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위복', 그리고 류이치 사카모토의 'Rain'

 

 

<이수민, "전화위복"(2015)>

 

한글도 깨우치기 전부터 하루종일 연필과 종이를 갖고 놀던 아이.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무척 좋아해서 연필과 빈 종이만 있으면 그림을 그렸다고 해요. 무엇을, 어떤 모양으로, 어떤 공식에 맞춰 그려야하는지 누구에게도 강요 받지 않은 채로 그렸기 때문에 상상력과 개성이 넘치는 그림들을 마음껏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들어간 첫 미술 수업.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주사위 같이 생긴 직육면체를 그리는 수업이었는데 이 면은 밝게, 다른 면은 어둡게, 그림자는 항상 오른쪽 뒤에.. 미술을 마치 수학 공식처럼 가르치는 선생님의 교육 방법에 무척 실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마다 사물을 보는 각도가 다르고, 앉은 위치에 따라 빛는 빛이 다른데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라고 강요한다니요!

제 생각에는 음악, 무용, 미술 등 장르 불문하고 모든 예술은 창작자의 개성이 듬뿍 담겨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누가 봐도 아름다운 ‘절대적인 미의 기준’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 개념에 사로잡혀 상상력과 개성이 억눌러진 채로 창작을 한다면 그 결과물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다녀와서 잘 먹고 등 따시게 잘 자기만 하면 행복했던 초등 학생 때 쓰던 그림 일기를 기억하시나요? 함축적인 의미를 담은 그림과 몇 줄의 짧은 글로 하루를 기록하게끔 했던 그림 일기. 매일매일 그림 일기를 그려 오는 것이 제가 다니던 초등 학교 숙제였는데 때로는 칸이 모자랄 정도로 빽빽하게 쓰기도 하고, 때로는 귀찮아하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틀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웠던 그 어린 시절에는 하루에 있었던 일 중 제일 기억에 남는 나의 감정을, 사건을 그림으로 재현 해내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평범하고 남들과 다르지 않은 생각과 행동을 해야 모범생이라고 칭찬 받는 교육 환경에서 자라온 우리들은 창작에 대한 자신감을 많이 잃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림을 안그린지 수십년이 지나 지금은 간단한 것조차 못 그리는데 하물며 그림으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게 가능하겠냐며 손사래를 칩니다.

저는20년 동안 바이올린을 전공으로 삼았던 성장 배경 덕에 제 감정을 남들에게 내보이고, 과장되게 전달하는데에 익숙합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저는 그때 그때 느끼는 저의 생각과 감정을 말로, 사진으로, 글로, 그림으로 표현해내는데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루에 그림 일기 한 개씩 그렸던 초등 학생 시절 같이 요즘에도 다시 그림 일기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에는 내 생각과 감성을 글로 표현하는 것과는 또다른 재미가 있더라고요. 말과 글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너무 확실히 드러나기 때문에 비유, 함축적인 의미,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비밀 코드 같은 것을 숨겨둘 자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림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오늘 보여드릴 그림은 어느 화창했던 일요일, 살짝 우울하고 무료했던 오후가 예상치 못했던 사건으로 인해 유쾌한 시간으로 변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전화위복>입니다. 별처럼 생긴 뭉치의 왼쪽편은 검정 가시가 돋은 듯 모서리를 칠하고 어두운 색깔들을 이용해 무겁고 축쳐진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빨간색 선으로 표현된 중간 길을 거친 오른편의 별 뭉치에는 파란색, 은색 등 밝은 색깔들과 일관된 방향성을 이용해 경쾌하고 짜릿한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과 어울리는 음악으로는 개성 넘치는 음악 세계로 그래미상까지 받은 일본의 작곡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Rain>을 골라봤습니다. 바이올린 멜로디가 심플한데에 비해 뚝뚝 떨어지는 빗소리를 묘사하는 듯 피아니스트의 왼손 연타가 특징적인 곡입니다. 피아노가 주는 거친 느낌 때문에 비장함까지 풍기는 앞부분에서 갑자기 몽롱해지고 부드러운 분위기로 바뀌는데 이러한 큰 폭의 감정 변화가 제 그림 <전화위복>에서 나타내려고 했던 부분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서 골라봤습니다.

 

<류이치 사카모토, "R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