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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교육] 최초의 근대 학교에 대한 4가지 설
월간교육 | 승인 2017.04.26 10:03

1. 근대의 의미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는 어느 학교일까? 뒤에 살펴보겠지만 최초의 근대 학교에 대한 설은 분분하다. 서양의 경우 근대 교육과 전근대 교육을 구분하는 준거는 다음과 같은 3가지이다.

먼저 교육기회의 보편화이다. 전근대 교육에 있어서 교육기회는 제1계급이라고 하는 성직자들과 제2계급이라고 하는 귀족계급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것을 제3계급인 시민계급과 제4계급인 노동자 계급에까지 확대하는 것이 근대 교육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기회의 확대에 큰 영향을 미친 사상은 천부인권 사상에서 도출되는 아동의 권리확인과 그 교육적 표현으로서의 학습권 사상인데, 시민혁명의 대표적 사상가이며 근대 공교육체제의 주창자이기도 한 콩도르세(Condorcet)는 교육을 인간적 권리의 평등을 현실화하는 수단으로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공립학교는 이러한 ‘권리로서의 교육’을 보편적으로 현실화하기 위한 가장 유효한 수단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중세사회에서 일부 특권층에 한정되던 교육을 모든 계층, 모든 집단으로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에 따른 교육기회의 보편화가 근대 교육의 가장 중요한 준거로 인정되고 있다.

두 번째는 교육의 세속화이다. 근대 교육의 또 하나의 준거는 역시 천부인권의 원리로부터 도출되는 것으로, 교육에서 양심의 권리 혹은 내면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종교적 영향력에서 벗어난 세속주의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속주의의 원리에 따라 기존에 교회가 가지고 있던 상당 부분의 교육권이 부모 혹은 부모가 위탁한 것으로 간주하는 국가로 넘어가게 되었다. 근대 교육의 또 하나의 준거는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하나의 경제단위로서 국민경제를 지향하고 이것이 이념적으로 민족주의로 발현된다. 따라서 중세적 질서의 구각(舊殼) 속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통해 민족의 이념을 획득한 서구 유럽의 국가들은,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공교육체제를 서두르게 되었다.

이러한 민족주의 교육을 통해 기존 기독교 중심의 보편교육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모국어, 모국역사 중심의 애국 교육이 보편화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기회의 보편화, 교육의 세속화, 교육의 민족주의화라는 서구 근대 교육의 세 가지 준거는 우리의 근대 교육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이러한 3가지 준거를 염두에 두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에 대한 4가지 주장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2. 최초의 근대 학교에 대한 4가지 설

가. 배재학당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는 배재학당이라는 주장이 가장 먼저 대두하였다. 그 대표적인 학자는 오천석이다. 배재학당은 1885년 7월 미국 북감리회 소속인 아펜젤러가 서소문동에 집을 한 채 사서 학교를 시작한 것에서 출발하였다. 최초의 수업은 이겸라, 고영필이라고 하는 영어 학습을 대단히 희망하는 두 청년에게 영어를 가르친 것이었다.

<복원된 배재학당 동관(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선교계 최초의 사립 학교로 미국 북감리교회 선교사 H. G. 아펜젤러가 설립하였다. 출처=다음백과>

그러나 아펜젤러가 미국 선교본부에 보낸 기록에 “우리 선교학교는 1886년 6월 8일에 시작되어 7월 2일까지 수업이 계속되었는데 학생은 6명이었다”고 하여 이 해를 배재학당의 출발로 보고 있다. 배재학당의 근대 교육적 성격을 오천석은 교육사상사적인 측면과 교육 운영 방침의 두 가지로 나누어 지적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 배재학당을 세우고 스스로 그 교장이 된 아펜젤러가 설립 다음 해에 만든 학당훈, 즉 “크게 되려는 사람은 마땅히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欲爲大者 當爲人役)”는 교육 정신이 전통적 교육목적과 다른 근대성을 나타낸다고 말하고 있다.

즉 전통사회에서 과거 교육의 목적이 자신의 영달과 가문을 빛내는 것에 불과한 것에 비해 이처럼 남을 위한 교육이념을 제시한 것은 우리의 교육사에 있어서 획기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교육운영 방침의 경우에도 (1) 학년을 두 학기로 나누고, (2) 하루의 일과를 시간으로 정해 진행하며, (3) 입학과 퇴학의 절차를 엄격하게 규정하고, (4) 수업료를 물품 대신 돈으로 받았으며, (5) 성적표를 만들어 부형이나 보호자에게 직접 보내고, (6) 근로를 장려한 것 등은 전통 교육과 확실히 구별되는 ‘근대적’ 교육방식이라고 오천석은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을 일반화하여 오천석은 개화기의 선교계 학교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하여 국가의식,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으며, 이후 민족교육의 기본이념을 형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선교계 학교가 우리의 근대 교육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특히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선교계 학교는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898년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기 전까지 한국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침략대상이었으며, 특히 자본주의 열강의 식민지 획득 경쟁에서 한발 뒤처졌던 미국에 있어 한국은 풍부한 자원 공급지 및 과잉생산물의 판매시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광대한 아시아 대륙 진출을 위한 군사, 전략적 기지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에 진출한 기독교 선교회는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침략의 첨병 역할을 하였다.

한국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병원이자 의학교육기관을 설립한 미국공사 앨런은 침략의 첨병이 되어 이권 탈취를 비롯한 갖가지 권익획득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오늘날 경신학교의 전신인 언더우드 학당을 설립한 미국 장로교파 언더우드는 통상과 교회가 손을 맞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배재학당은 체조와 교련과목에서미국 공사관의 경비대원과 해병대원이 교관으로 동원되었으며, 학교 행사에는 한국 국기와 함께 미국 국기가 게양되었다. 또 선교사들은 일요일 교회당 예배를 강제로 시키고, 교회에 불참한 학생을 퇴학시키기도 했으며, 학생들은 기독교 중심 교육을 반대하여 동맹 휴학을 하기도 하였다.

배재학당이 선교계 학교 중에서 큰 명성을 얻게 된 데에는 정부 파견 위탁생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즉 정부 관리들을 대상으로 서구 학문을 받아들이기 위한 육영공원이 실패로 끝나자, 1895년 2월 한국 정부는 배재학당과 정부 위탁생에 대한 계약을 맺어 매년 다수의 위탁생을 배재학당에 입학시키고 이들에 대한 학용품 지급은 물론 일부 교원의 봉급마저 국고에서 지출하였다.

이 계약은 1902년 9월까지 7년 넘게 지속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배재학당은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교육적, 도덕적, 지적 영향력을 지닌 선교계 학교가 되었다. 이처럼 배재학당설은 서구 근대 교육의 3가지 준거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근대=서구화’라는 오천석의 무의식적 전제하에 성립된 주장이다.

나. 원산학사설

원산학사는 1883년 8월 개항장 원산에서 개화파 관료들과 원산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기존의 개량서당을 확대해 설립한 학교이다. 이 학교는 문예반 50명과 무예반 200명을 선발하여 문예반은 경서(經書)를 그리고 무예반은 병서(兵書)를 가르치되, 문무 공통으로 산수, 격치(格致), 각종 기기와 농업, 양잠, 광채 등의 실용과목을 가르쳤다.

<원산학사는 1883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설립한 학교이다. 사진은 원산학사를 계승한 일제 때 원산소학교 모습이다.>

이러한 기록을 중심으로 신용하는 원산학사의 설립 의의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1)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가 종래의 통설과는 달리 우리나라 사람들의 손으로 설립하였다는 사실에 큰 역사적 의의가 있다.

(2) 정부의 개화정책에 앞서 민중들이 기금을 설치하고, 자발적으로 학교를 설립하였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3) 외세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지방의 개항장에서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인재를 양성하고 신지식을 교육하려는 애국적 동기로 근대 학교를 설립한 것은 큰 의의가 있다.

(4) 외국의 학교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종래의 교육기관인 서당을 개량서당으로 발전시켰다가 이를 다시 근대 학교로 발전시킴으로써, 역사적 계승을 나타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5) 학교설립에 있어서 개화파 관료들과 민중이 호흡을 일치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원산학사가 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인가를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원산학사가 최초의 근대 학교였다는 근거는 외세에 저항하기 위해 설립한 학교였다는 것도 아니고, 관료와 민중이 힘을 합해 설립한 학교이기 때문도 아니다.

원산학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라는 근거는 그 학교에서 기존의 전통 교육기관과는 달리 서구의 신지식을 교육 내용으로 채택했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원산학사의 교육내용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경서나 병서가 중심이 되고 부수적으로 ‘시무(時務)에 긴요한 것’, 즉 산수, 격치 등의 신지식을 가르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덕원부사가 임금에게 보낸 상소문에서 원산학사를 설립하였으니 과거 시험에서 혜택을 달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설립목적도 전통적인 교육기관의 설립목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측면에서 원산학사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라고 주장하는 바탕에도 여전히 ‘근대=서구화’라는 기본 가정이 깔려 있다.

다. 18세기 서당설

18세기 후반에 설립된 서당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정순우이다. 그는 조선 후기 사회변동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적인 교육지표를 통해 근대 교육의 기점을 새롭게 설정하였다.

<김홍도의 '서당', 서당은 조선 후기 8~15세의 양반과 평민층 아이들을 가르치는 초등교육을 담당했다. 출저=다음백과>

첫째, 교육주체로서 소농민의 성장이다. 18세기에 이르러 신분관계의 혼란으로 교육과 신분의 상응관계가 무너지고 비사족(非士族) 중에서 상거래와 광작경영, 상품 경제적 농업경영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한 집단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을 소위 ‘자본주의 맹아(萌芽)’의 담당자라고 하는데, 기존 양반 중심의 학교체제에 대신하여 새로운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한 주체라는 것이다. 이들은 주로 기존의 서당계를 활용하여 훈장을 고용하고 일정 급료를 주어 자신들의 자녀들을 교육했다.

둘째, 계층의 개별적 교육구조의 획득이다. 18세기 후반 경제적 변화와 신분제의 와해를 통해 지배층인 양반들의 학교 교육 독점은 점차 퇴조하고, 각 계층은 독자적인 교육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소농민 층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지배 이념인 삼강오륜적인 윤리 덕목이 점차 약화하고, 서당의 교육도 이러한 윤리서 중심이 아니라 현실 생활에 밀접한 내용으로 바뀌게 된다.

그 대표적인 책이 ‘한국의 페스탈로치’로 불리는 장혼(張混)의 《아희원람(兒戱源覽)》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기존의 소학류의 교재보다 교화적인 성격이 배제된 탈명륜적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아동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접하는 민간유희, 민속, 민담, 국속 및 조선의 현실 인식 위주로 그 내용이 편성되어 있다.

이러한 서민들을 위한 서당에서는 기존의 훈장들과는 달리 몰락 양반이나 유랑 지식인들을 고용하였는데 이들은 기존의 사회체제에 강한 불만을 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유랑지식인 서당 훈장은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광범위하게 증가하여, 기층민의 의식을 고양하고 각성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 시기 이후의 각종 모반 사건에서 서당 훈장들이 주모자로 등장하는 것이나, 19세기 각종 민란의 중심에 서당 훈장들이 있는 것은 이들이 가르치는 교육내용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념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18세기 서당설은 ‘근대=자본주의’라는 도식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18세기 서당설은 아직 충분하게 역사적 고증이 이루어지지 못해, 몇 가지 특징적인 현상을 부조적(浮彫的)으로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라. 근대 교육=식민지 교육설

이 주장은 일제하 식민지 교육을 정당화하기 위한 주장으로, 식민사학인 ‘정체성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일제 강점 이전의 조선은 자생적인 근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인식하에 우리의 교육 또한 일제 식민지 교육의 이식 때문에 비로소 근대화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제 식민주의자들은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고 보통학교령, 사범학교령, 고등학교령, 외국어학교령, 농림학교 관제 등을 공포한 1906년 8월을 근대 교육의 기점으로 잡고 있다.

<조선통감부 청사, 일본은 1906년 2월 1일 조선통감부를 설치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해 실질적인 지배를 시작했다. 출처=다음백과>

그러나 1906년에 이르면 우리의 근대 교육은 이미 근대 학교의 숫자나 제도화의 정도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정착단계에 접어든다. 특히 1894년부터 10여 년간 지속한 갑오교육개혁으로 근대 교육에 대한 법적, 제도적 토대는 이미 마련되어 있었으며, 1906년부터는 그 주도권이 관공립학교에서 사립학교로 이전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에 대한 4가지 주장을 검토해 볼 때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교육 기점은 18세기 후반 자생적 근대 교육의 맹아로서의 서당과 1906년 일제 통감부의 원산보통학교 사이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일제 식민사학의 주장을 배제한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는 그 출발을 자생적인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서양에서 전래한 것으로 볼 것인가 하는 관점의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우리의 근대 학교를 서양으로부터 이식된 선교계 학교가 아니라 자생적인 것으로 본다면, 우리의 근대 교육은 18세기 후반의 서당과 그것이 1883년 원산학사를 거쳐 원산항 공립소학교로 전개되는 어느 한 시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원산학사나 교육구국운동의 목적으로 설립된 사립학교나 모두 그 뿌리를 서당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서당의 전개과정 중 어느 시점부터 근대 교육으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데 있다.

 

이 글은 정재걸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가 월간교육 4월호에 기고한 글을 재게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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