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가장 자연적이고 단순한 공동체인 가정, 여러 가정들로 구성된 최초의 공동체가 마을이며, 여러 마을로 구성되는 완전한 공동체가 국가이다. 국가는 단순히 생존을 위하여 형성된 것이지만 구성원의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하위의 공동체들이 자연스로운 것이라면 그 국가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국가는 최종목표의 공동체이고 최고의 가치이다. 그의 입헌정체와 민주주의는 생활양식에 기초한 점에서 유사하지만 ...

 

생활민주주의와 학습기반 (4) 

정치 민주주의와 생활 민주주의 (II)

-- 아리스토텔레스의 입헌정체 고찰 --

이돈희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민주주의”의 가장 고전적-원시적 의미는 정치 민주주의의 틀에서 이해되던 것이었다. 원시적 민주주의는 주로 일종의 통치체제, 즉 민중(dēmos)에 의한 통치체제를 의미하던 것으로서, 고대 그리스 당시의 도시국가인 아테네의 통치를 위한 제도적 구조와 그 기능을 중심으로 설명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정치 민주주의” 혹은 “제도 민주주의”라고 일컫는다면, 이와는 의미상 다소 구별되는 설명과 논의의 차원이 있어서 그것을 “생활 민주주의”라고 한 것이다. 생활 민주주의의 개념은 듀이(John Dewey)가 “생활양식”(mode of life)의 민주주의로 언급하면서 의미상 확대된 논의를 시작한 데서 본격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현대적 의미의 생활 민주주의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좀더 자세히 검토하기 전에, 먼저 민주주의를 경멸하듯 한 플라톤과는 달리 동시대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주의를 다소 온건하게 비판한 내용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는 현재 우리의 관심사인 생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민주주의의 경우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체제를 실제적 생활상황에 관련지어 설명한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민주주의도 그런 수준에서 평가하였다. 오래전의 고전이기는 하지만, 그의 이론에는 민주주의를 객관적으로, 즉 우려되는 부분을 포함하여 긍정적인 면도 매우 현실감 있게 다루었다.

정치 민주주의의 요건

“민주주의,” 그리고 영어의 democracy는 문자 그대로 민중에 의한 통치체제를 의미한다. 그리스어의 dēmokratiā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말은 민중이라는 뜻의 dēmos와 통치를 의미하는 kratos의 합성어이다. 애초에 이러한 민주주의의 원천은 기원전 5세기의 중반까지 존재했던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아테네(Athenai)에서 시행되던 통치체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민중에 의한 (혹은 민중의) 통치체제와 관련하여 단순한 의미론적 분석 이외에 몇 가지의 기본적인 요건을 브리태니카에서는 일곱 가지의 질문을 제기하여 논의한 것이 있고, 그 질문들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언급하였다. (“democracy.” Encyclopædia Britannica. Chicago: Encyclopædia Britannica, 2008)

첫째, 민주적 통치체제가 제대로 운영되자면 정치적 조직으로 어떤 수준 혹은 규모가 적정한가? 민주적 통치체제는 하나의 국가만이 아니라, 도시, 기업, 대학, 국제기구 등 어느 특정 규모의 조직을 운영하는 체제와 규칙에 적용되는 원리이다.

둘째, 적정의 민주적 조직이 성립한다면, 구성원의 전부 혹은 일부가 완전한 권한을 행사하는 자격을 소유하는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민중(dēmos)에 해당되며 동시에 통치행위에 종사하는가? 그리고 통치행위에 종사할 수 있는 계층이나 집단의 기준으로 볼 때, 민주정치는 귀족정치(aristos)나 공명정치(oligos)와는 어떤 점에서 구분될 수 있는가?

셋째, 민주적 통치를 위하여 어떤 제도적 체제가 필요한가? 적정한 민중의 조직이 구성되었다면, 구성원을 통치한다는 것은 어떤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통치적 체제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크고 작은 마을이나 고장과는 어떻게 다른가?

넷째, 구성원인 시민들은, 흔히 있듯이, 어떤 쟁점을 두고 서로 나누어서 다투고 있을 때, 어느 한 편의 의견이 다른 편에 비하여 지배적으로 우세하다고 판정하는 기준이 있을 수 있다. 어떤 경우가 옳은 기준인가? 언제나 다수의 편을 따라야 하느냐, 아니면 소수편이라도 때로는 다수결의 원칙을 유보하거나 저지할 수 있어야 하는가?

다섯째, 만약 다수결이 일상적인 규칙이라고 한다면, 다수는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 모든 시민의 다수? 투표자의 다수? 혹은 적정한 다수는 개별적인 일반시민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특정의 세습적 단체 혹은 지역적 조직 등과 같은 집단 혹은 조직에 속하는 사람들이 일부 혹은 전부를 차지하는 그런 것인가?

여섯째, 위의 질문들은 어쩌면 더욱 중요한 다음의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요청하고 있다. 즉, 왜 “민중”(국민)이 통치해야 하는가? 민주주의는 참으로 확실하게 귀족주의나 군주주의보다 나은 제도인가? 아마도 플라톤이 그의 「국가론」에서 주장하였듯이 가장 좋은 정치제도는 가장 우수한 사람들로 구성된 소수가 다스리는, 즉 “철인왕”(哲人王)에 해당하는 귀족일 수도 있다. 플라톤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가?

일곱째, 어떤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민주주의는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만약에 민중 혹은 정치조직의 다수가 지금의 제도보다 더욱 나은 것이 있다고 믿는다면, 어떤 통치조직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 자체를 장기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의 체제가 민주적 체제로서 지속적으로 유지되려면, 최소한의 조건으로, 민중 혹은 지도층의 상당한 다수가 지금의 것, 즉 민주주의가 어떤 가능한 대안보다도 나은 제도라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된 질문으로,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데 유해한 요소들은 어떤 것인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체제들 중에는 수없이 많은 경우가 격심한 위기를 잘 넘기면서 오래도록 잘 지속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멸망해 버리는 체제들도 수없이 많이 있었다. 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가?

위의 내용들은 민주적 조직의 조건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기준, 그리고 제도적 장점이 무엇이며, 어떻게 영구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가 등, 기본적인 질문들을 제기한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긍정적 답변이 가능하다면 민주주의는 그만큼 정당화되고 지지받을 것이다. 그 질문들에 대한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답변은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방어하기 위하여 집착할 가치를 지닌 제도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적 체제는 그 자체로서 국가나 조직의 안전을 보장하는 제도적 특성과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반드시 전적으로 안전한 제도적 체제는 아니었다.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나 생활양식으로 충분히 성숙하기 전에 여러 가지의 예상되는 문제들을 있을 것이고, 그 문제들 중에는 민주주의를 치명적으로 붕괴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예측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들 수 있다.

민주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적 검토

듀이는 민주주의를 단지 정치적 제도의 차원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국가를 포함하여 온갖 형태의 사회적 조직 혹은 공동체에서 그 구성원들이 자유로운 존재로서 성장의 삶을 영위하는 생활양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듀이의 이러한 발상과 다소 비슷한 생각을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게서 희미하지만 유사한 내용을 들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조직, 특히 국가를 단순히 개체들의 군집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존재하게 된 공동체로 설명한다. 그의 공동체의 개념과 존재적 목적을 구성원들의 ”행복“이라고 설명한 것에는 듀이와 매우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즉, 듀이가 “성장”이라는 말을 쓴 데 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라는 말을 썼다는 정도의 차이밖에 없을 정도로 매우 유사하다. 실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적 삶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라고 하고 인간의 이성적(합리적) 특성을 꽃피우는 것으로 생각한 데 비하여, 듀이의 경우에 인간은 계속적인 성장의 삶을 지향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두 철학자는 공히 사회적 구성원이 함께 삶을 영위하는 공동체의 개념에 바탕을 둔 논거를 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가장 자연적이고 단순한 공동체인 가정은 번식을 위해 결합할 남녀의 한 쌍으로 성립한다. 일상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정들로 구성된 최초의 공동체가 마을이며, 여러 마을로 구성되는 완전한 공동체가 국가이다. 국가가 형성되면 그 공동체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최고수준의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국가는 단순히 생존을 위하여 형성된 것이지만 구성원의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하위의 공동체들이 자연스로운 것이라면 그 국가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국가는 최종목표의 공동체이고 최고의 가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체에 관해서 그것이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정치학」 4권 4장) 먼저, 적어도 국가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농부, 기술자, 상인, 기술직, 전사, 재산가, 공직자, 법조인 등의 여러 기능적 계층들이 존재함을 전제로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계층을 단순히 국가가 보조적 존재로가 아니라, 엄연한 정치적 조직의 구성적 조건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민주적 정체의 특성에 관심을 두지 않는 다른 여러 정체에서는 보기 힘든 경우이다. 이런 조건의 국가 구성원들이 제대로 작동하자면 탁월한 정치가가 요청된다. 그런데 서로 다른 부문에 요구되는 이런 재능들을 같은 사람이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의 실상은 효율적이지도 않고 불가능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같은 사람이 전사(戰士) 겸 농부 겸 기술자가 될 수 있고, 나아가 법률 심의자 겸 재판관도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두가 자기는 정치가로서 뛰어난 자질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정치에 참여하고자 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정체로도 해결할 수 없는 한 가지 문제를 지적하였다. 그것은 바로 부유층과 빈곤층으로 양극화된 사회에서 같은 사람이 가난하면서 동시에 부자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체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부자와 빈민이야말로 국가의 가장 본질적인 구성요소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런데 부자는 적고 빈민은 많은 까닭에 이들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보이고, 어느 쪽이 우세하냐에 따라서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체를 세우고자 한다. 그러면 결국 생각할 수 있는 정체로는 가난한 집단을 중심으로 한 민주정체와 부유한 계층을 중심으로 한 과두정체(Oligarchy, 寡頭政體), 이 두 가지만이 가능하다. 그런데 국가의 정체를 운영할 민중이나 귀족의 어느 쪽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양하기로 말하면 마찬가지이다. 민중의 편에서 보면 농부, 기술자, 상인 등도 또다시 분류가 가능한 많은 다양성이 따르고, 귀족의 편에서도 재산, 가문, 교육 등에 따라서 다양하다.

민주정체, 과두정체, 그리고 입헌정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특징을 지닌 민주주의를 플라톤의 경우만큼 악평하지는 않았다. 다수를 개별적으로 보면 특별한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보다 열등하지만, 그 다수의 지지로서 나타내는 지혜는 소수의 전문가들과 동등하거나 혹은 더욱 나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절차와 전략이 합리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면, 모든 사회는 필요에 따라서 통치의 규칙을 발전시켜야 하기 때문에, 다수에 의한 결정은 유익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절대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체와 과두정체를 혼합한 정체를 구상하였다. 그 정체를 “politeia”라고 하였다. (이 말의 번역으로 반드시 적절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의미상으로 보아 “입헌정체”라고 번역해 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헌정체는 그가 일종의 혼합정체라고 설명하기도 하였듯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민주정체와 동일시하거나 그 체제의 한 유형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단순히 민주정체를 공적 이익을 추구하도록 변형시켜 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실상 입헌정체를 당시의 민주정체와 동의어로 사용하지도 않았고, 그 외연에 속한다고 명백하게 언급하지도 않은, 다소 애매한 상태에 둔 개방적 의미를 지닌 말이다. 빈민층과 부유층을 포함한 만인이 참여하는 정체라는 점에서 민주정체와 과두정체를 혼합한 정체라고 읽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입헌정체에 접근하는 정치적 지향성은 적어도 오늘의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주적 가치관과 일관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고, 그렇게 의도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입헌정체”는 하나의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표현하는 이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오늘의 민주주의의 개념이 지향하는 바와 같이, 입헌정체는, 적어도 원리상, “만인의 이익을 위한” 정체이고, 그러므로 공통선(공동이익)을 실현하는 데 통치력이 발휘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정체이다. 그러나 실제로 공통선의 개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정치적 환경에 따라서 바뀌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고대 그리스 시대의 공통선의 개념이 함의하는 것보다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반적 원리들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국가는 일종의 공동체(koinônia, community)이고, 각기 독특한 기능을 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부분들의 집성체라고 한 것이다.(정치학, 2권 1장, 3권 1장). 이러한 집성체는 구성원들에 의해서 여러 형태의 가치들을 추구하게 되지만 큰 공동체의 국가에서도 기본적으로는 개체적 시민들로써 구성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입헌정체의 국가는 상당한 정도의 질서와 규칙을 제도화한 법치국가의 체제를 의미한다. 국민이 준수하는 법률의 내용은 구성원의 모두가 추구하는 가정구조, 경제적 계급, 자치적 조직들이 있고, 종국적으로 공통성과 일관성을 유지하여야 한다. 위대한 정치체제는 공동이익의 가치를 개발하되 그것은 모두의 행복을 구현하는 방안으로 개발하여야 한다. 이것이 입헌정체의 핵심적 특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헌체제에서 우리는 제도적 체제와 병행하는 일상생활적 측면의 조건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인간의 공동체에 지배와 피지배라는 “힘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이때 지배의 힘은 명시적인 권력의 행사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관습과 생활”에서 우선권을 인정하는 관계까지 포함한 넓은 의미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 점에서 성립되는 관계의 특성을 의미하고, 그런 맥락에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입헌정체를 논하는 내용에서 보면, 과두정체의 부유층과 민주정체의 빈민층을 혼합하면서 중산계급을 확충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중용의 원리와 중산층의 구축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는 일상생활적 측면에서 특정한 가치요소를 실질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말하는 실천적 이성의 기본적인 원리인 “중용”(mesotēs, mean)의 개념을 개체적 덕성을 설명하는 데서 뿐만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중간층”(hoi mesoi)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데서도 일관되게 언급하였다. 덕성은 바로 중용을 의미하며, 중용의 가치와 삶은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가치이고 삶의 의미를 가져다주는 최선의 도덕적 원리이다. 예를 들어, 개체적 덕성의 경우에, 참다운 용기는 만용과 비겁의, 절제는 사치와 인색의 중도를 의미하듯이, 욕구 충족의 과도함과 부족함의 양극적 경향에서 도덕적 중도와 균형을 취하려는 “중용”(中庸)의 원리가 있다. 행복한 삶이란 이러한 중용의 덕성을 실현하는 데 방해받지 않은 삶을 뜻한다. 그렇듯이 가장 탁월한 정치공동체도 중산계층 시민들의 주도에 의해서 구축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당시의 그리스 사회에는 중산계층의 개념이 거의 없는 시기였다. 그의 현실주의적 안목에 따라서 구상된 정치적 체제에 관해서 적어도 두 가지의 질문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중산계층은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는가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계층 내부의 상대성, 즉 상대적 빈곤의식과 상대적 부유의식은 어떤 형태로든지 형성된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활발한 계층이동이 진행되면, 중산계층이라는 정체의식은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적 개방사회는 소득수준 정도의 경제적 계층구분은 다소 무리하게나마 계량적으로 결정할 수 있지만, 각기 향유하고 있는 이지적, 윤리적, 심미적 문화의 특징은 경제적 계층이동에 자연스럽게 동반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는 상류에 속하지만 문화적으로는 하류에 남아 있을 수가 있고, 그 역으로도 사실이다. 그러면 고전적 민주정체나, 그리고 이와 유사하게 상대적 빈곤의식을 소유한 계층이 주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헌정체에는 플라톤도 우려한 군중적 선동정치의 발생을 방지할 제도적 장치가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입헌정체(politeia)에서 제도적 체제와 생활적 양식을 조화시키는 입헌정체, (혹은 혼합정체)에서도 두 측면의 조화를 기대하기에는 여전히 문제와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문제와 한계는 정치제도와 생활양식의 일관된 균형과 조화가 없는 현대적 민주주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민주주의는 단순한 정치체제만으로 그 의미를 다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탁월한 정치 민주주의도 건실하게 구축된 생활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서만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생활 민주주의라는 것이 탁월한 정치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삶이 문화적 기반으로 안착되어 있어야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정치 민주주의는 건강한 생활 민주주의의 바탕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합리적이고 안정된 체제를 구축하고 있어야 한다. 정치 민주주의는 제도적 구조와 기능을 포함하는 생활문화의 다소 “경성적(硬性的) 부분”이라면 생활 민주주의는 삶의 양식과 규범을 포함하는 다소 “연성적(軟性的)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후속되는 강의에서는 주로 생활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논의하고 필요한 만큼 정치 민주주의를 언급하게 될 것이다.)

[에듀인뉴스(EduinNews) = 인터넷뉴스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