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90일만 더 살아볼까

90일은 결국 지나간다. 꼭 희망이 아니더라도, 나아지는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인간의 힘으로 견딜 수 없는 건 없으니까.

 


“그 곳 내가 12월31일에 올라갔던 그 곳에 올라가면, 옥상 위에 올라오지 않은 사람들은 바다 건너 100만 킬로미터 떨어져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바다는 거의 다 마른 땅 위에서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행복이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뭐 그런 헛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다. 자실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겨우겨우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내 말은 겨우겨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살과 그다지 멀지 않다는 것이다.”(373)

 

정말 그랬다. 그다지 멀지 않았다. 지난 주 일어난 두 건의 자살. 가까운 지인을 통해 알게 된 구조조정 가운데 일어난 대기업 과장의 투신자살이나, 일이 없어 불안해했다는 탤런트 정다빈 씨의 자살은, 실상 우리 주변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죽음이었다.

 

가끔은 이렇게 책이 나를 선택한 것 같은 순간이 있다. 지난 주말, 서점에서 문득 눈에 들어온 책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문학사상사)는 바로 그런 책이었다. 런던 한복판에서 투신자살하려는 인간들의 이야기!

 

해가 바뀌는 12월 31일 밤, 자살의 명소(?) 토퍼스하우스 빌딩 15층 옥상에 모여든 네 명에게는 모두 저 허공 밑으로 몸을 던져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어린 소녀와의 하룻밤 때문에 파멸한 전직 유명토크쇼 사회자 마틴, 이십년 동안 중증장애인 아들의 뒷바라지를 해온 중년 여인 모린, 행방불명된 언니와 위선적인 부모에 치여 조울증을 앓는 제스, 록 스타가 되겠다는 꿈으로 대서양을 건너왔지만 피자배달부로 연명하고 있는 제이제이.

 

그들은 이렇게 모였으니 서로 얘기나 들어보자고 했다. 그런 것이, “그게 무슨 죽고 싶은 이유냐”고 서로 싸우게 되고, 지금 죽지 말고 딱 90일만 더 살아 보자고 합의하는 데 이르게된다. 책은 그렇게 90일의 유예 기간에 변화하는 네 사람의 마음의 행로를 따라간다.

 

그들에게 삶의 방향을 갑작스레 바꾸는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면서 조금씩 생의 의지를 얻기까지의 과정이 작가 특유의 위트 넘치는 문장으로 펼쳐진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인생을 감당할 수 없어 죽음을 결심했던 사람들은, 앞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매력적인 것이 인생임을, 툴툴대면서도 받아들이게 된다.

 

90일 뒤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실업자인 마틴은 이웃집 아이의 독서 지도를 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고, 모린은 여전히 아들을 돌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제스는 그새 새 남자 친구를 사귀었지만 썩 좋은 인간 같진 않다. 제이제이는 길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경쟁자가 더 인기다. 그래도 그들은 더 이상 자살을 희망하지 않는다.

 

한 계절이 가고 한 계절이 오는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더는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이 생각됐던 최악의 상황이 조금은 나아지게 되니까. 90일이 지난 후, 얽히고 꼬이고 싸우기만 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괜찮을 수 있었던 건, 어쨌거나 그들은 ‘함께’ 있다는 것. 더 이상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 때문이지 않았을까.

 

지난 주 우리 곁을 떠나간 그들도 이런 동반자를 만날 수 있었다면, 그들 또한 90일을 견딜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6개월, 그렇게 더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아주 더디지만 90일은 결국 지나간다. 꼭 희망이 아니더라도, 나아지는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인간의 힘으로 견딜 수 없는 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