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완전하고 일관된 전체를 향해서 자신의 역량을 최고도로 가장 균형있게 계발하는 것이다. (훔볼트 K.W. von Humboldt, 1767-1835)

[에듀인뉴스(EduinNews) = 인터넷뉴스팀 ]

제4강 개체의 성장과 자아의 실현

이돈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어느 것을 시킬까? --

식물성장의 비유

성장의 개념을 교육적 과정의 설명원리로 사용한 것은 근대적 교육사조의 영향이다. 19세기에 아동중심교육을 주장하던 초기의 사상가들은, 교육이란 인간 삶의 장에 객관적으로 주어진 문화적 유산에 속하는 지식을 주입하거나 규범을 내면화하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이 생득적으로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능력과 성향의 계발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대개 루소(J.J. Rouseau)의 교육론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멀리는 록크(J. Locke)와 코메니우스(J.A. Comenius)에까지 소급되기도 한다.

그들에 의하면, 교육은 밖에서부터 안으로의 주입이 아니라 오히려 안에서부터 밖으로의 계발이다. 교육적 가치의 원천은 학습자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의 내면에 있으며, 교육은 잠재적인 것의 실현 혹은 내면적인 것의 계발이라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무엇인가를 주입하거나 부과하는 것은 그 성장 주체의 의지와 무관한 것일 수 있으므로 권위주의적인 원리이다. 이에 비하여, 아동중심적 사상은 성장 주체의 조건과 의지와 선택을 교육활동의 원점에 두고자 한 만큼 교육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기본적 원리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들이 설명하는 교육적 성장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유기체의 성장 목표는 유기체 자체 속에 이미 내재하고 있다고 한 것에서 이어진 사고이다. 어떤 사물이든지 그것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목표는 이미 잠재적으로 지닌 것의 완성에 있는 것이지 어떤 다른 것으로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 인간도 이미 성장을 통하여 도달할 목표와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힘을 잠재적인 형태로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장은 무엇인가의 변화를 상정하지만 모든 변화가 교육적인 것은 아니다. 개체의 자아에 본질로서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실현하는 과정이 바로 교육이라는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잠재성(potentiality)과 실제성(actuality)의 관계로 설명하는 논리의 틀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Aristotle, On Generation and Corruption, The Great Books 8 (Chicago: Encyclpedia Britannica, 1952, Bk 1, Chapters 9-10, pp. 425-428.)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방식을 도토리와 참나무로 예를 들어 보면 도토리는 실제성으로 볼 때 작은 열매 알맹이이지만 잠재성으로 볼 때는 커다란 참나무이다. “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있듯이 도토리는 우리의 손가락 한마디 정도에 불과한 작은 열매이지만, 그러한 작은 것이 싹이 터서 자라면 때로는 높이 10 미터도 더되는 커다란 참나무가 되기도 한다. 그 작은 열매 속에 발아한 새싹이 그런 큰 참나무가 될 가능성이 자체 속에 잠재하고 있다.

잠재성이 실현되는 성장의 과정은 큰 나무가 전봇대로 바뀌는 것과 같은 변화가 아니다. 잠재된 힘이 발현되면서 변화하여 계속 자라고 있는 참나무로 되는 것은 성장이지만, 그런 참나무가 전봇대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단순한 물리적 변화일 뿐이다. 잠재성이 실현되는 과정도 변화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작은 도토리의 “본질적 실체(essential entity)”는 커다란 참나무에서도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전봇대는 그렇지가 않다.

인간의 유아도 실제성으로 볼 때는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생명체이지만 잠재성으로 볼 때는 고도의 세련된 사고를 하고 체계적으로 사물을 처리하는 힘을 지닌 이성적 존재이다.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일컬어지는 그야말로 위대한 생명체로 성장한다. 이러한 잠재된 힘이 성장하면서 실현되는 과정이 바로 흔히 교육적 용어로 사용되는 “자아실현”(自我實現)의 원리이다. 인간의 자아실현은 잠재적 가능성을 발현하고 개성을 신장시키며 계속적인 성장의 삶을 영위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계발설을 주장하는 이론가들은 교육이란 식물의 성장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도토리가 싹을 돋우어 자라는 데는 적절한 공기, 적절한 온도, 적절한 수분과 영양분을 지닌 토양, 그리고 태양 광선 등을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성장에 필요한 조건을 제공해 주면 참나무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그냥 자라게 되어 있고, 인위적인 접목과 같은 것이 아니라면 자라는 도중에 감나무가 되거나 밤나무가 되지도 않는다. 정원사가 할 일은 성장에 필요한 조건을 관리해 주는 일이면 족하다. 그러면 나무는 그 자체에 내재된 힘에 따라서, 거기에 내재된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그리고 그 자체에 내축되어 있는 완성의 목표를 향하여 저절로 자라게 되어 있다.

많은 교육자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아실현에 의한 개성을 지니게 한다는 것은 바로 그가 지닌 잠재성을 계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개성”이란 어떤 의미에서 한 인간을 다른 어느 인간으로부터도 구별되게 하는 특징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되어 있는 요소의 계발을 통하여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순수하게 계발될 수 있게 하는 길은 자연상태에 두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 상태에 있지 않을 때 그 잠재력은 왜곡되어 버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완전한 균형을 갖추어 인간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계발하는 것, 그것은 교육의 이상이기 전에 오히려 사회의 목적이라고 여기는 사상가들도 있다. 공리주의 철학자인 밀(J.S. Mill, 1806-1873)은 훔볼트(K.W. von Humboldt, 1767-1835)를 인용하여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완전하고 일관된 전체를 향해서 자신의 역량을 최고도로 가장 균형있게 계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J.S. Mill, On Liberty, The Great Books 43. Chicago: Encyclpedia Britannica, Inc., 1952, p. 294.) 그가 생각하기로는 사회적 전통으로 주어져 있는 제도나 관습은 임의적인 권위에 의해서 개성의 자유로운 표현과 발달을 제약하는 것이었다. 개성의 계발은 인간성에 내재해 있는 잠재성의 계발을 의미한다. 거기에 인간으로서 완성의 목표가 있고, 거기에 기거하는 이성은 사물과 인간의 활동을 지배하는 법칙을 세울 수 있게 한다. 그러한 내면적 실체는 그 자체가 목적이며 또한 존엄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잠재력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이다. 성장의 본질적 내용과 요소가 원천적으로 생명체 속에 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식물의 성장을 비유하여 설명되는 잠재력은 환경적 조건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 자체로서 실현되지 않으며, 또한 그러한 조건의 조성 이상의 어떤 통제나 간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인간은 자연적 환경 속에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사회적 환경 속에 태어난다. 사회적 환경이란 단순한 대인관계나 인간집단이 형성하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생활의 조건이 아니라, 언어, 관습, 제도, 사상, 예술, 신앙, 기술 등의 문화적 환경을 의미한다. 식물과 동물의 세계에는 축적된 문화의 유산이 없다. 동물에게도 문화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연에 대한 본능적 반응에 의한 흔적에 불과하고 다음의 세대로 전승되면서 축적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화는 유산으로 전승되고 유업으로 승계된다. 문화란 단순히 인간이 개발해 놓은 현실적인 삶의 방식, 규칙, 제도, 지식, 예술, 종교 등과 같은 평면적이고 직접적인 내용만이 아니다. 문화는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그리고 스스로를 대상으로 하여 스스로의 삶 속에서 이루어 놓은 업적의 총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깊이와 넓이를 가진다. 깊이란 역사성을 말하고 넓이란 사회성을 말하는 것이다. 깊이와 넓이를 가진 문화는 잠재력을 지닌 인간이 태어나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장이다.

문화는 그 어느 부분의 것이든지 간에 단순한 우연적 산물은 아니다. 그것은 그 부분에 참여하여 활동한 사람들의 업적이며 그만큼의 수월성을 반영한 것이다. 어느 부분에서나 인간은 거기서 성장할만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물론 잘 통합되지 않은 상태의 문화 속에서는 부폐된 부분이 있고 왜곡된 부분이 있다. 그리고 어떤 개체들은 거기서도 성장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육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문화체제, 어쩌면 부분적으로 병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그 자체에 적응시키는 일이 아니다. 물론 그것을 개혁하면서 살아갈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교육을 계획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병든 문화의 장은 그 자체가 성장을 촉진시키는 수단으로가 아니라면, 교육적 경험을 위하여 선택해서도 안된다. 교육은 선택된 문화의 장을 제공하는 것이며 각자가 인간활동의 수월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장을 제공해야 한다.

내재적 동기와 외재적 동기

자연적-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신의 성장, 즉 자아실현을 통한 개성의 성장을 위하여, 학교와 가정은 젊은이들에게 어떤 경험의 세계를 선택하도록 도와야 하는가? 노래를 좋아한다고 해서 반드시 노래를 잘한다는 말은 아니다. 수학을 싫어한다고 해서 반드시 수학을 잘못한다는 말도 아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이 있고 싫어하는 것이 있으며 잘하는 것과 잘못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싫어하고 잘못하는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정리해서 보면,

(1) 좋아하기도 하고 잘하기도 하는 것이 있고,

(2) 좋아하지만 잘못하는 것이 있다.

(3) 싫어하지만 남보다 잘하는 것이 있고,

(4) 싫어하기도 하지만 잘 못하기도 하는 것이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하고 싶은 것을 못하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잘못하는 것을 억지로 하라고 강요받기도 한다. 좋아하는데도 잘못한다고 해서 그만하라고 야단맞기도 하고, 좋아하고 잘한다고 해서 그렇게만 하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다르다면 아이의 진로나 장래를 위하여 잘하는 것을 하라고 시킬 것인가, 아니면 좋아하는 것을 하라고 시킬 것인가?

물론 아이들이 성장의 과정에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 다르고 자라서 다르기도 하다. 좋아하던 것도 어느 시기에 이르면 싫어지기도 하고 남보다 잘하던 것도 자라서는 상대적으로 뒤지는 수가 있다. 그리고 성장의 과정은 단순히 신체적-정신적 능력의 일정한 향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범위의 계속적인 확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많은 것을 새롭게 또 새롭게 경험하게 되고, 관심과 취미도 이에 따라 달라지면 잘하고 못하는 것에 적지 않은 변화가 생긴다.

어떻든, 아이가 좋아한다는 것은 누가 강요하지 않더라도 즐겨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잘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관찰한 바로는 잠재력이 다소 그 방면에 있음을 비쳐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잘하고 있다는 말은 그 일과 관련하여 아이의 “잠재적 능력”의 한 요소가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고, 좋아하고 즐긴다는 것은 그 일을 하는 당사자의 “내재적 동기”가 주도한다는 말이다. 그 좋아하고 즐기는 성향을 바꾸자면, “외재적 동기” 예컨대 부모나 교사는 칭찬이나 징벌이나 회유 등에 의해서 관심과 습관을 새롭게 형성하게 해야 할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시킬 것인가, 아니면 잘하는 것을 시킬 것인가의 질문은 바로 “내재적 동기”와 “잠재적 능력”의 어느 것을 더 중시할 것인가의 질문이기도 하다.

인간의 활동, 특히 의도적인 활동에는 그 활동을 하게 하는 어떤 심리적인 힘이 작용한다. 어떤 욕구, 필요, 의지와 같이 직접적이고 순간적인 것도 있고, 입지(立志), 포부, 소망, 집념 등과 같이 다소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것도 있다. 그 힘을 일컬어 심리학에서는 “동기”라고 하고 모든 의식적인 행위와 활동에는 크고 작고 간에 어떤 동기가 작용한다. 일반적으로 동기의 개념은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할 때 거기에 작용하는 그 행위자의 내면적 혹은 외부적 힘의 작용을 의미하고,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와 “외재적 동기(extrinsic motivation)”로 구분하기도 한다. 내재적 동기는 내재적 가치를 추구하고 외재적 동기는 외재적 가치(혹은 수단적 가치)를 위한 것이다.

과학자는 어떤 법칙이나 이론을 이해하고 거기에 근거하여 새로운 연구를 위한 가설을 설정하고 그것을 검증하는 일을 한다. 탐구자로서의 활동 그 자체에 몰두해 있고 그 과정을 즐기고 희열을 경험한다. 그 자체가 연구자에게 보상이며 또한 활동이 지향하는 내재적 가치이고 그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바로 내재적 동기이다. 그러나 그 과학도가 행한 일련의 탐구활동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고 목적하는 바는 영리나 명성이나 지위 등의 보상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 힘은 외재적 동기에 해당한다. 한 학습자가 공부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학습에 종사하면 내재적 동기에 의한 것이고, 칭찬을 듣거나 징벌을 면하거나 일등하거나 합격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 외재적 동기에 의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 학생이 수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수학의 질서와 세계를 분석하고 조작하고 이해하는 과정 그 자체만을 즐기지는 않는다. 애초에는 어떤 깨달음의 즐거움도 있겠지만 오히려 칭찬이나 보상을 통한 외재적 동기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있다. 내재적 동기에 지배되는 단계는 상당한 정도의 학습경험이 진행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학에서 재미를 느끼고 그것을 즐기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자식을 피아니스트로 키우고 싶은 부모는 아이가 피아노를 배우는 초기에는 칭찬도 하고 야단도 치면서 가르쳤지만, 아이는 나중에 피아노를 무엇보다도 즐기는 생활을 하게 된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학습이나 노력에는 반드시 어느 하나의 동기가 배타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어른이 된 경우, 예를 들어 어떤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고 함께 공부하고 제자의 성장을 보면서 사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어서 교직에 애착을 버리지 않고 헌신의 생활을 하는 것, 즉 교직생활의 내재적 동기에 충실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과정에서 때로는 주변에 눈을 돌려보고 자신의 삶의 모습을 타인과 비교할 때, 예컨대 한 친구가 정치계에 진출하여 자기보다 막강한 권력의 행사를 즐기고 있거나, 사업에 성공하여 경제적으로 자기보다 훨씬 풍요한 생활을 누리는 것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고 자신의 내재적 동기가 희석되기 시작할 수도 있다.

한 학생이 평소에 문학이나 과학이나 어느 분야에서 그야말로 내재적 동기에 지배되어 공부를 즐기고 그 자체로서 보상을 받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학년말에 보니 일등은 다른 친구가 가져가고 소위 일류대학에 진학하기도 어렵게 되고, 아무도 자기를 칭찬해 주는 사람도 없으며, 더이상 공부 그 자체의 즐거움에 빠져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적어도 어느 수준의 외재적 가치의 요소가 따르지 않으면 내재적 동기만으로 자신의 활동과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내면적 만족과 외재적 보상은 어느 정도의 균형을 필요로 한다.

다시, 아이에게 좋아하는 것을 시킬 것인가, 아니면 잘하는 것을 시킬 것인가의 질문에 대하여 우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잘하는 것은 잠재적 능력이 작용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 수가 있고, 좋아하는 것은 환경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수도 있다. 좋아한다는 것은 내재적 동기가 충족되고 있는 상태이지만, 좋아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시키는 것은 아이의 자율적 자아형성에 도움되지 않은 것이므로, 적어도 외재적 동기보다는 내재적 동기가 주도할 수 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물론 외재적 동기로 시작하여 내재적 동기로 전환하는 것이 때때로 가능하기 때문에, 상벌이나 보상의 방법과 같은 외재적 동기의 유발은 일시적 수단으로 사용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외재적 동기의 유발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은 내재적 동기의 지속적 유지 자체를 어렵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으로 변하여 어떤 공부가 외재적 동기에 지배되도록 방치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공부와 관련하여 아이가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것을 관찰하거나 아니면 좋아할 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는 있고, 그것이 불가능하여 아이가 상벌과 강제 등의 외재적 동기에 지배되는 상태로 묶어 두는 것은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잠재력의 관찰을 위한 기회의 장을 만들어야

그러면 좋아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시킬 것인가? 좋아하는 것도 그것이 요구하는 능력이 없으면 좋아하는 것 그것만으로 보람된 인생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내재적 동기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좋아하는 것에의 보상은 만족감이고, 만족감이 지속적으로 혹은 간헐적으로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계속해서 좋아할 수 없게 된다. 바로 내재적 동기는 힘을 잃게 된다. 그래서 흔히 “소질”이라고 하는 것이 전혀 없으면 만류하는 것이 보통이다. 쉬운 대답은 적어도 잘할 수 있는 소질, 말하자면 좋아하는 것 그것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잠재력은 일종의 성향(disposition)이다. 사물의 성향도 그렇지만 인간의 성향은 숨겨진 것이지 언제나 지금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휘발유는 “가연성,” 즉 불에 탈 수 있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항상 휘발유가 불에 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어떤 수준의 고온이 일시적으로라도 주어져야 불이 붙고 탄다. 그렇듯이, 잠재력도 일종의 성향이라는 말은 숨겨진 것이지 항상 나타나는 능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숨겨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떤 아이가 공격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항상 남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심의 어떤 요소가 작용하여 좌절을 경험하거나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공격적 성향이 바로 파괴적 행동으로 표현되고 또한 관찰된다. 어떤 성향이 있다고 말할 때, 특정한 조건 혹은 환경이 주어지면 기대한 실제의 행동이나 변화를 나타낸다. 말하자면 그 성향이 실제로 나타날 수 있게 하는 조건 혹은 상황이 주어져야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잠재력의 유무를 파악하려면, 그것이 발휘될 수 있는 환경, 여건, 조건 혹은 상황을 제공해 보고 기대한 결과가 관찰되어야 한다. 아이가 어떤 잠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발휘될 수 있는 경험의 장을 제공해 보아야 한다. 그러한 경험(혹은 학습)의 장이 제공되지 않고는 잠재력의 유무를 파악할 수가 없다.

부모들은 아이가 여러 가지의 경험을 하는 것은 아이의 건강한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박물관에도 데려가고 축구도 시켜보고 여행에도 데려가고 연극도 시켜보고 바이올린도 가르쳐 본다. 여러 가지의 폭넓은 경험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러한 다양하고 폭넓은 경험의 장에서 부모나 교사나 학생 자신이 어떤 능력이 실제로 발휘되고 있고, 어떤 상황을 잘 감당하며, 무엇을 즐겨하는가를 할 수만 있으면 체계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잠재적 능력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능력(혹은 성향)이 발휘될 수 있는 경험(혹은 학습)의 장을 제공해 보아야 한다. 가장 잘하는 것이 무엇인가, 잘못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관찰해 보아야 한다. 부모나 교사가 아이의 교육적 성장에 관심을 둔다면, 무엇인가를 잘하는 잠재적 능력을 실제로 발휘하도록 경험 혹은 생활의 장을 제공해 보아야 한다.

가정에서 부모와 가족이 아이들을 위한 행사나 일을 계획한다면 잠재력을 관찰한다는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학교의 특별활동과 클럽활동도 단순히 정규의 교육과정을 보완하는 수준의 학습활동으로만 운영할 것이 아니라, 교사가 학생의 잠재력을 파악하는 기회로, 혹은 학생 자신이 자신의 잠재력을 시험해 보는 체험의 장이 되도록 기획할 필요가 있다. 학생 자신도 친구를 사귀고 견문을 넓히고 일을 추진해 보고 새로운 세계를 알고 지식을 넓히고 사회적 활동을 해 보고 하는 것 등의 경험은 그 자체로서도 바람직하지만, 이러한 기회에 내가 좋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알아보는 기회로 삼으면 더욱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단순히 말해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좋은 취향과 좋은 능력으로 평가되는 것이라면, 성공적인 삶은 내가 가장 좋아하고 동시에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논리로 본다면, 아이가 잘하는 것을 관찰하여 그것을 좋아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외는 있다. 내가 좋아하든지 않든지 간에, 그리고 내가 잘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내게는 특별한 사명과 보람이 있어서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뜻있는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굳게 자리 잡은 경우, 그리고 나는 내 인생이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오직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겠다는 타협이 불가능할 만큼 확고한 목표가 있다면, 문제는 다르다. 좋은 신념은 좋은 능력에 우선한다. 이 부분은 단순히 탁월한 개성의 요청이 아니라, 준엄한 인격의 요청이고 보람있는 삶의 조건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