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적 원리'로서의 민주주의… 이해해야
민주주의, '좌-우 대결' 구도가 온전한 이해 방해
아동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친다는 것… 곧 ‘절차적 원리’를 가르치는 것”
절차적 원리 존중한 '자유민주주의', "위기 속에서도 끝내 굳건히 지켜내야"

김정래 (부산교대 교육학과) 교수.
김정래 (부산교대 교육학과) 교수.

[에듀인뉴스팀]

아동과 민주주의

김정래 (부산교대 교수)

일견 아동과 민주주의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인다.

많은 아동학과 유아교육 연구에서 민주주의를 내용으로 한 연구가 별로 없는 것이 그 반증일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담고 있는 생각이 아동 문제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교육이 민주적이면, 교육의 대상이 되는 아동 문제도 민주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실천방안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아동 문제와 민주주의가 현실적으로 결합할 경우, 그것이 아동이 자유방임 상태에 놓이게 되거나, 반대로 이를 악용하여 아동방임이나 유기 등이 자행된다고 본다. 그렇게 보면 아동과 민주주의는 상호 관련시키기 요원한 문제가 되어 버린다.

아동문제가 민주주의와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보려면, 우선 민주주의의 의미를 자세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인간이 지향하는 하나의 가치로 여겨왔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과연 지향해야 할 ‘가치’인가에는 강한 의문이 남는다. 우선 민주주의의 시원이라고 할 고대 희랍의 고전적 민주주의는 제한적이지만 서로가 의사소통을 하는 공동체적 절차였다. 일종의 ‘제한된 참여방식’이다. 이어 로마의 공화정은 정치세력 간의 권력의 견제와 법치를 존중하는 절차를 존중한 체제이다. 비록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측면이 있어서 ‘민주주의’라는 명칭을 붙일 수 없다는 비판이 있지만, 이를 민주주의와 관련시켜 보면, 법치와 설득을 민주주의의 전제로 한다.

17-8세기에 이르러 민주주의는 중세와 절대왕정의 굴레를 벗어나 기지개를 편다. 그 갈래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대 희랍과 로마의 공동체적 가치를 부활하고자 하는 집합적 민주주의 이념이다. 루소가 주장하는 일반의지를 토대로 평등사상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이데올로그’이다. 이 생각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에 따르면, 사회구성은 일반의지에 근거하여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을 견지한다. 구성 상호간의 평등, 동등한 참여를 강조한다. 특히, 경제적 평등을 강조하고, 사유재산을 악의 근원으로 보고 공유제를 선호, 권장하며, 결과적으로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마르크스주의의 토대를 제공한다. 루소의 집합적 민주주의는 19세기에 이르러 ‘인민민주주의’로 계승된다. 이 점에서 필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의 모체가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라고 본다. 이는 20세기에 이르면 참여민주주의 형태로 이어진다. 총칭하여 사회민주주의라는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하나의 이상향, 지고의 가치, 절대선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가치일원주의(value-monism)에 매여 교조주의에 빠진다.

다른 하나는 근대 계몽사상을 발화점으로 하고 서구의 시민혁명을 임계점으로 출현한 개인의 생명‧자유‧재산을 존중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이다. 사상적으로 보면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 경제론과 존 로크의 민권사상이 그 토대가 된다. 민주국가의 책무는 개인의 생명‧자유‧재산의 보호는 물론 사생활,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을 존중하고 정부가 이를 보호하며, 권력의 분산을 통하여 정부의 독주를 감시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 헌법에 천명된 각종 기본권과 함께 우리가 강조하는 고전적 권리를 이 민주주의 이념에 근거한 것이다. 작은 정부, 시장의 원리, 삼권분립 등의 가치가 민주주의를 이념이 아닌 절차적 원리로 존중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이다.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개인의 생명‧자유‧재산을 보호하고 기본권을 존중하는 절차적 원리로 본다. 자유민주주의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만큼 가치다원주의(value-pluralism)와 관용을 수용하되, 체제 부정적인 갈등이 유발할 경우 법치를 우선한다.

다른 한편, 지금 소개한 두 가지 중 어디에도 넣기 어려운,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화면서도 평등과 박애의 가치를 강조한 민주주의 유형이 있다. 이른바 ‘진보적 자유주의’를 토대로 한 민주주의 모델이다. 자유주의자로 분류되는 이들이 이 모형에 토대를 제공한다. 19세기 존 스튜어트 밀과 20세기 존 롤스가 대표적이다. 역사적으로는 프랑스대혁명의 기치인 자유‧평등‧박애가 사상적 근원이다. 이 민주주의 모형은 사회민주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분배, 평등, 정의가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가치체제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20세기 후반 대두된 민주주의 모형이 이른바 뉴 라이트(The New Right) 또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를 핵심으로 하는 신 보수주의 모형이다. 이는 외형상으로 보면 자유민주주의의 복원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좌파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대두되었다. 이를 선도하는 사상가로는 하이예크와 밀턴 프리드먼을 들 수 있으며, 이를 정책에 실현시킨 이들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대처 영국수상을 들 수 있다.

이렇게 민주주의의 전개 양상을 개괄해 보면, 민주주의 자체가 좌-우 대결 양상으로 보인다. 이러한 핑퐁 게임 또는 시계추 운동과 같은 대립 양상은 민주주의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이데올로그를 반영하는 이념이나 정책 노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추구해야 할 도덕적 가치, 실현해야 할 이상이나 절대선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인간이 문명 생활을 영위하는 데 요구되는 ‘절차적 원리(procedural principles)’이다. 

"민주주의", 추구해야 할 "도덕적 가치.이상.절대선으로 보는 데서 사회적 병폐가 나타난다.

왜 그런지 간단하게 언급하도록 하겠다. 만약 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할 도덕적 가치, 실현해야 할 이상이나 절대선으로 보는 데서 여러 가지 사회적 병폐가 발생한다. 과거 민주화 운동의 기여자들 또는 희생자들은 오늘날 마치 ‘완장 찬 기득권’처럼 행세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물론 모든 민주화 운동 참여자가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선민의식(選民意識)을 가지고 행세하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왜 그럴까? 이들은 민주주의를 삶의 절차적 원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상향 또는 절대선으로 설정한 결과이기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지 못한(즉 자신들이 설정한 가치를 공유하지 못하거나, 그 대열에 동참하지 않은) 많은 이들에 대하여 선민의식을 지닌다. 사회적 합의에 따라 선의(善意)로 부여된 ‘민주유공자’는 이제 특권의식이 되었다. 백 보 양보하여 여기까지 사회적으로 용인해줄 수도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들의 사회적 기여도를 순국선열들의 기여도와 마찬가지로 인정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선민의식 병폐는 그들에게 국가가 베푼 보상과 예우에 만족하고 데 그치지 않는 데 있다. 자신들의 선민의식은 곧 편 가르기 수법에 따라 상대방으로 하여금 부채의식(負債意識)을 지니게 만든다. 선민의식을 지닌 이들과 부채의식을 지닌 이들의 부조화와 대립이 사회적으로 연출된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연출되는 순간 합법성을 찾기 어려운 ‘완장 찬 권력’이 출현하고 상대방을 ‘적폐’ 세력으로 몰아세운다. 하지만 이들은 부지부식 간에 자신들이 ‘적폐’라고 규정했던 사회적 기득권이 되어 상대방에게 득세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민주주의는 스스로 지향하는 가치를 부정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 독재로 나가게 된다. 인민민주주의에는 ‘인민’이 없고, 사회민주주의는 실체 없는 ‘사회’에 개인을 종속시켜 버린다. 전자에 관한 실증과 논거는 최근 발간된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 (송재윤, 2020)』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평등 대신에 불평등을 겪어야 했으며, 풍요와 자유 대신에 빈곤과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반대로 서유럽 국가들은 실체 없는 사회에서 실체 있는 개인을 존중하는 민주주의를 택하게 된다. 우파는 자유시장경제의 단점을 보완하는 복지정책을 선호하고, 좌파는 페이비언 사회주의를 전략적으로 모색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민주주의의 뜻부터 헤아려야 한다. 우선 ‘민주주의’라는 번역어가 잘못되어 있다. 영어 ‘democracy’가 사상체계를 뜻하는 ‘〜ism’이 아니므로 ‘민주정(民主政)’으로 번역해야 옳다. 사상체계가 아니므로 그것은 방법상의 원리일 뿐이다. 더 구체적으로 ‘민주주의’는 국민, 인민, 공동체라는 집합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구체적 실체로서 개인들이 정연한 질서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이를 운영할 모종의 절차를 가리킨다. 그 다음으로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 말이나 개념의 뜻이 잘 파악되지 않을 때, 그 반대말이나 반대개념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권위주의’이다. 권위주의는 ‘권위’를 빌미로 하여 권력을 남용하거나 부당하게 독점하는 행태를 말한다. 권위주의는 특정할 이데올로그나 이념이 자리 잡은 실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일체의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절차를 무시한 경우를 지칭한다. 여기서도 ‘민주주의’의 본질은 절차적 원리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자유주의의 반대는 ‘전체주의’이고, 개인주의의 반대는 ‘사회주의’이다. 공산주의는 경제적 용어이므로 그 반대는 ‘자본주의’이다. 실제로 공산주의는 명분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지 않는가?

문제는 절차적 원리로서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권위주의가 단순한 절차적 하자와 결함을 넘어서 여러 가지 형태의 독재정치로 변질된다는 데에 있다. 특히 민주주의를 ‘이상향’으로 설정해놓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전체주의가 그러하다. 따라서 그러한 폐해를 막기 위한 해법은 민주주의를 절차적 원리로 보는 데서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절차적 원리로서 민주주의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지를 살펴보자.

제도적으로는 입법, 행정, 사법의 절차를 존중하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 의미와도 연결된다. 법적 절차를 존중한다는 것은 정치적 논의에서 중립적인 위치에서 심판관 노릇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곧 정치적 권위주의를 배격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정치적 권위주의란 곧 독재체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절차적 원리로서 민주주의를 존중한다는 것은 독제를 막는 가장 합리적이고 정당한 일이다.

이를 연장하면 삶의 양식으로서 민주주의를 보는 관점이 된다. 우리가 영위하는 문명화된 삶이 지니는 여러 양식 중에서 절차를 존중하는 삶의 태도와 습관을 이른다. 삶의 양식으로서 민주주의는 곧 시대변화에 어긋나거나 뒤떨어지는 구습, 악습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인류의 진보는 이상향이나 절대선을 자의적으로 설정해놓고 이를 맹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구습과 악습으로부터 벗어나는 일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급진적인 혁명을 통하여 이루는 방법이 있고, 절차적 원리를 개방적인 관점에서 융통성 있게 다루는 방법이 있다. 전자는 앞서 민주주의를 하나의 이상이나 절대선으로 보는 이들이 취하는 방식이다. 후자의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고전적인 자유민주주의을 지지하는 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진보 사상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앞서 잠시 언급한 페이비언 사회주의가 이에 해당한다. 무엇보다도 구습과 악습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을 민주적 절차로 본 대표적인 사상가는 존 듀이이다.

‘절차적 민주주의’ 누구보다도 존중한 인물 ‘존 듀이’

듀이와 민주주의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필자가 보기에 듀이는 절차로서 민주주의를 누구보다도 존중한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그의 대표작이 『민주주의와 교육』이 아니던가? 듀이의 민주주의는 어떤 이상적인 가치나 절대 선을 상정하지 않은 채 절차적 원리를 삶과 교육에 접목시킨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듀이의 대표작인 『민주주의와 교육』에 정치학 교과서에 볼 수 있는 정치체제 문제와 정치제도로서 민주주의에 관한 언급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 이유는 바로 듀이가 ‘민주주의’를 절차적 원리, 구체적인 삶의 원리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가 곧 『민주주의와 교육』이 20세기가 낳은 불후의 명저인 까닭이기도 하다.

듀이가 생각하는 ‘진보’는 역동적, 개방적 사고원리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사고 원리는 특정한 이념이나 명제, 그리고 진리체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고정된 지식체계, 신념체계, 그리고 고착화된 행동양식을 배척하고 삶의 역동적인 과정 속에서 삶이 개선되는 일련의 절차를 강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듀이의 주요 개념인 ‘경험’, ‘성장’의 개념을 파악해야 한다.

필자가 과문하기는 해도, 듀이의 주요 개념은 상당 기간 그리고 현재까지도 식상하게 이해되어 왔다. 사실 필자도 최근까지만 해도 그렇게 여겨 왔고 그래서 관심에 넣지 않았었다. 그러나 듀이의 이론은 적어도 20세기 전반기의 지성사적 맥락에서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세기 사상은 전통 철학의 반전으로 시작된다. 니체를 필두로 하여 베르그송, 후설, 그리고 듀이의 철학이 그것이다. 또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거시적으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지면상, 그리고 필자의 역량에 비추어, 이 모든 내용을 여기서 개괄할 수는 없다. 하지만 20세기 현대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적인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평면적, 단선형적 사고에서 나선형적 사고로 이행이다. 이를 흔히 왕상형(往相型) 사고에서 환상형(還相型) 사고로 이행이라고도 한다.

둘째, 요소환원주의 또는 단일인과론에서 관계중심주의로 이행이다. 20세기 초중반에 이룩한 양지물리학이 이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셋째, 본질보다는 상황을 중시하는 이행이다. 앞서 언급한 전통철학에 대한 반전 때문이다. 특히 니체에 의하여 형이상학적 가정이 전도된 데서 비롯된다.

넷째, 이성보다는 감성 또는 질성을 중시하는 이행이다. 언어, 이론, 명제보다 습관, 실험, 시행착오, 역량 등이 강조된다.

이와 같이 변화된 사고의 패러다임에 비추어 듀이의 이론을 이해해야 한다. 이를 몇 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예시해 보도록 한다.

첫째, 듀이의 ‘상호작용(inter-action)’을 평면적 사고 틀에서 두 주체 간의 직선적 작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마치 상호 거래(give-and-take)로 보는 것은 부당하다. 듀이가 말년에 펴낸 Knowing and the Known에 언급된 ‘교변작용(trans-action)’은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제시한 개념이다.

둘째, 듀이의 핵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경험’과 ‘성장’은 본래 자연과학(특히 생물학)의 개념이다. 플라톤의 철학에서는 ‘경멸적인 의미’를 포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을 실증적이며 일차원적 관찰에 따라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든지, 반대로 관념적인 차원에서 가치 없는 개념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경험은 주체와 객체가 상호 되먹임의 과정을 통하여 형성되는 구체적인 실체(화이트헤드의 용어로는 actual entity)로 파악해야 한다. 그 연장선 또는 지속(이는 베르그송의 개념이다)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개념이 ‘성장’이다.

셋째, 질성의 개념은 이성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본질주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핵심 개념이다. 이성은 ‘독립된 실체’도 아니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관념적인 가치나 선도 아니다. 이성은 경험이 작용하는 양상이거나, 그것이 실체라고 한다 하더라도 경험의 작용한 결과물일 뿐이다. 이 점에서 감성을 이성의 반대로 보는 기존 형이상학적 가정은 그릇된 것이다. 즉 이성-감성의 이분법은 가치 있는 인간과 세계의 특질을 설명하는 데 실패한다. 이를 아우를 수 있는 개념이 듀이의 ‘질성’이다. 현상학자들이 강조하는 감각-지각은 이성의 대비되는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총체적 특성을 지닌 특질로 보아야 한다. 이 점에서 듀이의 질성은 현상학자들의 감각-지각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총체적이고 편재적이어서 고정된 실체로서 이성이나 이론, 언어와 명제를 넘어선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듀이의 개념은 반드시 새로운 패러다임, 즉 플라톤의 철학에 근거한 전통적 패러다임을 극복하는 새로운 형이상학적 가정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게 듀이를 이해하는 것을 우리는 ‘듀이의 복귀’라고 칭할 수 있다.

아동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친다는 것… 곧  ‘절차적 원리’를 가르치는 것”

그러면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형이상학적 가정에 기초한 사고는 어떠한 특징을 지니는가? 하나는 이분법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듀이는 서양 지성사의 모든 이분법을 극복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분법의 극복을 평면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분법은 논리적으로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그리고 어떤 이분법은 그릇된 이분법이다. 따라서 이분법의 극복은 어떤 형이상학적 가정에 근거하여 이분법이 설정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패러독스와 자기회귀성(self-reference)과 같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고과정을 탐구해야 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모순’과 ‘패러독스’의 결정적인 차이는 자기회귀성 여부에 달려 있다. 모순은 자기지칭을 하지 않는 논리적 난점이며, 패러독스는 자기지칭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나타나는 경우이다. 상호작용과 교변작용의 차이는 모순과 패러독스의 차이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장황하게 설명할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한 듯하지만, 요점은 절차적 원리로서 민주주의를 이해한다는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요구되는 사고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있다. 더욱이 이를 교육과 아동 문제로 정연하게 연결하고 논의한 인물이 듀이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민주주의를 절차적 원리로 파악한다는 것은 고정된 규칙 또는 절대 진리로 설정한 준칙을 준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 또는 형이상학적 가정 아래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사고를 하는 것을 말한다. 전자의 방식으로 보는 것은 이전 시대의 형이상학적 가정(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중세신학-근대 경험론과 합리론-칸트와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론)에 매인 것에 불과하므로,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사고에 역행한다. 민주주의의 절차적 원리란 우리가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사고를 실행하는 데 요구되는 준칙이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 바깥 어디에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경험 외적인 어떤 실체를 가정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심지어 목하 우리의 관심사안인 ‘아동’의 개념도 고정된 실체(정형화하거나 언어적으로 특정할 수 없는 존재)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살아 움직이는 현실체이다. 그렇게 보지 않다면, 우리는 아이들을 우리 마음대로 설정한 ‘민주적 가치’를 제시하고 때로는 강요하는 대상으로 취급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언필칭 ‘민주시민’을 내세우지만, 아이들을 무기력한 가치 추종자로 만들거나 아이들에게 ‘민주투사’가 되라고 선동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친다는 것은 곧 아이들에게 절차적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절대선이나 성취해야 할 실체가 아니라면, 민주주의를 따로 떼어놓고 가르칠 수도 없다. 따라서 교육목적으로서 ‘민주시민’을 따로 설정하거나 진술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것이다. 그러한 민주시민교육은 실패한다. 민주시민교육은 그러한 이데올로그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철학에서 ‘인간존중’은 매우 심각한 주제인 만큼, 교육에서 ‘아동존중’도 그러하다. 아동을 존중하는 것은 아동의 현재 상태를 그대로 떼어내서 그것을 존중하는 것도 아니고, 아동 아닌 다른 사람(부모, 교사, 또는 국가이념이나 특정 이데올로그)이 설정한 아동의 미래 가치를 위하여 아이들을 그것에 복속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절차적 원리로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맥락에서 ‘아동존중’의 뜻이 파악되어야 한다.

서두에 아동과 민주주의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인다고 한 바 있다. ‘아동’과 ‘민주주의’가 관련을 맺는 것은 민주주의를 절차적 원리로 보는 것이며, 아동을 이 원리에 의하여 존중되어야 할 존재로 인식하는 일이다.

또한 서두에 아동 문제에 있어서 민주주의를 직접 대입하면 오히려 이를 악용하여 아동방임이나 유기 등이 자행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다. 많은 것을 학습해야 할 여정에 놓인 존재인 아동을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정형화해서 보기 때문에 아동에게 일체의 간섭이나 인위적인 작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실제로 루소는 자연 상태의 아동을 완벽한 실체로 보았기 때문에 ‘소극적 교육’을 주장한 것이다. 루소는 현 상태의 아동과 자연 상태의 아동을 혼동한 것이다. 게다가 루소의 주장이 낳은 폐해는 단순한 아동 교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의지라는 집합적 사고를 설정하여 구체적인 경험의 주체인 ‘개인’을 거기에 종속시킨 데서도 찾을 수 있다. 반대로 아동을 ‘조작하거나 채워 넣어야 할 용기’로 보는 데서 아동에 대한 외부 간섭과 지시, 그리고 아동에게 절대 복종을 강요하게 된다. 두 가지 모두 절차적 원리로서 민주주의에 위반된다.

교육에서 아동 문제도 민주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뜻은 아동과 아동 문제를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형이상학적 가정에 입각하여 고려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답은 듀이의 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식상하게 인식했던 방식이 아닌 20세기 이후 전개된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추어 그의 이론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안과 대책은 보다 엄밀하고 정연한 논의를 요구한다.

절차적 원리 존중한 '자유민주주의', "위기 속에서도 끝내 굳건히 지켜내야"

앞서 소개한 민주주의 유형 중에서 민주주의를 절차적 원리로서 인정하는 유형은 자유민주주의이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절차적 원리를 존중하는 데서 그 의의를 찾는다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가 선택해야 할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 질서이다. 그러나 특히 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하다.

자유민주주의는 절차적 원리를 존중하기 때문에 방법적 원리에 실려 있는 ‘내용’에 대하여 중립과 관용을 취한다. 그러나 이를 악용하여 허용된 ‘내용’에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내용을 담아 자유민주주의의 혜택을 누려가면서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행태를 볼 수 있다. ‘자유의 패러독스’, ‘민주주의의 패러독스’, 또는 ‘자유민주주의의 패러독스’는 이와 같은 심각한 상황을 언어로 희화화한 것이다. 이러한 행태로 인하여 자유민주주의는 파멸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에 대한 최후의 보루는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한 헌법질서이다.

그럼에도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한 헌법질서를 훼손하고자 하는 인물들이 자유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선정되어 또 다른 차원에서 자유민주주의적 헌법체계를 위협하는 데 나서고 있다. 21세기 작금의 대한민국의 상황에 견주어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시급하게 수행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원론적이기는 하지만, 절차적 원리로서 민주주의를 삶의 규칙으로 내면화하도록 교육의 방향을 수립하는 일이다. 또한 도덕교육의 패러독스처럼 아동의 초기 단계에서는 절차적 원리가 내면화될 수 있는 ‘양육’이나 ‘훈련’ 방식을 허용해야 한다. 가치다원 사회에 아이들을 방치하거나 오만 가지 가치 메뉴를 어린 아이들이 ‘자율적으로’ 선택하게 하는 일은 아이들의 ‘경험’ 밖에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과거 악습으로 회귀하자는 것이 아니다. 절차적 원리로서 민주주의, 민주적 원리는 정형화된 규칙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아동에 대한 제한이 한정적으로 요구되는 방편에 불과하다는 점을 확신하게 된다. 아이들을 다루는 우리가 절차적 원리를 존중하는 민주시민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절차적 원리의 습득에는 일종의 ‘훈련’이 필수적이다.

끝으로, 앞서 언급한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를 맞는 세태에 더하여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모든 선택지가 ‘민주’로 포장되어 있고 만약 우리가 제도적으로 어느 하나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절차적 원리를 가장 존중할 수 있는 제도 또는 체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의 현실은 최선을 선택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보기에 최선이란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만약 그것을 설정한다면 또 다른 독재와 전체주의를 불러온다.) 그렇다면 차선(次善)을 선택해야 한다. 차선의 선택 기준은 절차적 원리를 현실적으로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가 이러한 민주 ‘훈련’을 경험한다면, 절차적 원리로서 민주적 가치는 우리 아이들이 바로 그 민주적 절차에 따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부기]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은 ‘민주’가 난무하지만 자유민주주의가 지닌 절차적 원리가 실종되는 듯하며, 차선을 선택할 여건조차도 ‘민주’의 이름으로 소멸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그 결과 우리는 최악 대신에 차악(次惡)을 선택해야 하는 딱한 처지에 몰려 있다. 그래도 차악을 선택하여 최악(最惡)을 막고 점진적으로 차선을 택할 수 있는 잠재적인 역량이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당장은 차악을 택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주교육이 절차적 원리를 가르치고 존중하고 있다는 확신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 21세기 중반을 달려가는 대한민국에 사는 천학(淺學)의 간절한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