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으로 “완숙한 사회적 지력”(full-fledged social intelligence)을 계발하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민주적 심성”(Democratic Mind)을 성숙시키는 것이며, 그것은 곧 “교육을 통하여 이룬 심성”(Educated Mind)을 의미하고, “성숙한 사회적 지력”(well-fledged social intelligence)을 계속적으로 계발하고 증진시키는 노력을 유지하는 사회적 과업이다. 의미론적으로 보면, 민주주의와 교육은 동의어이다.

민주주의는 싸움이 아니다

-- 다원주의의 패러독스와 민주교육의 과제 --

 

 

                                    이돈희 (서울대 명예교수)
이돈희 (서울대 명예교수)

 

민주주의의 개념적 난맥상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민주주의라는 말은 일종의 가치진술이다. “민주적 사회라고 하면, 그러한 사회는 특별한 가치가 실현되는 좋은 사회를 의미한다. 마치 양심적인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왜 양심적이어야 하는가를 묻지 않는 것과 같이, 우리는 대개 왜 민주적이어야 하는가를 묻지 않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민주주의,” “민주적이라는 말은 적극적으로 긍정적 가치를 함의하고 있는 일종의 가치지향적 언어이다. 그래서 우리의 국가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의해서 운영되어야 하고, 우리가 속해 있는 조직들도 민주적 규범을 실천해야 하며,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도 민주적 가치와 본질에 역행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어떤 사회를 일컬어 민주적 사회라고 해야 하고, 어떤 가치체제를 일컬어 민주주의라고 하는가에는 명시적이고 권위적인 일정한 답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다. 현실적으로 민주주의의 사상과 제도와 생활의 양식들은 그 본체를 보여주지 못할 정도로 다양하고 어지럽기만 하다. 오늘의 세계를 주의해서 보면, 사람들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저마다의 삶의 방식으로 추구하는 바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국가주의, 심지어는 독재성을 띤 제국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의도 모두 각기 민주주의의 한 유형이라거나, 심하게는 민주주의의 전형이라고까지 고집한다.

어쩌면 그러한 혼란스러운 주장들이 서로 공존하는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면 별로 우려스럽지도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대로 저들은 저들대로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보면, 모두가 평화롭고 안전한 삶을 즐기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닐 법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제도나 생활양식의 유형 간에 반드시 평화로운 선택의 질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민주주의는 인류의 삶에 질서를 가져다주는 원리라기보다는 갈등과 반목과 투쟁의 합리화를 위한 명분을 제공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민주주의의 개념 그 자체는 적극적으로 긍정적 가치를 표상하는 것이고 누구나 추구하는 가치이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집착하는 방식에는 다양성을 허용하는 개방적인 이념적 원리로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모든 것에 대하여 개방적이고 수용적이라고 여긴다. 다양한 방식으로 추구할 수 있는 가치의 개념이면, 그런 여럿 중에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는 가치체제들이 동시적으로 형성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론적 다양성, 특히 자유민주적 전통을 유지하고자 하는 국가 혹은 조직에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위치에 있는 공직자들에게 가장 곤혹스러운 부담을 주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공교육 종사자, 법률적 심판자, 공공 행정의 수행자, 국가 혹은 단체의 이법자 등이다.

사실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여러 유형 중에서 특히 자유민주적 노선의 체제는 그 본질적 특성으로 인하여 현실적으로 감당하기조차 힘든 부담을 가장 심각하게 안고 있다. 심지어 자유민주적 체제는 자체를 부정하거나 전복하려는 세력에 대해서도 다양성의 원칙을 유지하는 관용을 취하기도 하고, 그런 상태의 유지가 바로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인식하는 경향도 있다. 말하자면, 일종의 패러독스” (paradox)가 민주주의 자체의 이념적 체제에 실제적으로, 그리고 개념상으로 내재해 있는 셈이다.

 

패러독스의 다원주의적 근원

민주주의의 국가에서 정치교육적 패러독스의 문제를 발생케 하는 가장 빈번한 원인은 민주주의의 개념 자체가 함의하는 다원주의의 성격에서 연유한 것이다. 국가를 비롯한 사회적 조직의 체제와 운영(혹은 통제)의 원리를 의미하는 민주주의는 다원주의를 기본적으로 상정하고 있다. 이 경우의 다원주의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세계관, 인간관, 사회관, 종교관 등과 같은 가치관에 대한 이론적 혹은 이념적 지향성이 서로 구별되거나 대립되는 복수(다원적 형태)의 신념체제를 언급할 때 사용된다. 관심의 맥락에 따라서 수없이 많은 종류의 다원주의적 요소들이 있을 수 있으나,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주로 가치론적 다원주의이다. 민주적 조직의 정치적 가치와 원리에는 다원주의적 문제와 쟁점이 적어도 잠정적으로 내재하기 때문에, 다원주의의 개념은 그 자체로서 분리시켜 논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관심의 맥락에 따라서 집중할 만한 논의의 대상, 즉 구체적인 문제 혹은 쟁점이 특별히 인식되기도 한다.

어느 수준의 것이든지 간에, 민주적 조직은 그 구성원의 모두에게 같은 수준의 자유를 부여하면, 그들의 각각이 지닌 개성과 신념과 가치는 상당한 정도로 서로 다른 삶의 형태를 표출하게 된다. 이러한 조직에서는 다원주의적 질서를 허용하고, 이에 따라 형성된 공동체는 암묵적 혹은 명시적 규칙의 체제에 대한 합의가 전제되어 있다. 우선 자유와 평등의 개념에도 획일적 혹은 폐쇄적 한계를 설정하기보다는, 가능하면 그 개방성을 최대한으로 유지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이념적 방향과 일관성을 지니는 길이다. 그러므로 자유와 평등은 거의 무한한 다양성의 실천적 원리를 포괄하는 일종의 메타언어이다. 실제로 구성원들 간에 우리의자유는 이런 것이며, “저들의자유는 저런 것임을 허용한 다원주의적 원리에 따라서 상이한 실천의 규칙이 요구된다.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사회적, 정치적, 도덕적 체제는 다원주의를 기본적으로 상정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체제에서 자유와 평등은 그 자체로서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는 개념이다. 하지만, 실제로 다원주의의 맥락과 무관하게 언급되는 경우라면,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적어도 민주주의를 논의하는 사고의 영역에서, 본질적 관심의 중심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다원주의가 없으면 자유와 평등도 결국 외곬으로 강제되는 것이다. 다원주의가 거부된 사회에서 탁월한 민주주의가 구축될 수 없고, 다원주의가 허용되는 실천적 폭만큼 조직의 구성원들은 자신에게 유의미한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가치의 다원성을 수용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그 근원에서부터 다원주의를 함의하고 있다. 우선 그 정체(政體)로 본다면, 군주정체나 잠주정체와는 달리 한 사람이 통치하는 정체가 아니며, 귀족정체나 과두정체와도 달리 소수가 통치하는 정체도 아니다. 오늘날 여러 형태로 독재체제를 구축한 국가들도 명목상으로는 다수의 통치를 내세워 민주주의라고 표방하는 경우가 있지만,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는 민주주의혹은 민주정체는 실질적으로 다수(민중)의 평등한 참여와 자유로운 의사의 반영을 통하여 제도를 운영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체제이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통치에 참여하는 다수는 개별적으로 의견의 다양성을 보일 수도 있고, 특정한 부류의 집단적 의사의 다양성도 있을 수 있다. 이와같이 다원주의가 본질적으로 허용되는 사회적 구조 속에는 서로 경쟁하거나 갈등하는 관계에 있는 여러 형태의 가치(혹은 이념)의 체제들도 공존한다. 이러한 구성요소적 체제들 간에는 논리적으로 혹은 실제적으로 힘을 겨루는 관계, 때로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에 있게 되면, 힘의 대결로 인하여 다원주의가 제한당하고 민주주의 자체가 존속하지 못하는 결과에 이르기도 한다. 패러독스의 극악상태에 있는 셈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러한 극악의 경지는 민주주의가 극성기에 이르렀을 때의 이야기이다. 오히려 혼란이나 좌절을 경험하는 상태에 있을 때, 혁명의 회오리가 지나간 흔적이 남은 상태에서 보듯이, 민주주의는 다른 어느 체제보다도 더욱 불안정한 생활의 장을 만들기도 한다. 이 경우에 조직의 구성원들은 잠재적으로 지닌 삶의 역량을 발휘하는 수준만큼 삶의 질을 유지할 수가 있다. 민주사회에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평등하며, 구성원의 각각이 성장의 삶을 가장 충실히 누리는 상태에 있고, 모두가 가장 안전한 삶을 영위하는 상태에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다원주의가 건강하게 안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볼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를 사회적 조직과 운영의 기조로 삼고 이에 따른 삶을 열정적으로 영위하고자 할 때, 어렵지 않게 위기와 파산의 경지에 직면하는 사례를 관찰한다. 때로는 조직의 전면적 붕괴까지도 우려해야 하는 문제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도 바로 다원주의에의 집착 때문이다. 말하자면, 민주주의에 있어서 다원주의는 실현하고 성취해야 할 과제이면서 동시에 피할 수 없는 부담이고 멍에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정치적 갈등과 대립과 투쟁은,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근원적으로는 사실상 민주주의가 허용하고 귀하게 여기며 집착하는 다원주의의 이념에서 연유한 것임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으로 보면,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적 대립, 지역 간 이해관계의 충돌, 종교 간의 갈등, 사회계층 간의 견제 의식 등 수없이 많은 요인들이 다원화된 신념구조를 반영한다. 어떤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사회 구성원들 간의 대립 혹은 갈등을 전제로 한다. 이에 비하여 독재체제는 사회적 갈등을 권위나 강압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그것은 다원주의를 제한하거나 금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적 체제는 사회 구성원들 간의 갈등과 대립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사회가 아니라, 그것을 해결하는 원리와 규칙을 공유하면서 다원주의를 유지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에서 민주적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체제는 때때로 자체의 개방적 특징으로 인하여 체제 그 자체의 붕괴를 가져올 수도 있는 세력의 잠식을 방치하거나 허용할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서 문제로 삼고 있는 주제인 패러독스이다.

 

다원주의의 개념적 외연

가장 고전적 형태의 정치적 다원주의는 정치행위와 의사결정은 주로 정부의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며, 비정부집단은 거기에 영향을 주는 일종의 압력집단이라고 전제한다. 그리하여 고전적 다원주의는 정치적 과정에서 권력과 압력이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가에 일차적 관심을 두고 있었다. 갈등관계에 있는 정치적 노선들은 복수로 존재하며 계속적인 타협의 과정을 통하여 권력의 유지와 전환이 이루어진다.

국가적 수준에서 정책결정을 설명하는 다원주의의 이론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르러 특히 미국에서 대단한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하였지만, 종래의 다원주의 이론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신다원주의”(neo-pluralism)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새로운 목소리는 권력분배에 관련하여 종전과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는 많은 압력집단이 존재하지만, 종래와 같이 주로 법정기구의 권력에만 한정할 것은 아니라고 평가하였다. 말하자면 고전적 다원주의는 국가의 정치문화적 다원성에 한정된 것이지만, 신다원주의는 사회문화적 다원주의의 개념으로 확장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다원주의자들은, 국가란 이제는 더 이상 여러 이해집단의 요구들을 중재하고 판결하는 심판자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며, 단지 여러 하부조직의 활동을 통하여 부분적인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기구로서 일종의 상대적 자율권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의미의 다양성은 사회-경제적 힘의 불균등한 분배로 인하여 나타난 현상이다. 정치적 선택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어떤 집단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하지만, 어떤 집단에게는 제약조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신앙과 민족의 다양성을 비롯하여 성별 활동, 혼인 관계, 언어 사용, 친교 관계, 친족 모임 등에까지 다양성의 개념을 확대하여 복합적 다원화를 기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William E. Connolly, Pluralism (Durham : Duke University Press, 2005), pp. 38-67.)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강조점이 바뀌게 된다. 시민권에 관련된 운동들은 이전까지만 해도 변방에 머물고 있었지만, 이제 여러 집단에서 새로운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성별적 역할과 차이에 관하여, 인종적 특성의 차이와 관련하여, 민족적 기원을 중심으로, 사회적 계급에 관련하여, 세대 차이와 연령층의 문제로, 신체적 조건에 관련하여, 양심과 도덕의 문제로 인하여, 종교적 갈등과 차등의 문제로 인하여 등등, 수없이 많은 집단들의 목소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사회 정책의 중심적 과제는 이제 차별성의 정당성에 관한 것이었다. 다원주의적 사회는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기본적인 가치관의 다양성, 정치적-사회적 이데올로기의 다양성, 전통이나 관습이나 신앙 등의 문화적 특성의 다양성, 그리고 성별, 소득, 인종, 지역 등의 인구학적 특징에 의한 이해관계의 다양성을 포함하여 헤아릴 수 없는 다원적 요소와 구조를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움직임에 대하여 완전주의자들(perfectionists)은 다원주의가 사회적 통합성의 기반에 문제를 발생시킨다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하여, 19세기의 빅토리아 시대에 완전주의를 주장하는 대열의 사람들은, 다양성이 좋은 듯이 보이지만,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하나의 사회로서 결속시키는 바탕 혹은 동력으로 작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 바도 있다. 자칫, 확실한 기준도 없이 무기력한 상대주의로 나아가는 흐름을 우려하는 소리였다. 그들에 의하면, 다원주의를 윤리적으로 당연시하는 주장이나 정책은 여러 가지의 정치적 문제를 발생케 할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다원주의는 그 자체로서 합법적인 정치적 판단의 권위를 부여받을 만큼 민주적 사회의 기초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치적 도덕성은 인간의 복리와 번영을 지향하는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사상체제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장 엄격한 완전주의는 획일주의를 의미하지만, 어느 완전주의자가 예컨대 합리적 가치를 절대시한다고 하더라도 합리적 삶의 방식은 상당한 정도로 다양하다는 것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어느 다원주의자가 다양한 가치관을 제한 없이 허용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가치관의 각각은 그것을 선택한 개별적 주체는 마치 절대적인 것인 양 추구할 수도 있다. 좀 더 엄격히 생각해 보면, 자유주의적 전통 속에 있다고 할 때, 다원주의라고 해서 국가의 교육은 국민들로 하여금 어떤 가치체제를 수용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며, 완전주의라고 해서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오직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제한된 몇 가지의 삶을 살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강제하거나 회유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다원주의와 완전주의는 그 차이가 표방된 포괄적 가치체제가 지닌 개방성의 정도에 있다. 쉽게 말하면, 국민교육이 지향할 가치체제를 다원주의에서는 다소 느슨한상태에 두자는 것이고, 완전주의에서는 그것을 다소 단단한상태에 두자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느슨한 기능은 그 체제가 다양한 가치 혹은 가치체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중립성에 대한 요구의 외연이 넓고, 단단한 기능은 그 외연이 좁을 뿐이다.

 

교육의 과제 : 생활 민주주의의 요청

이러한 패러독스를 긍정적으로 극복하고 감당하기 위하여, 논자들은 자유민주적 원리와 그 가치에 대하여 다른 어느 이론적 노선의 경우보다도 복잡한 개념적 구조와 분석적 틀을 가지고 접근한다. 그것은 사실상 대단한 철학적, 사회적, 정치적 부담을 주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에 따른 실천적 참여와 노력과 기획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갈등과 분쟁은 때때로 필사적인 전쟁의 장을 만들기도 한다. 바로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자유, 평등, 개성, 공동체 등의 가치를 비롯한 화려한 덕목들을 구현하고 수호하는데 집착과 헌신과 희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의 의지, 바로 그 의지의 실현을 위하여 적지 않은, 때로는 엄청난 부담을 안고 있으며 때로는 대단한 대가를 지불하기도 한다.

내가 보기로, 패러독스의 상황은 아주 독특한 문제의 상황이다. 예컨대, 지역 간의 반목이나 계층 간의 갈등과 같이 반드시 물리적인 힘으로라도 철저히 제거해 버려야 할 문제의 상황은 아니다. 그야말로 그 상황에 관련된 사람들의 역량만큼 만족한 수준의 해결을 기대할 뿐이다. 엄격히 검토해 보면, 민주주의에 내축된 패러독스는 적응하고 감당하고 극복할 대상이지, 분석하고 검증하고 판정하여 어느 것을 선택적으로 제거해 버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거기에 함께 인격체들의 경험과 습관, 지력과 열정 등으로 자신들이 스스로 추구하는 목적과 가치에 비추어 검토하고 조정하고 극복할 과제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특히 이러한 점을 반성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 실로, 근대사회적 민주주의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관찰할 수 있듯이, 수없이 많이 발생했던 대결, 갈등, 혼란 등은 사실상 민주주의적 체제와 생활에 내재하는 패러독스적 요소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거기에 적응하고 문제를 감당하고 해결한 결과는, 자연적 질서와 문화적 세계의 맥락에서 인간적 경험의 영역을 확장하고 또한 합리성과 세련성을 높인 자산의 중요한 부분이 되기도 한다.

패러독스는 우리가 직면하거나 몰입되어 있거나 스스로 임한 문제상황의 논리적 표현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력을 다하여 해결에 임할 것을 요청하는 일상적 사고의 과제를 의미하고, 그 상황과 더불어 추구하는 가치의 실현을 의도하는 인간적-집단적 요청일 경우에 유의미한 것이 된다. 이러한 유의미성이 없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패러독스는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민주주의는 크고 작은 문제적 상황을 삶의 과정에서 수없이 생산하고 있다. 그러한 상황은 경우에 따라서 우리에게 고통의 원인일 수도 있지만, 성취의 과제이기도 하고 성장의 조건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성장의 삶을 위한 바탕이 되기도 한다.

더욱 함축적으로 말하면,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서 패러독스이다. 자유와 평등의 관계가 그러하고, 개체와 전체가 그러하며, 지도자와 추종자가 그러하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가벼운 혹은 심각한 문제로 다가오며, 성공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그 주체는 파멸할 수도 있는 위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인류의 역사 속에 그나마 다소 혹은 상당히 유산으로 남아 건강한 민주주의가 있다는 것은 패러독스와의 삶에서 그만큼 성공한 결과가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패러독스의 문제와 관련해서 보면,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서 문제를 해결하는 일종의 방법이다. 반드시 논리적 방법도 아니고 경험적 방법도 아니다. 그것은 독특한 방법으로 진화해 왔다. 패러독스적 특징을 지닌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서 항상 문제적 상황으로 다가오는 것이며,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문제에 임하는 구성원이 지력의 성숙성을 발휘하는 역량만큼의 성취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문제의 상황에 작용하는 능력은 관련된 조직 혹은 집단의 사회적 지력이며, 그 지력이 작용하는 과정과 이에 따라 생산된 해결의 원리는 민주적 방법이라고 언급한다. 더러는 합리적인 규칙의 입법과 준법의 실천으로, 더러는 관행과 상식으로, 더러는 관용과 배려의 마음으로, 때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때로는 공생공영(共生共榮)의 정신으로, 때로는 양해와 희생과 헌신으로, 때로는 한마음 한뜻으로 해결하기도 하는 일상적인 공동체적 삶의 방식을 포괄한다. 거기에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과 같은 인간애의 바탕이 있어야 하고, 생산적인 담론의 역량을 길러야 하며, 구성원들은 이웃과 함께 공동체를 영위하고 함께 문제를 감당하는 의지와 심성과 능력을 소유해야 한다. 각자의 인격적, 사회적, 능력적 특성에 따라 자신만이 아니라 동료와 이웃과 공동체의 모두가 성장의 삶을 영위하는데 동참하게 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바로 생활의 양식 그 자체이다.

그러한 목표는 궁극적으로 완숙한 사회적 지력”(full-fledged social intelligence)을 계발하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민주적 심성”(Democratic Mind)을 성숙시키는 것이며, 그것은 곧 교육을 통하여 이룬 심성”(Educated Mind)을 의미하고, “성숙한 사회적 지력”(well-fledged social intelligence)을 계속적으로 계발하고 증진시키는 노력을 유지하는 사회적 과업이다. 의미론적으로 보면, 민주주의와 교육은 동의어이다.

 

 

[에듀인뉴스(EduinNews) = 인터넷뉴스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