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삶을 살도록 가르칠 것인가? --

 

[인성교육특강1]

제1강 인성교육 서장

-- 유동의 시대와 인성교육의 문제 -- 

이 돈 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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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인성교육 서장

제2강 인성은 습관이다

제3강 도덕성의 개념과 양심의 기능

제4강 개체의 성장과 자아의 실현

제5강 입법과 준법의 일상

제6강 배려와 관용의 윤리학

제7강 각자가 지닌 영재성

제8강 대화와 토론과 품위

제9강 행복한 삶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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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인성교육 서장

“유동의 시대”와 삶의 조건

우리는 지금 주어진 삶의 조건에서 어느 것도 고정된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언제나, 그리고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삶을 바우만(Zigmunt Bauman)은 “유동적 근대”가 지닌 특징이라고 하였다. (Culture in a Liquid Modern World, trans. from Polish by L. Bauman. Malden, MA, USA : Polity Press, 2011, p. 11.) 근대의 초기에는 개인이나 국가나 간에 어떤 일정한 가치를 지향하였고 변화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린 편이었다.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의 변화는 비교적 여유로움을 보이는 “견고한 근대”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최근에 이를수록 변화는 급격히 가속화되고 극심한 유동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겪는 불안과 공포가 있다. 모든 것이 변화하면서 온갖 잡다한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 종래에 유지해 오던 삶의 수단이나 도구가 더 이상 소중하지도 유용하지도 않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추구해 온 가치들이 일시에 의미를 잃게 되고, 앞선 세대로부터 물려온 관습과 전통도 무너지는 허탈감을 경험할 수도 있다. 개방성 자체의 특징인 불확실성, 그리고 이와 더불어 발생할 역기능을 예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타율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많은 취약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개방성으로 인하여 감당할 수도 없고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는 세력과 마주치거나, 어쩌면 그 세력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Liquid Times, Living in an Age of Uncertainty. Malden, MA : Polity Press, 2007, p. 7.) 특히 정보화가 주도하는 변화에 적응하기 힘든 노년층, 장비와 기기의 구입과 학습에 지출되는 비용을 감당하기 힘든 저소득층, 그리고 정보망의 혜택을 보기에 불리한 변방에서 생활하는 소외층이 그러하다.

물론 이러한 변화도 삶의 특징과 환경을 총체적으로 일시에 변화시키는 불연속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양식이나 제도적 형태가 어느 시점을 두고 전후가 완전히 서로 다른 것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역사적으로, 우리의 삶의 특징과 환경은 전근대적 상태에서 근대적 경지로 바뀌어 왔고, 또한 이어서 초근대적(현대적) 요소를 수용해 왔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 우리는 전근대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 그리고 초근대적 요소가 혼란스럽게 교차는 세계에서 살게 된다.

도덕적 삶의 경우에, 오늘과 같이 극심한 변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옛날 같으면 한 가정이나 고장의 연장자가 행사하던 가치판단의 권위를 어느 누구도 행사하기가 어렵게 된다. 옛 마을에서는 인간관계나 공동체에 도덕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마을의 연장자가 판단의 권위를 행사하였다. 그것은 반드시 권위주의적 관습이 지배하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연장자가 공동체의 전통, 관행, 규범 등에 관해서 가장 균형 있는 지혜와 경험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옛 마을은 지금과는 달리 몇 세대를 지나는 동안에도 삶의 조건과 양상이 거의 변하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처럼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성장세대가 기성세대보다 삶의 환경과 조건에 훨씬 더 잘 적응한다. 성장세대는 변화의 흐름을 빨리 지각하고 변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正體)를 형성하며 나아가 변화를 주도하는 대열에 쉽게 참여하게 된다. 성장세대는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 반면에 기성세대는 사실상 삶의 에토스(ethos)를 결정하는 세력의 변방에 위치하고 주변인(周邊人)이 되어 버린다. 그들은 정체된 농경사회의 경우처럼 전근대적 구조 속에서 지녔던 “윤리의 담당자”로서의 위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제는 젊은이들에게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깨우치고, 필요한 습관을 지도하면서 인격의 성장을 보살피는 역할을 담당할 권위적 담당자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특히 정보사회의 컴퓨터는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생산한다. 특정한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며, 양적 규모는 엄청나고, 빠른 속도로 증가하며, 이론이나 의미나 목적과는 연관성도 없이 생산되고 있다.(Neil Postman, Technology. New York: Vintage Books, 1993, p. 70) 정보과잉 상태에 이르면 문화적 담론의 질서는 파괴되고 만다. 젊은이들은 엄격히 선별된 객관적 기준이 퇴조해 버린 채로 잡다하게 생산된 정보의 물결에 분별없이 편승해야 한다. 그리고 관습과 전통의 가치와 의미보다는 현실적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효율성을 쫓아야 한다. 이러한 세계는 유동적이고 변덕스러우며 혼란스럽다. 그러한 환경에서 형성된 신념체제는 언제 바뀌어버릴지 모르며, 이미 형성된 습관은 변화에 적응하는 데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격의 구성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덧없는 요소들”이 젊은이들까지도 혼란 속에 빠트리고 있다.

위기의식의 복잡성

변화의 소용돌이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전통적 윤리체제의 안정 그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체제로의 끊임없는 재정립 조차도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도덕적 일탈이나 부패, 혹은 사회적 부조리, 고질적 갈등이나 분열 등 사회적 문제를 해소하거나 최소화하는 일을 제도적 교육이 감당하기에는 거의 무력하다고 할 정도로 한계가 있다. “건강한 규범문화”의 정착 상태를 유지하는 과업을 감당하는 일이 전통사회의 경우와는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의 도덕적 질서는 총체적으로 위기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위기를 의식하는 관점들도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몇 가지의 대표적인 것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전통적인 관습의 붕괴를 우려하는 경향이다. 성장하는 젊은이들이 예의가 없고 불손하다거나, 전통적인 예법이나 관습을 지키지 않고 편의주의에 따라서 산다거나, 사회적 조직에서 기강이 무너지고 순종하는 심성을 소유하지 못하였다거나 하는 것 등, 즉 전통적 인간관계의 질서가 경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의적 차원”의 문제의식이다. 특히 근대적 산업사회에서 관찰되는 도시화, 개방화, 익명화 등의 현상과 더불어, 가족구조, 직업구조 등의 사회조직의 형태에 변화가 진행되고, 주거환경, 교통수단, 통신수단 등의 생활환경이 달라지면 인간관계의 특징인 예의적 행동의 전통적 방식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변화의 과정에서 새로운 관습과 규범과 질서가 제대로 정착될 겨를이 없다는 데서 더욱 혼란과 당혹을 금할 수 없게 된다는 문제의식이 있다.

둘째로, 일탈적 행동이나 파렴치한 사건이 날로 증가하여 우리의 일상적 생활의 장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다. 정서, 감정, 인성 등의 순화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문제의식은 “심성적 차원의 도덕성”에 일차적 관심을 둔 것이다. 폭행, 강도, 살인, 성범죄, 사기, 위조, 횡령, 뇌물, 범법 등의 범죄 사건들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우리를 긴장시켜 왔다. 인간의 생명을 하찮은 대상으로 여기는 생명경시의 풍조, 시민생활을 불안하게 만드는 폭력성 행동들이 빈번이 보도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거의 어느 시기에나 있어 왔지만, 무기, 약물, 기기, 정보 등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의한 새로운 수단, 도구, 수법이 활용되고 더욱 흉악상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긴장시킨다.

셋째로, 이기주의적 사고와 태도에 의해서 초래되는 사회적 분열현상을 우려하는 경향이다. 애국심, 애향심, 애교심, 우정, 가정의 화목, 조직체의 단결 등을 강조하는 공동체 의식이 이기주의적 사고에 의해서 잠식되어 가는 현상을 보고 불안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 즉 “공동체적 차원의 도덕성”에 대한 의식의 퇴조를 우려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 개방성, 이동성, 익명성, 개별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산업사회와 정보사회의 구조적 속성으로 인하여 전통사회적 연대의식과 귀속의식이 급격히 퇴조하고 있다. 집단적 소속감은 생활상황에 따라서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경향을 보이게 된다.

넷째로, 공동생활의 질서와 안전을 위협하는 행동을 개탄하는 태도가 있다. 기본적인 사회적 규칙과 법을 준수하는 생활에 도덕적 해이현상이 빈번히 관찰된다는 것이다. 산업화의 영향으로 자연의 훼손, 환경의 오염, 공해물질의 방출, 유해식품의 유통 등 시민 생활의 기본적인 규칙을 어기는 풍조에 대한 불안, 즉 “시민적 차원의 도덕성”에 관련된 문제의식이 있다. 현대사회의 구조적 복잡성으로 인하여 시민으로서 기본적 규칙을 준수하는 학습과 습관화를 위한 훈련에 효율성을 기하기가 어렵다. 전통사회에서는 안정된 가족중심의 생활을 통하여 인성의 기본이 형성되기도 하였으나, 핵가족 제도의 발달로 인하여 가정의 전통적 교육 기능은 상대적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그리고 교육기관도 양적으로 팽창된 지식교육의 비중으로 인하여 인성교육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과 관심이 부차적인 중요성의 대상으로 밀려나고 있다.

다섯째로, 황금이나 권력 등의 사회적 위세나 힘을 추구하는 풍토가 만연해 가는 현상에 대한 거부감을 보이는 문제의식이 있다. 고도의 산업화 과정에 부수하는 현상인 재산, 권력, 명예, 향락, 소비 등을 다양하게 추구하는 추세가 각종의 새로운 사회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경향은 “가치관적 차원의 도덕성”에 혼란이 발생한 결과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농경사회의 정태적 생활에서 벗어나서, 산업사회의 역동적 구조를 경험하고, 정보사회의 유동적 환경에 매몰되면,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은 거의 전면적이라고 할 정도로 바뀔 수가 있다. 행복한 생활의 조건이 달라진다. 그리고 예견되는 미래가 새롭게 조망되면 자연스럽게 적응의 형태와 추구하는 가치의 체계가 달라진다.

여섯째로, 과학과 기술의 발달 그 자체가 인간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혼란을 야기한다는 우려가 있다. 과학과 기술은 근대화를 주도하면서 인간의 삶의 조건을 바꾸어 놓는 데 대단한 위세를 보여 왔다. 뿐만 아니라, 더욱 심각하게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 그 자체가 특히 생명공학, 환경생태학의 영역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문제, 그리고 정보사회적 개방화와 기계화로 인한 생활조건과 행동양태의 변화로 인한 문제 등은 과거에 예측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윤리적 쟁점들을 생산하고 있다. 포스트만(Neil Postman)은 “테크노폴리(Technopoly)”라는 책의 서문에서 “걷잡을 수 없는 기술공학의 발전은 우리의 인간성에 내재하는 활력의 원천적 요소들을 파괴하고 도덕적 기반이 없는 문화를 만들어낸다”고 하였다.(위의 책, xii)

과학주의 혹은 기술주의는 “계량화,”“객관화”와 같은 자체의 논리로써 정당화하는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적용하며, 그것이 생활의 여러 영역에서 자체의 관료주의적 힘을 발휘하여 새로운 질서를 강요하면, 종교, 예술, 가족, 정치, 역사, 진리, 지성 등에 대한 의미가 거의 전면적으로 새롭게 규정된다. 기술공학은 친구이기도 하고 적이기도 하다. 문명의 이기로서의 일면과 도덕적 무법자로서의 일면을 함께 소유하고 있다는 양면성에 대한 우려가 있다.

이밖에도 특정한 종교적 관점에서 심령적-정신적 빈곤을 의식하거나, 분배정의의 관점에서 계층 간의 경제적-문화적 격차를 우려하거나, 정치적 이념의 관점에서 이데올로기적 혼란을 경계하거나, 사회통합의 관점에서 배타적 지역감정이나 계층적 갈등을 문제로 삼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도 어떤 의미에서 도덕적-인성적 문제라고 할 수 있으나, 그 원인이나 치유가 일차적으로 도덕적 진단이나 처방만을 요청한다고 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

물론, 위에서 열거한 문제의식의 범주들은 배타적으로 엄격히 구분되지 않으며 개념적으로나 인과적으로나 서로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관심의 강도도 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계층에 따라서, 시기에 따라서, 세계적 환경의 영향에 따라서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종래의 전통적 규범이나 가치기준으로써는 사고와 행동의 옳고 그름 그 자체의 판단을 어렵게 만드는 새로운 생활영역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속도가 매우 급격하면 “무규범”이 지배하는 생활세계가 확장되어 간다는 것에 대한 불안이 존재한다.

어떤 삶을 살도록 가르칠 것인가?

어지럽게 지속적으로, 그리고 급격하게 변화해 가는 사회적-물리적 환경이지만,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스스로 성장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교육이라는 제도와 활동에 의존하고자 한다. 환경에 적응하고 환경을 선택하고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는 존재이다.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의지를 소유한 존재이지만 그 삶에 주어진 원초적 소재(素材)는 각자의 잠재력이다. 그 잠재력은 애초부터 잘 다듬어진 것이 아니며, 오히려 본능적인 일종의 충동성을 나타내면서 어지럽게 환경과의 관계를 가지게 된다. 말하자면 충동적인 욕구가 발동하고, 그 욕구는 주어진 물리적-심리적-사회적 환경과의 관계를 통하여 분출되고 정돈되고 조직되고 재구성된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 혹은 선택한 환경과의 관계에서 피동적으로 자신의 삶이 만들어 지도록 맡겨 버리거나, 아니면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의 방식을 집요한 의지로써 선택하거나 결정하기도 한다. 가족관계, 교우관계, 지역사회, 교육제도, 국가 그리고 생활과 경험의 장으로 존재하는 온갖 환경적 요소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의 방식을 피동적으로 혹은 능동적으로 결정한다. 그 중에서 학교와 같은 교육제도는 이러한 과정에서 성장하는 인간에게 가장 조직적이고 강력한 환경이다.

학교는 성장의 시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리적-사회적 환경에 적응하고 그것을 선택하고 새롭게 조성(창조)하는 데 필요한 기술, 지식, 관습, 문화, 사상 등을 학습하면서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특징짓는 습관들을 만들어 가는 일을 도와준다. 물론 이러한 교육의 역할은 학교만의 책무는 아니며, 성장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기회를 통하여 자신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일에 관련된 학습을 한다. 삶의 방식도 수없이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학교와 사회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어떤 삶을 살도록 권장하기도 하고, 암묵적으로 혹은 무의식 중에 유도하기도 한다. 어쩌면 한 학습자의 삶의 방식은 학교의 실질적 교육력의 정도에 따라서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도 있다.

학교는 제도적 학습의 장에서 학생에게 성장의 삶을 사는 방법을 가르친다. 반드시 기계적으로 혹은 강압적으로가 아니라, 지시적으로 혹은 묵시적으로 젊은이들에게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학생 스스로의 노력에 함께 하는 동반자로서 참여하는 셈이다. 마르틴 부버(Buber)의 언어로 표현해서 “나(Ich)와 너(du)의 관계”에서, 즉 인격적 만남의 관계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함께 생각하는 장을 만든다. 학교와 가정에서 함께 하는 삶 속에서 학생에게 여러 가지의 길이 묵시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권장되는 삶이 있다. 모든 젊은이에게 직접적으로 권장하는 것은 아니라도 학교나 가정이 칭송하거나 본받기를 바라는 삶의 방식들이 있다. 말하자면 “이렇게 살라”고 직접 혹은 간접으로, 명시적으로 묵시적으로 일러 주는 바가 있다.

이 강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두고 학교라는 교육제도가 젊은이들을 인도할 때 가르쳐 온 기본적인 몇가지의 지침이 되는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도덕적, 인성적, 사회적 문제라고 해서 제도적 교육이 그것을 치유하고 교정하는 일에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을 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검토하여 대책을 논의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학교와 가정과 사회의 일차적인 교육적 과업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성장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관리하는 습관, 그리고 그 노력의 방향과 기준과 방법을 익히도록 돕는데 역점을 두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