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철 월간교육 편집인

시작하며

제19대 대선 후보중 일부의 ‘고교 학점제’란 공약 사항이 눈길을 끈다.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는 각각 ‘고등학교 학점제 시행’과 ‘학점이수 제도 시행’과 같이 학점제 시행을 명시적으로 제시했다.

심상정 후보는 ‘고등학교 선택과목 중심의 무학년제 도입’을 제시했고, 유승민 후보는 고교 교육과정에 ‘수강신청제’와 ‘무학년제’를 도입하여 학생 중심의 맞춤형 교육을 실현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심 후보와 유 후보의 공약은 학점제와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의미상 상당한 부분을 공유하는 유사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학점제라는 용어가 공식으로 국가 교육문서에 등장한 것은 이명박 정부 시절, 당시 교과부가 2009년 12월에 발표한 ‘고등학교 선진화를 위한 입학제도 및 체제개편 방안’ 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외국어 고등학교 문제가 사회적 쟁점이 되었을 때 교과부는 위 문서에서 외고 대책의 하나로 ‘일반계고 교육력 제고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 방안 중의 하나로 ‘영어, 수학 과목 무학년제·학점제 운용(안)’이 제시되면서 무학년제, 학점제 같은 개념들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다음 해인 2010년 1월, 교과부는 위 관련 정책들을 구체적으로 시행하기 위하여 ‘고교 교육 선진화 추진팀’을 구성하고 관련 업무를 추진하였으나 그 이후 구체적으로 진행된사항은 없었다.

이후 2016년 12월 22일, 교육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비하고 미래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지능정보사회에 대응한 중장기 교육정책의 방향과 전략’이란 제목의 문서를 발표했다.

이 문서에서 교육부는 고등학교를 선택 중심 교육과정으로 운영한다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의 방향에 따라 고등학교부터 학점제를 운용하고 점차 중학교로 확대한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그리고 위 문서에 제시한 여러 사항 중 다음 해부터 추진이 가능한 사안들은 2017년도 교육부 업무계획에 담아 실행에 옮길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그 후 발표된 ‘2017 교육부 업무계획(안)’에 학점제에 관한 명시적인 언급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2017년 4월 현재, 대선 후보자들이 고교 학점제를 제안하고 나선 만큼 대선 후 이 정책은 실행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중요한 논의 사항이 될 것은 틀림없다.

이전 정부에서부터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차기 정부를 위한 오늘의 대선 후보들까지 고등학교 학점제를 하나의 정책으로 제안하는 것 자체는 환영할만한 일이다. 학점제는 현행 고등학교에서 운영되고 있는 ‘단위제’보다는 보다 발전된 정책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점제는 ‘무학년제’나 ‘학생 맞춤형 교육과정’ 등과 같은 관련 개념들과 결합하여 효과적으로 운용되기만 한다면 대단히 바람직한 교육적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정책 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느 정책과 마찬가지로 학점제 역시 성공적으로 실천되기 위해서는 정교한 개념 설계와 그에 따르는 다양한 후속 조치 등 강력한 실천 의지가 지속하여야만 그 구현이 가능한 절대 쉽지 않은 정책이다.

무엇보다 우선 학점제를 도입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명료하게 제시하여야 하며, 성공적 도입을 위하여 준비하고 갖추어야 할 관련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학점제(Credit system)의 의미

학점제란 넓게 정의하면 학생이 ‘특정 교과목, 강좌, 과정 및 프로그램을 제대로 이수했다는 조건이나 기준을 결정하고 그 결과를 기록하는 주요 방식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학의 경우 특정 과목이나 강좌를 제대로 이수했다는 조건으로 ‘시수(時數)’와 ‘성취수준’을 제시한다. 어느 학생이 1학점짜리 과목이나 강좌를 제대로 이수했다는 것은 주당 1시간(더욱 정확하게는 50분)씩 한 학기(대개의 경우 16주) 동안 그 과목을 공부해야 한다는 시수 조건을 충족했다는 의미이다.

이와 동시에 그 과목을 이수하고 난 뒤에 도달해야 하는 성취수준에서 최소 성취기준은 만족하게 했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A, B, C, D, F의 5단계 성취수준 척도에서 최소 성취기준인 D 정도의 수준은 만족하게 했다는 의미이다.

특정 과목이나 강좌, 과정이나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이수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 수 기준이나 ‘성공적 이수’의 최소 성취기준은 과목, 강좌,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시행하는 주체에 의하여 임의로 결정된다.

특정 과목에 1학점을 부여하느냐 2학점을 부여하느냐, 1학점을 주당 50분씩 16주의 시간 양으로 하느냐 주당 100분씩 16주의 양으로 하느냐, 그 과목에서의 최소 성취 기준을 D로 하느냐 E로 하느냐, 성취기준을 점수로 표시하느냐 문자나 기호로 표시하느냐의 문제는 모두 운영 당사자가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서로 다른 교육기관에서 서로 다른 의미의 기준으로 학점제를 사용할 경우 학생들의 학업 성취의 양과 질을 비교할 수 있는 공통적인 잣대가 없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대개 대학들은 공통으로 주당 1시간(50분)씩 1학기(16주)의 시간 양을 1학점으로 하고, F를 최소 성취수준으로 설정하고 있다.

학점제는 특정 과목이나 강좌의 이수와 관련해 적용하기도 하지만 졸업이라는 대학 교육 프로그램 전체의 이수 여부와 관련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이 경우 학점제는 ‘과목별 이수 성취기준에 도달한 학생에게 학점을 부여하고, 과목별 학점이 누적되어 사전에 설정해 놓은 최소 졸업학점에 도달하는 학생에게 졸업을 인정하는 제도’로 정의하기도 한다.

이 정의가 우리에게는 훨씬 친숙하고 이해하기도 쉽다. 이 정의에도 학점제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인 ‘시수’ 개념과 ‘성취수준’ 개념은 포함되어 있다. 우리의 경우 대학을 졸업하려면 140학점 이상을 취득해야 하며, 특정 과목이나 강좌에서 학점으로 인정받으려면 성취수준에서 최소 D 학점 이상을 받아야 한다.1)

1) 우리나라의 경우 대학에서의 학점제는 『교육법시행령』 120조에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이 규정의 주요 내용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1학점은 1학기 16시간 이상의 수업시간을 의미한다. 2) 실험이나 실습, 실기나 체육 등 기타 학칙이 정하는 과목은 1학기 32시간 이상의 수업을 1학점으로 한다. 3) 졸업 필수 이수 학점은 140학점 이상이며, 4) 매 학기 취득 학점은 18학점이고, 21학점 이상을 취득할 수는 없다. 5) 계절 학기 취득 학점은 6학점이다. 6) 취득 학점의 분류, 기록 방법은 학칙에 따라 다를 수 있다. 7) D 학점 이상을 취득 학점으로 인정한다. 8) 전공필수와 전공선택 이수 학점이 부족할 경우 졸업 필수 이수 학점 수를 초과했어도 졸업할 수 없다.

학점제는 흔히 무학년제라는 용어와결합하여 사용한다. 그러나 이 두 용어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 학점제는 전술한 바와 같이 특정 과목, 과정, 프로그램의 성공적 이수의 양적·질적 기준을 결정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에 비해 무학년제는 교수-학습 상황에서 발생하는 ‘학습 집단 구성 방식’ 중의 하나로서 학습 집단을 학년의 구분 없이 구성하는 방식이다. 학습 상황에서는 자연 연령에 기초한 학년이라는 기준보다는 학생 개인의 전반적 발달 수준의 차이에 기초한 학습능력이라는 기준이 더욱 적합하고 효율적이라는 인식하에 여러 학년의 학생들을 하나의 학습 집단으로 구성하는 것을 허용, 장려하는 방식이다.

무학년제는 또한 학생의 교과목 선택을 핵심 개념으로 삼는 제도이다. 학생들이 배워야 할 교과목을 국가나 학교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게 해 주는 제도이다. 대신 선택의 대상(주로 교과목)을 학년 단위로 편성하고 같은 학년 안에서만 선택을 허용하는 ‘학년 내 선택’이 아니라 학년과 구분 없이 선택의 대상(주로 교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학년 간 선택’을 허용하고 장려하는 제도이다.

무학년제하에서 학생의 선택은 최대화될 수 있다. 이 제도하에서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교육 대상으로서의 교과목은 ‘학년’이라는 틀 안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학년의 벽을 넘어 학교가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교과목이 선택의 대상이 된다.

1학년 과목의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는 1학년 학생은 자신의 수준에 맞추어 좀 더 수준 높은 2학년이나 3학년 과목을 이수할 수 있다. 3학년 과목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는 3학년 학생은 좀 더 낮은 수준의 2학년이나 1학년, 또는 중학교 수준의 과목까지도 선택할 수 있다.

이리하여 ‘학습자의 발달 수준과 학습할 대상의 내용 수준과의 최적의 연합’이 이루어져 교육의 극대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제도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학점제와 무학년제는 서로 그 의미가 다를 뿐만 아니라 반드시 병합하여 적용할 필요도 없다. 학점제는 무학년제와 연계하여 운영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고등학교 수준에서의 학점제 적용의 의미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학점제는 대학 수준에서만 적용됐다.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학점제 대신 ‘단위제’가 적용됐다. 단위제는 학점제에서의 ‘시수’ 개념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1단위는 주당 1시간(더욱 정확하게는 50분)씩 한 학기(보통 16주) 동안 이루어지는 수업의 시간 양을 의미한다.

현재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대개의 교과목은 5단위 정도로 되어 있다. 매주 1시간씩 5학기에 걸쳐 배워도 되고 매주 5시간씩 1학기 동안만 배워도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모두 204단위를 이수해야 한다. 평균적으로 매 학기 34단위에 해당하는 시간을 배워야 한다.

이처럼 ‘시수’ 기준이라는 조건으로만 보면 고등학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단위제’는 대학에서 적용하고 있는 ‘학점제’와 같아 보인다.

그러나 현재 시행하고 있는 단위제와 학점제의 결정적 차이는 ‘성취수준’ 기준의 유무와 ‘무학년제’와의 연계 방식의 유무이다. 고등학교 단위제에는 ‘성취수준’ 기준이 없다. 특정 과목에서 어느 정도의 성취수준을 보여야 그 과목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수업에 참여만 하고, 출석만 하면 그 과목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한다. 졸업의 경우도 학업성취의 수준과는 관계없이 출석 시간만 채우면 졸업을 할 수 있다. 고등학교 단위제는 또한 대학에서의 학점제와는 달리 무학년제와 연계되어 있지 않다.

현행의 고등학교 단위제하에서 학생들은 다른 학년의 교과목을 이수할 수 없다. 오직 본인이 속해 있는 학년 안에 편성되어 있는 교과목만을 이수할 수 있다.

그리고 현행의 단위제에서는 학생 차원에서의 선택이란 없다. 학교 차원에서 학년별로 설정해 놓은 교과목을 그대로 택할 수밖에 없다.

현행 고등학교 학사 운영의 원리를 단위제에서 대학에서 운용하고 있는 학점제로 바꾼다는 것은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의미한다.

첫째, 과락제도(교과목별 낙제 제도)를 도입한다는 뜻이다. 수업에 참여만 한다고 수업 이수가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업 후 일정 기준의 성취를 보여야 수업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일정 수준의 성취를 보이지 않으면 그 과목은 재수강을 해야 한다.

둘째, 수업에의 참여만으로 졸업을 보장하지 않는다. 출석을 아무리 잘해도 성적이 좋지 않으면 졸업을 할 수 없게 된다. 졸업을 할 수 있으려면 일정 수준의 성취를 보여야만 하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이 특정 수준의 지식과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소위 ‘질 통제(Quality control)’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셋째, 무학년제가 도입된다는 것이다. 물론 학점제의 도입이 무학년제의 도입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학에서 운용되는 학점제를 고등학교에도 도입한다고 하는것은 고등학교에서도 무학년제를 도입한다는 의미가 된다. 고등학교에서도 대학에서와같이 1, 2, 3학년 학생들이 함께 이수하는 과목을 개설한다는 것이다.

넷째, 학교 교육의 상황에서 학생들의 흥미, 적성, 필요를 최대로 고려하게 되는 학생 선택형(혹은 맞춤형) 교육과정이 획기적으로 강화된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운용되는 학점제가 고등학교에 도입되는 경우 새로 입학한 고1 학생이라도 자신의 능력 수준이나 흥미에 맞는 고3 과정의 과목을 선택할수 있게 된다. 고3 학생이라도 자기의 수준에 맞은 고1 수준의 과목을 선택할수도 있게 된다.

그리하여 학점제를 도입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맞는다고 생각하는 과목들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학생 선택형, 학생 맞춤형 교육을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학점제 시행을 위하여 준비해야 할 작업

고등학교 수준에서 학점제를 도입한다고 했을 때 도입의 수준을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현행의 학년제하에서 도입하는 수준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에서와같이 무학년제와 동시에 도입하는 수준이다.

현재의 학년제하에서의 학점제 도입은 변화의 폭이 크지 않아 실현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 높지만 교육 개혁에의 가치는 그렇게 크지 않다. 이 경우 실제로 변화되는 것은 과목별 과락 현상이고, 그로 인한 학생들 간의 졸업 시기의 차이 현상이다.

현행의 학년제하에서 학점제를 도입할 경우 특정 과목에서 일정 수준의 학업성취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학생들은 그러한 기준에 도달할 때까지 그 과목을 재이수하여야 한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다른 동료 학생들과 진도를 맞추지 못하게 되어 졸업을 늦게 하게 되거나 못하게 될 수 있다.

이 경우 학점제를 모든 교과목에서시행할 수도 있고, 일부 교과목에 한하여 시행할 수도 있다. 학점제를 어느 정도의 강도로 시행하느냐와 무관하게 현재 학년제하에서의 학점제 도입은 고교 졸업생들의 자질을 일정 수준으로 보장할 수 있게 한다는 가치를 지닌다.

현행의 제도를 그대로 둔 채 학점제만 도입해도 우리는 고교 교육의 질을 일정 수준으로 통제, 유지하는 효과를기대할 수 있다.

이 정도의 효과를 기대하기 위해서도 준비해야 할 사항은 많다.

첫째, 학점제를 적용하고자 하는 교과목을 결정하여야 한다. 일부 교과목에 적용할수도 있고 전 교과목에 적용할 수도 있다.

둘째, 학점제를 적용하고자 하는 교과목에서 그 교과목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하기 위한 기준(또는 수준)을 설정하여야 한다. 학점제 적용 대상 과목에서 어떤 유형의 성취를 어느 수준으로 보여야 그 교과목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하느냐의 기준을 명료하게 설정하여야 한다.

셋째, 학점제 적용 대상 교과목에서 이수를 인정받지 못하게 된 경우 즉, 실패한 경우 그 교과목을 재이수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여야 한다.

넷째, 졸업할 때까지 필요 학점을 취득하지 못한 학생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여야 한다. 학점제 적용 대상 과목에서 이수에 실패할 경우, 그리고 그러한 과목이 많을 경우 그러한 학생들은 3년안에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취득할 수 없게 되어 제대로 졸업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들을 위한 조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 정도의 준비를 하는 일도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학점제를 대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무학년제와 함께 도입할 수도 있다. 학점제를 무학년제와 연계하여 도입하는 경우 현행의 고등학교 운영 방식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이 경우 학년제하에서의 학점제 도입이 유발하는 변화 이외에도 광범위한 변화가 수반된다.

가장 현저한 변화는 학생의 교과목 선택의 범위가 획기적으로 확대된다는 점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학생들의 과목 선택의 범위는 학년의 벽을 넘어 다른 학년의 과목으로까지 확대된다.

학생들은 자신의 능력, 흥미, 필요에 따라 다른 학년의 과목들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학년과 관계없이 빠른 속도로 취득하여 3년이 아니라 2년이나 1년 만에 졸업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제도는 학생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자기 주도적으로 구성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학생 맞춤형 교육’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구현하는 방법이 된다.

최근 일부 대선 주자들이 내걸었던 ‘고교 학점제’ 도입의 취지는 학점제와 무학년제가 결합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교육적 효과와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귀한 가치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한다. 무학년제가 동반된 학점제가 발휘할 수 있는 교육적 가치나 효과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거의 무한대의 준비와 노력이 요구된다.

단순 학점제의 시행을 위한 준비 사항도 결코 단순하거나 쉽지가 않다. 무학년제와 학점제가 결합한 학생 맞춤형 교육제도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단순 학점제의 시행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사항 이외에 다음과 같이 힘들고 복잡한 사항들이 준비되어야 한다.

첫째, 현행 고교 교육과정 체제를 학생 중심의 ‘선택 교육과정 체제’로 바꾸어야 한다. 현행의 고교 교육과정 체제에서 학생들은 교과목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다. 현행 체제에 존재하는 약간의 교과목 선택 가능성은 거의 학교 수준으로 제한되어 있다. 일단 학생들이 교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학생 중심 선택 교육과정 체제’ 혹은 ‘열린 교육과정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무학년·학점제를 구현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다.

둘째, 학년 내에서뿐만 아니라 학년간에서도 학생들이 자유롭게 선택할수 있는 다양한 종류와 수준의 교과목이 풍부하게 개설, 제공되어야 한다. 학생들이 학년의 벽을 넘어 의미 있게 선택할만한 교과목이 별로 없다면 무학년·학점제는 제대로 시행되기가 어렵다. 시행된다고 하더라도 형식적 운영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셋째, 모듈화된 교과목별 교육과정(한 교과를 다양한 수준으로 적절하게 위계화하여 분절된 형태로 개발한 교육과정)을 준비해 놓아야 한다. 현행의 고등학교 교과목별 교육과정은 하나의 전체 체제로 되어 있어 한 교과를 선택하게 되면 그 교과의 전체 내용을 모두 배우게 되어 있다. 특정 교과의 일부 내용만 배울 수 있게 하는 부분적 선택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이는 학생 선택의 폭을 크게 제한하는 요인이다.

넷째, 현행의 2학기제를 4~5학기제로 바꾸는 준비를 해야 한다. 현행의 2학기제에서는 학생 선택의 기회를 아무리 확대한다고 하더라도 일년에 두 번의 기회밖에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아무리 다양한 교과가 제공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교과를 선택하여 경험해 볼 기회가 극히 제한된다. 무학년제를 통한 자기 결정의 경험과 교과 경험의 다양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하여 4~5학기제가 도입되어야 한다.

다섯째, 현행의 학년제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내신 평가방식을 대신하는 새로운 내신 평가방식을 준비해야 한다. 무학년제하에서의 내신점수 산출 방식은 현행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행 방식에서는 학년별 성적을 서로 다른 비중으로 합산하여 전체 내신 점수를 산출한다. 무학년제에서 이 부분은 생략되어야 한다.

여섯째, 교원 양성 제도를 개선하여야 한다. 무학년제가 충실하게 이루어지려면 다양한 종류와 수준의 강좌를 개설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강좌를 운영할 수 있는 교원의 확보가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정규 교사의 확보뿐 아니라 다양한 유형의 교원 인력을 활용할 수 있는 유연한 교원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또한 한 교사가 여러 과목을 감당할 수 있는 복수전공제를 강화하고, 복수전공 교사에 대한 우대가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학교 시설 및 환경의 양적 질적 개선이 필요하다. 무학년·학점제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유형의 강좌를 제공해야 하는데 강좌 유형에 적합한 교실의 확보가 필수적이다. 교실 수가 양적으로 충분해야 하며 질적으로 적합해야 한다. 교과나 강좌의 성격에 부합하는 교과교실제의 완전 성취는 기본적으로 요구된다.

맺으며

진정한 무학년·학점제는 학생들의 선택 가능성을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개인의 잠재 가능성을 최대한 구현할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학교 교육과정 편성·운영 방법의 하나다. 이러한 이유로 세계 교육 선진국들은 대부분 무학년제를 도입, 운영하고 있다.

2017년 현재 초등학교 1~2학년에 적용하고 있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의 기본 틀은 기존의 교육과정에 비하여 선진화된 측면을 지니고는 있으나 무학년·학점제를 시행할 수 있는 선진형 교육과정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

따라서 미래의 교육과정에서 무학년·학점제를 높은 수준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수용에 필요한조건들을 지속해서 갖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 교육과정 개선의 기본 방향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며, 그러한 합의 내용을 구현하기 위한 후속 정책들이 일관성있게 추진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