삶의 질을 급
2019년 다문화 학생 수는 12만2212명. 학생 수가 줄고 있는 반면 다문화 학생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다문화 교육의 정의 및 내용에 대한 구체적 합의와 법령체계는 미흡한 상황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문화가 공존할 때 창의적 문명의 꽃이 피어나고, 문화 인류학과 다문화에 대한 폭넓은 인식을 갖춘 사람이 미래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방탄소년단(BTS) 노래에 민속춤이 어우러지듯 다문화는 함께 공존하고, 어우러짐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밑바탕이 된다. 는 우리가 지나쳤던 다양한 문화를 다문
지금의 구로동은 조선 초기부터 조선 말, 일제 시기 중반까지 줄곧 경기도 등에 속해 있다가 광복 뒤인 1949년 ‘구로리(里)’라는 이름으로 서울시 영등포구에 편입된 뒤 1950년 서울시 조례에 따라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구로동의 이름은 ‘아홉(九)의 늙은이(老)’라는 뜻이다. 이 동네에 원래 아홉의 노인네가 살았다는 얘기인데, 실제는 어떤 모습일까. 그 정답을 얘기해 줄 만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름을 붙이는 데에는 대개 유래가 있는 법이다. 아홉의 노인네를 뜻하는 구로(九老)라는 말의 원전은 아무래도 과거의 중국, 그중
우리말로는 도야미리, 되미리라고 했던 곳이란다. 이름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정설이 없다. 우선은 마을 일대의 들판에 억새풀 종류인 새나무가 많아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다른 하나의 설은 야산의 모습이 마을 뒤를 성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또 그 마을 형국이 국도에서 돌아앉은 모습과 관련 있다고 하는데, 딱히 이해가 가지 않는 풀이로 보인다.상도천이라는 하천 한쪽에 있던 도림리가 일제 때인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됐는데, 다른 한쪽에 있던 도림리 일부가 나중에 서울의 행정구역 안으로 들어오면서 ‘새 신(新)’
서울시가 여의도 권역을 개발하면서 함께 번창의 흐름을 탔던 곳이다. 값싸고 맛있는 음식이 많았고, 이곳을 거쳐 가는 인구가 많아 서울 서남 권역에서 가장 유명해진 지역이다. 한강에 붙어 있어 포구를 의미하는 포(浦)라는 글자가 들어 있다는 점은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앞의 ‘영등(永登)’이 문제다. 지명을 풀어놓은 사전을 들여다봐도 이 글자의 조합을 자신 있게 설명하는 곳은 없다. 그러나 지명만으로 볼 때 이 ‘永登(영등)’이라는 글자의 조합은 곳곳에서 나타난다.먼저 경남 거제도에도 있었다. 임진왜란 또는 그 전의 기
경상도 사투리에 ‘대끼리’라는 말이 등장한다. 요즘 젊은 친구들의 표현대로 하자면 ‘짱~’이다. 아주 좋은 것, 훌륭하기 그지없는 것, 대단하게 좋은 것, 말로 형용키 어려울 정도로 좋은 것…. 그래서 흐뭇한 말이다. 단지 발음에 된소리 ‘끼’가 들어가 속어의 느낌을 풍기므로 맘껏 말하기가 좀 뭐 하지만.이 말 ‘대끼리’의 정체는 대길(大吉)로 보인다. 우리 설이나 입춘이 다가오면 대문에 걸어두는, 그래서 우리에게 어딘가 눈에 익은 한자 표현 말이다. 바로 ‘입춘대길(立春大吉)’이다. 입춘은 새해를 맞이해서 처음 다가오
이곳에는 외곽을 흐르는 두 하천이 있다. 중랑천과 우이천이다. 월계동은 그 둘로 바깥을 형성하고 있는데, 두 하천 사이에 있는 모습이 멀리서 바라볼 때 꼭 반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우선은 동네 이름이고, 다음은 월계(月溪)라는 역명이다.우리가 이 역에서 주목할 한자는 달을 가리키는 月(월)이다. 이 글자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다. 1월에서 12월까지, 한 해를 이루는 달의 단위에 들어가 있는 글자여서 우선 그렇다. 그리고 밤의 허공에 떠서 때로는 지구를 휘영청 밝은 빛으로 비추는 그 달을 모를 사람은 당연
석관동(石串洞)과 월계동(月溪洞)의 경계에 있어 둘 안에서 한 글자씩을 따와 지은 역명이다. 석관동(石串洞)은 이곳 동네의 남서쪽에 있는 천장산(天藏山)의 지맥을 따라 검은 돌이 차례 때면 상에 오르는 경단 꿰어 있는 것처럼 늘어섰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돌(石)과 곶이(串)가 합쳐진 구성이다.이곳 석계(石溪)역에서는 우선 돌을 가리키는 石(석)에 주목하는 것이 좋겠다. 다음 역이 바로 월계(月溪)라서 다음 글자 溪(계)를 풀기도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석수(石水)라는 역에서 이 石(석)이라는 글자와 다시 만난다. 그때
‘높은 절’, ‘번댕이’라는 두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왕조 말까지 이런 명칭의 두 말이 합쳐졌다고 하는데, 그래서 생긴 이름이 번대방리(番大方里). 이어 동(洞)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현재의 대방(大方)이라는 명칭이 나왔다고 한다.번댕이는 순우리말로 보이지만, 일부 조사에 따르면 이 역시 한자어에서 나왔음을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대방동 옛 공군사관학교 자리에 있던 연못이 번당(樊塘)이었는데, 이를 우리 식으로 발음하다 번댕이라는 명칭으로 불렸고, 결국 글자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번대방리’, 그마저 후에는 글자를 줄여 결국
관련 사전에 따르면 조선 때 도둑을 막기 위해 각 마을마다 설치한 게 이문(里門)이라고 한다. 조선 세조(世祖) 때에 지금 서울의 각 마을에 설치했다는데, 그 기능은 야간에 통행하는 사람들을 검문하는 데 있다고 했다. 그런 이문(里門)이 있던 장소가 지명으로 변한 곳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지금의 서울 이문동(里門洞)이다. 신이문(新里門)이라는 역명은 지하철 개통 때 동네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서울의 종로구 인사동, 중구 남대문로 조선호텔 입구, 태평로, 성동구 상왕십리, 마포구 염리동 등에도 이문(里門)의 터가
마땅한 설명이 없다. 이 지명에 관해서도 말이다. 해오라기가 많아 그를 가리키는 한자 鷺(로, 노)를 사용했다는 설명이 있고, 강이나 바다를 사이에 둔 땅이라는 뜻에서 우리말 식으로 한자를 전용한 량(梁)을 붙였다는 얘기가 있다. 앞의 해오라기를 가리키는 鷺(로)라는 글자 대신에 ‘드러내다’ ‘이슬’의 새김이 있는 露(로)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지금은 해오라기의 鷺(로)를 쓴다.노량진을 순우리말로 ‘노들강변’이라고도 부른다고 하지만 이 역시 뜻이 분명치 않다. ‘노들’의 앞 글자 ‘노’가 해오라기라는 의미의 한자
한국이나 중국이나 이 용산(龍山)이라는 이름을 단 곳은 매우 많다. 한국에만 해도 서울 용산을 비롯해 경상도와 충청도 등 곳곳에 등장한다. 특히 산이 발달한 곳에는 반드시 이 용(龍)에 관한 관념이 따라 붙기 마련이다. 한반도 50배 면적에 조금 못 미치는 중국에도 사정은 같다.우선 산의 생김새가 상상의 세계에서나 그리는 용과 매우 닮았다. 구불구불하게 내려오는 산의 흐름, 우리는 이를 흔히 산맥(山脈) 또는 지맥(地脈)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모양새를 용의 생김새와 일치시키는 버릇이 있다. 산이 품고 있는 암석 등 바위의 흐름은 용의
일반적으로 지명에 영(營)이라는 글자가 붙으면 군대가 머물렀던 곳을 말한다. 따라서 남영이라고 하면 서울 남쪽의 군대 주둔지였다는 뜻이다. 조선 때 군이 머물렀던 정확한 위치는 지금 찾기 힘들다. 단지 조선 말, 또는 구한말 무렵부터 이곳을 남영으로 불렀던 점은 분명하다.군이 주둔하는 기지를 직접적으로 군영(軍營)으로 적는다. 영문(營門)이라는 단어도 군대 주둔지를 가리킨다. 군대가 행군 등을 하다가 밤을 보내는 일이 숙영(宿營)이다. 진을 펼치고 있는 군대를 우리는 진영(陣營)이라고 부른다. 원문(轅門)도 군대의 정문이다. 전쟁터
영화 ‘왕의 남자’로 일반인에게 다시 화제로 떠올랐던 연산군(燕山君)의 부침(浮沈)과 관련이 있는 동네다.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廢妃) 윤씨(尹氏)가 세상을 뜬 뒤 만들어진 묘가 회릉(懷陵)인데, 그 소재지가 바로 이곳 회기동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산군은 폭정으로 지탄받다 곧 임금 자리에서 쫓겨난다.그 뒤 폐비 윤씨가 묻힌 묘소의 존칭인 릉(陵)을 깎아 내려 회묘(懷墓)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가 그 懷(회)라는 글자가 어려웠던지, 그에 비해 한결 쓰기 쉬운 회(回)를 붙여 회묘(回墓)로 적고 불렀단다. 그러나 동네 이름에 이미 죽은
조선시대에 일찌감치 생긴 이름이다. 본래는 신라 말엽에 창건한 청량사(淸凉寺)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한때는 중앙선 발착역이 있어 강원도 일대로 떠나는 여행객들로 늘 붐비던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고등학생과 대학생 등 청춘남녀들이 경춘선을 타고 1박2일 등의 이른바 MT를 떠나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던 곳이기도 하다. 1970~80년대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은 대개 이 청량리역 광장 앞의 시계탑을 약속 장소로 해서 만나 여행을 떠났다.이곳은 또 지하철 1호선의 시발역이기도 하다. 1974년 개통한 지하철 1호
제사(祭)를 지내는 터(基)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자료를 찾아보니 지금의 제기역 인근에 선농단(先農壇)이 있었다. 선농단은 전형적인 농업 국가였던 조선이 농업의 신이라고 알려진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사를 올려 백성들의 농사를 장려코자 했던 곳이다.풍년을 기원하는 제사, 가뭄에 비를 내려달라고 비는 기우(祈雨)의 제사, 가을에는 왕이 벼 베기를 참관하는 행사 등이 이곳 선농단에서 열렸다고 한다. 풍년을 기원하는 선농제가 열리면 왕조는 이 지역의 나이 많은 노인들을 함께 참석시켰다고 하는데, 행사가 끝난
한자 뜻 그대로 풀자면 ‘새로(新) 만든(設) 동네(洞)’라는 의미다. 실제 이 지역은 조선시대 서울을 가리켰던 한성부(漢城府)의 동쪽 지역에 있던 숭신방(崇信坊)에 새로 만든 마을인 까닭에 그 이름을 얻었다. 당시의 이름은 ‘신설계(新設契)’였다. 왜 마을 이름에 ‘계(契)’가 들어있을까 궁금해진다.이 글자는 사람 사이의 계약(契約)을 의미하는 한자다. 더 나아가 일정한 규약을 만들어 공동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 또는 그런 행위를 일컫기도 한다. 옛 마을에서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 돕고 살아가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초기 사회조직
동묘는 우선 동관왕묘(東關王廟)의 준말이다. 동쪽(東)의 관왕(關王)을 모신 사당(廟)이라는 뜻이다. 이 관왕(關王)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잘 아는 역사적 인물이다. 유비(劉備)와 의형제를 맺은 뒤 활약했던 그의 장수 관우(關羽)다. 그가 왜 신으로 모셔지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제법 잘 알려져 있다.우선 중국의 신앙이 드러내는 특징 때문이다. 고래로부터 중국은 현세(現世)에서 강한 힘을 행사했던 인물은 죽어서도 힘과 권력을 지닌다고 믿어왔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이 關羽(관우)다. 그는 충성과 의리의 인물이면서도 삼국시대(三國時
멀리 돌아가 이를 필요가 없다. 동쪽의 대문이라는 뜻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의 옛 서울에는 사대문(四大門)이 있었다. 지금도 도심 한가운데에서 일부가 잘 버티고 서있는 이 사대문을 자세히 보면 누각 높은 곳에 현판이 걸려 있다. 사대문의 ‘본명’이다. 동대문, 남대문, 서대문 등은 부르기 좋게 만든 호칭에 불과하다.이 동대문의 진짜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몇 해 전에 화풀이 노인네의 방화로 불에 탔다가 최근에 복원한 남대문의 본명은 ‘숭례문(崇禮門)’이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서쪽에 버티고 있던 서대문의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