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인의 통치체제가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지니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다원적 주권자들의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공동체의 통치에 직접 참여하였다는 데 있다. 적어도 정치적 의미에서 그들은 각기 시민으로서의 존엄성과 자존감과 권리의식과 책무부담을 공유할 수 있었다.

 "생활 민주주의와 학습기반"(3)

정치 민주주의와 생활 민주주의

이돈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두 가지의 민주주의, 구별이 가능한가?

우리가 민주주의를 정치 민주주의와 생활 민주주의로 나누어 언급할 수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에 (1) 두 개의 영역(혹은 종류)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마치 두 개의 운동장이 별도로 존재하여 한쪽은 정치 민주주의가 놀고 다른 쪽은 생활 민주주의가 노는 곳으로 따로따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인가? (2) 아니면, 마치 두 개의 가옥이 인접하고 있으면서 서로 오가는 사이에 있다는 것과 비슷한 모양인가? (3) 그것도 아니면, 커다란 민주주의의 집에 두 형제가 함께 산다는 것인가?

이글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런 것이다. 정치 민주주의와 생활 민주주의는 마치 같은 가문의 성을 가진 형제나 친척이 한집에서 사는 가족, 혹은 한마을에 사는 집안 친척의 관계처럼 같은 가족 혹은 친족의 관계에 있다는 것과 유사하다. 정치 민주주의와 생활 민주주의는 같은 속성으로써 존재하고 서로 작용하는 관계에 있다. 계속해서, 가족의 비유로서 이야기 해 보자.

민주주의라는 가족의 장자, 혹은 친족의 장손이 태어나고, 뒤를 이어 여러 형제 혹은 같은 항열의 친족이 출생하여 커다란 가족 혹은 친족이 형성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같은 혈통의 가족 혹은 친족을 이루게 된 셈이다. 그들을 모두 민주주의의 가족 혹은 친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같은 혈통의 사람들이며 같은 가문의 전통으로 인하여 서로 신체적으로나 생활방식에 있어서 유사한 특징을 지니기도 한다. 영어에서는 이러한 가족 간의 닮음을 일컬어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라고도 한다.

민주주의의 장손은 정치 민주주의였지만, 그 가문의 전통은 장자의 가족뿐만 아니라 친족들도 다 함께 이어가고 있다. 그 전통이 장손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다. 장손과 당대 그리고 후대들의 생활 속에서 형성되어 이어지고, 또한 작고 큰 변화를 경험하면서 독특한 특징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는 장손인 정치 민주주의로만 이어져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형태의 가족 혹은 친족이 함께 민주주의적 전통을 이어 온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말의 전형적인 의미는 주로 국가적 차원의 제도적 체제, 특히 통치의 “힘” 혹은 “권력”의 원천적 구조와 기능에 관련된 것이다. 어원상으로도 민주주의는 국가를 누가 통치하느냐에 따라서 구별되는 통치체제의 한 유형을 뜻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왕이 다스리는 군주국가, 소수의 귀족층이 다스리는 귀족국가, 잠주가 폭력으로 다스리는 독재국가와는 달리, 민주국가는 국가의 구성원이 모두 직접 혹은 간접으로 참여하는 통치체제의 한 유형이다.

“민주주의,” 그리고 영어의 democracy는 문자 그대로 민중에 의한 통치체제를 의미한다. 그리스어의 dēmokratiā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말은 민중이라는 의미의 dēmos와 통치를 의미하는 kratos의 합성어이다. 애초에 민주주의의 원천은 기원전 5세기의 중반까지 존재했던 고대 그리스의 한 도시국가인 아테네(Athenai)에서 시행되어 유지되던 통치체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통치체제인 민주주의는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생활양식의 민주주의와 의미상 다소 차이를 둘 수는 있지만 완전한 별개의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를 논의할 때의 통치체제는 국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나 대학이나 국제기구, 민간단체 등에도 통치의 구조가 제도적으로 확립되었을 때, 비로소 조직체의 구성적 형태가 공식화되고 기능적 작용을 본격화할 수 있게 된다. 그 조직체의 대외적 혹은 대내적 대표가 있고 그 대표는 의사결정의 규칙에 따라서 제도와 정책을 결정하는 최고 책임자의 위치에 있게 된다.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라는 통치체제는 여러 가지 형태의 조직에서도 그 의미와 원리가 적용되고, 민중 혹은 구성원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조직체의 통치에 참여하는 제도적(혹은 정치적) 체제와 운영의 원리를 의미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되는 민주주의는 그 전형적 외연(장손)을 중심으로 언급할 때 “정치(혹은 제도) 민주주의”라고 일컫게 되고, 이와는 달리 내포(가문의 전통)의 독특한 특징을 중심으로 생각하여 서술하면 “생활 민주주의”로 일컬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정치 민주주의는 생활 민주주의가 제도적 형태로서 그 구체적 특성이 구현된 경우이고,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바로 생활 민주주의의 속성을 내포한 제도적 형태이기 때문이다.

아테네에도 생활 민주주의가 있었는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로 시작된 민주적 정체에서 통치체제를 형성하는 규칙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아테네의 시민들이 바로 “민중”에 해당하되 18세 이상의 남자들이 국가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고, 다수의 의견에 따라서 통치의 제도와 정책이 결정되었다. 그 민중에 해당하는 아테네의 시민은 모두가 자유인으로서 노예나 포로나 외국인이나 죄수가 아닌 성인으로서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사회적 지위나 교육적 배경이나 일상적 생활의 방식도 크게 다양성이 있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시행한 민주주의는 다른 통치체제와는 다른 독특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었다. 즉 도시국가의 구성원인 시민(민중)들은 모두가 직접적으로 통치체제의 규칙에 따라서 제도와 정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국가는 한 사람이 다스리는 국가가 아니며, 소수의 권력자가 다스리는 국가도 아니었다. 시민 혹은 민중은 그들 사이의 이해관계에 있어서나 종사하는 직업에 있어서, 그리고 혈통의 배경이나 주거의 형태나 재산의 수준이나 신앙의 생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선악을 분별하는 기준에 있어서나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다양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국가이다.

말하자면, 비록 소박한 수준이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그 국가에는 민중의 다원적 구조가 있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다원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참여하는 동등한(혹은 평등한) 시민의 자격으로 통치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조건만으로 검토할 때, 아테네인의 통치체제가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지니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다원적 주권자들의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공동체의 통치에 직접 참여하였다는 데 있다. 적어도 정치적 의미에서 그들은 각기 시민으로서의 존엄성과 자존감과 권리의식과 책무부담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동료 시민에 대하여 상대의 인격과 의견과 경험 등을 존중하고, 그 상대에 대한 관용과 배려의 마음을 나누어 가지는 삶을 함께 영위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들은 다원주의적 삶을 제도적으로 경험하는 상황에 있었던 셈이다.

물론 당시의 민주적 삶의 양식을 과대평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빈부의 차이, 이웃이나 집단 간의 경쟁, 그리고 가문적 배경, 능력과 기회의 차이 등으로 인하여 크고 작은 갈등과 사회적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시의 시민계급이 그들의 정치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교육적 노력을 미루어 보면, 매우 세련된 삶을 유지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들이 시민생활을 위하여 중점적으로 중시한 교육 프로그램이 오늘의 교과목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였다. 즉, “세 가지의 중심교과”(trivium)인 문법, 논리학, 수사학이 그것이다. 이러한 세 교과를 시민적 자질에 대비하는 교육내용으로 삼았다는 것은 바로 생활 민주주의적 인프라로서 그 가치를 인식하였던 셈이다.

문법은 자신의 의사표현과 상대방의 발언내용을 정확한 어법에 비추어 담론할 수 있게 하는 언어의 기본적인 규칙에 관한 교과이며, 논리학은 자신의 발언과 상대의 주장에서 모순 없는 의견과 주장을 일관되게 교환할 수 있도록 토론하는 능력을 증진케 하는 교과이고, 수사학은 대화, 연설, 토론 등에서 특히 대중을 상대로 하여 설득력 있는 언어적 기법을 구사할 수 있도록 하는 교과이다. 민주주의의 아테네 시민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주장을 펴는 발언에서 적어도 문법적으로 바르게,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수사적으로 설득력을 지닐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을 갖추도록 교육을 받았다. 문법과 논리학과 수사학, 이 세 가지는 민주국가의 시민이 정치적 상황에 임하여 자신의 의사를 개진하는 기본적인 자질을 구비토록 하기 위한 교과목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자유인들은 공공장소에서 행하여지는 각종의 토론에 참여하여 소견을 발표하거나, 법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거나 판정관으로 활동하거나, 혹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당당한 시민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문법을 익혀서 언어의 규칙에 맞게 의견을 말하고, 논리를 배워서 모순되지 않은 사고를 하고, 수사를 다듬어 개인 혹은 군중을 상대로 하여 설득력을 지닌 표현이나 주장을 한다. 문법, 논리학, 수사학 이러한 학과는 자유인인 시민으로서의 덕행을 익히고, 지혜를 갖추며, 품성을 도야하는 데 요구되는 기본적인 도구였다.

당시의 아테네는 직접 민주주의의 체제이므로 시민은 모두가 자신의 의사를 바르게 피력하는 능력을 소유하여야 했다. 그 능력은 단순히 말을 하는 재주나 기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의사는 정확하게, 정직하게 교환되고, 서로의 토론과 대화가 질서 있게 진행될 수 있도록 협조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은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의 기본적인 규범에 속한다. 언어의 바른 규칙에 따라서 모순없는 주장을 펴면서 상대 혹은 대중을 설득하는 노력의 기법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러한 상황에 임하는 사람의 도덕적 책무이기도 하다. 상대나 대중에게 모멸감을 주거나 무시하면서 이기고자 우기는 토론자, 그리고 눈속임으로 회유하고 거짓으로 기만하고 문제에 대한 전문적 판단을 못하는 대중을 상대로 선동하는 정치인은 민주주의의 이름하에서 함께 대화할 상대가 못된다.

[에듀인뉴스(EduinNews) = 인터넷뉴스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