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 다산미래원 원장 / “다산TV”유튜버

 - 전) 숭실대, 인천대 외래 교수(2014-2016)

 - 전) 강진군 다산박물관 교육전문관(2017–2019)  

 

  21세기 우리 사회는 초뷰카(hyper VUCA) 시대를 맞고 있다. 유동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이 확대 재생산되는 초뷰카 시대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노력이다. 그 노력의 주체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 앞에 놓인 시대적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스스로 해법을 찾아야 한다.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연결 지어 사고의 지평선을 확대함으로써 더 나은 현재를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평생학습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18세기에 600여 권의 책을 저술하고 죽는 날까지 저술 활동을 한 다산 정약용 선생이야말로 평생학습인의 원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생학습 전공자의 렌즈에 다산 정약용은 평생학습인의 원조로서 손색이 없다. 다산은 평생 독학자로서 살면서 학문에 있어서는 누구든지 학문적으로 스승이 되었다.

  선생은 7살 때 한자로 삼미집(三眉集)”이라는 시집을 냈으며 13세 때는 수백 수의 한시를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15때 결혼하여 서울로 올라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여러 사람들과 폭넓은 교류와 학습을 통해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새로운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17세 때는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동림사에서 40일 동안 거처하며 맹자를 읽고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형을 놀라게도 하였다.

  또한 다산은 나이를 따지지 않고 친구가 되어 학문의 폭을 넓히기도 하였다. 그 예가 16세 때 부친을 따라 전라도 화순에서 25세나 많은 유명한 선비인 조익현을 만나 경전과 문장을 토론하며 학습한 예이다.

  다산은 22세 때 성균관에 입학하여 다양한 학문을 접하게 되었고, 이때 정조가 낸 중용에 관한 70조목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제출하여 정조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미래 핵심인재로 발탁되었다. 다산은 28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초계문신으로 발탁되어 규장각에서 경전의 강론과 학문의 연마를 더욱 깊게 하였다. 다산은 이곳에서 매월 치르는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왕으로부터 말과 표범가죽 등 많은 상을 받았다. 30세 때는 정조가 시경에 대하여 800여 조목의 의문점을 제시하고 그에게 답하도록 하였다. 다산은 60일 동안 조목조목 항목에 대하여 답을 정리하여 시경강의로 엮어서 제출하여 정조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다산의 학문적 위상은 31세 때 부친이 사망하여 상 중인데도 정조는 다산에게 수원화성을 건축할 설계도와 공사를 위한 계획도를 작성토록 할 정도였다. 수원화성은 1794년에 착수하여 17961016일에 낙성식을 하였다. 10년을 예상한 공사를 2년 반 정도 걸려서 끝내 버렸다.

  이러한 평생학습을 통한 다산의 폭넓은 학문은 다양한 분야에서 창의력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실력까지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런 수원화성이 지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다산은 여섯 살 위인 매형 이승훈과 여덟 살 위인 큰형 처남 이벽을 통하여 천주교를 알게 되었고, 많은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면서 새로운 학문을 접하기 시작하였다. 23세 때 다산은 이벽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황홀할 정도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면서 천주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이때 다산은 천주교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비밀강습회를 만들어 함께 스터디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천주교를 알게 된 것이 훗날 다산이 유배를 당하게 되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으나, 1791년 외사촌인 윤지충이 천주교 신앙에 빠져 제사를 폐지한 일로 처형당하면서 천주교를 끊었다고 한다.

  36세 때 다산은 반대파들의 극심한 공격을 피해 황해도 곡산부사로 나가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다산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신의 학문적 이론을 현장에서 실험하고 개혁하는 실험장으로 활용하였다. 다산은 이곳에서의 관료생활을 바탕으로 먼 훗날 유배지에서 쓴 경세서 즉,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심서 등을 쓰는 자료로 삼기도 하였다. 다산은 현장에서의 경험과 학습한 것을 바탕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한 개혁서를 저술한 것이다.

  다산은 40세 때 정조의 사망과 동시에 반대파들의 천주교에 대한 탄압으로 강진으로 유배되어 18년이란 시련과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그 속에서도 다산은 평생학습이야말로 유배생활의 시련과 고난 극복의 최선의 방법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학문의 끈을 놓지 않고 600여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이것이 바로 다산학으로 다산의 위대한 학문적 사상적 실학적 결과물이다. 다산은 해배되어 고향에 돌아와서도 죽기 전까지 18년 동안 지인들과 학문적 교류를 지속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책을 저술하거나 교정하면서 평생학습인으로 살다가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3살 때부터 75세 때까지 평생을 학습과 저술 활동을 통하여 실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야말로 진정한 평생학습인이다. 200여 년이 지난 지금 평생학습인 다산 정약용의 다산정신은 초뷰카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평생학습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관련 유튜브   https://youtu.be/wEbKe6H6w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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