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을 위한 토론, 그리고 토론을 위한 학습 (8)

이돈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범하기 쉬운 논리적 오류 

 

토론에 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주장하는 내용에 논리적 오류를 담고 있으면 그만큼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고 토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체모순”(self-contradiction)이다. 자체모순을 담고 있으면 주장 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체 모순은 자신의 논의 속에 자신이 주장하는 바가 있고 동시에 그것과 모순되는, 즉 그 주장을 부정하는 것이 함께 들어 있을 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A씨는 결혼한 총각이다”와 같이, 즉 A씨는 미혼의 성인을 의미하는 총각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또한 A씨는 결혼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므로 자체모순이다. 스스로 주장하면서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된다.

물론 이러한 간단한 자체모순은 쉽게 분별이 되고 오류라고 판정할 수가 있지만, 다소 복잡한 논의의 과정은 앞뒤의 관계에서 이러한 자체모순을 쉽게 범하게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논리적 자체모순을 범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은 토론자의 가장 기본적인 자질에 속한다. 토론의 과정에서 공격을 받게 되는 많은 경우가 바로 논리적 자체모순의 지적이다.

논리적 오류는 자체모순만이 아니라, 주장이나 논의 자체의 힘을 잃게 하는 여러 가지의 요인들을 포함한다. 옛부터 논리학자들은 우리가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나 무엇을 의도적으로 주장할 때, 심지어는 학술적으로 이론을 펼 때에도 알게 모르게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습관이 있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위력에 호소하기 (appeal to power)

“힘이 곧 정의”라고 생각하고 어떤 주장이나 노선을 받아들이도록 세력이나 권력으로 위협하는 것을 뜻한다. “당신의 주장은 옳을지 모르나 그 주장을 실천에 옮기기 전에 이미 당신의 가족과 재산은 혁명의 지지자들이 소유하고 있을 것이오”라고 위협하는 것은 대화의 결론이 논리적 타당성를 지니고 있느냐와는 무관한 주장이다. 우리나라는 대국이니만큼 “당신의 나라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아무리 떠들어도 우리가 거절하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조용히 물러가시오”라고 말하는 상대와 더불어 외교적 토론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서로 무례한 싸움을 하는 경우에는 필요할지 몰라도 합리적 주장으로 겨루는 상황에서는 옳은 전략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를 두고 서로 투쟁적 자세로 상대하는 상황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2) 대인공격 (argumentum ad hominem)

주장된 내용에 관하여 논박하려고 하지 않고 주장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반대 주장의 논리적 부당성을 문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과 원천적으로 관련된 사람을 문제로 삼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발생론적 오류”라고도 일컬어진다. “그런 사람의 말이라면 아예 믿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라든가,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은 모두가 그들의 이익만을 대변하고자 하는 것이므로 전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라든가, “그런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고 그런 주장을 하는가?”와 같은 표현과 태도가 이에 속한다. 물론, 모든 발언에는 의도가 있으므로 표현된 그 자체로서 신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발언의 내용을 논박하는 일은 그 내용에 관련된 사람의 인격이나 능력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장의 내용 그 자체의 진실성 혹은 타당성을 근거로 하여 겨루거나 진행하는 일이어야 한다.

(3) 무지에 호소하기(appeal to ignorance)

어떤 주장이나 결론이 허위라고 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진실이라고 하거나, 진실이라고 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으므로 허위라고 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허위라고 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다고 해서 그 주장을 반드시 진실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진실이라고 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다고 해서 그 주장을 반드시 허위라고 할 수도 없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지 모름 그 자체가 진실이나 허위로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냥 진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거나, 반대로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 그냥 결단코 믿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을 관철하려고 한다면, 이러한 태도는 토론의 장에서 취할 자세는 아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더욱 권위 있는 문헌이나 전문가의 의견을 참고할 필요가 있고, 불확실성은 그런대로 합의하여 토론을 진행할 필요는 있다.

(4) 동정심에 호소하기 (appeal to sympathy)

어떤 결론을 수용하도록 하기 위하여 상대방의 동정적 태도를 유도하는 것을 뜻한다. “또다시 낙선하게 되면 나는 우리의 가족과 친구를 다시 볼 수가 없고 무력하고 무능한 자로 낙인됩니다. 여러분,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이번에 당선되어야 할 사람으로 나보다 더 절실한 사람이 어디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와 비슷한 내용은 어떤 선거에서 후보자들이 행하는 연설 내용에서 가끔 들을 수도 있는 사례이다. 주장되는 내용이 능력의 평가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동정심을 발휘하여 결정할 수도 있으나, 진위를 분별하거나 효율성을 판단하거나 타당성을 밝히는 일이라면 결코 동정심에 호소할 수는 없는 법이다.

(5) 대중에 호소하기 (argumentum ad populum)

합당한 증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수의 대중에 감정적으로 호소하여 설득하려는 방법이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든가, “어느 나라에도 그런 제도는 없다”든가, “요즈음은 모두 그런 것을 택한다”든가 “많은 사람들에게 가서 물어 보라”는 식의 선동이나 회유로써 어떤 주장을 수용토록 하는 경우에 이에 해당한다. “어디에 가서 물어보시오. 누가 그렇게 생각하는가”라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다. 이런 태도는 상대를 압도하기 위한 방법일 수는 있다. 특히 얼토당토않은 고집에 메인 상대를 설득하고자 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토론을 위한 주장의 합리성을 뒷받침하는 전략으로서는 결코 온당한 태도가 될 수는 없다.

(6) 권위에 호소하기 (appeal to authority)

우리가 흔히 어려운 문제를 당하거나 결정이 곤란할 때 그 문제와 관련된 권위자에게 도움을 구하기도 한다.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그 권위자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한 부문에 있어서 권위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 부문과 상관없는 다른 부문의 문제에도 조언을 구하고 그것에 따라서 행동이나 의사를 결정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권위 그 자체에 의존하는 것이 된다. “플라톤의 철학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라든가, “김 박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라든가, “이 박사도 그렇다고 믿었다”는 등의 표현은 흔히 있는 사례이다.

(7) 속단적 일반화 (hasty generalization)

하나의 특수한 사례를 보고 그것을 일반적 규칙이나 법칙이라고 단정하는 오류는 우리의 일상적 과정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한두 사람의 중국인이 한국의 김치를 좋아한다고 해서 중국인들도 김치를 좋아한다고 쉽게 규정하거나, 곱슬머리를 한 친구가 자기를 미워한다고 해서 곱슬머리를 한 모든 사람을 경계하거나 하는 것과 같이, 극히 예외적인 사실일지도 모르는 것을 들어 전반적 경향이나 특징인 것처럼 주장한다면, 이는 속단적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과학적 법칙을 성립시킬 때, 귀납적 추리에 의하여 몇몇 사례를 관찰하거나 고려하기도 하지만, 통계학적 일반화의 통상적 규칙에 따라서 오류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여 일종의 가설적 결론을 채택하는 것이 보통이다.

(8) 원인의 허위성 (falsity of cause)

어떤 사건의 실제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을 실제의 원인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어떤 주장을 도출하는 행위가 있다. 우리의 옛말에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烏飛梨落)는 말이 있듯이 우연한 어떤 일이 문제가 된 사건과 동시에, 혹은 바로 직전에, 발생하여 그것이 원인이라고 규정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속단은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체계적인 과학적 연구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수없이 많은 과학적 법칙도 언제 부정될지 모르는 일종의 가설, 즉 부정되지 않은 한 채 잠정적으로 유지되는 주장(혹은 학설)일 따름이다.

(9) 논점절취 (begging the question)

어떤 주장을 펴기 위하여 그 주장을 결론으로 도출할 수밖에 없는 전제를 내어 놓는 것을 의미한다. 일종의 순환논법이다. 즉, 결론이 의미하는바 그대로를 전제 속에 포함시켜 버리는 경우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면, 언제나 국가에 이익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국민 각자가 자신의 의사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것은 모두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앞 문장의 결론은 이미 뒷 문장의 전제에 그 뜻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그리고 더욱 간단한 표현으로 “나는 서울을 떠나 살고 싶지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서울에 사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첫째 문장의 주장은 둘째 문장의 내용으로 뒷받침되는 것이고, 둘 사이의 논리적 모순은 전혀 없다. 그러나 둘째 문장의 내용은 바로 첫째 문장의 내용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므로 실제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충분한 합리적 근거가 되지 못한다. 말하자면, 그 말이 그 말이다.

(10) 복합질문 (complex question)

우리가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질문 중에는 둘 이상의 질문 내용을 가진 것을 하나의 질문으로 표현하여 듣는 사람을 혼란시켜 놓고 자신의 결론을 임의로 도출하는 경우가 있다. 긴장의 토론의 장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당신은 그 사기성 있는 광고를 해서 그렇게 많은 돈을 벌게 되었오?”라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하면, 이렇게 두 가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하나는 그 대답을 “나는 돈을 벌지 못했오”라는 말을 한 것으로 보고, 그러면 그 광고의 사기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돈은 벌었지만 광고에 사기성은 없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 부패한 정권이 국민경제를 도탄에 빠지게 한 실정에 대하여 국민 앞에 사죄할 용의는 없는가?”라는 국회의 정치적 발언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하면, 부패와 실정을 인정하나 단순히 사죄의 거부로 해석할 수도 있고, 부패와 실정을 인정하지도 않으며 사죄의 의사도 없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11) 부당결론 (false conclusion)

어떤 특별한 주장을 내세우기 위하여 시작된 토의가 본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결론으로 끝나는 경우가 있다. 어느 학급에서 방과 후 교실 청소를 않고 귀가해 버린 한 학생을 징벌하기 위하여 논의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진행된 토의는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즉, 교실 청소는 공부하는 시간을 빼앗으므로 청소부를 고용하여 맡기는 것이 옳다는 결론으로 끝났다. 본래의 목적하는 바와 전혀 엉뚱한 결론을 내고 만 것이다.

(12) 의제회피 (red herring)

훈제한 붉은 청어를 끌고 길을 가로질러 가는 행위를 영어로 red herring이라고 한다. 비유적으로는 남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게 한다는 뜻이다. 대화나 논쟁에서 궁지에 몰리거나 거북한 경지에 이르면 다른 화제를 꺼내어 이를 모면하려는 경우에 사용되는 말이다. 대화나 토론에서 흔히 있을 수 있다. 교통 위반을 적발한 경관에게 “많은 사람이 위반하고 있는데 왜 나만 잡느냐?”고 항의하자, 경관이 “파리를 잡을 때 모든 파리를 다 잡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잡을 수 있는 파리만 잡는 것 아니냐?”고 하였다. 이때 위반자는 “여보시오, 내가 파리요? 어떻게 나를 파리에 비유하시오?”라고 하면서 데어 들어 경관을 당혹하게 한 이야기가 있다.

(13) 얼버무리기(equivocation)

우리는 토론의 진행과정에서 사용되는 말의 의미가 상황에 따라서 바뀌는 경우를 흔히 경험한다. “당신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인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인데, 어떻게 대한민국의 요직을 맡을 수 있다는 말이오?”라고 추궁을 하자,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인에게 충성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런 내가 조국인 대한민국에 어찌 충성을 못하겠습니까?” 이렇게 대답하면 충성의 의미는 크게 얼버무려진 것이 사실이다.

(14) 취약한 비유 (poor analogy)

대화에서나 토론에서 비유는 매우 유용한 표현의 방식이며, 편리한 논증의 수단이기도 하다. 예컨대, 전압을 설명할 때 물의 낙하현상으로 비유한다. A를 설명할 때 B를 들어 설명한다. 그러나 A와 B의 사이에 유사성이 없다면 비유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사성이 없는 두 개의 현상을 가지고 마치 유사한 것처럼 설명하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장교와 사병의 관계는 마치 교사와 학생의 관계와 같아서 사병은 항상 장교를 존경하고 그 말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좀 지나친 비유가 될 것이다.

우리가 대화에서나 토론에서 범할 수 있는 오류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물론 아무런 오류도 없는 대화나 토론은 엄격히 말해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논리적 오류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소한 오류가 있고 심각한 오류가 있다. 위에든 어느 것은 사소하고 어느 것은 심각한 것이 아니다. 어느 것이든지 토론의 과정에서 주제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혼란이나 모순을 유발하게 되면, 이 경우에 그 오류는 바로 심각한 오류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가벼운 오류로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EduinNews) = 인터넷뉴스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