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공동체적 삶을 지배와 피지배라는 “힘의 관계”를 전제로 볼 때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그는 과두정체의 부유층 정치와 민주정체의 빈민층 정치를 혼합하여 중산층을 확충하는 방안으로 입헌정체(politeia)를 구상하였다. 이 구상은 만인이 각자의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게 하는 국가와 정치의 체제를 보여 주는 계획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돈희 교수 "민주교육론"(4)

아리스토텔레스의 입헌정체는 민주적인가?

이돈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행복한 사회의 조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관에 있어서 서로 중요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플라톤은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데 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한 사회를 지향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인간성의 본질에 대한 규명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심성적 구조를 이성, 기개, 욕망의 세 가지 차원으로 구분하고, 개체들은 그 중의 어느 하나에 주로 지배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국가는 이데아의 세계에 접근하는 참다운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이성과 그것의 작용으로 지혜를 소유한 사람이 통치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철인왕의 국가 혹은 귀족의 국가이다. 기개에 지배되는 사람들은 용기의 덕성을 발휘하여 국가의 방위에 종사하고, 욕망에 지배되는 사람들은 절제의 덕성을 지니고 생산에 종사한다. 세 계급이 각기의 자질에 따른 덕성을 실현하면서 조화와 질서를 이룬 상태가 이상적 국가이고 “가장 정의로운 국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 플라톤과는 달리, 인간은 모두가 본질적으로 “이성적 존재”이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인 동물이나 식물의 영혼이 소유하지 못하는 이성을 소유한 존재이다. 능력이 발휘되는 수준에 있어서 개별적 차이는 있지만, 이성은 인간의 존재적 본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각기 존재하는 목적이 있고, 인간의 경우에 궁극적으로 실현코자 하는 목적인 “최고선”(summum bonum)은 “행복”(eudaimonia)의 상태이다. 이 상태는 바로 인간의 존재적 본질인 이성의 잠재적 능력(지성적, 실천적)을 최대한으로 실현하는 경지를 의미한다. 잠재적인 이성적 능력이 발휘되는 과정과 결과의 수준만큼 인간은 행복을 누리는 셈이다. 이성의 작용으로 획득하는 지혜는 이지적인 것도 있고 실천적인 것도 있다. 함께 생활하는 인간 공동체인 국가는 구성원의 모두가 각기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즉 잠재된 이성적 능력을 최대한으로 실현할 수 있도록 통치하여야 한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국가이다.

그는 좋은 국가와 나쁜 국가를 구별하였지만, 국가의 통치체제를 구별하는 기준에 있어서 플라톤과는 다소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국가를 기준으로 하여 이에 비해 열등한 수준별로 분류하였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국가의 여러 형태들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누어 열거하였다. 그 방식은, 통치의 주체인 구성원의 수가 일인이냐, 소수이냐 혹은 다수이냐에 따라서 구별하고, 그 각각을 다시 공적 이익을 지향하는 이상적 형태와 사적 이익을 위한 타락한 형태로 분류하였다.

이상국가                                        타락국가

                      공적 이익을 위한 국가                     사적 이익을 위한 국가

    (일인 통치)        군주정체 (Monarchy)                    잠주정체 (Tyranny)

    (소수 통치)       귀족정체 (Aristocracy)                   과두정체 (Oligarchy, 부유층)

   (다수 통치)        입헌정체? (Polity)                         민주정체 (Democracy, 빈민층)

위에서 잠주정체는 잠주인 한 사람의 이익을, 과두정체는 부유층의 이익을, 그리고 민주정체는 빈민층의 이익을 위한 정체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당시의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지금보다는 규모에 있어서 훨씬 작은 수준이었으므로, 민주정체는 모두가 함께 개방적 의회에 참여함으로써 직접 통치하는 체제이다.

민주주의는 국가의 규모가 큰 경우나 작은 경우에나 투표를 통하여 누구나 통치에 참여하는 제도이다. 말하자면 합법적인 시민이면 누구에게나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태상으로 볼 때, 과두정체와 민주정체가 가장 흔히 있을 수 있는 정치제도라고 하였다. 단지 그 차이는 권력의 분배와 의결의 절차에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빈민층과 부유층의 통치체제라는 것이다. 과두정체는 그 수가 많든 적든 간에 부자라는 이유로, 민주정체는 빈민이라는 이유로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된다. 과두정체와 민주정체는 권력층 소수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최악의 상태, 즉 살 수 없을 정도로 나쁜 국가는 아니라는 점에서 잠주정체보다는 나은 편이다. 그리고 다른 정체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민주정체도 통치자가 비범한 지도력과 훌륭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면 훌륭한 국가로 운영할 수도 있다.

국가 공동체와 입헌정체

플라톤의 경우에, 이상적인 국가는 귀족국가라고도 하고 철인왕이 다스리는 국가라고 하지만, 어느 특정한 개인인 왕이 통치하는 국가라기보다는 이성과 지혜를 소유한 계층을 의미한다는 접에서는 귀족정체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귀족은 세습적 가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생학적 고려를 하는 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교육제도의 운영을 통하여 선발된 지식인 집단을 의미한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 귀족은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던 바와 같이 일단 세습적 부유층을 의미하고, 개인이나 소수에 의한 정책보다는 가능하면 다수의 지혜를 동원하는 것이 좋은 방안으로 여기는 편이었다. 그러나 플라톤과 비슷하게, 아리스토텔레스도 한 국가나 사회에 뛰어난 개인이나 가문이 존재한다면, 군주정체가 가장 좋은 체제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며 잘못되면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 온다고 경고하였다. 왜냐하면, 군주정체가 부패할 경우에 최악의 정체인 잠주정체로 바뀌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론상으로 보면, 뛰어난 소수의 통치집단이 다스리는 귀족정체가 차선책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제로 다소 혼합적인 체제인 “입헌정체”(politeia, polity)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입헌정체”라는 번역은 꼭 적절하지는 않으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상대적으로 가장 좋은 정체를 모색하면서 칭한 국가를 “Politeia”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는 그냥 “입헌정체”라고 번역키로 하여 큰 무리는 없는 것 같다.) 입헌정체는 부유층과 빈민층이 서로의 권리를 존중해 주고, 국민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모두의 동의에 따라서 통치하는 국가를 의미한다. 이러한 정체는 귀족정체, 과두정체, 민주정체가 혼합된 형태이기도 하고, 국민의 모두가 정치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민주주의가 조정된 형태로 볼 수도 있다.

가장 자연적이고 단순한 공동체인 가족은 번식을 위해 결합할 남녀의 한 쌍으로 성립한다. 일상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족들로 구성된 최초의 공동체가 마을(부락)이며, 여러 부락으로 구성되는 완전한 공동체가 국가이다. 국가가 형성되면 그 수준의 공동체는 완전한 자급자족이 가능한 최고 수준의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국가는 단순히 생존을 위하여 형성된 것이지만 구성원의 좋은 삶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전의 공동체들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모든 국가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국가는 모든 하위 공동체의 최종목표이고 최고의 가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국가라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회적(혹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하였다. 국가는 특징적으로 자연의 산물이지만 개인과 가족에 우선한다. 국가가 완성되기 전에도 인간은 가장 훌륭한 동물이지만, 법(nomos)과 정의(dike)에서 이탈했을 때는 가장 사악한 동물이 된다. 무장한 불의는 가장 다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혜와 덕성을 위해 쓰도록 언어와 도구들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덕성(aretē)이 없으면 인간은 가장 불경스럽고 가장 야만적이며, 색욕과 식용을 가장 먼저 밝히고자 한다.

그러므로 국가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정의로움이며,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해 주고, 무엇이 옳은가를 판별해 주는 기준을 제공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느 특정한 통치체제가 절대적으로 좋은 국가를 만든다고 규정하지도 않았고, 이상적 국가의 절대적 그림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오히려 그는 이상적 국가는 특정한 형태의 국가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구성원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정치학」에서 일인의 통치나 다수의 통치나 간에 여러 체제의 각각이 성공적인 국가가 되기 위한 도덕적, 구조적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주로 다수, 특히 빈민들이 통치하는 민주정체를 포함한 혼합적인 형태까지도 검토하였고, 그것이 바로 위의 표에서 명시된 “입헌정제”(politeia, polity)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체제를 일종의 혼합체제라고 설명하기도 하였듯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민주체제와는 대조적으로 공적 이익을 추구하는 체제의 명칭이라기보다는, 민주정체를 바탕으로 하되 법률적 (혹은 일종의 법치주의적) 체제 위에 성립되는 정체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체가 출현하는 가능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정치학」 4권 4장) 먼저, 적어도 국가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농부, 기술자, 상인, 기술직, 전사, 재산가, 공직자, 법조인 등의 여러 기능적 계층들이 존재함을 전제로 한다. 이런 조건의 국가 구성원들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정치가가 요청된다. 그런데 서로 다른 부문에 요구되는 이런 재능들을 같은 한 사람이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말하자면, 같은 사람이 전사 겸 농부 겸 기술자가 될 수 있고, 나아가 법률 심의자 겸 재판관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자기는 정치가로서 뛰어난 자질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정치에 참여하고자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감당한다는 것이 실상은 효율적이지도 않고 불가능한 상황도 있다.

민주정체와 선동정치의 문제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정체로도 해결할 수 없는 한 가지 문제를 지적하였다. 그것은 바로 부유층과 빈곤층으로 양극화된 사회에서 같은 사람이 가난하면서 동시에 부자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에서 부자와 빈민이야말로 국가의 가장 본질적인 구성요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런데 부자는 적고 빈민은 많은 까닭에 이들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보이고, 어느 쪽이 우세하냐에 따라서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체를 세우고자 한다. 그러면 결국 생각할 수 있는 정체는 가난한 집단을 중심으로 한 민주정체와 부유한 계층을 중심으로 한 과두정체, 이 두 가지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국가의 정체를 운영할 민중이나 귀족의 어느 쪽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매우 다양하기로 말하면 마찬가지이다. 민중의 편에서 보면 농부, 기술자, 상인 등도 또다시 분류가 가능한 많은 다양성이 따르고, 귀족의 편에서도 재산, 가문, 교육 등에 따라서 다양하다.

그러므로 귀족이 중심이 된 과두정체가 아닌 빈민이 중심이 되는 민주정체도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유형들이 있다. 첫째 유형은 평등의 원칙에 근거한 것이다. 빈민이든 부자이든 어느 쪽도 우선권을 가지고 다른 쪽을 지배하지 못하는 대등한 정치적 참여가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그러나 빈민이 다수이고 부자가 소수이므로 결국 민주정체로 기울게 된다. 둘째 유형은 재산등급에 따라 공직을 배분하지만, 그 요건이 매우 낮아 극빈의 수준이 아니면 누구나 공직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체제이다. 셋째는 법으로 정한 결격사유가 없는 시민이면 공직에 참여할 수 있는 체제이다. 넷째는 법의 지배를 받는 모든 시민에게 공직이 개방되는 경우이다. 그리고 다섯째는 법 대신에 대중(plethos)이 민중선동가(demagogos)에 의해서 형성된 최고권력을 행사할 때 발생한 체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당시의 실제로 존재했던 민주국가는 매우 양극화된 사회이다. 부유층과 빈곤층이 있을 뿐이고 그 중간, 즉 지금의 중산층의 개념이 없는 상태이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민주국가가 이루어야 할 중요한 정치적 과업은 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산을 너무 많이 축적하여 그 위세가 두드러져 보이는 사람은 일시적으로라도 도시국가에서 추방당한다. 분위기는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민주주의를 플라톤의 경우만큼 악평하지는 않았다.

이유인즉, 유추해 보건대, 하나는, 인간사회가 이성적 존재들의 공동체인 이상, 누구도 평등하게 행복을 추구하는 대열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관점에서, 불완전하지만, 어떤 의미의 민주적 장치를 거부하지 말아야 했다. 플라톤의 이성은 소수 인간의 속성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 모든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다.

이유의 다른 하나는, 바로 그는 대다수 혹은 대중의 지혜를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수를 개별적으로 보면 특별한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보다 열등하지만, 그 다수의 지지로써 나타내는 지혜는 소수의 전문가가 발휘하는 지혜와 동등하거나 혹은 더욱 나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절차와 전략이 합리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면, 모든 사회는 필요에 따라서 통치의 규칙을 발전시켜 나가야하기 때문에, 다수에 의한 결정은 유익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절대적인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어느 공동체에서나 다소 항구적 구속력을 지니는 법률체제가 있다. 그러므로 거기에 따라야 하는 것이 중요하며 소수나 다수가 문제될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회도 하나의 법률체제를 철칙으로 삼고 영구히 유지해 갈 수는 없다. 법률은 단지 개괄적으로 말하는 것일 뿐이고, 항상 변화하는 상황에 구체적으로 대비하는 규칙을 명시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성문법에 의한 정치를 가장 탁월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통치자는 물론 법을 존중하고 준수해야 하지만, 상황에 적응하는 지도력을 발휘하여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수의 통치는 소수의 통치보다 덜 부패할 수 있고, 변화에 가장 융통성을 발휘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체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을 이것이라고 언급하였다. 그것은, 바로 플라톤도 그랬듯이, “선동정치”와 같은 극단적 민주주의이다. 부유층과 빈민층이 양극화된 상태라는 것만 아니라, 민주정체의 다양한 계층이 서로 이해관계로 얽혀져 있으면, 자칫 여러 형태의 선동이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높아진다. 선동정치는 법률이 아니라 군중이 최고의 세력을 장악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 군중의 선언은 때때로 법률을 초월한다. 군중의 선언에 의하여 법률을 초월하고 모든 것은 선동된 군중의 집회에 회부한다. 그리고 선동에 동원되는 군중이 일단 형성되면 그 위세는 더욱더 커지고, 선동에 매인 군중은 하나의 강력한 타성을 형성한다. 모든 것이 그들의 손에 있고 대중의 투표도 그들이 장악한 상태에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입안되는 모든 통치의 규칙들은 군중의 선언으로 시행된다. 이러한 체제는 다수의 결정이란 점에서 형태상 민주적 체제일 수는 있어도, 실질적 의미의 민주주의, 즉 빈민층을 포함한 만인의 행복을 추구하고 영구히 보장하려는 정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선언이라는 것은 단지 특수한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잠정적 규칙일 뿐이기 때문이다. 선동정치는, 결국 폭동이나 혁명과 같은 일종의 유사 민주적인 세력에 의해서나, 새로이 등장하는 다른 세력의 강력한 저항과 투쟁하면서 쇠퇴하거나, 민주주의의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세력에 의해서 사멸되기도 한다.

중산층중심적 정치공동체의 논거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느 특정한 통치체제가 절대적으로 좋은 국가를 만든다고 규정하지도 않았고, 이상적 국가의 절대적 그림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오히려 그는 이상적 국가는 특정한 형태의 국가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구성원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정치학」에서 일인의 통치나 다수의 통치나 간에 여러 체제의 각각이 성공적인 국가가 되기 위한 도덕적, 구조적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주로 다수, 특히 빈민들이 통치하는 민주정체를 기반으로 한 혼합적인 형태까지도 검토하였고, 그것이 바로 위의 표에서 명시된 “입헌체제”(politeia, polity)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헌체제는 그가 일종의 혼합체제라고 설명하기도 하였듯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민주체제와 동일시하거나 그 체제의 한 유형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단순히 민주정체를 공적 이익을 추구하도록 변형시켜 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실상 입헌정체를 당시의 민주정체와 동의어로 사용하지도 않았고, 그 외연에 속한다고 명백하게 언급하지도 않은, 다소 애매한 상태에 둔 개방적 의미를 지닌 말이다. 빈민층과 부유층을 포함한 만인이 참여하는 정체라는 접에서 민주정체와 과두정체를 혼합한 정체라고 읽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입헌정체에 접근하는 정치적 지향성은 적어도 오늘의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주적 가치관과 일관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고 그렇게 의도한 것으로 읽을 수 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입헌정체”는 하나의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표현하는 이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오늘의 민주주의의 개념이 지향하는 바와 같이, 즉 적어도 원리상, “만인의 이익을 위한” 정체이고, 그러므로 공통선(공동이익)을 실현하는 데 통치력이 발휘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정체이다. 그러나 공통선의 개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정치적 환경에 따라서 바뀌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고대 그리스 시대의 공통선의 개념이 함의하는 것보다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반적 원리들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면, 시민(국민)을 위한 좋은 정치체제에는 두 가지 부분이 있다. (i) 하나는 그들이 복종하는 법률 자체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느냐이고, (ii) 다른 하나는 시민이 법률에 실질적으로 복종하느냐이다.

(1)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주 정치가를 공예가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비유가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엄격한 입법이론에서 보면 정치학은 일종의 실천적 지식이지만 공예나 의술은 생산적인 지식이다. 그러나 그 비유가 여전히 타당성을 지니는 것은 정치가는 지식을 보편적인 원리에 따라서 법률적 체제를 구축하고 조정하고 유지하는 일종의 생산적인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보면 그러하다.(EN VI.8 and X.9) 이러한 비유를 좀더 검토해 보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나의 공예품을 생산하는 과정을 그의 “네가지의 동인”(four causes), 즉 질료적, 형상적, 효율적, 그리고 종국적 동인의 원리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 것을 보면 그 타당성을 이해할 만도 하다. (Phys.II.3 and Met. A.2).예) 예컨대, 공예가가 진흙으로써 항아리를 만들고자 할 때, 진흙은 질료로서 하나의 동인(material cause)이 되고, 공예가가 최종적으로 완성하고자 하는 하나의 항아리는 그 일을 하게 하는 종국적 동인(final cause)이며, 그가 의중에 어떤 형상의 항아리를 만들 것인가의 구상이 있으면 그것은 형상적 동인(formal cause)이고, 그것을 만들기 위한 그의 작업은 효율적 동인(efficient cause)이다.

그렇듯이, 국가(도시)도 그러한 네 가지의 동인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일종의 공동체(koinônia, community)이고, 각기 독특한 기능을 하는 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부분들의 집성체이다.(Pol. II.1.1261a18, III.1.1275b20). 이러한 집성체는 여러 가정구조, 경제적 계급, 자치적 조직들이 있고, 종국적 동인에 해당하는 국가는 기본적으로 개체적 시민들로써 구성된다. 그 개인들이 질료적 동인이라면, 도시국가의 시민들이 어떤 질서를 이루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케 하는 입헌적 원리(politeia)가 바로 형상적 동인에 해당하고, 정치가는 그러한 국가를 만들어 가는 효율적 동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정치가는 아테네의 솔론(Solon)이나 스파르타의 (Lycurgus) 등과 같은 입법자는 바로 기본법을 제정하여 국가를 만드는 공예가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헌국가는 상당한 정도의 질서와 규칙을 제도화한 법치국가의 체제를 의미한다. 국민이 준수하는 법률의 내용은 구성원의 모두가 추구하는 바의 공통선에 일관성을 유지하여야 한다. 위대한 정치체제는 공동이익의 가치를 개발하되 그것은 모두의 행복을 구현하는 방안으로 개발하여야 한다. 이것이 입헌정체의 핵심적 특징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는 특정한 가치요소를 실질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말하는 실천적 이성의 기본적인 원리인 “중용”(mesotēs, mean)의 개념을 개체적 덕성을 설명하는 데서 뿐만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중간층”(hoi mesoi)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데서도 일관되게 언급하였다. 덕성은 바로 중용을 의미하며, 중용의 가치와 삶은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가치이고 삶의 의미를 가져다주는 최선의 도덕적 원리이다. 개체적 덕성의 경우에, 참다운 용기는 만용과 비겁의, 절제는 사치와 인색의, 절제는 사치와 인색의 중도를 의미하듯이, 욕구 충족의 과도함과 부족함의 양극적 경향에서 도덕적 중도와 균형을 취하려는 “중용”(中庸)의 원리가 있다. 행복한 삶이란 이러한 중용의 덕성을 실현하는 데 방해받지 않은 삶을 의미한다. 그렇듯이 가장 훌륭한 정치공동체도 중산계층의 시민들에 의해서 구축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산층이 충분히 크고, 가능하면 부유층과 빈민층을 모두 능가할 정도로 더 큰 경우에, 그 국가는 잘 다스려지고 있는 국가라고 하였다. 국민들이 적절하고 충분할 만큼 소유하고 있는 국가는 위대한 국가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너무 많이 소유하는 데 비하여 어떤 사람들은 너무 적게 소유하는 경우에 극단적 민주주의에 이르게 되고, 결국 순전한 과두정체, 때로는 잠주정체까지 등장할 수가 있다. 중산층이 중심이 된 국가에서는 극단적 민주정체가 발생하지 않고, 더욱 안정된 국가를 만들 수 있으며, 입헌정체의 수립과 운영의 열쇠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산층이 빈부의 극단으로 흐르지 않고,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을 취함으로써 모든 구성원들에 최대한의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하였다. 중산층이 빈약할 경우에 발생하는 사회적 풍토를 「정치학」에서 기술한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국가에는 세 부분이 있고, 매우 부유한 층, 매우 가난한 층, 그리고 세 번째로 그 중간층이 있다. 중도와 중용이 가장 좋듯이, 세 계층 중에서도 중간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이성(logos)에 가장 잘 복종할 것이다. 한편으로 지나치게 아름답거나 지나치게 힘이 세거나 지나치게 집안이 좋거나 지나치게 부유한 자라든가, 다른 한편으로 지나치게 가난하거나 지나치게 약하거나 지나치게 볼품이 없는 자는 이성에 복종하기가 어렵다. 이 가운데 전자에 속하는 자들은 무뢰한이나 대형 범죄자가 되고, 후자에 속하는 자들은 불량배나 좀도둑 같은 범죄꾼이 되는 경향이 있다. 한쪽은 교만한 마음에서, 다른 쪽은 악의에서 불의한 짓을 저지른다. 그밖에도 체력, 재산, 연줄 등 과도하게 좋은 환경에 타고난 자들은 복종하려고도 않고 복종할 줄도 모른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너무 사치스럽게 자란 탓에 학교에서도 복종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불우한 환경에 태어난 자들은 너무 비굴하다. 그리하여 한쪽은 지배할 줄 모르고 노예처럼 지배받을 줄만 알며, 다른 한쪽은 복종할 줄 모르고 폭군처럼 지배할 줄만 안다. 그리하여 자유민의 도시(국가)가 아니라 주인들과 노예들의 도시(국가)가 생겨나, 한쪽은 시기하고 한쪽은 경멸한다.

한 국가에서 가장 안전한 것이 중산계급이다. 그들은 빈민들처럼 남의 재물을 탐하지 않거니와, 빈민들이 부자의 재물을 탐하듯, 아무도 그들의 재물을 탐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남들도 그들에게 음모를 꾸미지 않고, 그들도 남들에게 음모를 꾸미지 않으므로 그들은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에는 중산계급의 수가 적다. 그러므로 부유층이든 빈곤층이든 어느 한쪽이 우세해지면 정체를 자기들 의도에 따라 개편하기 하게 되면 과두정체나 민주정체가 생겨난다. 이때 중간계급이 어느 한쪽에 가담하게 되면 그쪽의 비중이 더 높아져 양극단 가운데 어느 한쪽이 우세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극단적인 민주정체나 독선적인 과두정체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고, 둘 중의 어느 한쪽이 극단으로 흐르지 못하므로 최악의 상태인 참주정체를 미리 방지할 수 있다. (4권 11장)

아리스토텔레스적 입헌정체와 현대적 민주정체의 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헌정체는 오늘의 민주정체와는 개념상 매우 유사한 것 같지만,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결정적 차이가 있다. 첫째는 노예제도를 당연시하였고, 둘째는 여성을 차별하는 제도를 정당화하였으며, 셋째는 계층의 구분에 절대적 기준을 상정하였다.

(1) 아리스토텔레스 당시로 보면 완전한 가족은 노예와 자유민으로 구성되며, 최소한 구성요소로 보면 주인과 노예,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자식이다. 이 중에 노예는 생명이 있는 재산에 속하며 재산은 그 소유자의 부분에 속한다. 그러므로 주인은 노예의 주인일 뿐이고 노예에 속하지 않으나, 노예는 주인의 노예일 뿐이고 전적으로 주인에 속한다. 그러면 노예는 본성에 있어서 노예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이 있는 존재는 지배와 피지배의 이원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그 구별은 혼(psychē)과 몸(soma)으로 구성된다고 하였다. 지배의 형태에 있어서 몸에 대한 혼의 지배는 주인의 지배와 같고, 욕망에 대한 이성의 지배는 정치가나 왕의 지배와 같다. 그러면 몸과 혼이 다르고, 들짐승이 인간과 가른 만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몸을 사용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면 최상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인간들은 모두 본성적으로 노예이며, 이들은 주인의 지배를 받는 편이 낫다. 남에게 속할 수 있고 그래서 실제로 남에게 속하는 자는, 이성이 있는 것은 알지만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본성적으로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은 자유민의 몸과 노예의 몸을 구별하고자 노예에게는 천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강한 몸을 주고 자유민에게는 그런 일에는 쓸모가 없지만 시민 생활에 적합한 꼿꼿한 몸매를 준다.

(2)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도 지배와 피지배의 방식이 있다. 우선 아내와 자식에 대한 가장의 지배는 자유민을 지배한다는 점에서 같으나, 지배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자식들의 경우에 아버지의 지배는 피치자들에 대한 왕의 지배와 같고, 아버지는 더 사랑하고 더 연장자이기에 지배자인 것인데, 이것은 왕의 지배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내에 대한 그의 지배는 동료 시민들에 대한 정치가의 지배와 같다. 자연에 배치되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성이 여성보다 본성적으로 지배하는 데서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가가 지배하는 경우 대개 치자와 피치자는 교대를 하며 국가는 차별 없는 평등을 지향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지배하고 다른 사람이 지배를 받을 경우에 지배자는 외형과 말투와 예절에서 구별을 두려고 하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관계도 언제나 이와 같다.

모든 가족은 국가의 일부이고 부부관계, 부자관계들은 가정의 일부이며, 부분의 덕성은 전체의 덕성과 관련하여 고찰해야 한다. 따라서 아이들도 여자들도 국가의 정체에 맞추어 교육을 받아야 한다. 특히 여자들은 한 국가의 자유민의 절반이고, 아이들은 자라서 국정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여성을 비하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인 것은 인간관계를 공동체 속의 관계, 가족 공동체를 확대한 국가 공동체를 상정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가족 밖의 여성이 아니라 가족 안의 여성인 아내의 위치를 두고 논의했기 때문이다.

(3)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 당시의 그리스 사회는 중산계층의 개념이 거의 없는 시기였다. 그의 현실주의적 안목에 따라서 구상된 정치적 체제에 관해서 적어도 두 가지의 질문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중산계층은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는가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계층내의 상대성, 즉 상대적 빈곤의식과 상대적 부유의식은 어떤 형태로든지 형성되기도 하고, 특히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활발한 계층이동이 진행되면, 중산계층이라는 정체의식은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적 개방사회는 소득수준 정도의 경제적 계층구분은 다소 무리하게나마 계량적으로 결정할 수 있지만, 각기 향유하고 있는 이지적, 윤리적, 심미적 문화의 특징은 경제적 계층이동에 자연스럽게 동반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는 상류에 속하지만 문화적으로는 하류에 남아 있을 수가 있고, 그 역으로도 사실이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민주정체와 유사하게 상대적 빈곤의식을 소유한 계층이 주도하는 민주정체 혹은 입헌정체에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려한 군중적 선동정치의 발생을 방지할 제도적 장치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이러한 문제는 바로 민주주의를 단순히 통치체제, 즉 민주정체만으로 접근하고 설명하는 안목의 한계를 벗기가 어렵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공동체에 지배와 피지배라는 “힘의 관계”가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그러나 그가 입헌정체를 논하는 내용에서 보면, 과두정체의 경우에 지배적인 부유층과 민주정체의 경우에 지배적인 빈민층을 혼합하면서 중산계급을 확충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입헌정체(politeia)라고 한 것은 오늘날에는 법치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민주정체의 기본적 요건처럼 되어 있다. 그가 인간은 모두가 이성적 존재라고 보고, 다소 제한적인 측면은 있지만, 만인이 각자의 행복을 향유할 수 있는 국가와 정치의 체제를 구상한 것은 오늘의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기본적인 조건과 방향의 정립에 있어서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고, 그만큼 우리 모두에게 매우 고마운 사상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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