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자유학기제 사이트 캡처.
교육부 자유학기제 사이트 캡처.

나는 작년 한 해 동안 중1엄마였다. 큰 아이에 이어 두 번째 겪는 중1엄마였지만, 서울형 자유학기제 희망학교에 배정 받은 둘째 아이 덕에 자유학기제를 직접 지켜볼 수 있었다. 자유학기제에 대한 정보라고는 1년 동안 지필시험을 한 번밖에 치르지 않고 나머지 시험은 수행평가로 대치한다는 것, 시험 기간에는 현장체험학습을 실시한다는 것 정도밖에 몰랐기에 기대보다는 우려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도 사실이다. 이 글은 지난 1년간 학부모로서 자유학기제를 지켜보고 느꼈던 학부모의 관찰기지만, 한때 교육정책 연구기관에 몸담았던 교육학도로서 자유학기제에 대한 분석과 평가이기도 하다.

자유학기제에 대한 기대 : 공부가 뭘까? 학습이 뭘까?

아이가 배정 받은 중학교에서 자유학기제를 실시한다는 것을 알게 된 주변 엄마들의 첫 번째 반응은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하게 될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학교에서 시험을 안 보면 아이들이 공부를 안하게 될 것이고, 공부를 안 하면 2학년에 올라가서 힘들 것이고, 그러자니 공부 보충을 위해서는 학원을 더 많이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두 번째 반응은 학교에서 실시하는 수행평가의 많은 부분은 결국 엄마들의 몫이 될 것이라는 우려였다.

나 역시 대한민국에서 공교육을 받고있는 자녀를 둔 평범한 엄마로서 이러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제도가 도입될 때 우리 아이가 그 안에서 마치 실험 대상처럼 되어서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교육학도로서 또 한국교육을 사랑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으로 잠시나마 교육정책 연구기관에 몸담았던 나의 지난 경험들과 평소의 소신에 비추어 볼 때, 아직은 낯선 자유학기제에 대하여 염려나 걱정을 앞세우기보다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공부라는 것이 책상에 앉아서 문제나 풀고 내용만 암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자유학기제는 분명 공부와 학습, 교육에 대한 본질적 관점을 보여줄 수 있는 의미 있는 교육적 실험이 될 것이라고 믿고 싶었고, 그래야만 할 것이다. 제대로만 실시된다면, 고등학교 입시에 반영되지 않는 이 중학교 1학년 시기를 유연하고 자기주도적이며 탐색적인 활동이 가능한 자유학기로 보내는 것은 참으로 이상적인 학교생활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나는 어떤 것이 진짜 공부인지 무엇이 의미 있는 학교교육활동인지를 자유학기제가 스스로 증명해 내기를 기대하며 지난 1년을 보냈던 것 같다.

나와 세상을 알아가는 여행 : 진로탐색

지난 1년간 우리 아이의 학교생활을 뒤돌아 볼 때 서울형 자유학기제1)를 특징짓는 첫 번째 키워드로 ‘진로탐색’을 꼽고 싶다. 초등학교에서도 진로교육과 관련된 교육활동을 경험하긴 했지만, 이번 중학교 1학년 시기처럼 진로에 대해서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탐구활동을 했던적은 처음이었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활동들이 마치 진로와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질 정도로, 진로와 관련된 다양한 수업과 체험활동이 실시되었고 아이들은 거기에 바쁘게 참여하였다.
진로와 관련된 검사를 실시하고 진로박람회에 참가하였으며, 시험 기간에는 인근 지역에 있는 기관들을 방문하기도 하였고, 친구들의 부모님이 일하시는 곳에 서 일터 체험도 하는 등, 다양한 진로탐색활동이 1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의미 있었던 것은 진로탐색활동이 교과 수업과 연계되어 실시되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학교에서의 진로탐색활동은 교과 수업 내용과는 직접적인 관련 없이 별도의 시간에 진행되는 것이 많았다. 그러나 자유학기제에서의 진로탐색활동은 교과 수업과 연계하여 교과 수업의 일부로서 실제 수업시간 동안 실시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우리 아이의 학교에서는 과목별 학기말 성적의 10~15% 정도를 진로 관련 수행평가로 실시하도록 되어 있다.

진로탐색활동과 교과 수업을 연계하는 방식은 교과별로 특징이 있었다. 이를테면 만약 사회시간에 남북통일과 관련된 주제를 학습했다면, 수행평가로는 통일한국 시대에 필요한 직업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조사하여 발표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교과에 따라 수업 시간에 다룬 교과 내용 중에서 그것과 관련 있는 직업 요소를 찾아보고 해당 직업에 필요한 능력, 관련 학과와 관련 전공, 직업인이 되기 위한 과정과 절차, 직업인에게 필요한 자질과 직업윤리 등을 조사하고 발표하는 활동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직접적으로 직업과 연계되지 않더라도 교과 내용과 관련하여 존경하는 인물이나 멘토로 삼고 싶은 사람의 생애를 조사함으로써 미래의 자신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설계해 나갈 것인지를 성찰해 보는 활동을 했던 수업도 있었다.

나는 자유학기제를 직접 경험해 보기 전에는 중학교 1학년 때 집중적인 진로탐색활동을 실시하는 것에 대하여 약간 부정적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이유는 중학교 1학년이라는 시기가 자신의 진로나 직업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판단을 내리기에는 이른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소질과 관심 분야에 대한 이해와 성찰이 없이 진행되는 일회성 체험학습을 통해서 오히려 직업의 세계에 대한 피상적인 환상이나 오해를 갖게 될 수도 있다고 염려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의구심은 오히려 자유학기제를 경험하는 과정 속에서 많은 부분 해소되었다. 그 이유는 첫째, 우리나라에서 중학교 1학년 시기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는 시기라는 점에서 이다. 중학교 1학년 시기는 입시 경쟁이 치열한 우리나라 현실 속에서 많은 아이들이 입시를 위한 선행학습을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이 왜 공부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그 목적을 찾지 못한 채 반복적으로 수행되는 선행학습과 타율적인 학교생활은, 예민한 시기 아이들의 정서와 학습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사춘기가 왔다는 것은 이제 아이들이 납득할만한 대답을 들을 수 없다면 어떤 말에도 움직이지 않는 시기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고유한 인격체가 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딛는 시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유연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사고체계를 경험하게 해 주고, 그 속에서 자신의 소질과 관심을 발견하도록 해 줄 수 있다면, 이는 아이들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유학기제는, 비록 이제 막 시험 단계를 거친 제도이기는 하지만, 아이들의 성장과 자아 찾기에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로에 중점을 둔 자유학기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꾸게 되었던 두 번째 이유는 학교에서 진행된 진로탐색활동이 상당히 체계적으로 계획되고 충실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기간에 진행되는 직업체험활동의 경우에, 그 활동이 일회적인 이벤트로 끝나지 않도록 학교에서는 사전 검색활동, 체험활동, 사후보고활동을 계획하고 아이들이 스스로 참여할 수 있도록 제시하였다. 또 아이들의 활동 결과물을 포트폴리오로 만들어 활동성과를 축적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단순히 흥미로운 장소가 아닌 교과와 관련된 내용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체험학습 장소로 선정함으로써 일회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아이들의 경험이 교과 내용을 매개로하여 연결되고 통합된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하였다.

세 번째 이유는 교과 수업 내용에 진로직업에 관한 부분을 직접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인간의 탐구활동과 지식의 의미를 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직업과 관련된 교육은 이론적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인문교육과는 달리 인간의 실제 생활세계를 다루고 변형시키는 실제적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하는 이론적 지식은 실제 생활을 위해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라든가 혹은 생활세계에 관련된 실제적 지식들은 학문적인 이론적 지식에 비해서 열등한 지식이라든가 하는 왜곡된 생각을 갖도록 할 가능성이 있다. 자유학기제에 서 시도하고 있는 교과와 진로를 결합한 수업 모델은 이런 점에서 인간의 탐구활동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 같다.

교과 수업과 진로탐색이 연계된 수업에 참여하게 되면 아이에게 어떤 점이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아이는 진로나 직업을 낯선 먼 미래가 아니라 친숙하고 가까운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될 것이다. 또한 교과 지식들을 단지 교과서와 노트필기에 담겨 있는 추상적이고 공허한 지식이 아니라 내 삶에 밀접히 닿아 있는 생활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동네 일터에서 다양한 삶의 양상들을 보고 들으면서 아이가 세상을 보는 관점과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은 분명히 깊어지고 넓어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

수행평가 : 학습의 다른 이름

내가 경험했던 자유학기제의 두 번째 키워드는 ‘수행평가’이다. 한 과목의 수행평가가 끝나면 다른 과목의 수행평가가 기다리고 있고, 그 과목의 수행평가가 끝나면 또 다른 과목의 수행평가를 준비하면서, 우리 아이는 그렇게 1년의 시간을 보냈다. 1년에 단 한 번만 지필시험을 치르고 나머지는 수시 수행평가로 성적과 평가의견을 산출하기 때문에, 중학교 1학년 생활에서 수행평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것이었다. 더구나 학기말 성적의 50% 이상을 수행평가로 산출해야 하기 때문에,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아이들이 부담을 느낄 만도 하였다. 입학식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과목별로 수행평가 계획이 발표되었다. 배부된 수행평가 안내지를 보니 예상보다 어려워 보였다. 깊은 생각과 준비가 필요한 것들이 많았고 평가 횟수도 적지 않았다. 중
간고사 기간에는 진로체험활동을 해야하고 그것을 위한 탐구활동과 보고서 작성도 해야 할 테니 1년간의 일정은 매우 바쁘게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우리 아이들이 이 과제물들을 잘 해낼 수 있을까하는 약간의 우려도 되었다.

나는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수행평가는 상당히 체계적이고 정교하게 디자인되어 실시되었다고 생각한다. 과목별로 배부되는 수행평가 안내문에는 수행평가의 개요, 발표 주제, 발표 시간, 평가 방법, 평가 기준, 배점에 이르기까지 수행평가에 대한 안내가 매우 구체적이면서 상세하게 제시되어 있었다. 평가 방법도 개별 과제, 모둠별 과제, 발표와 토론, 오픈북 테스트, 학습지, 영상물 제작, PPT 발표, 글쓰기, 포트폴리오 만들기, 보고서 작성, 자기평가와 동료평가 등으로 다양했다. 토론 수업의 경우에는 토론의 주제에 대한 자신의 주장과 반론에 대한 답변 등을 생각해보고 미리 정리할 수 있도록 제작된 워크시트도 제시되었다.

학기 초에 실시된 학부모연수에서 1학년 학년부장 선생님께서, “본교 교사들은 자유학기제를 일회적인 진로체험활동이 아니라 다양한 수업 방법을 개발하고 적용하는 ‘수업방법 개선 프로젝트’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난다. 그 당시 이 말씀이 얼마나 신선하고 감동적으로 들렸는지 모른다. 학년부장 선생님의 그 말씀은, “일방적인 전달식의 기존 수업의 틀을 깨고 학생들의 성장에 필요한 다양한 역량을 계발할 수 있는, 참여적이고 혁신적인 교육 패러다임으로 전환해 가겠노라”고 선언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께서 이렇게 유연하고 개방적인 생각으로 자유학기제를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나는 자유학기제에 대하여 더욱 신선한 기대와 희망을 품게 되었던 것 같다.

우리 아이는 참 열심히 수행평가를 준비했다. 남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1학기때는 다니던 학원도 그만 두고 수행평가에 전념했다. 우리 아이가 점수를 잘 받으려고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학교에서 요구하는 과제물을 완성해서 제출하는 것이 수행평가에 임하는 소박한 목표였을 뿐인데, 그 목표를 달성하기가 우리 아이로서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에 선행학습을 하지 않고 있었던 우리 아이는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일주일에 2~3번, 수 시간씩을 학원에서 보내다보니 수행평가를 준비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게 되었다. 수행평가는 본래 그 특성상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완성할 수 있는 평가방법이다. 게다가 초등학교 때 경험했던 수행평가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과제물에 대한 부담 때문에 우리 아이는 학원을 잠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수행평가는 시작부터 아이에게 막막함으로 다가왔다. 어떤 주제를 선정해야 할 지, 왜 그 주제를 선정했는지, 필요한 자료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그 많은 자료 중에서 어떤 내용을 취사선택해야 하는지, 어떤 문장과 어떤 표현 방법으로 결론을 제시해야 하는지 등 스스로 또는 친구들과 함께 탐구의 주체가 되어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겨나가는 것이 만만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어떻게든 해 냈다. 선생님들이 안내해 주신 가이드 라인을 의지하며, 인터넷을 뒤져가며, 엄마에게 물어가며, 친구들과 회의를 해 가며 나름대로 자기들만의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과제물의 수준을 떠나서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막막함에서 시작했던 아이들의 고민, 협력과 갈등의 시간들, 최후의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의 노력과 생각이 온전히 녹아있는 완성품이기 때문이다. 학원을 포기해가며 우리 아이가 몰입했던 그 시간들이 참 소중하고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결과물에 대한 좋은 평가를 받아서가 아니라 그 과제를 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아이는 성장했고, 느꼈고, 알게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숫자나 점수로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는 아이만의 개성과 성품, 능력과 소질이 수행평가를 통해서 드러났을 것이고, 그것을 평가하는 선생님들은 분명히 아이의 성장의 증거들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행평가는 그 자체로 학습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기 중에 가끔씩 모이는 학부모 친목 모임에서 엄마들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수행평가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왜 수행평가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것일까? 빨리 끝내고 해야 하는 다른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혹시 그것은 ‘공부’일까? 선행학습? 만약 그런 의미의 공부라면 우리 아이는 ‘공부’를 위해서 ‘공부’를 포기한 셈이 된다. 하지만 우리 아이와 내가 내렸던 그 결정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자유학기제가 아니었다면 우리 아이는 ‘공부’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수행평가는 힘들었다. 하지만 힘들었기 때문에 진짜 공부가 되었던 공부였다. 아이들이 공부하기를 원한다면 공부가 되도록 해 주는 수업을 하고 공부가 되도록 해 주는 평가를 실시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어떤 공부를 하기를 원하느냐는 것이다. 이 대답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세상의 어떤 것보다 기쁜 일로 여기는 교사와 교육연구 종사자들, 교육정책 담당자들이 책임지고 내 놓아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미래사회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성실한 실천력을 지닌 주도적인 개척자로서 성장해 나가기를 바란다면, 자유학기제는 분명히 제대로 된 방향의 첫 걸음을 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가 얻게 된 것 : 장래 희망, 그리고 우정

자유학기제를 통해서 우리 아이는 되고 싶은 것이 생겼다. 농부가 되겠다고 한다. 엄마나 아빠가 모두 도시 출신이라 시골을 경험해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해서 농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물어봐도 그냥 농부가 되고 싶다고 한다. 수행평가를 하면서 식량 과학자에 대해서 조사를 한 적은 있었으나 농부는 아니었다. 처음으로 농부가 되고 싶다고 말한 지 몇 개월이 지났음에도 그 꿈에는 변함이 없다. 어떤 농과대학을 갈 것인지, 어디에서 농부로서의 첫 생활을 시작할 것인지, 결혼하기 힘들다는 농촌 총각들의 심각한 고민 얘기까지 꺼내는 것을 보면 조금 웃음이 나기도 한다. 아직 진정한 사춘기를 거치지 않은 우리 아이가 과연 진지하게 고민하고 알아보며 정한 장래희망인지 궁금하다. 하지만 목표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다. 목표가 없는 것보다는 아직 불안정할지라도 목표가 있는 편이 낫다. 적어도 목표가 있는 동안에는 아이는 움직일 수 있고 나아갈 수 있으며 또 목표를 수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장래희망이 어떻게 현실화될 것인지는 격려하며 지켜볼 일이지만, 그 과정은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 아이는 수행평가를 통해서 친구들과 우정을 쌓아가는 소중한 경험을 하였다. 팀별 과제를 준비할 때면 항상 주말에 우리 집에 모여서 서너 시간씩 함께 보내곤 하였다. 수행평가 때문이 아니어도 아이들은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다. 그렇게 그 아이들과 1년을 함께 뒹굴며 지내다보니 어느새 아이들 사이에는 우정이 싹트게 되었다. 자칫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는 중학교 1학년 시기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들과의 동행과 교감을 통해 잊지 못할 추억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튼튼한 자유학기제가 되기 위해서는? : 독서, 멘토 또는 선배, 아이들을 향한 사랑

수행평가를 준비하면서 우리 아이가 가장 어려워했던 것은, 영상물 제작 기술도 아니었고 PPT 제작 기술도 아니었다. 그런 것은 누군가에게 부탁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반면 아이디어를 내는 일은 누군가 대신 해 줄 수 없는 일이니 그것이 가장 어려웠다. 엄마나 주변의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대신 갖다 쓰게 되면 그것은 아이 스스로에게서 나온 아이디어가 아니라서 생명력을 잃고 금방 못 쓰게 되는 것을 경험했다. 작은 것이라도 아이 스스로가 하나의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그것을 탐구 주제로서 발전시켜 나가는 경험을 해 볼 수 있어야 했다. 이러한 생각의 힘을 기르는 데에는 학교와 가정에서 오랜 기간 훈련된 독서와 토론식 대화법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아이가 수행평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의 도움이 작용했다는 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약간은 소심하고 염려가 많은 우리 아이에게 수행평가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 사람은 가장 가까이 있는 나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 나 뿐만 아니라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수행평가를 도와주었을 것이다. 물론 아이들은 스스로도 잘 할 수 있다. 하지만 처음 가는 길, 처음 하는 과제에 대한 적절한 가이드와 지원을 받는다면 더 잘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박사과정 대학원생에게도 지도교수나 동료들의 집단 코칭이 필요하듯이, 아이들에게도 아이들의 수준에 맞는 도움과 안내가 필요하다. 제도적으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모든 아이들이 동료나 선배, 또는 코칭맘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더 좋겠다. 지금으로서는 코칭맘의 능력을 지닌 엄마를 둔 아이들만이 그 혜택을 받고 있는 셈이다. 또한 수행평가에 필요한 공간이나 장비, 자료검색 도구 등을 학교나 가까운 지역사회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기 집에서 혹은 친구들의 집에서 모여서 수행평가 과제를 준비하고 집에 있는 캠코더나 스마트폰, 컴퓨터, 프린터 등을 이용해서 과제물을 작성하였다. 모든 학생들이 그러한 여건이 가능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으나, 자원이나 정보는 항상 불균형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므로 분명히 소외되는 아이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즉 다양하게 존재하는 격차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에 대한 정책적 고려가 필요하다.

자유학기제는 그저 현장에 심기만 하면 쑥쑥 자라는 만능 묘목이 아니다. 이는 자유학기제뿐만 아니라 모든 교육정책이 마찬가지이다. 어떤 정책이든지 거기에는 그 정책을 만든 사람과 시행에 옮 기는 사람의 정신이 들어 있다. 정책을 움직이고 살리는 것은 그 정신이다. 교육의 정신은 다음 세대를 향한 사랑과 책임이다. 교육을 통해서 내가 받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다음 세대에 책임지고 전수하고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모든 선생님과 학교가 해야 할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 사람의 헌신이 필요하다. 2학년이 된 우리 아이가 1학년을 그리워하며 다시 자유학기제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한 분의 담임선생님, 교과선생님, 교장선생님 덕분이었음을 알고 있다. 다음 세대를 향한 한 분 선생님들의 사랑과 헌신에 감사드리며, 그 사랑과 헌신의 소명이 한국교육과 학교를 변화시키는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