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적으로 성숙한 정도만큼 도덕적 책임을 묻는다. 어린 아이들에게도 그렇고, 정신적으로 박약한 사람에 대해서도 그러하며, 우리의 관습과 규범을 잘 모르는 낯선 외국인의 경우에도 그렇다. 물론 외국인이 충분히 성장한 성인이고 도덕적 행동이 기대되는 수준의 사람이라면, “로마에서는 로마인이 하는 대로 하라”는 속담이 있듯이, 남의 나라에 있을 때는 그 나라의 도덕적 규칙을 익힐 필요가 있고 어떤 의미에서 그럴 의무도 있다.

[에듀인뉴스팀 ]

제3강 도덕성의 개념과 양심의 기능

이돈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도덕성의 성장

어떤 사람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 앎의 도덕성과 행함의 도덕성 --

두 아이가 장난감 자동차 하나를 두고 서로 가지겠다고 싸우는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본래 그 장난감 자동차는 창수의 것인데 영수가 한 자리에 있게 되면서 그것을 두고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창수는 자동차가 자기 것이니까 영수가 뺏어가지 않도록 그것을 지키고자 하고, 영수는 그것이 탐나서 가지고 싶어 한 것이다. 뺏고 지키고 하는 싸움이 계속되면 어른들은 아주 초보적인 도덕교육을 시작하게 된다. 아마도 먼저 영수로 하여금 그 자동차가 창수의 것이니까 마구 뺏으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 창수로 하여금 그 자동차를 영수와 함께 가지고 놀면 좋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이러한 어른들의 설명과 제안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한 아이들이 아니기 때문에 싸움은 계속된다. 달리 말릴 길이 없는 영수의 엄마는 아이를 억지로 데리고 그곳을 떠나고 만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창수도 영수도 도덕적으로 잘못된 아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영수는 남의 소유물을 뺏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창수는 장난감을 친구와 함께 가지고 노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옳고 그름을 알고 바로 그 알고 있는 바대로 실천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어린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분별할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사람은 도덕적 칭찬이나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저지른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단순한 일종의 사고일 뿐이다. 규칙을 모르는 사람이 저지른 행동은 이를 참작하여 용서하되 일깨워서 우선 그 규칙을 알게 하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규칙 자체를 알게 하고 그 뜻을 이해시킬 수 없는 대상일 때는 도덕적 징벌(懲罰)보다는 다른 방도를 취한다.

우리는 지적으로 성숙한 정도만큼 도덕적 책임을 묻는다. 어린 아이들에게도 그렇고, 정신적으로 박약한 사람에 대해서도 그러하며, 우리의 관습과 규범을 잘 모르는 낯선 외국인의 경우에도 그렇다. 물론 외국인이 충분히 성장한 성인이고 도덕적 행동이 기대되는 수준의 사람이라면, “로마에서는 로마인이 하는 대로 하라”는 속담이 있듯이, 남의 나라에 있을 때는 그 나라의 도덕적 규칙을 익힐 필요가 있고 어떤 의미에서 그럴 의무도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행동에 대하여 도덕적 책임을 물을 때, 그 사람이 그 행동과 관련된 도덕적 가치, 즉 규범이나 규칙을 알고 있을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도덕적 가치를 아는 것을 “인지적(認知的) 도덕성”이라 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실천적(實踐的) 도덕성”이라 한다면, 인지적 도덕성은 실천적 도덕성의 필요조건이다. 인지적 측면은 실천적 행동에서 어떤 규칙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하여 알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수준의 규칙(혹은 규범)이 있다. 하나는 “관습적(慣習的) 수준”의 규칙이고, 다른 하나는 “반성적(反省的) 수준”의 규칙이다.

관습적 규칙의 기준에 의한 인성교육이 의도적으로 겨냥하거나 허용하는 습관은 사회적 관습으로 추구하는 규범에 비추어 변별한다는 것이다. 정직, 효성, 협동, 애국, 희생 등과 같이 좋은 행실이나 착한 태도라고 관습적으로 평가받는 습관들이 이에 속한다. 관습적 규칙은 그것이 이해되는 방식이나 준수되는 구체적 행동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사회적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도덕생활의 기본적 규칙으로 인식되는 것이 보통이다. 대개 어느 사회에서나 성장의 초기에 이러한 기본적 규칙들을 구체적 행동이나 생활에서 실천하도록 요구한다. 관습적 규칙에 따른 습관은 대개 좋은 습관임에 틀림이 없으나, 구체적 상황에서 때로는 복수의 규범들이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 일상적 상황에서 많은 도덕적 문제들이 관습적 규칙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가 아니라, 맹목적으로 충실히 지키고자 할 때 발생하기도 한다. 강한 애국심이 때로는 독선적 행동을 낳고 나라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 오기도 하고, 곤경에 빠진 친구를 구하기 위하여 범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반성적 규칙은 대개 인지적 수준에서 성숙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경직된 관습에만 매이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여 행위의 규칙을 만들고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세우며 지키는 경우를 의미한다. 내가 스스로 여러 가지의 도덕적 문제를 해결하면서 자신의 인격을 관리하고자 할 때, 내가 설정한 원칙이나 신념이나 지혜가 있어야 한다면, 바로 반성적 규칙이 요청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관습적 규범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습관으로 형성할 것인가에는 깊은 반성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다. 특정한 상황에서 관습적 규범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으나 거기서 꼭 지켜야 할 적절한 관습 혹은 규범이 없을 때, 그리고 자신만의 가치관에 의한 삶의 방식과 행동의 기준을 따르고자 할 때, 이런 경우에 자신의 성찰에 의하여 규범을 선택하거나 조정하거나 변통하여 지킬 수도 있다.

타율적 도덕성과 자율적 도덕성

도덕성의 발달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를 주도한 피아제(J. Piaget), 콜버그(L. Kohlberg) 등도 도덕성의 성장은 일차적으로 인지적 성숙성만큼 기대된다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먼저 규칙의 학습으로 시작되고 인지적 세련성, 즉 규칙의 이해, 적용, 판단의 능력이 신장되면 그만큼 도덕적 성장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도덕적 성장은 관습적으로 요구되는 규칙에 따라서 행동하는 “타율성”에서 시작하여 반성적 사고의 도움으로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따라 스스로 규칙을 제정하는 “자율성”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였다.

도덕적 실천에 있어서 관습적 규칙에 맹목적으로 혹은 상당한 정도로 매여 있다면,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선택과 의지가 작용하지 못하는 도덕적 타율성에 묶여있는 셈이다. 반성적 규칙은 도덕적 자율성을 유지하려는 수준에서 요청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자율적인 사람이 관습적 규칙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도덕적 문제의 상황에서 관습적 규칙의 우선적 선택, 균형적 충족 혹은 대안적 발상 등이 있을 수 있고, 자율성이 아무리 세련된 수준의 도덕성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관습적으로 공허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지적 측면이 자율적 수준으로 성숙된 상태는 관습적 규칙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과 그 규칙이 성립하는 이유나 그것에 따른 행동의 결과를 이해하여 실천의 지침으로 내면화하는 것을 포함한다. 예컨대 정직한 삶을 산다는 것은 내게 어떤 의미로 이해되고 어떤 방식으로 실천되어야 하는가를 스스로 숙고해 보는 경지로 성숙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관습에 매였던 타율적 도덕성에 머물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창의력과 독자성을 발휘하며, 새로운 상황, 지식, 혹은 통찰에 비추어 학습한 도덕적 원리를 수정하거나 선택을 행사하는 수준의 세련된 판단의 능력 등도 이 범주에 포괄된다.

아마도 자율적 도덕성의 가장 중요한 경지는 자율적 통합의 수준이다. 잘 통합된 인격체에는 습관들이 서로 일관된 관계를 유지한다. 가까운 이웃에 대해서는 서로 친절히 도우며 의좋게 지내면서 모르는 타인에게는 함부로 폭언을 하는 사람은 잘 통합된 인격의 소유자가 아니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은 이중인격자, 기회주의적 삶을 사는 사람, 투철한 사명감을 지니고 있으나 화합을 못하는 사람, 좋은 목적을 추구하고 있으나 실천의 규칙을 무시하면서 사는 사람 등은 통합된 인격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잘 통합된 인격을 지닌 완벽한 사람을 찾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그것을 지향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좋은 습관의 기준이 된다.

상당히 “자율적(自律的) 수준”의 규칙을 소유하기 시작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하는 습관은 구체적일 수 있다. 애국심은 추상적 개념이지만, 실제로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지키고 나라의 발전에 협조하는 구체적 행동으로 표현된다. 실천적 도덕성은 규칙들을 실제의 행동으로 일관되게 이행하는 “실천적 습관”을 의미한다. 외형적으로 관찰되는 도덕적 행동과 생활은 실천적 측면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신체적-심리적 활동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열정적이거나 미온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실천적 움직임에 요구되는 동기나 감정이 일종의 습관적 성향으로 굳혀져서 행동이나 생활을 이끌어 가는 과정도 포함된다.

실천적 도덕성은 인지적 도덕성에 의해서 방향이 잡혀진 습관을 의미한다. 만약에 기본적 규칙의 이해 방식에 동요가 발생하거나, 규칙들이 충돌하는 갈등의 상황에 직면하거나, 규범의 실천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가 존재하거나, 새로운 낯선 경험의 장에 임하거나 하는 등, 인지적 영역에 혼란이 발생하면 실천적 도덕성은 작동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일관성을 잃게 된다. 이러한 문제 상황은 인지적 능력의 발달 수준에 따라서 그 복잡성의 정도도 달라진다.

도덕성의 지적-행적 양면성

습관의 개념은 실천적 도덕성의 수준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실천하는 습관에만 도덕적 습관이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를 신중하게 검토하는 습관, 내심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진지하고 치밀하게 생각하는 습관, 충동이나 격분을 참고 스스로 조정하는 습관, 옳지 못하다고 판단되는 것에는 주저 없이 용기를 발휘하는 습관 등은 간접적으로는 실천과 무관한 것이 아니지만, 직접적으로는 실천보다 성찰, 반성, 숙고 등의 인지적 노력이며 그 수준에서의 습관이 있다. 도덕적 습관으로는 두 가지, 즉 행동이나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유지되는 실천적 도덕성의 습관이 있고, 도덕적 규칙의 이해와 판단에 작용하는 인지적 도덕성의 습관이 있다.

<>인지적 습관 (지적 도덕성)

- 관습적 이해의 수준

- 자율적 이해의 수준

<>실천적 습관 (행적 도덕성)

- 구체적 행동의 수준

- 일상적 생활의 수준

사람에 따라서는 지적 도덕성과 행적 도덕성에는 각기 강한 특징과 약한 특징, 즉 건전하거나 세련되었거나 일관성 있는 습관을 유지하는 성숙한 도덕성을 지닌 경우가 있고, 불건전하거나 유치하거나 일관성이 없는 습관을 지닌 취약한 도덕성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조합해 보면 다음의 네 가지로 분류된다.

(1) 지적으로도 취약하고 행적으로도 미숙한(무례한) 사람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은 선악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하고 일상적으로 무례한 행동과 절제 없는 생활을 하는, 말자면 도덕적으로 대책이 없는 사람이다. 대체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 이 범주에 속하지만, 신체적으로나 연령으로나 성장한 사람들 중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범주에 속하는 경우가 있다.

(2) 지적으로는 성숙했지만 행적으로 취약한 사람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은 적어도 관습적 수준에서 어떻게 살아야 도덕적으로 비난받지 않는다는 것을 비교적 잘 알고 있고, 때때로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 지혜를 보이기도 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도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도덕적 상황의 선택과 처신에 관해서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실천적 행동과 생활에서 보면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다. 흔히 우리가 “이중인격자”라고 비난하는 대상은 이 범주에 속한다. 대개 많이 배워서 지식인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범주에 속하는 경우가 많고, 지식인은 누구나 다소간 이중인격자일지도 모른다.

(3) 지적으로는 취약하지만 행적으로는 일관된 사람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은 머리가 나쁘거나 공부를 적게 했기 때문에 세련된 판단과 문제해결은 잘 하지 못하지만, 우직하여 자신이 옳다고 믿고 지내는 것에는 충실하며 오히려 “착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도 있지만, “벙어리 삼룡이,” “노테르담의 곱추” 등의 작품에서 그 표본을 보여 주기도 한다.

(4) 지적으로도 출중하고 행적으로도 일관된 사람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은 통합된 신념체제를 소유하고 있으며, 매사의 판단과 실천이 일관되고, 만인의 존경과 추종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지혜와 판단과 선택을 신뢰하고, 생활에서 사표로서 본받고자 한다. 이 경지의 사람들 중에서 출중하게 뛰어난 사람은 “성인” 혹은 “군자”라고 칭송을 받는다. 우리는 모두가 이 경지에 오르기가 어렵고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삶을 영위하는 대상에 대하여 존경하고 칭송하는 태도를 보인다.

앞선 강의에서 검토하였듯이, 개성의 신장과 개체의 자아실현은 개체가 지닌 잠재적 가능성의 실현을 중심으로 인성교육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덕적 측면에서 보면, 인성교육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적-도덕적 규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한편으로 건전한 신념을 소유하게 하고 세련된 사고를 하며 지혜로운(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지적 성숙을 기하고, 다른 한편으로 신념에 일치된 행동과 생활로 행적 일관성을 높이는 성장의 삶을 도우는 노력이다. 즉, 개성의 신장과 자아실현은 개체에 잠재된 내재적 가능성에 일차적 관심을 두고 있다면, 도덕적 측면의 인성교육은 인격의 형성과 성숙에 일차적 관심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두 지의 측면은 같은 실체의 양면일 뿐이며, 성장의 과정에서 때때로 양면의 어느 부분에서 갈등과 고뇌가 생산될 수는 있으나 반드시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양심(良心)이란 어떤 것인가?

도덕적인 삶을 살면서 인격을 도야한다는 것은 양심적인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서 무리는 아니다. 옳고 그름을 알고 그 알고 있는 바대로 실천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일컬어 우리는 “양심”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냥 통속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양심이라는 것이 있고, 인간이 도덕적일 수 있는 것은 그 양심의 힘이 발휘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 양심이 우리의 마음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우습게도 한국인에게 마음이나 양심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면 가슴을 가리키고,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에게 마음(mind) 혹은 양심(conscience)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머리를 가리킨다. 한국인은 마음과 양심은 느끼고 움직이는 감성적 성질의 것으로 생각하고,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생각하고 분별하는 이지적 성질의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양심”이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잘 분석해 보면, 위의 두 가지 의미를 함께 상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경우에 “양심”이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우선, 내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하여 있다고 호소하면, 주변에서 조언하기를 “양심에 비추어서 판단하라”고 일러 준다. 이 경우에 양심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지시해주는 일종의 “권위적 능력”이 있음을 암시한다. 거기에 호소하면 선악을 분별하고 정의와 불의를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양심은 내심(內心)의 “도덕적 판단의 권위”라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면서도 부도덕하거나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평하여, “양심이 마비된 사람,” 혹은 “양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한 판단의 권위가 발동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상대를 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달리, 내가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 종종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고 하면서 죄의식을 표하기도 한다. 그러한 잘못을 다시는 저지르지 않기 위하여 유사한 상황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고 스스로 저항하기도 한다. 그리고 “양심을 가진 사람이면 그런 짓을 하지 아니 한다”라는 표현에서는 “양심”이라는 말이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거나 소극적으로 악을 기피하는 행동을 유발하게 하는 “실천의 동기”와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유혹에 대한 저항과 과오를 저지른 후의 죄의식과 같은 것은 이러한 실천적 동기의 작용으로 이해된다.

내심의 판단적 권위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나 규칙을 밝혀주는 것이므로 인지적(지적) 도덕성의 능력이며, 행동의 동기적 상태는 그것을 이행하려는 경향성을 의미하므로 실천적(행적) 도덕성의 능력이다. 양심의 개념에는 이 두 가지의 특징을 모두 담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이러한 양심이라는 능력은 선천적인 것인가, 아니면 후천적인 것인가? 선천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면 성선설(性善說)이고, 후천적이라고 주장하면 성악설(性惡說)이다.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

사람의 본성이 본래 선한 것인가 아니면 악한 것인가에 대한 대답의 향방은 도덕교육의 목적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결정요인이 된다. 만약에 인간이 본래 선하다면 그 선성(善性)을 습관의 형태로 보존하거나 회복하는 것이 교육일 것이며, 만약에 악하다면 그 악성(惡性)을 계속적으로 고침으로써 다시 악성으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습관을 교정하여 고정하는 것이 교육일 것이다. 옛날 유가(儒家)의 전통 속에 이 문제를 두고 상반된 견해가 있었다. 맹자(孟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하였고, 순자(荀子)는 악하다고 하였다.

맹자는 인간이 본래 양심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한 셈이다. 그의 설명은 위에서 우리가 분석해 본 “양심”이라는 말의 용법에 매우 공교롭게도 일치한다. 그가 선한 성품의 실체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마음은 본래 인의(仁義)를 알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성향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가정된다. 즉, 그것이 양심(良心)이다. 양심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양지(良知)”와 배우지 않고도 실천할 수 있는 “양능(良能)”을 포함한다. 생득적인 판단과 실천의 능력이 곧 양심이다.(진심상 양능) 인지적 요소와 실천적 요소를 함께 응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근거로 든 것이 바로 맹자의 유명한 “사단설”(四端說)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측은함을 느끼는 마음(惻隱之心, 측은지심)이 있고,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마음(羞惡之心, 수오지심)이 있으며, 공경하는 마음(恭敬之心, 공경지심)이 있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是非之心, 시비지심)이 있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인(仁)의 단서이고,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마음이 바로 의(義)의 단서이며, 공경하는 마음이 바로 예(禮)의 단서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바로 지(知)의 단서이다. 인의예지는 밖으로부터 와서 나를 교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본래 있는 것이지만 단지 우리는 마음에 내재하는 바를 평소에 생각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告子上 公都)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에 대립되는 “성악설”을 주장하여 후대, 특히 송(宋) 나라의 유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록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맹자와는 성선설과 성악설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교육의 과제는 다 같이 선성을 기르는 것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맹자는 선한 성품의 회복을 교육적 과제로 삼았으나, 순자는 악한 성품의 개조를 교육적 과제로 삼았다. 맹자는 도덕성의 선천성을 주장한 셈이지만, 순자는 도덕성의 사회성을 제시하였다. 순자는 착한 인간은 선천적 본성의 회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관습과 제도가 사람을 착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순자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인데 이것을 착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챙기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과 싸워서 빼앗으려는 마음이 생기고 사양하는 마음도 없는 것이다. 또 사람은 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소리와 색을 좋아하는 이목(耳目)의 욕망이 있어서 자연히 음란한 행실이 생기게 되고 동시에 예의와 조리가 없어지는 법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도덕적으로 착하게 될 수 있는가? 인간의 본성이 본래 악한 것이므로 그대로는 세상의 혼란을 가져 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옛 성왕(聖王)은 예(禮)를 제정하여 모두 지키게 하였다. 순자에 의하면, 그 예를 숭상하는 마음이 바로 양심이다. 인간의 악한 본성은 반드시 스승과 법도가 있기 때문에 바로 잡히고 예가 있기 때문에 다스려진다. 예는 바로 본성을 인위적으로 정한 기준에 의해서 바로 잡은 것이며 그것은 사회적 산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맹자와 순자에 대하여 각기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맹자에 대하여, 인간의 본래 성품에 착하고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맹자는 마음이 혼탁해졌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그 혼탁함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좋지 못한 환경이나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착한 성품에 악한 요소들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맹자는 인간에게는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하였을 뿐, 인간의 마음은 악한 요소와 어울리거나 물이드는 잠재적 성향도 없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과 인간의 기질적 요소에 어떠한 악한 것도 수용하는 않는 성향이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다시, 순자에 대하여, 인간에게 본래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악을 물리치기 위하여 예를 존중하고 실천할 것인가? 좋은 관습과 제도는 애초에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의 작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의 악한 마음에서 어찌 좋은 관습과 제도가 세워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기준에서 볼 때, 인간의 기질적 요소에는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으나, 선을 추구하는 마음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자신을 다스리면서 좋은 관습과 제도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악한 부분을 다스리기 위하여 좋은 관습과 제도를 확립하고 확충하는 데는 성인과 군자와 같이 탁월한 지혜와 교훈을 보여 준 사람들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칸트의 내심(內心)의 법정

칸트(I. Kant)에 의하면, 양심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내심의 법정”(inner moral court)으로 비유될 수 있다. (The Metaphysics of Morals, M.J. Georgor (trans.) (Philadelphia :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64), p.104.) 개인은 혼자서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역할, 즉 원고, 피고, 판사의 역할을 하며 또한 언도하고 형을 집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여러 역할을 개인이 동시에 수행할 때 일종의 부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양심을 소유한 개인은 자신의 일을 전적으로 자기 혼자서 다루되, 자신을 대하기를 마치 타인을 대하듯이 다루어야 하는 기이한 특징을 가진다. 왜냐하면, 소송 사건을 법정에 가져갔지만, 양심에 의해서 고소된 피고와 그것을 심판하는 판사가 동일한 존재이면 원고가 언제나 패소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법정은 정의에 입각한 것일 수 없는 부조리의 법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덕적 의무에 관한 한에서, 양심은 자기 자신이 아닌 어떤 다른 주체를 자신의 행위에 대한 심판자로 삼아야만 이러한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 이 다른 주체는 이성이 낳은 참다운 인간 혹은 오로지 이상적인 인간이어야만 한다.

칸트는 이러한 부조리의 문제를 “실체적 자아”(homo noumenon)와 “현상적 자아”(homo phenomenon)를 구분함으로써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자유에 근거하여 도덕적 입법을 행사하는 주체로서의 자아와, 이성을 가지고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자아를 구별하였다. 전자는 자신에게 법을 과하고 거기에 복종하려는 도덕적 입법자이고 또한 원고이며 이를 “실체적 자아”라고 한다. 후자는 현실적인 삶을 영위해가는 “현상적 자아”로서 자신의 행위에 관련하여 그 양심의 법정에 피고로서 나타나야 한다. 피고는 역시 변호를 맡는다. 그리고 심판의 과정이 끝나면 권위를 부여받는 공정한 내심의 판사는 행복이나 불행의 언도를 내린다.

칸트의 이와 같은 실체적 자아와 현상적 자아와의 구별은 한 개인이 도덕적 입법자이며 동시에 복종자일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의 도덕적 자율성은 여전히 문제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한 사회의 구성원이 자신이 입법한 것에만 복종하면서 살아간다면, 사실상 사회적인 도덕적 법칙은 없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도덕적 자율성은 타인의 입법에 복종하는 가능성을 허용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최선의 것은 자신의 입법과 상충되지 않는 타인의 의지를 받아들이는 방식, 즉 보편성을 가진 개인적 도덕율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입법적 의지가 일치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칸트는 “자신의 행위가 보편적 법칙일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격률(格律)로 도덕적 자율성이 보편성을 지향할 것을 말하였다. 이러한 실체적 자아와 현상적 자아에 의한 설명은 적어도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자의 조건을 잘 설명하여 주고 있으며, 그의 보편적 법칙론은 도덕성 자체가 요구하는 사회적 구속력을 잘 반영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한편, 정신분석심리학자인 프로이드(S. Freud)에 의하면, 인간은 어릴 때 부모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상과 벌, 모방, 선망 등에 의해서 일종의 습관과 같은 것으로 양심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선인가를 알며 또한 선을 실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양심은 인간성에 내재하는 것으로 선을 아는 지적 권위이며, 선을 행하는 데 실패하지 않게 하는 의지와도 같은 것이며, 비도덕적 희생에 대해서 의협심과 동정을 가지게 하며, 비행에 대하여 분개를 느끼게 하고, 충동이나 욕망 따위를 제어하는 능력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구체적 실체로서 자리 잡고 있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생득적-잠재적 요소가 환경적-사회적 요소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성향, 즉 일종의 도덕적 습관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양심의 개념도 습관의 개념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