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저자·허위저자·출판사 '검은 공생'…학생들만 '희생'

전공 서적의 표지만 바꿔 출판하는, 이른바 '표지갈이'가 검찰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전국 국·공립 교수를 중심으로 '무더기 징계'가 예상돼, 파문이 일 것으로 전망된다.
경기도 의정부지검 형사5부(권순정 부장검사)는 일명 '표지갈이' 수법으로 책을 내거나, 이를 눈감아준 혐의(저작권법 위반·업무방해)로 전국 50여개 대학교수 200명을 24일 입건했다. 검찰은 또 교수들의 범행을 알면서도 새책인 것처럼 발간해준 3개 출판사 임직원 4명도 입건했다.
◇ 표지갈이? "이공계 전공서적 출판 꺼리는 업계 특성"
'표지갈이'란 대학교수의 연구를 토대로 만든 전공서적을 말 그대로 표지만 바꿔 그대로 출판하는 것이다. 원저자의 묵인 하에 허위저자가 내용은 그대로 둔 채 표지만 달리 해 출판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수법은 원저자·허위저자·출판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원저자는 이공계 서적 등 전공서적 출판을 꺼리는 출판업계 특성 때문에 앞으로 책을 낼 출판사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표지갈이를 묵인했다.
허위저자는 원저자의 연구실적을 고스란히 자신의 이름을 달아내면서, 연구실적을 올릴 수 있다는 측면에서 표지갈이에 적극 가담했다. 연구 내용의 일부를 인용하는 표절에 비해 남의 연구 내용을 고스란히 자신의 연구 실적으로 반영하므로, 표절보다 더욱 질이 나쁜 범죄라고 검찰은 보고 있다.
출판사의 경우 표지갈이가 재고를 없애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전공서적이 잘 팔리지 않으므로, 표지만 바꿔 재판매하는 방식으로 표지갈이에 가담했다. 잘 팔리는 전공서적의 저자가 다른 출판사로 옮기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 데도 출판사들은 '표지갈이'를 통해 약점을 잡거나, '저자 풀'을 확보하는 데 활용했다.
◇ 1980년대부터 만연? "전공서적 여러 권 사는 학생 없어 적발 어려워"
1980년대부터 대학가에 만연한 교수의 비리 관행 실체가 이번 검찰 수사를 통해 드디어 밝혀졌다. 교수와 출판사의 비리 관행이 '표지갈이' 수법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표지갈이 수법은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검찰은 설명했다. 표지만 바꾸면 온라인으로 표절 여부를 검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전공서적을 여러 권 사는 학생이 없기 때문에, 표지가 다른 책의 내용이 같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학생이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검찰에 입건된 교수들은 대체로 1인당 1권 정도의 전공서적을 표지갈이를 통해 출판했으나, 일부 교수는 3~4권까지 펴낸 것으로 확인됐다. 또 표지갈이를 한 번 했다가, 출판사에 약점이 잡혀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기도 한 교수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제자들에게 책을 팔아 인세를 챙기기 위해 표지갈이에 적극 가담한 교수도 있는 것으로 검찰 수사 결과 나타났다.
◇ 파장은? “재임용 평가 앞두고 연구실적 부풀려”
표지갈이 수법에 동참한 교수들은 대학의 재임용 평가를 앞두고 연구실적을 부풀리기 위해 가담했다. 각 대학은 책을 펴내면 연구실적으로 인정해준다. 책 1권을 상위 30%의 국내 학술지에 논문 한 편 발표하는 것과 동일한 평가를 하는 대학도 있다. 특히 수업 교재로 활용하면서 제자들에게 '가짜 책'을 팔아 인세를 챙기기도 한다.
각 대학은 논문 표절을 근절하기 위해 벌금 300만 원 이상의 선고를 받으면 재임용 대상에서 탈락시킨다는 방침을 정했다.
따라서 이번 검찰 수사를 통해 전국의 국·공립 대학과 서울의 유명 사립대 교수들이 대거 검찰 수사망에 걸려들어 대학가에 큰 파장이 일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검찰에 입건된 교수 중 일부는 스타 강사와 각종 학회장도 포함돼 있어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검찰은 현재 공소유지에 큰 어려움이 없는 만큼 입건된 교수 대다수가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은 다음달까지 수사를 마무리 하고 교수 전원을 입건할 방침이어서, 새 학기를 맞는 대학가에 교수들이 대거 강단에서 쫓겨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