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희의 인성교육] 제7강 영재성은 누구나 지닌 잠재력
[이돈희의 인성교육] 제7강 영재성은 누구나 지닌 잠재력
  • 서혜정 기자
  • 승인 2016.09.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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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을 영재(英才)라고 하는가?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보람과 즐거움을 말할 때 흔히 맹자(孟子)를 급하기도 한다. 맹자는 군자에게 세 가지의 즐거움이 있다고 하였다.

양친이 모두 생존해 계시고 형제들이 탈 없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첫째의 즐거움이고, 우러러보아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보아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둘째의 즐거움이며,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째의 즐거움이라고 하였다.

영재를 발굴하고 교육하는 일을 포함하여 이 가지의 즐거움에는 나라의 왕으로서 천하를 통치하는 일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군자가 누리는 특권이라고 한 셈이다.

우리는 여기서 맹자가 말하는 ‘영재’는 어떤 사람을 일컫는 것인가를 두고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 시대의 ‘뛰어난 문사(文士)’를 의미한다. 문사는 맹자가 말하는 노심자(勞心者), 즉 글을 익혀 마음을 쓰면서 사는 사람의 대표적 계층에 속한다.

맹자는 이들과 구별되는 노력자(勞力者), 즉 손발을 움직여 힘을 쓰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고, 이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바로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며 당연히 노심자를 부양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맹자의 생각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유인은 생산에 종사하지 말아야 하고, 여가를 즐기면서 인간의 뛰어난 부분인 이성의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오늘의 영재는 문사로서의 영재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영재는 물론 어딘가에 뛰어난 사람이지만 그냥 무슨 능력이든지 남다르게 뛰어난 수준의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뛰어남은 적어도 ‘사회적 쓸모’를 전제로 한다. 영재는 한 개인의 능력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쓸모를 함의하고 있으므로 바로 ‘사회적 영재’여야 한다. 오늘날에는 영재, 즉 사회적 영재는 문사에 속하는 사람들 이외에 수없이 많은 범주의 영재들이 있다.

사회의 어느 부문에서나 뛰어난 사람을 필요로 한다면, 모든 부문에 각기의 영재가 있는 셈이다. 학술, 예술, 정치, 교육, 법률, 경제, 문화, 군사, 종교, 스포츠, 기능 등 수없이 많은 분야의 영재들이 있다.

자신이 남다르게 독특하고 뛰어난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사회적 쓸모를 지닌다면, 누구나가 적어도 ‘잠재적으로’ 영재일 수 있다고 말해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그 ‘사회적 쓸모’라는 효용도의 평가에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사회적 효용성이라는 것도 시기에 따라서 달라지고 사회의 사정에 따라서 달라진다. 어떤 때는 학술에 뛰어난 사람이, 어떤 때는 기업에 탁월한 성과를 거둘 사람이, 어떤 때는 대중문화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또 어떤 때는 스포츠에서 챔피언이 될 사람이 각광을 받고 높이 평가받기도 한다.

수없이 많은 종류의 영재성, 어쩌면 무한히 많은 영재성이 존재한다면,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영재에 속하는 사람과 영재에 속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눌 수가 없다. 누구는 영재에 속하고 누구는 영재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가 자신만이 지닌 독특하고 뛰어난 잠재성이 최대한으로 실현되는 상황에서 영재의 위치에 있게 된다. 누구나 잠재적으로는 영재이다.

흔히 영재라고 하면 과학의 경우처럼 주로 이론적인 것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뛰어난 사람들을 영재의 범주에 포함하고, 손발을 움직여서 생산적인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뛰어나도 영재의 범주에 포함하지 않는 편견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생산적인 활동에도 이론적 지식이 필요하고, 과학적인 연구에도 실험이나 조사, 그리고 기기의 제작과 사용과 같은 관찰의 과정에서 때로는 강력한 신체적 능력이, 때로는 정교한 신체적 기술이 요구되기도 한다.

인간의 탁월성은 반드시 이론적인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적인 삶의 상황에서는 학술적-이론적 영역과 신체적-활동적 영역이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간의 성장과 잠재력의 실현

어떤 의미에서 교육은 이러한 각자의 잠재적 영재성을 최대한으로 실현할 수 있도록 도우는 사회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자아실현’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즉 각자에게 잠재되어 있는 능력 혹은 가능성이 실제로 발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잠재성이라는 것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식물에게도 있고 동물에게도 있다. 엄지의 절반도 체 못되는 조그마한 도토리에는 그 자체보다 수천 배나 큰 참나무가 될 잠재력이 있다.

갖 태어난 호랑이 새끼는 사실상 고양이만큼도 못한 겨우 하나의 작고 무력한 생명체일 뿐이지만, 그 속에 모든 동물들을 위협하는 밀림의 왕자인 용맹스런 호랑이가 잠재되어 있다. 태어날 때로 말하면, 인간의 아기는 다른 생명체에 비하여 연약하고 성장기도 다른 생명체에 비하여 대단히 길지만,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도 일컫는 대단한 능력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잠재성의 실현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나 생명체가 자체 속에 지니고 있는 잠재성 그 자체만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환경을 필요로 한다.

도토리의 경우에 적당한 수분과 양분, 토양과 온도, 공기와 햇빛 등의 환경이 주어져야 한다. 식물은 환경에 적응하면서 성장하지만 스스로 환경을 선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적응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지 않으면 성장도 생명도 유지하지 못하고 사멸해 버리고 만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식물은 수없이 많은 씨를 주변에 뿌리고 적어도 몇몇이라도 살아남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 그러나 동물은 식물처럼 환경에 적응해야 하지만 제한적으론 환경을 선택하기도 한다. 주어졌거나 선택한 환경이 성장과 생존에 적절치 못하면 역시 동물도 사멸해 버린다.

인간도 식물처럼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야 하고, 동물처럼 더 나은 환경을 선택 하기도 한다. 적절한 환경이 주어지지 않으면 생존에 위협을 받고, 선택할 환경이 없거나 잘못 선택하면 성장에 한계를 가져 오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필요한 환경을 스스로 만들기도 한다.

도토리가 싹을 트고 자라면서 환경에 맞추어 스스로 밤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호랑이가 환경의 영향으로 자라다가 사자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도 아무리 자신의 환경을 선택하고 스스로 조성하더라도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가 되지는 않는다.

생명체의 성장은 보잘 것 없고 미미한 존재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의 잠재성이 실현되어 감을 의미한다. 인간의 성장은 그 자체 내에 잠재된 가능성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거나, 선택하거나, 스스로 조성하면서 삶의 조건을 적절하게 획득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환경의 영향이라고 말하고 환경이 성장에 영향을 주는 것 같지만, 사실상 환경은 잠재성의 실현을 위한 조건일 따름이고 그 조건과 잠재력이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서 성장의 형태가 달라진다.

같은 환경에 사는 사람들도 성장하는 방식이 다른 것은 잠재성이 다르기 때문이고, 비슷한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환경에서 비슷하게 성장하지만 그래도 다른 것은 주어진 환경과 선택한 환경 이외에 자신이 스스로 만든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성장하는 환경은 구조적으로 매우 복잡하다. 자연환경이나 거주 환경과 같은 물리적 환경도 있고, 가족이나 교우나 친족이나 지역사회와 같은 사회적 환경도 있다. 그리고 평화롭거나 전쟁 상태에 있거나, 격정적 행동과 생활을 유도하거나 온화한 정서의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심리적 환경도 있다.

이러한 환경적 특색의 어떤 것에는 순응하고 어떤 것은 기피한다. 말하자면 환경에 대한 선택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집을 짓거나 밭을 가꾸면서 스스로 물리적 환경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기도 하고, 이웃들과 사귀고 다소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과도 조직을 하며, 다른 조직에 대하여 협동이나 갈등을 조성하기도 한다.

때로는 모험도 하고 자연이나 물리적 환경에 변화를 가해 보기도 한다. 물리적-심리적 환경, 사회적-문화적 환경은 구조적으로 매우 복잡하여 각자의 잠재성이 환경과 교섭하는 형태도 무한히 다양하다.

특히 문화적 환경은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쌓아 온 복잡한 문명의 체제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잠재력과 그 환경적 구조는 질적으로 다양하고 양적으로 천차만별이며 따라서 잠재력의 실현가능성은 그만큼 무한하다.

이와 같이 무한히 다양한 실현가능성은 각자가 적응하고 선택하고 조성하는 환경의 여하에 따라서 많은 부문에서 평범할 수도 있지만 어떤 특정한 부문에서 한 개체를 영재로 만들 수도 있다.

어떤 삶을 살도록 가르칠 것인가?

환경에 적응하고 환경을 선택하고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존재이다.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의지를 소유한 존재이지만 그 삶에 주어진 원초적 소재(素材)는 각자의 잠재력이다.

그 잠재력은 애초부터 잘 다듬어진 것이 아니며, 오히려 본능적인 일종의 충동성을 나타내면서 어지럽게 환경과의 관계를 가지게 된다. 말하자면 충동적인 욕구가 발동하고, 그 욕구는 주어진 물리적-심리적-사회적 환경과의 관계를 통하여 정돈되고 조직되고 재구성된다.

주어진 환경 혹은 선택한 환경과의 관계에서 피동적으로 자신의 삶이 만들어지도록 방치되거나,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의 방식을 집요한 의지로써 선택하거나 결정하기도 한다.

가족관계, 교우관계, 지역사회, 교육제도, 국가 그리고 생활과 경험의 장으로 존재하는 온갖 환경적 요소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의 방식을 피동적으로 혹은 능동적으로 결정한다. 그중에서 학교와 같은 교육제도는 이러한 과정에서 성장하는 인간에게 가장 조직적이고 강력한 환경이다.

학교는 성장의 시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리적-사회적 환경에 적응하고 그것을 선택하고 새롭게 조성(창조)하는 데 필요한 기술, 지식, 관습, 문화, 사상 등을 학습하면서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특징짓는 습관들을 만들어 가는 일을 도운다.

물론 이러한 교육의 역할은 학교만의 책무는 아니며, 성장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기회를 통하여 자신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일에 관련된 학습을 한다.

삶의 방식도 수없이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학교와 사회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어떤 삶을 살도록 권장하기도 하고, 암묵적으로 혹은 무의식 중에 유도하기도 한다. 어쩌면 한 학습자의 삶의 방식은 학교의 실질적 교육력의 정도에 따라서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도 있다.

학교라는 제도적 학습의 장에서 교사는 학생에게 성장의 삶을 사는 방식을 가르친다. 반드시 기계적으로 혹은 강압적으로가 아니라, 지시적으로 혹은 묵시적으로 교사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학생의 노력에 함께 하는 동반자로서 참여하는 셈이다.

마르틴 뷰버(Buber)의 언어로 표현해서 ‘나(Ich)와 너(du)의 관계’에서, 즉 인격적 만남의 관계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함께 생각하는 장을 만든다.

교사와 학교, 그리고 부모와 함께 하는 삶 속에서 학생에게 여러 가지의 길이 묵시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권장되는 삶이 있다. 모든 젊은이에게 직접적으로 권장하는 것은 아니라도 학교나 가정이 칭송하거나 본받기를 바라는 삶의 방식들이 있다.

말하자면 “이렇게 살라”고 직접 혹은 간접으로, 명시적 혹은 묵시적으로 일러 주는 바가 있다.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분류해 볼 수도 있다. 

첫째는 고귀한 삶이다. 예수가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한 것 같이 이웃이나 사회나 국가나 인류를 위하여 생명까지도 바치는 마음으로 희생의 삶을 사는 것이 극단의 예가 된다. 순교하거나 순국하는 사람들은 나를 희생하여 인류나 국가를 돕는 삶을 거역하지 않는다.

예수, 석가와 같은 성인을 닮아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가히 찾아보기가 어렵고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구체적으로 권장하지도 않지만, 그런 삶의 의미와 가치를 높이 칭송하고 조금이라도 본받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경우는 반드시 교회나 사원이 아니라도 있는 일이다. 그러한 희생의 삶은 실천하기는 어렵지만 그 의미와 가치는 순수하고 고귀한 것으로 칭송한다.

둘째는 영웅적인 삶이다. 이순신과 같이 나라를 구하는 장수로서 공을 세워 그 이름이 널리, 그리고 오래도록 남기를 원하거나, 수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독점하는 스포츠 선수, 연기자, 노벨수상자와 같이 출중한 경지를 추구하거나,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는 국가의 대통령, 재벌의 수장, 단체의 장과 같이 공로와 업적의 사회적 인증과 명예를 누리는 삶이 이에 속한다.

이런 위치에 도달하는 것이 반드시 공명심이 작용한 결과는 아닐 수도 있다. 상황이 주어져서 최선을 다한 끝에 당연하게 얻게 된 경우도 있다.

물론 공명심은 성취를 위한 강력한 동기로 작용하고 성취한 것은 개인적으로 만족스럽고 사회적인 기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기회를 획득하고 활용하고 성취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쳐야 하고 책략과 용기와 인내를 요하는 삶의 방식이므로 편안한 삶은 아니다.

셋째는 선비 같은 삶이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전형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자신의 능력과 취향을 살려 스스로 성장을 기하고 기회가 닿는 대로 사회에 봉사하는 삶을 말한다.

옛날 선비는 학문을 익히면서 수신(修身)하고 나라의 부름을 받으면 충성을 다하고 소신에 따라 임금에게 간하기도 하며, 자리에서 물러나면 초야에서 학문을 닦고 제자와 고을을 교육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면서 생활하는 문사들이었다.

지금의 전문직은 직종이 다양해졌지만, 고도의 교육과 훈련을 받아 직업적 윤리와 기술적 자질을 익혀서 사회에 봉사하는 직업을 의미한다.

넷째는 평안한 삶이다. 만족할 만한 수준의 호구지책(糊口之策)이 해결되면, 많은 사람들은 건강한 신체, 화평한 가정, 좋은 이웃과 친족의 관계, 즐길만한 취미생활, 안정된 노후를 중요하게 여긴다. 아울러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정직하고 근면한 생활을 하며, 큰 욕심이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이웃과 고장에 모범을 보이면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평범한 삶이지만 행복하고 만족하는 생활을 즐긴다. 아마도 행복지수가 가장 높고 분수에 맞는 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이 부류에 속한다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는 소유하는 삶이다. 평안한 삶을 사는 사람처럼 적정의 수준에서 만족하지 않고, 특별한 명예를 추구하지도 않으며,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거나 봉사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모든 공명심이나 사회봉사도 자신이 소유한 재물의 한 부분을 공여함으로써 해결한다. 흔히 재벌이라고 일컫는 사람들 중에는 재물의 소유 자체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재벌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노력이나 행운에 의해서 획득한 재물로써 이웃을 돕고 인류의 삶에 봉사하며 사회에 기여하는 예가 얼마든지 있다.

위의 다섯 가지 삶의 방식 이외에 또 다른 유형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위의 어느 삶의 방식도 반드시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 나은 삶을 의미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각각의 삶의 방식은 삶의 주체가 그 삶을 어떻게 영위하느냐에 따라서 성공적인 삶, 유의미한 삶 혹은 행복을 가져다 준 삶이 될수 있고, 또한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리고 개인은 누구나 위와 같이 분류된 삶의 어느 하나를 택하여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이런 삶을 취하다가 저런 삶으로 전환하기도 하고, 반드시 의도적으로 선택했다고 말하기도 어렵게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어떤 유형에 속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느 것을 추구하다가 실패했거나 아니면 만족스럽지 못하여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인성교육을 위한 학교와 가정의 중요한 역할의 하나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의 삶의 유형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를 검토해 보는 경험을 가지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적어도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삶의 동반자로서 혹은 조언자로서 참여하는 교사, 학교, 그리고 부모는 장래의 삶을 생각하는 젊은이들에게 여러 가지 유형의 삶의 방식에 대한 특별한 편견 없이 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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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혜정 기자  hjkara@edu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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