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관계나, 사회적 과정, 혹은 사회적 공동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나 사업의 규범적 성격을 논할 때, 가끔 “게임의 규칙”(rules of the game)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게임의 규칙에 해당하는 것은 법이나 준칙. 규정이나 지침, 조직의 강령, 특정한 무엇을 실행하는 절차적 규칙과 같이 형식적인 것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규칙의 개념을 확대하면 우리가 생활에서 지키고 있는 모든 것, 모든 문화적 요소가 넓은 의미의 규칙의 범주에 속한다.

제7강 입법과 준법의 일상화

이돈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일상적인 삶의 과정에서 우리가 인성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사회적 삶, 즉 사회적 관계 속에서 타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개인이 혼자서 무인도에 살면서, 섬 밖의 누구와도 어떤 의미의 사회적 관계가 없이 살고 있다면, 그 개인의 인성을 문제로 삼거나 관심의 대상으로 삼을 이유가 없다. 혹시 자연 속에서 생활하면서 성격상의 문제로 인하여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지키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도 일종의 인성적 문제라고 생각할 수는 있겠으나,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지금 관심을 두고 있는 인성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인성적 문제는 사회적 관계의 삶 속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사회적 관계”의 성격에 관한 원초적 검토를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게임(혹은 놀이)”의 비유

사회적 관계나, 사회적 과정, 혹은 사회적 공동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나 사업의 규범적 성격을 논할 때, 가끔 “게임의 규칙”(rules of the game)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가장 쉽게는 스포츠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종류의 경기에서 규칙은 언제나 기본적으로 중요한 개념으로 인식된다. 규칙이 없는 경기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기에서만 아니라, 정치적 활동에서도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는 상황에서 갈등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경쟁과 타협 혹은 협상의 방법을 두고 겨룰 때 이 말이 적용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이 까다로운 가설의 검증이나 체계적인 탐구의 기법을 원론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이 말이 가끔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사회적 활동이나 과학적 탐구의 과정에서 문제를 체계적으로 검토하고 해결하여 사회일반이나 전문가 집단에게서 공인을 받고자 할 때, 그 과정에는 규칙의 체제가 있고 마치 게임 혹은 놀이의 규칙을 적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검토하면서 진행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사회적 삶 자체를 “게임”으로 비유해서 생각해 보자. 게임에는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지만, 어느 것이나 그것이 제대로 게임이 되게 하는 “규칙의 체제”가 있다. 예를 들어 병정놀이의 경우에, 우리는 두 군대가 서로 적대 관계에 있다고 가상한다. 군대에는 대장이 있고 부하가 있다. 대장이 하는 일과 부하가 하는 일은 같지가 않다. 또한 전쟁을 시작하는 방식과 끝내는 방식이 서로 합의되어 있다. 그들은 싸움이 끝난 후에 이긴 편에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패한 편에서 지켜야할 일이 무엇이라고 약속되어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약속들은 모두 규칙에 해당하며 그 규칙들이 지켜지지 않으면 게임은 성립되지 않는다. 병정놀이의 경우에만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온갖 종류의 경기는 규칙이 있기 때문에 경기로서 성립된다. 이러한 규칙들 중에는 “필수적(혹은 법리적) 규칙”과 “전략적 규칙”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

필수적(법리적) 규칙은 그 게임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하여 규정된 것으로서 꼭 지켜야 할 규칙이다. 야구경기를 설명하자면, 두 팀이 나누어서 싸우고, 한 편이 공격을 할 때 다른 편이 수비를 하며, 공격팀에서 세 선수가 “아웃” 판정을 받았을 때 수비와 공격을 교대하고, 정규의 공격과 수비는 9회에 걸쳐 진행한다는 것 등의 규칙을 밝힌다. 이런 필수적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그 게임은 엄격한 의미의 야구경기가 아니다. 그리고 그 규칙들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공정하고 정직한 게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공정성을 관리하기 위하여 심판을 둔다. 이렇게 규칙들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야구라는 게임을 정의하고 설명한다.

전략적 규칙은 필수적 규칙과는 달리 경기에서 이기기 위하여, 혹은 경기를 더욱 재미있게 하기 위하여 대체적으로 팀의 관계자들이 임의로 정한 것이며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야구의 경우에, 1번 타자 혹은 4번 타자는 어떤 자질을 가진 선수가 맡아야 하고, 유격수와 중견수는 어떤 능력을 가진 선수가 맡아야 하는 가에 대한 일종의 규칙이 있다. 일반적으로 어느 팀에서나 지키는 것도 있고 한 팀이 자체의 필요에 의하여 특별히 정한 것도 있다.

이러한 필수적, 전략적 규칙들은 모든 스포츠에서 볼 수 있고, 바둑이나 어린 아이들의 놀이 혹은 성인들의 도박에도 만들어져 있다. 단지 게임이나 경기만이 아니라, 인간 생활의 모든 활동에는 이러한 의미의 규칙들이 있고, 그 규칙들 때문에 그 모든 활동들이 그 자체의 특징을 가지고 행해진다. 그런 점에서 모든 사회적 활동을 성격상 게임(놀이)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치 활동, 경제 활동, 가정 생활, 교우 관계, 예술 활동, 그리고 학문 탐구 등 어느 것이든지 이들이 각기 그렇게 불리고 그렇게 행하여지는 것은, 바로 그 속에 명시적으로 혹은 묵시적으로, 형식적으로 혹은 관습적으로 주어져 있는 규칙들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필수적 규칙은 그 게임의 전통이나 관습으로 전해오거나, 공식적인 합의에 의하여 정하거나, 필요한 경우에 관련된 당사자가 새롭게 제정한다. 이 경우에 모든 구성원이 직접 참여할 수도 있고 대표를 보내어 간접적으로 참여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입법”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고,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혹은 의무적으로 정해진 바를 지키는 것이 “준법”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수없이 많은 사회적 조직에 관련해서 살고 있다.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교사로서 학생으로서, 생산자로서 소비자로서, 고용주로서 근로자로서, 상인으로서 고객으로서, 순간순간 마다 우리는 사회적 조직에 참여하여 그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입법과 준법의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사소한 것도 있고 심각한 것도 있고, 많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도 있고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있다.

여기서 게임의 규칙에 해당하는 것은 법이나 준칙. 규정이나 지침, 조직의 강령, 특정한 무엇을 실행하는 절차적 규칙과 같이 형식적인 것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규칙의 개념을 확대하면 우리가 생활에서 지키고 있는 모든 것, 모든 문화적 요소가 넓은 의미의 규칙의 범주에 속한다.

우리는 소리로써 의사를 교환하지만 모든 소리가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소리가 말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지키는 규칙이 있어야 한다. 그 규칙으로 인하여 소리가 말이 될 수 있다. 옷을 입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이나, 인사를 하는 것이나, 자녀를 키우는 것이나, 결혼생활을 하는 것이나, 학문을 하는 것이나 정치를 하는 것 등, 모든 것이 규칙들, 즉 게임의 규칙들을 실천하고 있는 삶의 방식이다. 우리는 수많은 게임 속의 삶을 살고 있다. 입법과 준법의 삶을 구성원의 누구든지 제대로 바르게 준수하거나 감당하지 못하면, 그 조직과 게임은 붕괴되는 것이고, 개인적으로 혹은 소수가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다소 소외를 느끼거나 “왕따”를 당하거나 이단자가 되거나 범법자가 된다.

사회적 관계의 원초적 기원

게임의 규칙들에 비유할 수 있는 사회적 삶, 특히 사회적 관계의 규칙들은 원초적으로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사회적 관계 속에 있는 타인들은 나와 어떤 의미의 관계를 가진 사람들인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형성되는 원초적 과정을 미국의 철학자이기도 하고 사회심리학자로 기억되는 미이드(George H. Mead, 1863-1931) 만큼 설득력 있게 설명해 준 이론도 드물다.

미이드는 실험심리학적 방법을 신봉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왓슨(John B. Watson, 1878-1958)과 함께 행동주의 심리학자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는 왓슨의 행동주의에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하나는 심리학을 개체의 행동에 한정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성적(內省的) 사고를 철저히 불신하고 거부함으로써 개인의 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해 버리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미이드는 개인의 행동은 사회적 과정에서 존재하고 또한 그렇게만 이해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인간의 행동은 개인을 초월한 것이며 다른 개인들과의 활동에 동시에 참여하는 사회적 상황을 지향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행위에는 내면적인, 사적인 부분이 있고 그 만큼 행위는 부분적으로 유기체(有機體)의 내부에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미이드는 사회적 행동의 가장 단순한 형태이며, 동시에 마음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제스쳐”(gesture)라고 하였다. 제스쳐, 즉 몸짓이나 손짓은 단순히 몸이나 손의 움직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의 표현이거나 주변의 사람에게 던지는 신호이기도 하다. 이 몸짓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가진 상태에서 어떤 반응을 기대하면서 취하는 일종의 자극적 신호이기도 하다.

열려진 창문을 닫았으면 좋겠다는 것을 몸짓으로 나타내었을 때 창가에 앉은 사람이 그 뜻을 알고 창문을 닫는다. 우리가 어떤 몸짓을 취할 때는 그것에 반응하게 될 상대가 있음을 상정하고 있다. 내가 보낸 몸짓에 대하여 기대했던 반응을 상대방이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비로소 나는 어떤 종류의 사고(思考), 즉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사고는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몸짓의 작용과 같은 것이며 바로 마음속의 대화이기도 하다.(George H. Mead, Mind, Self and Society,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7, p. 47.) 그러한 마음 속의 대화를 우리의 마음이 경험한 내용으로서 모아 둔 것, 즉 내면화한 것이 바로 “신념(사상)의 본질”이다. 몸짓(제스쳐)은 근원적으로 마음의 표현(혹은 활동)이며, 타인과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사회적 관계의 시작이기도 하다.

몸짓은 단순히 신체적인 동작이나 표식만이 아니라 소리로써도 취할 수 있다. 언어는 바로 “음성적 제스쳐”(vocal gesture)이며 인간의 마음처럼 매우 발달한 수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다른 동물들도 음성적 몸짓을 사용하고 있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자신의 반응으로써 교환할 수 있다는 것, 바로 여기에 음성적 제스쳐의 중요성이 있다.(위의 책, pp. 69-70.)

인간은 언어를 통하여 자신을 타인의 위치에 두기도 하고 타인의 역할을 인식하기도 한다. 그만큼 언어는 매우 유용성이 높은 상징적 수단(기호)이다. 언어는 그 몸짓의 주체인 나와, 그 몸짓이 나타내는 유의미한 내용, 그리고 그 몸짓을 받는 상대방과 연결하는 “삼자의 관계,” 즉 주체와 객체를 연결하고 그 관계가 보편적 의미를 지니도록 하는 상징적 힘을 발휘한다.

미이드에 의하면, 사회구조는 개인들의 사회적 과정을 통하여 나타난 것이지만 자아(自我)는 역시 개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개인의 “개별성,” 즉 정체(正體)는 그 자체로서 유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사회성, 즉 사회적 관계의 맥락에서 의미를 지닌다. 개별적 자아는 타인의 존재가 있고 그 타인과의 관계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개별적일 뿐이다.

각기의 자아가 지닌 본질적 특성을 타인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자아는 오히려 객체가 된다. 나를 떠나 타인의 관점에서 나를 보면 나는 내가 아닌 타인일 뿐이다. 이러한 초월적-반성적 원리에 의하여 자아를 타인의 관점에서 볼 수 있고 또한 그 관계에 있는 자신을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은 “내면적 대화,” 즉 사고의 진행을 의미한다. 대화의 주체이며 동시에 객체인 자아는 기본적으로 이지적 능력과 특성을 지니게 되고, 인간은 사고하고 지식을 생산하고 이론을 세울 수 있게 된다.

미이드는 인간의 경험을 사회적 경험의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의 경험은 고립된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더욱 넓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 즉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그 외연을 넓고 깊게 형성하는 인간의 전체적 환경 속에서 발생한 경험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도 단순히 지금의 개체 자체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습과 제도와 문화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인간의 마음이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그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 과학적 탐구행위를 두고 자세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것이 협동적인 사회적 과정인 것을 알 수가 있다.(위의 책, p. 135.)

개체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어떤 성격의 관계인가?

앞서 논의한 바 있는, 사회적 학습의 내용이 되는 규칙들, 즉 게임의 규칙들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사회적 존재로서 참여한 사회적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미이드는 개체의 자아를 사회적 과정의 소산으로 설명하지만, 개체의 자아는 또한 유일한 정체성을 지닌 존재이며 각기 자체의 창의성을 발휘하는 원천으로 이해하고 있다. 개체들은 자신을 초월한 객관적 힘에 의해서 입법된 규칙의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 있으면서 거기서 형성된 규칙의 체제로써 사회적 관계를 가지며 자율적 삶을 사는 존재로 이해된다.

그러면 사회적 규칙들을 입법하고 준법하는 생활을 할 때, 개체들이 어떻게 사회적 존재가 되었는가도 중요하지만, 그 사회 자체와 개체들은 어떤 의미의 관계에 있는가도 중요한 질문이 된다. 말하자면, 나는 사회와 어떤 의미를 지닌 관계로 존재하는가의 질문이다. 그 대답에 따라 입법과 준법의 의미가 달라진다.

과거의 수많은 이론들은 이 질문에 관하여 다소 불명료한 논리를 동원하거나 신비주의적 사고로 위장하기도 하였다. 아니면 개체와 사회를 서로 수단과 목적의 관계, 즉 개체들은 사회의 구성요소로서 사회적 목적의 수단일 뿐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그 반대라는 방식의 이해와 설명이 있어 왔다.

개체와 개체의 관계, 그 관계로써 사회가 성립하는 원리에 관하여 두 가지의 대립된 주장이 있어 왔다. 하나는 “기계적 관계”(혹은 “외적 관계”)로 이해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유기적 관계”(혹은 “내적 관계”)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기계적 관계(mechanic relation)를 주장하는 논자들은 사회를 성립시키는 기본적인 실체는 개체들이며, 개체와 개체의 관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규칙들이 형성된 결과라고 생각하였다. 이때의 개체는 원자적 개체로서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개인주의적 사고에서 나타나는 개념이다. 개체 혹은 개체 사이에 본연적 관계라는 개념이 없다. 말하자면, 그 관계는 개체의 속성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외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관계를 “외적인 관계”(external relationa)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각 개체는 고유하며 그 자체로서 목적적 존재이고 도덕적으로는 절대적 존엄성을 지니며 따라서 스스로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러한 자유롭고 존엄한 개체들도 사회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지만 개체들 간의 관계는 일종의 “계약적 관계”이고 우연적으로 맺어진 것이다. 계약의 원리는 인간이 이성의 능력에 호소하여 합리적 방식으로 계약의 규칙들, 혹은 규칙의 체제를 입법하고 이에 따른 준법의 삶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개체와 개체의 관계를 유기적 관계(organic relation)로 이해하면, 사회 속에 있는 개체들은 각기의 본질적 특성 자체 속에 이미 다른 개체, 나아가서는 전체와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관계는 개체의 속성 속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므로 “내적 관계”(internal relation)이라고도 한다. 그 관계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다.

개체와 다른 개체와의 이러한 관계가 필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면, 결국 모든 개체들은 전체 속에서 서로 내재적으로 지닌 관계 속에 있는 셈이다. 이러한 사회의 개념은 사회유기체설에서 볼 수 있는 경향이다. 특히 사회를 개체들로 구성된 유기체라고 상정할 경우에 대개 그 설명의 결과는 개체의 가치를 사회의 가치에 비하여 부차적인 것이라고 평가하거나 다소간 희생시켜 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위의 두 가지의 생각과는 달리 듀이(John Dewey)는 제3의 주장을 한 바 있다. 듀이가 개체와 개체, 개체와 사회의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은 미이드의 생각과 거의 유사하다. 전형적인 개인주의자들과는 달리 개체를 사회적 개체로 보았고, 철저한 유기체설과는 달리 사회를 개체들의 연합적 조직(association)이라고 보았다.

듀이에 의하면, 모든 신념과 관습과 제도와 전통은 사회적 과정의 산물이지만, 그러한 사회성은 본질적인 유기체로서 필연적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체들의 상호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사회적 산물이며, 또한 그러면서도 그 개체들을 다시 사회적 맥락 속에 있게 한다는 것이다. 개체와 사회는 모두 그 관계를 통해 특성을 서로 결정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의 구조에 관한 듀이의 설명은 다원주의적인 특징을 보이며, 국가라는 사회적 조직도 구성원인 개체들의 공공적 복리에 봉사하는 수단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듀이의 그러한 연합적 조직은 낱낱으로 존재하는 개체들의 기계적 집합체가 아니라, 그 모임을 성립시키는 일종의 느슨한 유기체적 원리가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유기체적 원리는 부분적이고 다원적인 것이다. 연합적 조직은 하나의 전체로서 존재하는 것의 부분들이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유기체는 아니다.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흔히 발생하는 개체와 개체, 집단과 집단의 갈등적 관계를 설명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개체들이나 집단들이나 존재하는 목적과 추구하는 가치가 본질적으로 하나로 귀결되는 유기체적 특성에서 유래한다면 서로 충돌하고 갈등해야 할 이유가 없다.

듀이에 의하면 사회에는 수많은 조직체들이 구성되어 있고 그 수는 구성원들이 함께 추구하는 가치의 수만큼 많고 다양하다고 하였다. 가족, 기업, 학교, 사원, 동호회, 정당 등의 모든 사회적 조직들은 구성원이 추구하는 가치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들이다. 그리고 개체들은 각기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들 중에 특히 사회적 가치에 해당하는 것들이 수없이 많으므로 자신이 속한 조직들의 수도 그만큼 헤아릴 수 없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개인은 사회적 개인이고 사회는 개인들의 연합적 조직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

입법과 준법의 생활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어느 연령대의 사람이든지 간에 사회적으로 성장하고 도덕적으로 세련된다는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 혹은 세계의 기본적 규칙들 혹은 규범들을 내면화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회적 규칙들을 내면화(內面化)함으로써 인간은 그가 속한 사회에 적응하고 당당한 구성원이 되며, 삶의 과정에서 필요로 하는 규칙의 제정이나 재구성에 참여하게 된다. 규칙들을 내면화하는 것은 규칙을 지키는 것, 즉 흔히 우리가 말하는 “준법”이 가장 전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준법의 생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조직을 구성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일상생활에서도 새로이 요구되는 규칙의 제정 혹은 개정과 같은 것, 즉 “입법”의 상황과 경험을 맞이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기계적 관계와 유기적 관계의 어느 하나로서 설명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므로 입법과 준법의 생활도 그만큼 혼돈스럽다. 인간은 실제의 생활에서 볼 때, 나와 이웃, 혹은 나와 동료는 때때로 기계적인 관계로 존재하고, 때때로는 유기적 관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수없이 많은 사회적 조직들 중에서 어떤 조직은 상대적으로 그 특징이 더욱 유기적인 것이고, 어떤 조직은 성격상 더욱 기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더욱 유기적인 조직의 특징을 지닌 대표적인 조직으로는 친족관계, 교우관계가 여기에 속한다. 말하자면 흔히 사회학자들이 1차적 집단이라고 하는 조직이 여기에 속한다. 자식은 부모로 인하여 자식인 것이고 부모는 자식으로 인하여 부모인 것이다. 자식의 특성 속에 부모와의 관계가 주어져 있고, 부모의 특성 속에 자식과의 관계가 주어져 있다.

정상적인 친족관계는 사회적 계약이기 전에 이미 주어진 혈연적 관계로 맺어져 있다. 친족 간의 생활에서 지키는 기본적인 규칙은 우선적으로 혈연적 관계의 규칙이다. 친족 간의 항열의 개념이나 가족 간의 촌수는 혈연관계의 규칙에 따르고, 거기서 관련된 규칙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서로 존경하고 우애하고 보살피는 규칙은 일차적으로 유기체적 사회관계가 중심이 된다. 그러나 문중에서 공동의 재산을 관리한다든가, 친목의 목적으로 조직을 운영할 때, 유기적 조직의 성격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 회비를 부담한다든가, 회장을 선출한다든가, 사업을 계획할 때는, 그 조직이 기계적 관계의 경우와 유사한 규칙을 제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상대적으로 더욱 기계적인 조직의 특징을 지닌 대표적인 조직으로는 공공기관이나 기업체 등이 여기에 속한다. 유기체적 조직의 경우에는 함께 지키고 있는 규칙들은 동지적, 정의적, 형제적 유대에 호소하지만, 기계적 조직의 경우에는 합리적, 이지적, 계약적 기준과 관계에 기초하여 운영된다. 만약에 여기서 정의적 관계에 호소하게 되면, 기계적 조직은 유지되기가 어렵다.

흔히 “공적인 것은 공적인 것이고 사적인 것은 사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은 유기적 관계의 규칙과 기계적 관계의 규칙을 혼동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함께 근무하다가 보면, 직장 동료와의 관계가 마치 형제나 친구의 관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서로 기계적 관계로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는 냉엄한 규칙의 요구를 잊어버리기도 한다. 직장의 동료로서 주어진 업무를 함께 효율적으로 수행하자면, 대체로 냉철하고 기계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으나, 때때로 따뜻한 인간적 관계가 과업을 훨씬 생산적으로 수행하는 성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우리의 일상적 생활에서 유기적 조직의 규칙과 기계적 조직의 규칙을 잘 분별하여 판단하고 생활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순간에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가 다음 순간에 기계적인 관계에 놓이기도 한다.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 두 가지가 팽팽하게 맞서서 갈등하고 고민해야 하는 상황을 수없이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하여 나라의 법을 어기고 싶은 경우도 있고, 우정 때문에 범행에 동조하는 경우도 있으며, 순수한 인간적 동정심 때문에 회사나 관청의 규칙을 등지는 경우도 있다.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나 구체적인 행동을 결정하는 순간순간에 우리는 소박한 입법과 준법의 상황에 놓이게 되기도 하고, 국가나 기업이나 단체의 운영에서 경험하는 고도의 합리성과 준엄한 도덕성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탁월한 판단과 지혜로운 결정과 정직한 실천의 생활을 영위하는 자질의 수준을 어떻게 향상시켜 갈 것인가에는 공식화된 원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스포츠의 선수가 기량을 향상시키고, 바둑이나 장기의 기사가 판세를 운영하는 안목과 기술이 세련되어 가는 것과 같이, 다시 말해서, “게임의 규칙”을 잘 소화하면서 점차적으로 성숙한 선수로 성장하는 것과 같이, 입법과 준법의 삶을 세련되게 하는 개인 혹은 사회의 성실한 노력과 풍토가 요구된다.

[에듀인뉴스(EduinNews) = 인터넷뉴스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