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의지를 소유한 존재이지만, 그러한 인간의 삶에 주어진 원초적 소재(素材)는 각자의 잠재력이다. 인간의 성장은 원천적으로 잠재된 것의 발현이며 교육은 그것을 계발하는 활동이고 또한 제도이다.

[에듀인뉴스팀]

제9강 행복한 삶의 조건

-- 어떤 삶을 살도록 가르칠 것인가? --

이돈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고 환경을 선택하고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 가면서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존재이다.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의지를 소유한 존재이지만, 그러한 인간의 삶에 주어진 원초적 소재(素材)는 각자의 잠재력이다. 인간의 성장은 원천적으로 잠재된 것의 발현이며 교육은 그것을 계발하는 활동이고 또한 제도이다. 그 잠재력은 애초부터 잘 다듬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능적인 일종의 충동성을 나타내면서 어지럽게 환경과의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말하자면 충동적인 욕구가 발동하고, 그 욕구는 주어진 물리적-심리적-사회적 환경과의 관계를 통하여 정돈되고 조직되고 재구성된다. 그러면서 막연하게나마 인간은 스스로 각기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

삶의 몇 가지 유형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대하여 단순히 피동적으로 혹은 세련되게 능동적으로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자연적인 것이거나 사회적인 것이거나 간에 환경적 조건과 영향에 대하여 피동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은 환경을 주어진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은 환경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어느 정도 선택하거나 개조해내는 역량을 발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명된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는 가족관계, 교우관계, 지역사회, 교육제도, 국가, 그리고 생활과 경험의 장으로 객관적으로 주어진 자연적-사회적 환경이 있지만 학교제도는 그 중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강력한 환경이다.

학교는 성장의 시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리적-사회적 환경에 적응하고 그것을 선택하고 새롭게 조성(창조)하는 데 필요한 기술, 지식, 관습, 문화, 사상 등을 학습하면서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특징짓는 습관들을 만들어 가는 일을 도운다. 물론 이러한 교육의 역할은 학교만의 책무는 아니며, 성장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기회를 통하여 자신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일에 관련된 학습을 한다. 삶의 방식도 수없이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학교와 사회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어떤 삶을 살도록 권장하기도 하고, 암묵적으로 혹은 무의식중에 유도하기도 한다. 어쩌면 한 학습자의 삶의 방식은 학교제도의 실질적 교육력의 정도에 따라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학교는 제도적 학습의 장으로서 학생에게 성장의 삶을 사는 거의 표준적 방법을 가르친다. 반드시 기계적으로 혹은 강압적으로가 아니라, 지시적으로 혹은 묵시적으로 젊은이들에게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일, 그리고 자아의 실현을 위한 학생의 노력에 함께 하는 동반자로서 참여하는 셈이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의 언어로 표현해서 “나(Ich)와 너(du)의 관계”에서, 즉 인격적 만남의 관계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함께 생각하는 장을 만든다. 물론 학교에는 교육활동을 지배하는 일종의 문화적 요소가 매우 다양할 수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도 그만큼 그 문화적 바탕 속에서 성장의 모습이 상당한 정도로 결정될 수 있다.

그 문화가 허용하는 규칙의 체제가 얼마나 획일적 경직성 혹은 개방적 유연성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만큼 개체적 다양성이 영향을 입을 것이다. 학교경영의 책임자와 교사진의 교육관, 공식적-비공식적 교육과정의 특징, 학교의 독특한 전통, 학생들의 사회경제적 배경, 지역사회의 관심과 관계, 학생 동료들의 사고와 행동과 생활을 지배하는 분위기 등 많은 것이 학생 개개인의 습관과 가치관과 인성에 영향을 준다.

대체적으로 학교와 가정, 그리고 사회가 지향하는 문화적 풍토나 추구하는 가치관에서 반드시 전적으로 일치하기는 어렵지만, 학교는 제도적 주도력을 공인받고 있기 때문에 그 사회의 공식적 표준을 제공하게 된다. 학교생활을 비롯하여 사회적으로 함께 하는 삶 속에서 성장하는 젊은이들에게 묵시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권장하는 삶의 방식이 있다. 모든 젊은이에게 직접적으로 권장하는 것은 아니라도 학교나 가정이 칭송하거나 본받기를 바라는 좋은 삶의 방식들이 있다. 말하자면 “이렇게 살라”고 직접 혹은 간접으로, 명시적으로 혹은 암시적으로 일러 주는 바가 있다.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분류해 볼 수도 있다.

첫째는 고귀한 삶이 있다. 구체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대체적으로 고귀하거나 천박한 삶을 구별하는 기준, 즉 묵시적으로 공유하는 기준이 있다. 다음은 페스타로치(Johann Heinrich Pestalozzi, 1744-1827)의 묘비에 새겨진 말이다.

< 페스탈로치의 묘비명 >

하인리히 페스탈로치 여기에 잠들다.

1746년 1월 12일 취리히에서 태어나

1827년 2월 17일 브루크에서 사망하다.

노이호프에서는 빈민의 구제자

린하르트와 게르트루트에서는 민중의 목자

슈탄츠에서는 고아들의 아버지

부르크도르프와 뮌헨부흐제에서는 국민학교의 창설자

이페르텐에서는 인류의 교사

참된 사람, 참된 크리스찬, 참된 시민

모든 것을 남을 위해 바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이름 위에 축복이 있을 지어다

페스타로치와 같은 교육자가 아니어도, 의사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5) 박사,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 등 이웃이나 사회나 국가나 인류를 위하여 봉사하는 삶, 생명까지도 바치는 희생의 삶을 산 극단의 사례들이 동서양의 역사 속에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인류 역사의 전체에서 볼 때 지극히 적은 수의 사람들이다. 순교하거나 순국하는 사람들은 나를 희생하여 인류나 국가를 돕는 삶을 거역하지 않는다.

예수, 석가와 같은 성인을 닮아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가히 찾아보기가 어렵고,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누군가가 구체적으로 그러한 삶을 살도록 권고하기를 주저한다. 대단한 희생의 삶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위인들의 삶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사람들은 높이 칭송하고, 또한 기리면서 조금이라도 본받는 삶을 살도록 가르친다. 이러한 희생의 삶은 실천하기는 어렵지만 그 의미와 가치는 순수하고 고귀한 것으로 존경과 칭송의 대상이 된다.

둘째는 영웅적인 삶이 있다. 이순신 장군과 같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장수로서 공을 세워 그 이름이 널리, 그리고 오래도록 남기도 하고, 나폴레옹과 같이 탁월한 군사적 지휘력과 전술적 역량을 발휘하여 영웅의 위상을 지니기도 하는 인물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반드시 군사적 영웅이 아니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독점하는 스포츠 선수, 연기자, 노벨 수상자와 같이 출중한 경지를 추구하여 성취한 인물, 정치적 적수를 상대로 격심한 경쟁에서 승리하여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국가의 대통령이나 정치 지도자, 수많은 역경과 싸우면서 인고의 삶을 살아 온 끝에 오르게 된 재벌의 수장, 그리고 비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수많은 경쟁자의 추종을 물리치고 획득한 큰 단체나 조직의 장과 같이 공로와 업적으로 사회적 인증과 명예를 누리는 삶이 이 범주에 속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특별한 모험적 집념이 아니라 상황이 주어져서 최선을 다한 끝에 자연스럽게, 어쩌면 탁월한 덕망으로 차지한 경우도 있다. 쟁취한 것이 아니라 선행과 사명감에 따라 살아 온 자연스러운 사회적 보상인 셈이다.

< 영웅 나폴레옹과 알렉산더 대왕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1769-1821)는 코르시카 섬의 한 하급귀족 출신으로서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혼란했던 시기에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하여 당시의 강국들과 겨루어 유럽을 평정하고 황제(나폴레옹 I세)가 된 인물이다. 흔히 “나폴레옹 전쟁”이라고 일컫는 많은 전쟁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끎으로써 천재적 군사 전략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유럽 지역의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으로 구축된 법치주의, 능력주의, 평등사상을 확산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이것은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근대사회의 전개에 한 축이 되었던 셈이다.

19세기의 초기 약 10 여년 기간에 프랑스는 유럽의 여러 강대국을 상대로 한 나폴레옹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유럽의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나폴레옹은 1799년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제1통령에 취임하였고, 5년 뒤인 1804년에 프랑스 원로원이 그를 황제 자리에 앉히면서 제1제정(帝政)이 출범하였다. 그는 즉위하자 영국과의 전쟁을 일으켰으나 1805년 가을에 이르러서는 프랑스 함대가 넬슨(H. Nelson) 제독의 영국해군에 의해 격파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동맹군을 꺾은 후에 프랑스 군대는 전 유럽을 제압하는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1812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면서 전력과 사기가 기울고, 1814년에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의 동맹군에 의해 파리를 점령당하고 말았다. 나폴레옹은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그는 다시 파리로 들어가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6월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여 영국에 항복하고 결국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마케도니아(Macedonia)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ros the Great)은 기원전 4세기에 대군을 이끌고 주변을 점령하여 그리스, 이집트, 인도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확보하였다. 그는 자신이 정복한 70여개의 땅에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을 붙이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결과적으로 거기에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함으로써 거대한 신헬레니즘을 형성하는 문화통합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와 바탕을 제공한 셈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런 위치에 도달하는 데는 도전과 성취의 의지, 때로는 특별한 행운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때로는 집요한 공명심이 따른다. 공명심은 성취를 위한 강력한 동기로 작용하고, 성취한 것은 개인적으로 만족스럽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회적인 기여 혹은 업적이 되기도 한다. 기회를 획득하고 활용하고 성취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쳐야 하고, 책략과 용기와 인내를 요하는 삶의 방식이므로 결코 편안하고 순탄한 삶은 아니다. 실패하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수도 있는 일종의 모험적인 삶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삶에서 성공하면 만인이 부러워하는 공적을 남기기도 한다.

셋째는 봉사하는 삶이 있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전형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중세기의 서양에서 발달한 초기의 전문직에 속하는 사람들은 법률가, 의사, 성직자였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과 취향을 살려 스스로 성장을 기하고 기회가 닿는 대로 사회에 봉사하는 삶에 종사한다. 옛날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선비”는 학문을 익히면서 수신(修身)하고 나라의 부름을 받으면 충성을 다하고 소신에 따라 임금에게 간하기도 하며, 뜻을 이루지 못한다고 여겨지면 자리에서 물러나고, 초야(草野)에서 학문을 닦으면서 제자와 고을을 교육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면서 생활하는 문사들이었다.

지금의 전문직은 그 직종이 매우 다양해졌다. 중세기적 전문직인 법률가, 의사, 성직자 이외에 교사, 엔지니어, 복지사, 간호사, 세무사 등 대개 고도의 교육과 훈련을 받아 특정한 분야의 탁월한 지식과 기술적 자질을 익혀서 사회에 봉사하는 직업이다. 전문직은 대개 제도적으로 공인된 자격증을 취득한 후에 종사하게 되는 직종이다. 공식적인 윤리강령을 두기도 하지만 적어도 사회적으로 공익성을 기대하는 관습적 윤리와 책무가 따르는 것이 보통이다. 전문직의 본연적 특징은 거기에 종사하면서 재물을 모으거나 영예를 누리거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본업의 목적이나 특징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문직은 사회적 봉사를 사명으로 여기고 또한 보람으로 일하며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면서 성취한 바를 귀하게 여기는 직업이다.

< 간호사 이레나 센들러 >

이레나 센들러(Irena Sendler, 1910-2008)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 나치 군대가 폴란드를 침략하여 점령하고 있을 때, 무려 2,500여 명의 유대인 아이들을 구해낸 용감한 폴란드 간호사였다. 1939년의 일이다. 나치가 폴란드를 침략할 당시에 29세의 간호사는 저항군이 되어 바르샤바의 유태인 집합소에 억류되어 있는 아이들을 구출하는 위험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레나와 동료 일당은 아이들을 몰래 빼내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방법을 사용했다. 응급차의 들것 밑에 숨기기도 하고, 하수구나 지하통로로 도주하기도 하고, 쓰레기 봉투 속에, 심지어는 관속의 시체 사이에 몰래 숨겨 운반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이레나에 의해 구조된 아이들의 수는 무려 2,500여 명이 넘을 정도였다. 그녀는 전쟁 후에 가족들과 재회할 수 있도록 아이들의 이름을 적어 유리병 속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1943년 어느 날 이레나는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발과 다리에 골절을 입을 정도로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지 않자, 그녀는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으나 다행히 사형 집행 직전에 극적으로 풀려났다. 그 후로 그녀는 신분을 위장한 채로 숨어서 살아야만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이레나는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유리병을 찾아내어 한 유태인 단체에 보내고 부모들을 찾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그 부모들의 대부분은 이미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는 이레나의 삶은 평범한 삶이었다. 결혼도 하고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레나의 용감한 업적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미국의 켄사스(Kansas)에 있는 한 고등학교의 학생 네 명이 지도교사와 함께 “병속에 든 생명(Life in a Jar)”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한 바 있고, 그들이 2001년에 인터넷 웹사이트에 이레나를 언급한 것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 이레나는 2003년에 교황 요한 파오르 2세로부터 전쟁 중의 활동에 대한 상찬을 친서로 받은 바 있고, 폴란드의 최고 상훈인 “백색 독수리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레나는 98세의 나이가 되는 2008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유태인 아이들의 구출에 함께한 동료들이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나버리고, 이제는 세상에 알려진 자신과 함께 있지 못한 것에 대해 늘 슬퍼하였다.

넷째는 소유하는 삶이 있다. 평안한 삶을 사는 사람처럼 적정의 수준에서 만족하지 않고, 특별한 명예를 추구하지도 않으며,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거나 봉사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모든 공명심이나 사회봉사도 자신이 소유한 재물의 한 부분을 공여함으로써 해결한다. 흔히 재벌이라고 일컫는 사람들 중에는 재물의 소유 자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재벌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노력이나 행운에 의해서 획득한 재물로써 이웃을 돕고, 인류의 삶에 봉사하며, 사회의 발전과 복리를 증진하는 데 기여하는 예가 얼마든지 있다.

< 철강왕 카네기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Pittsburgh)에 카네기-멜런-대학교(Carnegie Mellon University)가 있다. 이 대학은 미국의 연구중심대학의 하나로서 1900년에 개교한 이래 졸업생과 교수를 포함하여 21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고, 창업교육으로도 큰 성과를 거두어 학교로부터 독립해 나간 회사가 170개가 넘을 정도이다. 미국 최초로 컴퓨터 학과를 설립한 대학으로서 기록되고 그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대열에 서 있으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드라마스쿨은 수많은 배우들을 양성하였고, 그 중에서 유명한 토니-어워드(Tony Award)의 수상자만으로 24명이나 된다.

이 대학은 철강왕으로 일컬어지는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가 기증한 100만 달러와 피츠버그시가 내놓은 토지를 기금으로 하여 설립된 카네기 기술학교(Carnegie Technical Schools)로 출발하였다. 카네기 기술학교는 1912년에 카네기 공과대학(Carnegie Institute of Technology)으로 이름을 바꾸고 4년제의 정규 학위과정을 둔 대학으로 새로이 출범하였다. 1967년에는 재무장관을 역임한 앤드류 멜런(Andrew Mellon)이 설립한 멜런연구소(Mellon Institute of Industrial Research)와 통합하면서 카네기-멜런-대학이 되었다.

카네기는 섬유를 만드는 노동자의 아들로서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카네기 집안은 1848년에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로 이주하였다. 앤드루는 어려서부터 방적공장 노동자, 전보 배달원, 전신 기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1853년에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는 남북전쟁에도 종군하였다. 1865년까지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장거리 여행자를 위한 침대차와 유정(油井) 사업 등에 투자하면서 큰돈을 벌어 1892년에 철강회사를 세웠다.

카네기는 미국의 철강 재벌이 되었다. 2008년 기준으로 보아 세계적인 철강회사인 유에스-스틸(US Steel)은 투자자인 모건(J.P. Morgan)이 카네기의 철강회사를 합병을 통해 설립한 회사이다. 카네기는 1902년에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액수인 2천5백만 달러를 기부하여 공공도서관 건립을 지원하는 워싱턴 카네기협회를 설립하고, 미국 전역에 2,500개의 도서관을 지었다. 카네기는 그밖에도 카네기 회관, 카네기 공과대학, 카네기 교육진흥재단 등 교육·문화 분야에 3억 달러 이상을 기증했다.

다섯째는 평안한 삶이 있다. 만족할 만한 수준의 호구지책(糊口之策)이 해결되면, 많은 사람들은 건강한 신체, 화평한 가정, 좋은 이웃과 친족의 관계, 즐길만한 취미생활, 안정된 노후를 중요하게 여긴다.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착한” 사람들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정직하고 근면한 생활을 하며, 큰 욕심이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이웃과 고장에 모범을 보이면서 살아가는 것, 말하자면 “소시민적” 삶의 방식이다. 평범한 삶이지만 행복하고 만족하는 생활을 즐긴다. 아마도 행복지수가 가장 높고 분수에 맞는 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이 부류에 속한다.

< 어느 한씨(韓氏) 집안의 이야기 >

1960년대 살림살이가 매우 어려워진 한씨 성의 한 가정이 있었다. 가장인 한씨는 아내와 더불어 아들 셋, 딸 둘의 다섯 남매를 키우면서 살고 있었다. 본래부터 가난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별로 풍족한 생활을 해 본 적은 없다. 재산은 별로 없었으나 상당히 당당한 가풍을 유지해 왔고 지체 있는 혈족에 속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조상으로 물려받은 재산이라고는 겨우 일곱 식구의 호구지책(糊口之策)이 가능할 정도의 논밭이 있었을 뿐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한씨도 그런대로 가계를 꾸려갔지만, 그들이 성장하면서 생활비도 많이 들고 교육비의 부담도 점점 늘어만 갔다. 부모가 된 심정으로 할 수만 있으면 자식들 모두를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공부를 시키고 싶었지만 형편이 닫지 않았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부업을 해서 조금씩 모아 둔 돈으로 장남만을 대학에 보내고 아래 두 아들은 고등학교만 졸업시키기로 하였다. 그리고 당시에 엔간한 가정은 대부분 그랬듯이 딸들은 힘이 들기는 하지만 중학교는 졸업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둘째 아들 또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형의 공부 때문에 어려워하는 것을 보고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궁리 끝에 자신이 취직해서 돈을 벌어 대학을 다니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기특하게 여기고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도 한다. 그 오빠가 공부하는 것을 본 둘째 딸도 공부에 생각을 두었다. 이미 대학을 졸업한 후에 취직해서 돈을 버는 큰 오빠를 졸라,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데 필요한 학비를 지원해 주면 자기도 작은오빠처럼 벌어서 대학을 다녀 보겠다고 하면서 매달려 뜻을 이루었다.

셋째 아들도 대학가고 싶다고 아버지를 졸랐으나, 한씨는 그가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잘해 내지도 못한다고 생각하고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큰딸은 공부를 해낼 머리는 있었으나 작은딸 만큼 절실한 의지는 없었다.

큰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도 구하여 그 이상 부모의 도움이 없이 독립할 수 있을 정도로 벌고, 자신이 벌어서 모은 돈으로 결혼도 하고,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자신의 힘으로 집을 장만하기도 하였다. 대학을 어렵게 졸업한 둘째 아들도 취직하여 혼자서 살아갈 만큼의 벌이가 있었다. 큰 오빠의 도움으로 대학을 다닌 둘째 딸도 졸업 후에는 취직하여 자립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한씨는 셋째 아들과 큰딸을 대리고 있다가 딸을 이웃 동네에 사는 별로 넉넉지 못한 농가에 시집을 보낸 후에는 아들과 함께 살아왔다.

아들과 딸, 다섯 남매가 장성하여 남이 보기에는 자식들을 그런대로 잘 키워 번성하는 가정인 것 같지만, 사실상 한씨는 자식들을 키우면서, 그리고 키운 후에도 자녀들 간의 불화와 자식들의 원성으로 인하여 마음의 고통을 심하게 느끼면서 살고 있었다. 특히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셋째 아들은 부모로부터 차별을 받았고 혼자 남아서 힘든 농사일만 감당한다고 매일 같이 불평을 쏟아 놓는다. 셋째 아들이 부모에게 반항하거나 불만을 틀어 놓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럴 때마다 큰딸도 그 동생의 편에 서서 가세하기도 한다. 왜 우리는 공부를 시켜주지 않고 시골에 박혀 농사만 짓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아들과 큰딸은 공부한 다른 형제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기회만 있으면 싸움을 걸고자 했다.

그러나 자식을 대하는 한씨의 태도는 가혹할 정도로 냉정하고 엄격하였다. 그는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농토를 지키면서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이루고자 온갖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절약하고 계획성 있는 살림을 꾸려 왔다. 차별받았다고 여기는 셋째 아들이 때로는 행패도 부리고 때로는 이웃에 부끄러운 사고를 저지르면 무섭게 매질도 한다. 매를 맞는 것이 두려워 그 아들은 두세 차례 집을 나가기도 하였다. 이때 그 동생을 찾으려고 온 고장을 헤맨 큰딸은 동생보다는 부모를 더 원망하고 불만을 쏟아 놓는다.

그런 중에 한씨는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벌어서 보내준 돈으로 농지도 늘이고 이웃에 자랑할 만큼 값이 비싼 가구도 장만하였다. 가끔 아들과 딸이 보내준 돈으로 먼 곳에 여행도 다니고 회갑 잔치도 융숭하게 차려 이웃에 대접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공부한 아들과 딸을 자랑하면서 사는 것이 한편으로는 한씨 부부의 낙이기도 하다. 이웃은 한씨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가까이 살고 있는 셋째 아들과 큰딸의 불만을 때로는 달래고 때로는 야단치면서 사는 것이 부모로서는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부모에 대한 불만과 원망으로 세월을 보낸다. 그리고 돈을 버는 형제는 마땅히 시골에서 부모를 모시고 농사를 짓는 형제를 위하여 그들이 번 것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끔 밖에서 돈을 버는 형제들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한씨는 자신의 노력과 자식들의 도움으로 이제는 찌들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그 이상 하지는 않는다. 그 가정이 이 정도의 수준에 오른 것은 그냥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이 있었고 극심한 고통을 경험한 것도 있지만, 한씨 부부가 재산과 가족의 경영을 성공적으로 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씨는 언제나 불평과 불만에 차 있는 두 자녀에게 미안하게 느끼기는 하면서도, 가족 전체의 수준에서 보면 어느 정도 번영하는 모습을 한 가정이 된 것을 그런대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보람도 느낀다.

위에서 예시한 다섯 가지 삶의 방식 이외에 또 다른 유형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느 삶의 방식도 반드시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 나은 삶을 의미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각각의 삶의 방식은 삶의 주체가 그 삶을 어떻게 영위하느냐에 따라서 성공적인 삶, 유의미한 삶, 혹은 행복을 가져다준 삶이 될 수 있고, 또한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리고 개인은 누구나 반드시 위와 같이 분류된 삶의 어느 하나를 택하여 한평생을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이런 삶을 취하다가 저런 삶으로 전환하기도 하고, 반드시 의도적으로 선택했다고 말하기도 어렵게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어떤 유형에 속해 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느 것을 추구하다가 실패했거나 아니면 만족스럽지 못하여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인성교육을 위한 학교와 가정의 중요한 역할의 하나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의 삶의 유형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를 검토해 보는 경험을 가지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적어도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삶의 동반자로서 혹은 조언자로서 참여하는 교사, 학교, 그리고 부모는 장래의 삶을 생각하는 젊은이들에게 여러 가지 유형의 삶의 방식에 대한 특별한 편견 없이 임할 필요가 있다.

어느 유형의 것을 선택한 생애이든지 간에 거기에는 개인적인 욕구의 충족에 해당하는 자유로운 삶의 향유, 성공적인 성취, 일상적 행복, 보람 있는 자아실현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가치로서 사회적 구성원에게 함께 요구되는 정직, 화평, 배려, 공정, 발전 등의 공동체적 가치의 실현에 동참해야 하는 사회적 임무와 의무의 준엄함을 익혀 내면화하도록 해야 한다.

“행복함”의 기준

지금 여기서 행복함의 조건에 관한 논의는 객관적 기준과 주관적 기준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객관적 기준은, 위에 든 여러 유형의 어느 것으로 삶을 선택했든지 간에, 어떤 특정한 사람을 두고 그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다. 반면에 주관적 기준은 어떤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내가 행복하다면 어떤 상태에 있어야 행복한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행복한 삶은 어떤 삶이냐? 철학자들 혹은 종교인들 중에서 행복한 삶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종교인이나 철학자가 말하는 행복의 조건은 대체적으로 행복의 객관적 기준에 관한 것이다. 특히 종교인들은 자신의 신앙적 가치관에 따라서 행복한 삶의 조건과 특징을 말하기도 하고 그것에 따른 삶을 권유하기도 한다. 종교 간에도 행복의 기준이나 조건에 관하여 많은 부분을 공유하기도 하지만, 종교적 신념이나 그것을 내면화한 기준에 따라서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다. 이에 비하여 철학자들도 인간의 행복에 관하여 이론적으로 사변적 내용을 펴기도 하지만, 대개는 행복의 의미나 기준에 관한 객관적 기준을 밝히고자 한다. 대표적인 것을 들어보면, 아리스토텔레스, 쾌락주의자(hedonists), 그리고 성장이론가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포함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느 것이나 각기 존재하는 목적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목적은 행복이며 행복한 상태는 인간의 본질이 제대로 구현되고 있을 때를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은 “이성적(합리적) 존재”(rational being)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도 식물과 마찬가지로 생성하고 성장하고 사멸하고 부패하는 존재이며, 또한 다른 동물과 같이 움직이고 감각과 감정으로 반응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을 소유한 존재, 이성적 존재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른 생명체와는 구별된다.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그 이성의 힘으로 합리적 사고를 하면서 사물의 질서와 이치를 탐색하고 중용의 원리로써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며 공동체의 삶을 영위한다. 이와 같이 이성이 제기능을 다하고 있을 때 인간은 행복한 상태에 있고 존재하는 바의 목적을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은 이성적 존재로서의 보편적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행복은 그런 경우에만 본질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지, 나의 구체적인 행복의 상태, 내가 느끼거나 의식하는 행복함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쾌락주의자로 알려진 에피큐러스(341–270, BC)는 주관적 행복의 기준을 더욱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행복의 상태는 쾌락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어떤 쾌락은 고통을 수반하는 경우가 있고 활성화된 동적인 쾌락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한 행복은 순수한 행복일 수가 없다. 고통을 함께 가져오는 동적인 쾌락보다는 고통이 최소화되었거나 전혀 없는 정적인 쾌락의 상태가 가장 행복한 상태이다. 에피큐러스는 그러므로 소극적으로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적극적으로 쾌락을 증진시키는 것보다 질적으로 좋은 행복의 경지를 가져온다고 하였다.

이러한 쾌락주의는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 등의 공리주의자들에게서도 이어진다. 벤담의 경우에 “쾌락한”(pleasant), “바람직한”(desirable), “좋은”(good), “행복한”(happy)은 의미론적으로 같은 뜻이다. 이러한 쾌락 혹은 행복은 양적인 차이는 있으나 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하였다. 양적으로 계산되는 벤담의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지향하는 것이 사회적 행복을 위한 기준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떤 상황에서 두 개 이상의 (사회적) 정책이나 (개인적 행동)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에 각기 쾌락을 생산하는 총체적 양에서 고통을 생산하는 분을 빼낸 후에 남은 쾌락의 양이 가장 큰 쪽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물론 나의 선택은 나의 쾌락만으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선택으로 인하여 생산되는 사회적 쾌락과 고통의 총체로서 계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쾌락주의의 경우에도 고통을 제외한 순수한 쾌락의 양이 바로 “나의 행복한 상태”로서 절실하고 유의미한 것인가? 그리고 쾌락에는 질적인 차이가 없는가? 같은 공리주의의 범주에 속하는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소크라테스의 쾌락과 돼지의 쾌락은 질적으로 같은 것일 수 없다고 하면서 이에 반대하였다.

또 다른 행복의 기준으로 검토해 볼 만한 것은 매슬로우(Abraham Maslow)의 “성장동기”의 개념이다. 인간의 행동과 생활과 삶을 주도하는 동기는 추구하는 욕구의 충족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욕구의 충족이 곧 행복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동기(욕구)의 체계를 크게 결핍동기(deficit motivation)와 성장동기(growth motivation)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결핍 동기는, 배가 고픈(결핍된) 사람은 무엇인가를 먹고자 하지만 그것이 충족되면 더 이상 먹을 것을 추구하지 않는 것과 같이, 일단 충족되면 더 이상 동기로서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성장 동기의 경우는 추구하는 욕구가 충족되면 더욱더 그 욕구가 증대되는 것이다. 먼저 나타나는 욕구는 다음 단계에서 달성하려는 욕구보다 강하고 그 욕구가 만족되었을 때 다음 단계의 욕구로 나아간다.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사회적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등의 순으로 일종의 위계적 구조가 있다.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코자 하는 수준은 성장 동기에 해당하고 그 이전 단계 것은 결핍 동기의 범주에 속한다. 아마도 가장 행복한 상태란 성장 동기의 계속적인 실현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성장의 계속적인 과정을 사는 것, 그것이 나의 행복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성장 그 자체에서 행복함을 즐기고 있어야 한다.

행복, 곧 “보람”의 자의식

우리말 중에서 “보람”이라는 말은 모호하고 애매하며 다른 어휘로써 그 뜻을 설명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말을 흔히 사용하면서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담은 말로 여긴다. 그 말을 쉽게, 그리고 흔히 쓰지만, 함부로 사용하거나 내뱉지는 않는다. 그야말로 아끼면서 쓰는 말이다. 어느 순간에 보람이라는 말을 쓰게 되면서 의미를 스스로 감지한다면 그 순간은 소중한 순간이다.

내가 관심이나 성의나 수고나 헌신이나 열정을 바쳐서, 그리고 때로는 고통과 역경을 이기면서, 때로는 희열이나 감격이나 즐거움을 느낀 순간들을 경험하면서, 작고 크고 간에 내가 성취한 것에 대한 만족감, 또한 그것을 수시로 혹은 언제나 간직하고 싶은 마음의 집착이 있다면, 내가 이룬, 내가 참여한, 내가 주도한 일(성취 혹은 업적)에 어떤 수준의 보람을 느끼는 순간일 것이다. 보람은 나의 마음 밖에서 주어진 보상으로가 아니라, 내가 의도적으로 혹은 묵시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의 실현에 대한 자신의 내재적 보상을 느낄 때 쓰는 말이다.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행복한 순간이다. 어디에서도 보람을 찾을 수 없는 삶은 불행한 삶이고 실패한 삶이다. 가벼운 보람도 있고 벅찬 보람도 있으며, 마음에 해방을 안겨주는 보람도 있고 고통스럽도록 마음의 전율을 가져다주는 보람도 있다. 무겁고 끔찍한 희생을 수반하는 삶, 고귀한 삶으로 칭송받는 위인이나 열사가 자신의 삶에서 보람을 찾지 못하면, 희생과 고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무고한 징벌에 불과하다. 보람이 없으면 희생은 가혹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보람의 가닥을 찾는다면 행복을 소유한 순간일 것이다. 아이로닉하게도, 고통과 역경과 모멸과 분노도 때로는 보람을 실어다 주는 수레가 되기도 한다.

세상을 뒤흔들 만큼 육중하고 우렁찬 위세를 누린 영웅적 삶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서 보람의 흔적이 없다면, 순간순간의 행복한 감정은 지나가는 순간의 바람일 뿐이다. 보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자랑거리가 아니다. 보람은 자기만의 삶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와 더불어 삶을 함께 한 사람들로 인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나의 전문적 지식과 기술과 능력을 사용하여 이웃과 사회에 봉사의 일꾼으로 사는 사람으로 보였지만, 거기서 보람을 찾을 길이 없었다면 나는 이웃과 나에게 노예의 삶을 산 것에 불과하다. 억만장자도 삶 그 자체로서 보람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서 행복한 삶이 아니다. 단지 이기심의 화신일 뿐이다. 보람이 없다면 선행도 위선일 뿐이다. 평안한 삶, 남에게 덕도 해도 주는 것 없이 살아 온 사람인 나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보람을 찾을 데가 어디에도 없으면, 행복한 순간의 경험이 없이 살아왔을 뿐이다. 보람이 없으면 행복의 내용이 없는 공허한 삶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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