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계의 도덕적 권위가 인정되어야 정치사회 인재 양성이 가능하다

국가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것은 교육의 중심적 기능의 하나다. 국가를 발전시키고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인재를 찾아서 잘 길러야 한다. 그러한 인재의 육성은 국가를 위해서만 아니라 지구촌의 번영과 평화와 복리의 증진에 기여하는 길이기도 하다. 또한 인재의 발굴과 양성을 위한 제도적 구조와 기능은 그 자체로서 교육의 기회를 창출해 분배하기도 한다. 그러한 교육의 기회를 정의롭게 분배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제도적 구조와 정책적 방향, 사회적 환경은 어떠한지 검토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편집자 주>

한국인은 불행하다

우리나라는 불과 60년 만에 많은 나라들이 성취하지 못한 두 가지를 이룩했다. 절대빈곤으로부터 탈출했고 민주화를 이룩한 것이다. 지난해 UNDP(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 ; 유엔 개발 계획)는 한국의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가 세계 15위로 프랑스, 영국, 덴마크 보다 앞선 것으로 발표했다. 평균 수명, 소득, 교육수준 등이 평가의 기준인데 평균수명과 특히 교육이 높은 점수를 받은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인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다. 2015년 미국의 Pew Research Center는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100점 만점에 47점이라고 했다. 네덜란드 94점의 절반밖에 되지 않으며 이스라엘 75점, 미국 65점에 한참 뒤질 뿐 아니라 우리보다 가난한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보다 불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개인당 소득이 우리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은 부탄은 세계에서 8번째로 행복하다. 행복은 모든 인간이 예외없이 추구하는 최후의 목적인데, 우리가 이렇게 불행하면 그동안의 성취가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엇 때문에 한국인은 불행하다고 느끼는가? 물론 그 원인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빈곤이나 교통, 통신, 의료 등 일상 생활의 불편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큼 대중교통과 통신 수단이 잘 갖추어져 있고 편리한 나라가 없다.

비록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의료보험 제도는 전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균형이 잡혀 있다. 의료수준은 세계적이지만 지불하는 건강보험 부담금은 그렇게 높지 않다.

한국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한국의 사회적 자본이 매우 빈약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3년 전 영국의 Legatum Institute가 조사해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한국의 번영지수는 세계에서 25위인데, 사회적 자본은 조사대상 110개국 가운데 74위고 평균적인 생활만족도는 110개 조상대상국 가운데 104위였다.

위기를 만났을 때 의지할 만한 구석이 없다는 것이다. 자살률이 OECD에서 지난 10년 동안 계속해서 1위를 차지하고 있고 갈등지수는 2위란 사실만 보아도 한국인의 삶이 얼마나 불안하고 괴로운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이었던 Daniel Tudor(Korea the Impossible Country)은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경쟁심이 강하다”고 했다. 차세 중심적 세계관(Diesseitigkeit)에 젖은 한국인에게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삶의 목적이고, 따라서 다른 사람보다 앞서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 쓴다.

그 결과로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사회가 형성되었고 빠른 시일에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지만, 경쟁의 패자는 불가피하게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하더라도 그것이 공정하게만 이뤄지면 패자의 억울함은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치열한 경쟁이 공정하지(fair play) 못하다면 패자의 억울함은 훨씬 더 심각해진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경쟁은 치열한데 그 경쟁이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도덕적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제까지의 윤리는 주로 주체 중심적이었다. 즉 행동하는 주체가 선한 동기를 가지고 주어진 규범에 따라 행동하면 도덕적이라고 이해했다. 이 세상에 선한 것은 오직 ‘선한 의지’뿐이라고 주장한 Kant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Max Weber는 그런 윤리를 동기윤리(Gesinnungsethik)라 부르고, 정치에 필요한 것은 오히려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책임윤리(Verantwortungethik)라고 했다. 이제는 정치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 모든 영역에서 주체중심의 동기윤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사회에 미치는 결과중심의 책임 윤리가 필요하다.

오늘날 사회는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있고 인간관계도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으므로 선한 동기가 반드시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보장이 없다. 이제는 ‘내’가 선한 동기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가 중요하게 되었다. 즉 주체 중심적 윤리에서 타자 중심적 윤리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선한 동기에서 행동하거나 규범을 따르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윤리적이라 해야 하고 그것이 바로 다름 아닌 정의다. 타자 중심적 윤리는정의며 모든 윤리는 정의로 환원된다.

거짓말하는 것은 규범윤리에서는 비도덕적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으면 비도덕적이라 해서는 안 된다. 예의로 하는 거짓말을 비도덕적이라 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은 그에게 부당하게 해를 끼치는 것이므로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한국에도 이제 평등정신이 보편화되어서 모든 사람은 정당한 권리가 존중되기를 요구한다. 그런데 그 권리가 부당하게 침해되면 억울해 할 수밖에 없고 그런 억울함은 현대인에게 매우 견디기 어렵다. 오늘날 한국이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제도적으로는 민주적인데도 상대적으로 불행한 것은 도덕적 수준이 낮아서 억울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의 투명성은 세계 37위로 일본 18위, 싱가포르 8위, 아프리카 보츠와나 28위에 비하면 부끄러운 수준이다. 탈세율은 26.8%로 그리스에 가깝고 보험사기는 일본의 14배나 된다. 이런나라에서는 선량한 사람은 억울하게 손해를 당하고 억울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정치와 사회는 복잡하고 문제도 많지만 가장 심각한 것부터 우선 해결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도덕성 결여다. 곧 충분히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사회계를 위해서는 머리가 좋고 지식이 많으며 조직력이 있고 통솔력이 강한 인재도 필요하지만 그런 능력을 아무리 잘 갖추어도 도덕성이 결여되면 무자격자로 보아야 한다. 사회정치계 인재에게 도덕성이 전부라 할 수는 없지만 불가결하다.

한국 교육은 절반만 성공했다

오늘날에는 한 사회의 번영과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자연조건이나 천연자원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이며 인적자원이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발전한것도 선조들이 이룩해 놓은 문화의 영향으로 우수한 인적 자원이 비교적 잘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제적으로나 과학 기술에서는 비교적 발전해서 물질적 생활은 윤택해졌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인이 불행한 것은 우리사회가 잘못 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런 잘못을 고치고 제대로 이끌어 나갈만한 인적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경제, 과학기술, 스포츠, 연예 등 다른 분야에서 비교적 좋은 결과를 이룩한 것이나 우리 사회가 갈등과 부패로 신음하고 있는 것은 모두 우리 문화와 우리 교육에 그 책임이 있다.

한국의 정치학 수준은 세계에서 10위권에 든다 한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수준이 세계에서 10위권 안에 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세계 최악이 아니면 적어도 OECD에서는 최악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정치학자는 대부분 정치학 교수이기 때문에 정치학의 학문적 수준은 정치 교육에 어느 정도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치학 수준은 높은데 왜 정치교육은 수준 높은 정치지도자를 배출하지 못하는가? 그런 괴리는 정치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회학, 윤리학, 교육학, 심리학, 경영학 등 인간 및 사회와 관계되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비슷한 괴리가 나타나고 있다. 즉 학문적 수준에 비하면 그 분야의 교육은 제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괴리는 부분적으로 사회과학 그 자체의 학문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자연현상은 동서고금에 동일하고(uniformity of nature) 자연의 법칙에는 모든 것이 예외 없이 순응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은 문화와 개인적 성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한 지역에서, 혹은 한 개인이 습득한 지식은 다른 지역, 다른 개인에게 아무 어려움 없이 수용되고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현상에는 그런 불변성이 없기 때문에 엄격한 법칙을 발견할 수도 없고 정확한 설명도, 예측도 불가능하다. 문화, 사회, 개인의 특성이 사회문제 이해와 문제해결에 개입될 수밖에 없으므로 자연과학이 누리는 보편성, 객관성, 불변성, 정확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회분야의 교육은 자연분야의 교육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교사가 이념적으로 진보적이라 해서 그가 가르치는 수학이나 물리학의 내용이 다를 수는 없다. 부패한 사회에서 사기꾼이 수학을 가르친다 하여 2+2가 3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과목 교육의 결과는 교사의 이념이나 도덕수준에 따라 효과가 다를 수밖에 없다. 보수적 이념을 가진 교사가 학생을 진보적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며 부패한 사회에서 부정직한 교사가 학생들에게 정직하라고 교육하는 것은 학생들을 냉소적으로 만들 뿐이다.

이런 차이는 한국 교육의 정책과 수행에서 거의 간과되고 있다. 사회과 분야를 자연과학처럼 교육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문화적 배경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서양에서 개발된 사회과학 이론과 교육방법을 그대로 답습할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프랑스나 핀란드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자격 시험이 오히려 주관식인데 우리 수능고사에는 국어나 사회과목에서도 객관식 문제가 출제된다. 사회과 과목을 자연과목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도덕적 수준이 너무 낮아서 채점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가 약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회현상과 자연현상의 차이나 사회 과목의 문화적 배경을 무시하는 풍토도 거기에 작용한다. 사회 과목에도 사지선다형 객관적 시험을 적용하는 것은 사회 문제에도 자연현상처럼 정답이 있고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가?

과연 그런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복잡한 현대 정치와 사회에 필요한 인재가 될 수 있겠는가? 암기만 하면 되는 객관적 지식을 소유한 것이 도덕적 소양을 갖추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우리 교육의 이런 오류는 우리 사회현상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과학기술에서는 세계 7, 8위를 차지하고 경제적으로도 10위권에 속하지만 도덕적 수준은 후진국 수준이고 행복지수는 최하위 권에 머물고 있는 것은 우리의 자연과학과 과학기술 교육은 비교적 성공한 반면, 사회과 과목 교육은 실패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경제는 물론 사회현상이지만 현대 사회의 경제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과학기술에 의존하고 있고 모든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이윤을 추구한다는 보편성 때문에 경제학은 사회과학 가운데 자연과학에 가장 가깝다 할 수 있다.

한국의 발전은지식교육을 통해서 유능한 인재를 배출했기 때문이지만 한국인의 불행도 인성과 사회과목 교육의 실패로 책임을 질 줄 아는 정치사회 지도자들을 충분히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그렇게 극구 칭찬한 한국교육은 절반만 성공했다 할 수 있다.

선발이 양성보다 더 중요하다

한국 교육의 특이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공교육의 현장에서보다는 오히려 학교 바깥에서 더 많은 교육이 이뤄진다는 사실이다. 어떤 학교가 일류학교가 되는 것은 그 학교 교육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우수한 학생이 들어왔기 때문이고,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학생이란 시험점수가 높아야 하는데, 그 높은 점수는 그 전 단계 학교의 정규수업이 아니라 그 학교가 우수한 학생을 선발했고 학생이 사교육을 받고 개인학습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대학교는 좋은 학교란 명성만 한 번 얻어 놓으면 우수한 학생들이 자동적으로 들어오고 우수한 학생이 들어오기 때문에 좋은 학교가 되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물론 좋은 교육이 좋은 학교를 만드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으나 교육을 잘 시켰기 때문에 좋은 학교가 된 경우는 우리나라에서는 찾기가 힘들다.

오히려 졸업생이 사회에서 명성을 얻는 것이 더 큰 작용을 하는데 그것도 반드시 그 학교의 교육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학교의 위치, 재단의 명성, 장학금, 신입생 모집 정책 등 다른 이유로 유능한 학생들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어쨌든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큼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중요한 나라는 없다.

좋은 교육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학의 명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는 ‘좋은 교육을 받는 것’보다는 ‘좋은 학교에 입학’하는 것에 모든 힘을 다 쏟는 것이다. 실제적인 교육은 좋은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뤄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은 물론 바람직하지 않고 한국 교육계가 심히 빨리 해결해야 할 부끄러운 문제다. 그러나 명성으로 좋은 인재들이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려면 좋은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재목을 찾아내는 것이다. 즉 선발이 교육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연과학 분야가 필요로 하는 인재는 타고난 지적능력이 있고 필요한 지식만 갖추면 된다. 물론 도덕적이고 책임감도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그런 자질이 좀 부족하다 해서 훌륭한 과학적업적을 내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정치사회 영역에 필요한 인재는 지적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적으로 무능하고 기본지식이 없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공익을 위하여 헌신할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기본적인 도덕성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자질은 교육을 통해서 양성하는 것이 정상이고 바람직하지만 우리 교육은 이에 무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자격을 어느 정도 갖추었거나 갖출 가능성이 있는 인재를 선발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즉 그런 자질을 갖출 인재를 선별할 수 있고 그런 인재들이 합격할 수 있도록 선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정치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 필요한 인재를 배출하는 데는 신입생 선발 기준과 방법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교육계가 먼저 도덕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처럼 시험점수를 기준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방법으로는 우리의 이 후진된 정치와 빈곤한 사회적 자본을 개선할 인재를 찾을 수도 없고 그런 자질을 갖추도록 자극할 수도 없다. 지금보다는 수행평가, 내신, 추천서, 면접, 논술 등 주관적 평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월등하게 높아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책임 있는 인품, 공익에 대한 관심, 도덕성 등 정치사회 인재에게 필요한 자질을 판별하고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 방법이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 그런 방법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가능성도 없다. 그런 것은 주관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주관적 평가가 가능하려면 평가 기관과 평가자의 도덕성이 학생과 학부모의 충분한 신뢰를 받을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졸업자격시험이 주관식으로 치러지고 미국에서 대학교수가 자신이 가르칠 학생을 선발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신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고등학교 졸업자격시험인 동시에 대학 입학자격 시험인 Abitur에는 주 정부가 출제하지만 주관식이고 응시학생들은 자신들이 다니던 학교에서 자신들을 가르치던 교사들의 감독하에 치러지며 그 학교 교사들이 채점한다고 한다.

만약 우리나라에 이런 방식으로 수능고사가 치러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걷잡을 수 없는 난장판이 벌어질 것이고 고등학교는 일 년 내내 소송에 시달리고 말 것이다. 우리가 아직도 우리나라를 선진국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바로 이런 도덕적 후진성 때문이다.

우리 교육이 가진 문제들의 상당 부분은 바로 교육계에 대한 신뢰부족에서 비롯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교육의 가장 심각한 골칫거리인 사교육 문제도 바로 교육계가 도덕적 신뢰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고등학교 내신이 공정하고 상당할 정도로 객관적이면 대학이 그것을 근거로 해서 신입생을 선발할 수 있고, 대학의 평가가 공정하면 대학자체의 기준에 따라 자율적으로 학생을 뽑아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 지망생은 고등학교에서 정상적인 수업에 열중하고 인격도야와 각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 되지 구태여 사교육을 통해서 억지로 점수를 올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대학은 고등학교의 내신을 믿을 수 없고 대학의 주관적 평가는 학부모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컴퓨터가 채점한 시험점수만 가지고 신입생을 선발할 수밖에 없다. 그 점수를 한점이라도 더 높이기 위해서 학부모는 막대한 비용을 사교육에 지불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부담이 되어 젊은 부부들이 자녀 생산을 주저하므로 저출산이란 국가적 재앙까지 벌어지고 있다.

우리 정부와 교육계는 교육계의 도덕성 상실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뼈아프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유럽이나 미국에 사교육 시장이 번창하지 않는 것은 그곳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좋은 대학 가는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교육계의 도덕적 권위가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육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그런 권위가 지금처럼 시험점수를 기준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방법으로는 우리의 이 후진된 정치와 빈곤한 사회적 자본을 개선할 인재를 찾을 수도 없고 그런 자질을 갖추도록 자극할 수도 없다. 없기 때문이며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것이 심각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도덕 불감증이다.

물론 교육계의 도덕성은 신입생의 공정한 선발에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학교의 운영과 교육 자체가 도덕적이라야 양심적인 인재가 제대로 양성될 수 있다. 학교에 비리가 있고 교수가 표절을 일삼고 연구비를 유용하는데 거기서 강의를 듣고 연구에 협력한다 해서 도덕적 책임을 지는 인재가 나올 수 있겠는가? 학부모들이 교육기관의 신입생 선발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오해하기 때문이 아니다. 신뢰하지 못할 이유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교육계의 도덕성은 자연계 학생들에게 보다는 역시 인문 사회계 학생들에게 더 중요할 수밖에 없고, 특히 정치와 사회 인재 양성에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정치와 사회의 지도자들에게 기본적인 소양은 단순히 말과 글로 배울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덕목이 지배하는 문화적 환경에서 성장해야 하고 그런 덕목을 갖춘 교육자가 모범을 보여야 하며 그런 덕목의 성장이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가능하다.

학생들이 얻고자 하는 능력의 대부분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들이다. 지식, 논리적 사고, 창조적 능력, 조직력과 통솔력 등은 소유하면 할수록 경쟁에 유리하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그대로 두어도 학생 스스로가 노력해서 얻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도덕성은 그렇지 않다. 특히 우리처럼 도덕적 수준이 낮은 사회에서는 도덕성을 갖추는 것은 희생하고 손해 보는 것을 함축한다. “정직하면 나만 손해”라는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도덕성을 양성하려면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어야 하고 교육자 자신이 손해를 감수하면서 모범을 보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교육계에는 그런 학교와 교육자가 너무 부족하다.

물론 교육계는 사회에서 동떨어진 외딴 섬이 아니다. 교육계의 도덕성이 낮은 것은 우리 사회의 도덕성이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계는 사회를 탓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교육계는 너무나 당연하게 사회보다 우수해야하고 교육자는 일반 시민보다 더 도덕적이라야 한다. 더 많이 알고 더 훌륭해야 가르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교육계에 들어오지 말아야 한다.

처방은 간단하다. 우선 교육계의 도덕성이 확립되어야 제대로 된 정치사회 인재 양성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