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과 눈이 마주치자 변선배가 비시시 웃었다. 그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잔을 입에 들이키는 흉내를 내면서 손가락을 밖으로 가리키며 나갔다. 커피 한 잔 하자는 이야기였다. ‘완’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변선배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잘 댕겨왔나?”
“안녕하세요. 네. 잘 다녀왔습니다.”
“집안 어르신들은 편안케 잘 계시드나?”
“예. 어떻게, 명절은 잘 보내셨어요?”
“내야 머 서울에서 아~덜이 다 와서 같이 보냈다. 커피 한고푸 묵으러 가자.”
“네. 그러시죠.”
‘완’과 변선배는 커피를 들고 1층 야외 벤치로 나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려가는데 차는 안막히드나?”
“네.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는데, 올라올 때는 좀 막히더라고요.”
“땅덩어리가 좁은데 사람들은 집에 간다꼬 마 한꺼빈에 득시글데니까네 안막히고 베기겠나. 어쩔 수 없는 거지. 내는 아들들하고 딸래미들이 우리 집으로 와가 가족들하고 오랜만에 식사 한 끼 했다.”
변선배는 젊었을 적에 사업을 하면서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는 특히 브라질에서 십 수년 동안 살았었다고 했다. 변선배의 경우는 나이에 비해 상당히 왕성한 활동력을 보였다. 도서관에서 서로 안면을 익힌 뒤로 ‘완’과 만나서 식사 때가 되면 함께 식사를 자주 했는데 식사하는 모습이 젊은 사람이 먹는 것처럼 왕성하게 보였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내는 능력이라든가, 신문을 유심히 보면서 스크랩을 하거나, 여기저기서 자신이 참고할 만한 뉴스가 있으면 이거저거 조합해서 나름대로 해석하고 견해를 이야기 하는 등, 세상의 흐름에 대해 예리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 한참을 얘기하던 변선배가 갑자기 ‘완’에게 소주 한 잔 하자는 제안을 했다.
“니 오늘 저녁에 시간 되나? 우리 저녁에 소주 한고푸 하면서 노가리나 풀자. 어떴노?”
“아이고, 선배님 어쩌죠. 저 저녁식사 약속 있거든요. 6시 30분에 인사동에서 사람들 만나기로 했습니다.”
‘완’이 시간을 낼 수 없어서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변선배에게 이해를 구했다.
“아~ 그래. 누긴데?”
“친한 형님하고 동생입니다.”
“그래 뭐하는 사람들이고?”
변선배는 ‘완’이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형님은 제이티 통신에 있고, 동생은 법학전공해서 강단에 서고 있습니다.”
“아! 그래. 잘 나가네~”
변선배의 장난기 섞인 오보 액션에 ‘완’의 얼굴에 엷은 웃음이 지나갔다.
“그 친구들은 몇 살들이고?”
변선배의 질문은 마치 나무의 뿌리라도 뽑을 기세인 듯 세세한 것까지 파고 들어갔다.
“형님은 42살이고, 동생은 33살입니다.”
무엇이라도 생각하는 듯 변선배는 앞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네. 내는 오늘 자네하고 한고푸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 좀 할라켔구만. 할시없네. 그라믄 조만간에 다시 한 번 날 잡아보자.”
“예. 그렇게 하시죠. 모처럼 말씀하셨는데 타이밍이 그렇게 됐습니다. 조만간 다시 한 번 시간을 맞추시죠.”
“그라쟈. 좀 있으믄 가야겠네?”
시계를 들여다보던 변선배가 4시가 넘은 것을 확인하고 바쁘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변선배는 ‘완’에게 자기도 신문이나 보다가 가야겠다며 ‘완’과 함께 4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선배님”
약속시간이 다돼가자 ‘완’은 변선배 옆으로 다가가 나지막한 소리로 불렀다. 신문을 보던 변선배가 안경너머로 눈을 치켜 올렸다.
“저 약속 시간 다돼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변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이바이 손 인사를 저으면서 나지막히 인사말을 건넸다.
“맛난거 무라”
“내일 뵙겠습니다.”
그는 씩 웃음을 지으면서 오케이 싸인을 ‘완’에게 보냈다. ‘완’은 곧바로 인사동거리 초입으로 향했다. 5시 30분이 넘은 홍대입구역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은 불경기로 많이들 힘들다고 아우성인데 홍대입구역은 활황이라고 착각할 만큼 여기저기가 시끌벅적 했으며, 특히 주말일 경우 걷고 싶은 거리는 걷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인파에 떠밀려 저절로 걷기가 되어서 거리를 이동해야 할 정도로 여기저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인사동거리 초입에 도착하니 멀찌감치 종덕이가 보였다.
“언제 왔어?”
우두커니 서있는 종덕이의 등을 탁탁 두드리자 놀란 듯 멈칫한 종덕이가 ‘완’을 쳐다봤다.
“아. 오셨어요. 형님.”
“상수형님은 늦으신가 보네.”
“방금 통화했는데, 지금 퇴근해서 오시고 계신데요. 금방 도착하시겠는데요.”
“명절에 뭐하고 보냈냐?”
“뭐 그냥, 와이프하고 시골집에 내려가서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식구들 모여서 소주 한 잔씩 했어요. 식구가 많으니까 돼지고기만 30근을 샀어요. 어머니가 소주만 두 박스를 사놓으셨더라니까요. 뭐 어머니의 정성과 성의니까 다 먹어드리고 또 사서 먹었죠.”
종덕이는 헤헤헤 웃음을 보이며 식구들과 명절을 재미나게 보냈다며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종덕이는 전북 진안이 고향으로 9남매 형제가 모두가 결혼을 했고, 조카들까지 다 모이는 명절에는 직계 가족만 모여도 단체관광객 저리 가라 할 정도라고 했다.
그는 식구가 많으니까 한 번씩 모이면 집안이 떠들썩하게 재밌다고 했다. 종덕은 대학에서는 ‘완’과 함께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석사와 박사는 법으로 바꿔 전공하면서 국회 비서관으로 근무하다가 지금은 대학 강단에 서고 있었다.
“일찍들 왔네.”
“아 형님. 명절 잘 보내셨어요.”
저만치서 웃음을 던지며 터벅터벅 다가오는 상수에게 ‘완’은 인사를 건넸다.
“명절 뭐 별거 있어. 그냥 방구석에 쿡 하면서 만든 음식 먹는거지. 아~ 명절이 끝나니까 밖에 나오게 되는구만. 역시 서울 사람들은 명절은 그냥 집에서 푹 쉬는 날이야.”
“형님 뭐 드실까요?”
종덕이가 상수와 ‘완’을 번갈아 보며 허공에 메뉴판을 띄웠다.
“너희들 먹고 싶은 거 있냐? 말해봐”
“글쎄요. 뭐 딱히.....”
“쭈꾸미 어때? 오랜만에 쭈구미 한 번 먹으까?”
“괜찮네요. 그러시죠. 종덕이는 어떠냐?”
“그러시죠. 오랜만에 쭈꾸미에 한 잔 땡기시죠.”
셋은 근처에 종종 가던 쭈꾸미 집으로 향했다. 그 골목에는 연휴가 끝난 다음날인데도 회사에 출근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모두들 고향에서 연휴를 보내고 며칠 만에 만난 회사동료들과 고향에 다녀온 얘기들을 주고받는 모습들이었다.
“아줌마”
“네~.”
상수가 주문을 위해 식당 사장을 불렀다.
“뭐~ 드리까?”
“여기 쭈꾸미 대짜 하나 주세요. 대짜 시키는게 났겠지? 양도 충분하고.”
“그렇게 하시죠.”
“우리 여기 자주 오는거 알고 있죠.”
상수는 주문을 기다리고 있는 여주인에게 농을 던지듯 늘어지게 말하면서 양을 많게 해달라는 부탁과 소주 한 병부터 먼저 달라고 주문했다.
“아이, 알었어. 금방 가져다 드리께. 소주는 뭘로 드리까?”
“참이슬?”
상수가 앞에 앉아있는 완과 종덕을 바라보며 참이슬에 동의하냐는 듯 물음표를 던졌다.
“그래요. 참이슬 마시죠.”
“알았어. 참이슬 드리께.”
여주인은 돌아서기가 무섭게 나물 밑반찬과 소주를 들고 달려왔다. 이어서 한상이 차려지자 쭈꾸미 불판 밑둥에서 후우~욱거리며 올라오는 불소리와 치이~익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푸짐한 쭈꾸미 더미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기 시작했다.
셋은 쭈꾸미가 익는 동안 명절 기간에 있었던 얘기를 나누며 소주 한 병을 비웠다. 소주 한 병이 게눈 감추듯 없어지자, 종덕이 이내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하더니 상수의 빈 잔을 채웠다.
“형님도 한 잔 받으세요.”
상수의 잔을 채운 종덕이가 옆에 앉아있던 ‘완’의 술잔 위에 병을 멈추었다. 잔을 받아 채운 ‘완’은 다시 종덕이의 빈 잔을 채워줬다.
“야야. 안주 다 익었다. 한 잔씩 하고 먹자. 자~ 건배”
상수가 잔을 앞으로 치켜들자 ‘완’과 종덕도 잔을 부딪힌 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하~아. 시원~하다. 확실히 이 집 쭈꾸미가 다른데 가서 먹는 쭈꾸미보다 씨알도 굵고 양도 많고 맛도 더 좋다니까. 집이 좀 후져서 그렇지 음식이 괜찮아. 야 얼른들 먹어라. 먹고 더 먹자.”
상수는 쭈꾸미 한 젓가락을 입으로 가져다 넣으며 우물우물 씹는가 하면, 한 손으로는 불판위에 놓인 쭈꾸미가 타지 않고 고루 익도록 젓가락을 뒤적이더니, 고개를 옆으로 눕힌 채 불을 조절하며 그 집의 쭈꾸미를 연신 칭찬했다.
“네 그래요. 다른데 집은 값만 비싸지 별로더라니까요. 마포에서 연탄불에 석쇠 올려놓고 구워먹는 쭈꾸미집하고 여기가 제일 나은 것 같아요.”
“그래. 이집이 쭈꾸미는 다른데 보다도 훨씬 괜찮더라. 형님 저 번에 저하고 홍대에서 쭈꾸미 먹었을 때 그 집 쭈꾸미 기억나죠. 너무 먹잘게 없잖아요. 값만 비싸고. 그런데도 거기에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거 보면 참 희한해요. 아무리 홍대가 상권이라고 하지만.”
한 참 먹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던 상수가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고 불을 댕겼다. 상에는 빈 소주병 4병이 줄을 맞춰 서 있고, 셋의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달달하게 올랐다. 셋 모두 술 깨나 먹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제 시작 초반전이나 다름없었다. 빈 잔에 소주를 붓던 종덕이가 식당 주인을 부르자 여주인이 찾아왔다.
“왜! 뭐 더드리까?”
“여기 김치하고 나물좀 더 주시고 소주 한 병만 더 주세요.”
“참이슬 주면 되지?”
‘완’은 장난스레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처음처럼 참이슬 주세요.”
“처음처럼?”
“아니요. 처음처럼 참이슬 주세요”
“어? 참이슬?”
여주인이 헷갈려하자 피식피식 웃고 있던 종덕이가 참이슬로 달라면서 상황을 정리했다.
상수는 고개를 숙인 채 상 밑바닥을 쳐다보며 푹푹푹 웃더니 여주인이 주문을 받고 돌아가자 ‘완’에게 익살맞은 엄살투로 한 마디 툭 던졌다.
“야. 너 왜그~래에~ 안하던 농담을 다하고오~. 너무 썰렁하다, 야아~!”
“아이~ 우리형님 유머는 난이도가 좀 높다니까요. 처음 듣는 사람은 이해를 못해요”
종덕이가 천장을 쳐다보며 비실비실 웃더니 잔을 추켜들고서 건배를 제안하자 셋은 합창을 했다.
“건배”
“야, 그래도 연휴 직후라서 사람들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많네. 다들 힘이 남아도나봐. 집에 다녀와서 피곤들 할 텐테~.”
“다들 집에 내려가서 부모님이 만들어준 음식들 먹고 왔으니까 몸보신 잘하고 왔겠죠.”
“형님, 형님 바로 앞에 앉아있는 이 사람들 보세요. 체력이 짱짱하니까 이렇게 형님 만나서 한 잔 하고 있잖아요.”
종덕이가 슬슬 취기가 오른 듯 오른팔을 들어 올리며 이두박근을 보여주는 포즈를 잡는가 싶더니 아직 쌩쌩하다는 듯 상체를 들썩거렸다. 셋은 술이 몇 병 더나온 후 제법 취기가 오르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 맥주 한잔 하러 가야지”
상수가 앞길을 잡더니 늘상 가던 맥주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연휴가 끝난 가을밤 기울어져가는 달이 하늘에 걸려 있었다.
- 죽은도시의 반란 <3화>‘회상-정치의 계절1’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