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헌법 제31조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초국가적 가치중립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현실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교육과 정치는 물과 불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국가와 사회의 실제 작동 모습과 교육 현장에서는 교육과 정치, 정치와 교육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이에, 에듀인뉴스는 '교육을 생각하는 정치, 정치를 생각하는 교육'을 주제로 담론을 형성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아래 글은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이 쓴 시론이다. 교육과 정치, 정치와 교육의 관계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편집자 주> 

한 국가가 운영하는 제도적 교육은 정치와의 불가피한 관계 속에서 발달해 왔다. 고대 그리스의 문화에서 유래된 자유교육의 전통도 원천적으로는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철인왕이 다스리는 귀족정치의 교육제도에서 요구되는 것이었다. 고대 동북아시아의 유교적 전통에서 추구한 군자교육도 왕도정치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교육제도에서 요구된 것이었다. 근대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발달한 공교육제도(혹은 국민교육제도)도 정치적 과정을 통하여 결정된 국가적 가치체제의 실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와 교육은 반드시 어느 하나가 주도하고 다른 것이 종속되는 그런 관계에 있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현실적인 힘의 작용을 보면 정치는 교육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의 원리는 교육을 통하여 실천의 바탕을 형성하고 있다. 정치적 기능이 작용하는 사회 혹은 국가가 어떤 이념적 성격을 지닌 것이어야 하며, 그 대상이 되는 구성원은 본질적으로 어떤 존재로 이해되어야 하는가는 정치적 질문이기 이전에 교육적 질문이다. 국가가 존재하는 데는 구성원의 공통된 이해라는 도덕적 기반이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특정한 삶의 방식이 유지된다. 사람들이 모여 살고 사회를 이루며 나라를 세우는 데는 기본적으로 교육에 의해서 형성된 국민의 자질과 능력이 요구된다.

교육활동은 어느 것이나 자체의 성격상 가치중립적인 것일 수가 없다. 그러면 우리의 「헌법」에 천명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치적 중립성의 요구는 교육의 두 가지 특징으로 인한 것이다.

하나는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의 전통적 특징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교육에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무관한 자체의 본질적 목적이 있고, 그것의 실현을 위한 활동은 정치적 세력의 영향 없이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중립성은 모든 정치적 세력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 세력들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국민교육(civic education)’의 제도적 특징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교육에 작용하는 여러 종류의 정치적 세력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이때의 중립성은 다원적 정치세력의 작용에 대한 중립적 대응을 의미한다.

‘자유교육’의 기본적인 목표는 진리를 탐구하는 성향과 합리적 탐구의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다. 예컨대, 과학자를 훈련한다는 것은 연구의 윤리와 연구의 기술을 익히는 것이다. 물론 진리를 추구하는 방식에는 수없이 많은 것이 있을 수 있다. 어떤 것이든지 간에 자유교육은 특정한 사회적-정치적 상황의 영향을 받지 않고 실천될 수 있기를 요청한다. ‘한국인의’ 물리학과 '중국인의' 물리학이 따로 있을 수 없고, 부르주아 생물학과 사회주의 생물학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진리의 철저한 추구는, 경우에 따라서, 제대로 검토되지 않은 채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존의 신념과 주장을 파괴할 수도 있다.

반면에, ‘국민교육’은 자유교육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 국민교육은 일차적 목적이 진리의 추구나 획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조직 속에서 개개인의 각자가 효율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즉 ‘사회적 개체의 형성’에 있다. 국민교육은 하나의 특수한 정치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보편적일 수가 없다. 국민교육은 결코 자체의 정치적 조직에 반대되는 위치를 취할 수 없으며, 만약에 그 조직을 지지하고 강화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 교육은 실패한 것이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초국가적 가치중립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유교육의전통에서 추구하는 탈정치적 의미의 중립성도 그것이 허용되는 개방적 국가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그 국가의 포괄적 가치체제 속에 다원적 요소가 있고 그 범주 속에서는 선택적 행위를 방해하거나 제약하는 어떤 정치적 세력이 작용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포괄적 가치체제’란 국가가 공식적으로 혹은 비공식적으로 추구하거나 허용하는 가치들을 포괄하는 기준과 체계를 의미한다. 흔히 우리가 ‘헌법적 가치’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정치적 중립성’은 국가의 포괄적 가치체제의 범주 속에서 활동하는 정치적 세력들이 교육적 가치의 ‘공정한’ 실현과정을 방해하거나 편파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국가기능적 규칙은 ‘민주주의의 국가’라고 표방하는 모든 나라에서 유의미한 것은 아니다. 다원적인 가치체제로 인한 선택의 폭이 주어진 국가의 포괄적 가치체제하에서 그 의미를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을 포함한 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요구되는 정치적 중립성에 관한 논의는 가치체계가 여타의 것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더욱 개방적인 ‘자유주의’ 혹은 ‘자유민주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정치적 체제와 그 전통 속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지닌다.

중립적 태도를 지킨다거나, 중립적 위치를 유지한다거나, 중립적으로 어떤 힘을 작용하거나 영향을 미친다고 할 때, 우리는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복수의 가치지향적 세력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정하고 있다. 적어도 민주국가의 경우에 그러한 세력들간의 갈등, 상충, 대립의 문제를 민주적 목적과 절차의 합리성에 따라서 해결하려는 노력이 중립성의 원칙이다. 여기서 경쟁관계에 있다고 하는 ‘세력’이라는 말은 어떤 사회적 목적 혹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작용하는 조직이나 집단의 힘을 뜻한다.

우리의 「헌법」 제 31조 제4항에서 명시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의 원칙은 「교육기본법」 제6조에서 다시 ‘교육은 교육 본래의 목적에 기하여 운영·실시되어야 하며 어떠한 정치적·파당적 기타 개인적 편견의 선전을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이라는 말은 특정 정당의 노선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수 없다는 의미에 한정된 관행이 있고, 예컨대 ‘우파’ 혹은 ‘좌파’로 분류되는 일종의 집단적 정치 세력의 작용을 배제하지는 못하고 있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 관련된 문제는 제도적 정당과 같은 공식적인 정치 세력들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탈정치적 상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교육현장에는 현실적으로 국사교과서의 내용과 관련하여 임의적인 정치세력들이 격렬하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국민교육의 향방을 좌우하는 이데올로기적 주도권의 행사를 위한 정치적 세력들이 헌법적 강령의 해석에서부터 갈등적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갈등적 관계에 있는 정치적 세력들이 국가의 포괄적 가치체제에 대한 이해를 공유해야 하고, 이에 따라서 허용된 가치관이나 노선들은 정치적 조정의 과정에서 기본적인 규칙들을 준수해야 하며, 민주적 절차를 통하여 조정된 정책 혹은 제도는 국가권위에 의해서 확실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