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초보교사의 메모, 그리고 30년 교사의 다짐

충남 서령고.(사진 제공=최진규 교사)

[에듀인뉴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이 잔잔하게 흐르는 아침입니다. 따뜻한 물에 갓 갈아 넣은 원두향이 피아노 선율을 타고 퍼져오며 잠시나마 심연의 세계에 빠져봅니다. 

교직에 입문한지 30년째 접어들면서 사실 요즘은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고민을 하고 있었거든요. 

늘 같은 장소에서 같은 분들과 함께 해마다 되풀이 되는 프로그램을 갖고 알콩달콩하는 것이 때로는 소꿉장난처럼 깨를 볶는 재미도 주지만 반복이 주는 단순함에 길들여지다 보면 무료함에 빠지기도 한답니다.

사람 나이 지천명을 넘기면 갱년기가 찾아와 극심한 사춘기를 겪듯 일상의 반복이 쌓이면 권태기 또한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교직의 특성상 같은 일이 이어지기에 연륜이 쌓일수록 나태해지고 그러다보면 현실을 빌미로 편안함에 안주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마도 새로운 감성을 자극할 만한 촉수를 잃었거나 아니면 누군가를 통해 잠자던 과거를 일깨워 환경을 바꾸는 선한 영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

얼마 전 연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니, 책상 위에 과자를 비롯해 여러 가지 간식을 넣은 비닐봉지에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습니다.

최진규 선생님!
저는 오늘, 선생님 연수 듣고 많이 감탄하고, 반성하고 배웠습니다. 나이만 많지 초보교사라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열정도 많으나 무엇을 어떻게 배우고 채워나가야 할지 헤매고 있었는데…선생님의 열정, 노력, 실천을 보면서 주먹을 불끈 쥐어봅니다. 선생님 같은 분과 함께 근무하게 되어 매우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열심히 배우고, 뒤를 따라 가겠습니다.^^

코로나 19로 등교가 연기되고 온라인수업이 진행되면서 선생님들과 공유하고 싶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인문계 고교이다 보니 아이들 진학이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선생님들 간 소통과 협력이 필요하지요. 

등교가 자꾸 늦춰지면서 선생님들의 피로감이 쌓이는 시점에서 이때 우리가 준비해 두면 아이들이 학교에 돌아왔을 때 정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연수 날짜가 잡히고 발표 자료를 정성껏 만들었습니다.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누구나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겠지만 특별히 대학 진학과 관련된 노하우는 꽁꽁 숨겨두면서 들키지 않으려 하고 어쩔 수 없이 공개하더라도 핵심이 아닌 변죽만 울리는 내용이 많지요. 

그것이 인지상정이기는 하지만 그럴수록 학교는 벽이 만들어지고 서로간의 이기심으로 인한 부작용은 고스란히 학생들 몫으로 돌아갑니다.

제가 진행한 연수는 ‘대학이 원하는 학생부 기록의 이해와 실제’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학생부종합전형과 관련된 교재나 강의는 수 없이 많지만 실제로 대학은 학생부를 어떻게 보고 또 그에 따른 일선 고교의 학생부 기록은 어떻게 할지에 대한 내용을 저의 경험을 통해 세세히 말씀드리고 또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선생님마다 온라인 강의를 제작하여 편집하고 올리는 과정이 만만치 않아 시간을 낸다는 것이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만들어진 연수이기에 더더욱 소중했습니다.

한 시간 남짓 연수가 끝나고 선생님들의 박수가 귓가에 와 닿았습니다. 그동안 이런 저런 이유로 여러 가지 연수가 있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번번이 등교가 연기된 상황이었기에 분위기가 숙연했고 그래서 박수를 칠 만큼 마음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연수 내용 속에 선생님들께서 평소 고민했던 부분을 어떻게 녹여 해결할 지에 대한 방법이 공감대를 이룬 듯해 내심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포스트잇에 적힌 글을 읽으며 후배 선생님의 고마운 마음을 새기던 중 ‘나이만 많지 초보교사’라는 말에 살짝 의문이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같은 재단 중학교에 계셨던 분인데 가끔 뵈면 이제 막 교직에 입문한 새내기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올해 초 인사에서 고교로 발령받아 이동하셨고 가끔 마주쳐도 늘 미소를 지으며 밝게 인사하는 오월의 햇살 같은 분이었습니다. 

중학교에 근무하다 고교로 오시면 아무래도 입시에 대한 부담감과 함께 근무 강도도 높아지기 때문에 힘들어 하실 것이 뻔하고 그래서 답답한 마음을 해결할 기회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의 연수가 조금이라도 그런 답답함을 해소할 동기가 되었다면 다행이었는데 귀한 선물(?)까지 놓고 가셨으니 오히려 고마움이 컸습니다.

그로부터 한 주가 지난 뒤쯤 선생님께 가볍게 점심식사를 하자는 문자를 드렸습니다. 혹시 더 필요한 내용이 있다면 도움을 드리고 싶고 또 정성이 담긴 선물에 대한 응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학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생활하는 곳이라 매우 조심스러웠고 예의를 갖춰 식사를 청하는 문자를 드린 것입니다. 다행이도 선생님께서 부담 없이 응해주셨고 그렇게 선후배 간의 허심탄회한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겉으로 본 선생님은, 유복한 가정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을 것이 생각했는데,  저의 예측은 고스란히 빗나갔습니다. 한창 중요한 청소년기에 집안에 우여곡절이 있었고 그로 인하여 어려운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지만 그때마다 선생님이 되겠다는 마음 하나로 힘든 과정도 모두 이겨냈다고 합니다. 

스물 서넛쯤에 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의 문을 두드렸지만 쉽게 열리지 않았고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기회가 주어지면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면서 정교사의 꿈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학창시절부터 뜻을 함께 한 분과 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자녀도 태어나게 되었답니다. 교직에 대한 꿈은 사실 가정을 이루다보면 경제적 부분을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방향을 돌릴 수도 있었는데, 언젠가는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묵묵히 참고 견디며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선생님께서는 기간제로 근무하면서 학부모님의 전화를 받으면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실제로는 아닌 것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놓은 것처럼 느껴져 마음속으로 부담스러웠다고 합니다. 또 그런 자신이 한없이 측은하고 또 세상이 서운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렇게 자녀들을 키워가며 또 언제 정규직이 될지 알 수 없지만 교직에 대한 열정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답니다. 

“선생님,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너무 행복해요. 기간제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정교사가 된지 세 달째지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라는 말씀이 그래서 더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제 나이가 이제 불혹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이든 초보교사라고 쓴 것입니다. 학교 졸업하고 15여년 만에 이룬 정교사의 꿈이기에 정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리입니다. 지금 시작하면 정년까지 이십년 남짓 되는 기간이지만 그때까지 정말 아이들 열심히 가르치렵니다.”

어쩌면 기간제 교사를 거치지 않고 정교사부터 시작한 저 같은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일 수도 있을 터이지요. 그렇게 자격지심에 빠져 꿈을 포기하고 다른 길로 진로를 바꾼 젊은이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포기란 말은 현실의 벽이 거대하여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누구나 갖게 되는 자연스런 현상일지도 모릅니다.

“나이가 들어 정식으로 교단에 섰기 때문에 정말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했는데 막상 어떻게 해야 할 지 막연했던 상황에서 선생님의 연수가 제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라고 소회를 밝히며 무엇이든 배우고 또 아이들을 위해 성심을 다하겠다는 말씀에, 오히려 삼십년 가까이 교단에 선, 그리고 기간제라는 아픈 시간을 겪어보지 못한 제가 부끄럽고 또 그래서 더 후배 선생님들께 잘 해야 되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충남 서령고 조각상.(사진제공=최진규 교사)

1학년 아이들이 등교를 하면 아이들은 정말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교단에 서는 오빠나 형 같은 선생님도 좋겠지만, 십여년 넘게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내공을 쌓은 선생님의 무르익은 지식의 향기와 제자에 대한 사랑의 울림이 더 깊은 교육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교육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소통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는 학생이 소중하고 학생에게는 선생님과의 만남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지요.

귀한 선물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마련한 간단한 점심식사와 짧은 티타임이었지만 오히려 제가 또 다른 선물을 받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걸어온 길이 만만치 않은 힘겨운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꿈을 향해 한번도 포기하지 않고 될 때까지 묵묵히 걸어온 선생님이 내게는 교직을 사랑하고 더 성심을 다해야 할 소중한 가르침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느 때 부턴가 학교 현장에 기간제 교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정규직이 아니기 때문에 겪는 마음고생은 차치하더라도 보장받을 수 없는 장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교육활동에 매진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특히 정규직 교사들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이 더 움츠러들게 하는 아픈 현실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상황이 결코 교육적이지 않다는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학교생활이 너무 행복해요”라는 말이 오래 전 정규직으로 임용되어 교단에 머무르고 있는 선생님들에게는 어떻게 들릴까요? 한 번도 자격지심을 느껴보지 못하고 그냥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적당히 세월과 타협하며 살아온 저 같은 사람에게는 행복을 손에 쥐고도 찾지 못하는 타성을 일깨우는 죽비와도 같은 화두였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학교가 얼마나 소중하고 또 아이들이 저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오늘을 보내고 내일을 맞이하면서 제가 얼마나 열정을 갖고 교단에 임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선생님의 늦은 출발을 마음으로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선생님의 교직생활은 늦은 게 아니라 이제 시작입니다. 저도 그 길을 지켜보면서 느슨해진 마음을 추스르겠습니다.” 

어느덧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이 마음속에서 행진곡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최진규 충남 서령고등학교 교사
최진규 충남 서령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